마도구상의 마차에는 까마귀가 들어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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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등록일 :
2019.04.18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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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09 2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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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30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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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3-3. 마물 퇴치

DUMMY

“퀴르, 안 돼!”

“어?”


결론부터 말해서 이번에도 그는 늦었다.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팔찌가 퀴르의 손목에 맞물려 잠겼다. 네일린은 발을 멈추고 퀴르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왜 그래? 넬 거 아니라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퀴르가 말했다. 이윽고 네일린은 눈썹을 날카롭게 추켜세웠다.


“말했잖아! 함부로 만지면 뭔 일 날지 모른다고!”

“아! 음...... 미안.”


그제야 기억났다는 듯, 퀴르는 자신의 귀밑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사과했다. 네일린은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팔찌 차자마자 마차가 폭발하거나 하지 않아서 망정이지...”

“에, 에이, 설마! 어떻게 봐도 그냥 평범한 팔찌인데.”

“이거 만든 양반이랑 만나고 나면 절대 그런 말 못한다, 너!”


그때였다. 팔찌에서 파지직하고 스파크가 튀더니 거기서 웬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장착 확인 완료.”

“히익?”


여성의 목소리였다. 다만 억양에 감정이 하나도 담겨 있지 않아 거의 기계음 같았다. 퀴르는 기겁하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방금 전까지 네일린이 뭔 일이 난다느니, 폭발할 거라느니 겁을 줬던 것도 영향이 없지 않았다.


“최초 부팅 시 선행 프로세스가 설정되어 있습니다. 메모리화한 메시지를 리드합니다.”

“으, 으, 무슨 말? 저기 네-엘! 이거 지금 뭐라 하는 거야?”

“나도 몰라!”


네일린이 말했다. 퀴르는 팔찌를 찬 오른팔을 허공에 내뻗은 채 마구 휘저어대고 있었다. 몸에서 팔찌를 멀리 떨어뜨리려는 행동처럼 보였는데, 그녀는 당황한 나머지 팔찌를 풀 수 있다는 것을 잊은 모양이었다.


“치직.... 월... 치지직....... 일. 폭우가 내리고 있... 치직...”


아까와 똑같은 목소리였지만 이번에는 완연히 사람의 그것 같았다. 대신 음성에 잡음이 끼어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이어서 달카닥거리는 소음이 흘러나왔다.


“됐나.”


음성 속에서 그 한 마디가 들렸고 음질이 훨씬 깨끗해졌다. 네일린은 그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동시에 그는 지금 저 팔찌가 무슨 역할을 하고 있는지도 대략 알아차렸다.


“퀴르, 진정해. 폭발하거나 그러지 않을 거야.”


‘아마도’라고 네일린이 작은 목소리로 뒷말을 중얼거렸으나 퀴르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흐윽. 진짜로?”

“어. 그거 단순히 말을 전하고 있는 거니까. 네가 그 보석으로 했던 거랑 비슷하게.”


엄밀히 말하자면 단순히 소리를 기억했다가 재생하는 이것보다 쌍방향통신인 퀴르의 그것이 더 고급스러운 기술이었다. 하지만 네일린은 굳이 그 차이를 그녀에게 설명하지 않았다. 어느새 눈가에 눈물까지 고인 퀴르가 ‘응’이라고 대답하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들이 대화하는 동안에도 팔찌에서는 음성이 이어지고 있었다.


“후우... 연초(煙草)를 냉동한다는 걸 잘못해서 완제품 재고까지 전부 냉동해버렸다. 뒤져버릴 것 같다. 온몸이 연기를 원하고 있는 기분. 그래도 간만에 재정신이니까 이거 해동하는 동안 일기나 쓰련다.”


치직, 잡음이 꼈다가 사라졌다.


“일주일 전 마차 사역화 개조를 맡은 거 같다. 의뢰주는, 뭐야, 네르서스. 이 정도 돈 모았으면 어디 괜찮은 여자랑 결혼해서 정착이나 할 것이지. 아, 잠깐, 지금 전쟁 상황이―”


곧이어 바스락바스락 종이더미를 뒤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맞아맞아. 제국이 완전 작살이 났더랬지. 아하하. 덕분에 개조제한법 지킬 필요 없어져서 내키는 대로 손봐놨는데 그새 깜빡하고 있었네.”


가만 듣고 있던 네일린은 그 내용을 듣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 문맥과 전후 사실관계를 고려했을 때 저 ‘내키는 대로 손 봤다’라는 것은 네일린의 마차가 틀림없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가 싶더니 불규칙적인 숨소리가 이어졌다.


“아, 갑자기 또 기분 잡친다. 빨리 연기 마시고 편히 잠들고 싶어. 졸려죽겠는데 새벽에 이게 뭐하는 짓이지? 왜 바보 같이 다 만들어 놓은 걸 냉동실에 처박은 거야, 나? 아아아, 진짜! 진짜!”


쾅, 쾅, 쾅 연달아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달칵하고 음성이 끊겼다가 다시 켜졌다.


“진정하고 왔다. 아, 그, 뭐냐. 잘 생각해보니까 나 마차에 개짓해놨구나. 온갖 장비에 일시적 합금화 술식 박아 넣고 ‘어, 이러면 무게 때문에 보통 말로는 움직일 수 없잖아?’라는 생각으로 말의 뚜껑을 따서 뇌의 리미터를―”

“이 양반이 진짜 미쳤나!”


네일린이 참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소리쳤다. 그에 반해 퀴르는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웬 뚜껑? 무슨 말이지 전혀 모르겠어.”

“퀴르, 넌 몰라도 돼. 아니 모르는 게 약이다.”

“하지만 신경 쓰이는데.”

“몰라도 된다면 몰라도 돼!”


네일린은 목청과 기세로 퀴르의 호기심을 어떻게 해서든 막았다. 결코 그녀가 알아서 좋을 게 없었기 때문이다. 음성은 계속 재생되었다.


“―해제시켰는데 자꾸 복구되더라. 그래서 아예 의식을 펑~ 시키고 마차랑 직결로 사역화시켜 봤다. 결과 대성공. 원격조종용 팔찌로 통상의 세 배 이상 빨리 달리는 것을 확인했다. 뭐, 술식을 해제했더니 그 후유증으로 말은 내리 이틀을 잤지만 어쨌든 살아있다고? 따라서 그 정도면 자잘한 부작용이다.”


네일린에게는 절대 자잘한 게 아니었다. 말이 이틀 동안 퍼질러진다는 것은 이틀을 꼬박 발이 묶인 채 지내야 한다는 의미인데, 물건을 팔기 위해서 부지런히 움직여야하는 마차상인으로서는 도저히 간과할 수 없는 문제였다. 아니 그전에, 그런 일을 당하고 살아있다 쳐도 말의 상태가 온전하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역시 나 천재잖아!’라는 생각에 마음이 마구 고양돼서 겸사겸사 마차 천장에다 팔찌로 조종 가능한 석포도 올리고, 바퀴에는 무한궤도를 설치했다. 말이 정신 차리던 이틀 뒤 다시 사역화해서 팔찌로 달리게 해봤는데 조금 속도가 느려져서 침울했다.”


하아, 네일린은 한숨을 뱉었다. 그 사이 음성에 다시 잡음이 끼며 음질이 지저분해졌다.


“어, 그러고 보니... 치직...을 네르서스 녀석한테 알려줘야 할 텐데. 이거 끼고 쓰는 건 별로 어려운 거 아닌데 작동 정지시킬 때 제대로 절차 안 밟으면... 치직, 치지직... 이니까.”


네일린과 퀴르는 그 말을 듣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필 노이즈에 가려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절대 좋은 내용이 아님을 둘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당장 팔찌를 끼고 있기까지 한’ 퀴르는 반쯤 얼어붙은 상태로 마른침을 삼켰다.


“연기 마시면 분명 까먹을, 치직.... 아, 그래. 이 일기장을 통째로 팔찌에 저장해놓자. 치지직.... 잘 들어, 네르비안. 팔찌를 정지시킬 때는, 치직.....하고서 치지직.... 그렇지 않으면 치직, 치지직....가 펑하고, 치직.”

“펑.... 지금 펑이라고 말했지! 응?”


퀴르가 겁에 잔뜩 질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네일린도 살짝 동요했으나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앞에서 끼고 쓰는 건 별거 없다 했잖아. 즉, 당장은 문제없다는 얘기야.”

“아, 그, 그런가?”

“음, 그래도 잡음 때문에 그 절차라는 걸 못 들어서 여유부릴 상황은 아니―”

“우으으! 펑해버릴 거야!”

“―지만 걱정 마. 내가 어떻게든 해줄 테니까.”


퀴르의 얼굴에 금세 울음기가 차올랐다. 이에 네일린은 일단 마음에 없는 말을 지어내서라도 그녀를 다독였다.


“응.”


순순히 그 말을 믿은 건지, 아니면 그저 믿고 싶었던 건지 퀴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일린은 그런 퀴르의 모습을 보며 새삼 깨달았다. 퀴르가 그토록 장난치고 까불거릴 수 있던 것은 그녀가 대담하다거나 강인해서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위기를 모면하기 쉬운 변신술과 환술, 거기에 푸른 하늘이라는 믿음직한 탈출구가 있어서였다. 그것들이 쓸모없는 지금의 상황에서 그녀 자신만 뚝 떼어놓으니 생각 외로 겁도, 눈물도 많은 어린애에 지나지 않았다.


“우는 연기를 잘하는 것도 원래가 울음이 많아서 그런 건가.”


네일린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윽고 그는 오른손으로 자신의 뒷목을 매만지며 생각을 정리했다.


마차의 건(件). 어디 있는지도 모를 마차를 찾아 성안을 다시 휘젓고 다닐 수 없으니 거꾸로 마차를 호출한다. 애초부터 그런 목적으로 해놓은 사역화 개조였다. 이런 마개조를 네일린은 꿈에도 알지 못했고 바라지도 않았다. 사역화를 발동시킬 때에 쓸데없이 마력을 많이 필요했던 것도 틀림없이 그 마개조의 영향일 것이다.


이어지는 문제로서 퀴르가 낀 팔찌가 있었다. 정지 방법과 ‘펑’은 정보가 부족하니 둘째 치고 일단 사역화된 마차를 조종하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즉, 현재 마차는 퀴르만이 움직일 수 있었다. 지금 와서 사역화를 푼다는 선택지도 있었지만 그렇게 되면 이틀간 말을 움직이는 게 불가능했다.


마지막으로 기생나방의 건. 아니 기생나방 자체는 생각만큼 큰 문제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기생나방과 관련된 일련의 사건과 그 영향이었다. 안돌의 치안대는 이미 네일린을 영주를 살해한 마법사로 확정지은 상태였다. 영주 살해에 대해 네일린은 결백했지만 마법 사용은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극형을 언도받기에는 충분했다. 또한 중앙 연방군에도 네일린에 대한 보고가 갔을 텐데 시간을 지체했다가는 대마법 전담조사대가 들이닥칠 것이다.


생각을 마무리 지은 네일린은 쯧 혀를 찼다.


“이러저런 일이 있었지만 일단 원래 계획대로...”


네일린이 말을 중간에 끊었다. 계속 초조한 표정으로 팔찌에 시선을 두고 있는 퀴르가 보였다. 네일린은 잠시 눈을 굴리다가 그녀에게 다가섰다. 곧이어 그는 손을 퀴르의 이마에 가져다대고서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따악하고 경쾌한 소리를 내며 손가락이 퀴르의 이마를 때렸다.


“아얏!”


정신을 다른 데 팔던 퀴르는 급히 두 손으로 이마를 감싸 쥐었다.


“무슨 짓이야!”


그녀가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네일린에게 소리쳤다. 하지만 네일린은 사과는커녕 무덤덤하니 입을 열었다.


“너 풀 죽어 있는 게 영 꼴불견이라서 그랬다.”

“뭐, 뭐라고?”


퀴르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목소리를 높이고는 네일린을 쏘아보았다. 네일린도 전혀 물러서는 기색 없이 그녀를 마주보았다. 묘한 신경전이 이어졌으나 그리 오래 가지는 않았다. 화를 내던 퀴르가 오히려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먼저 눈을 돌렸기 때문이다. 네일린은 무릎을 굽혀 퀴르와 눈높이를 맞춘 뒤 말을 꺼냈다.


“평소처럼 행동하는 게 차라리 속 편할 거야.”


그 말을 듣고 퀴르의 시선이 다시 네일린을 향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걱정하고 그런다 해서 이미 생긴 일이 갑자기 없어지는 거 아니잖아. 그러니까 그렇게 꿍해 있는 거보다 평소처럼 지내는 게 속 편할걸.”

“...”

“뭐, 믿기 싫음 말고. 일단은 내 경험상으로 말해주는 거다만.”

“경험?”


경계심이 살짝 풀어진 퀴르가 물었다. 네일린은 슥 뒤를 돌아서며 대답했다.


“그래,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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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4-3. 잠깐의 안식 속에서 19.05.27 53 4 8쪽
17 4-2. 잠깐의 안식 속에서 19.05.24 44 4 10쪽
16 4-1. 잠깐의 안식 속에서 19.05.22 53 4 9쪽
15 번외. 추적자들 19.05.19 54 4 6쪽
14 3-7. 마물 퇴치 19.05.18 51 3 18쪽
13 3-6. 마물 퇴치 19.05.13 49 4 9쪽
12 3-5. 마물 퇴치 19.05.09 58 4 10쪽
11 3-4. 마물 퇴치 19.05.07 94 5 13쪽
» 3-3. 마물 퇴치 19.04.30 71 7 11쪽
9 3-2. 마물 퇴치 19.04.28 94 7 11쪽
8 3-1. 마물 퇴치 19.04.26 144 6 8쪽
7 2-4. 호우인 가의 참극 19.04.24 82 5 13쪽
6 2-3. 호우인 가의 참극 19.04.23 90 6 7쪽
5 2-2. 호우인 가의 참극 19.04.23 93 4 11쪽
4 2-1. 호우인 가의 참극 19.04.22 160 6 12쪽
3 1-3. 까마귀와 마차상인 19.04.20 117 6 7쪽
2 1-2. 까마귀와 마차상인 19.04.20 483 6 10쪽
1 1-1. 까마귀와 마차상인 19.04.18 448 8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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