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월동·득마
白馬嘯西風 백마가 서풍 속에서 울부짖으니
四蹄啼無聲 네 발굽 우는 소리 들리지 않누나
少年不知愁 소년은 근심을 모르니
朗聲遍荒野 밝은 웃음이 들판에 가득하구나
"더, 더 빨리."
말을 타고 신나게 달리는 잔월을 보며 홍야차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누가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어미 뱃속에서부터 말이라도 탄 듯 능숙하게 성질 사나운 군마를 다뤘다.
아직 다리가 짧아 발이 등자에 닿지 않았다. 잔월은 하체 도움을 일절 받지 못하고 고삐만 잡고 달렸다. 말이 거칠게 달려 엄청나게 들썩이는데도 안장에 아교로 붙인 듯 떨어지지 않았다.
"저 아이는 서동이라고 들었는데."
진우량이 감탄을 뱉었다. 진우량도 무공이나 기마를 배운 적 없다. 타고난 힘으로 말을 타고 싸움을 했다. 어릴 적에 글공부한 덕분에 작은 관리를 한 적도 있었지만, 학문도 깊다고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저 아이는 어린 나이에 서동을 할 정도의 학식을 갖췄고 진우량 휘하의 초원 출신보다 말을 잘 다뤘다.
"맞습니다."
홍야차와 눈을 마주친 진우량이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홍야차는 마치 전설에 나오는 이매망량을 떠올릴 정도로 흉측했다. 눈매가 사납고 눈동자가 빨갰으며 코가 무척 컸다. 입술이 두껍고 구레나룻이 유독 굵었다.
서동은 반 스승이라고 한다. 학식이 높은 선비가 서동을 둘 때는 제자로 들일 생각이고, 어린아이가 서동을 들일 때는 늘 붙어 다니며 스승 역할을 하라는 뜻이다.
잔월이 아는 글자는 많아도 학문 깊이가 없어 서동을 할 자격은 부족하다. 흑표 덕분에 서동 자리를 차지한 걸 모르는 진우량은 탄복에 탄복을 거듭했다.
"어어."
어른 키 높이의 달리는 말 등에서 잔월이 갑자기 뛰어내리자 진우량이 작게 비명을 질렀다. 지금 마차에 들어간 아들이 공손완아와 친분을 잘 쌓는지는 이미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말 등에서 뛰어내린 잔월은 손으로 땅을 팠다. 무와 비슷한 뿌리가 굵은 식물을 파낸 잔월은 흙을 툭툭 털어버린 후 말의 입에 넣어줬다.
말은 맹수가 아니지만 무는 힘이 무척 강하다. 노련한 기마병들도 말에게 물릴까 봐 늘 조심하는데 잔월은 겁 없이 손을 내밀었다.
입맛에 맞았는지 뿌리를 먹은 말이 폴짝폴짝 뛰면서 춤을 췄다. 진우량이 말을 좋아하는 아들을 위해 특별히 고른 준마였다. 성질이 사납기로 유명한 놈인데, 오늘 처음 태운 잔월과는 오랫동안 함께 해온 것처럼 친근하고 고분고분하게 굴었다.
자신의 두 아들을 떠올린 진우량은 저도 모르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맏이 진선은 힘만 세고 꾀가 부족하고, 둘째 진이는 겁이 많았다.
'무곡산장이 와호장룡이라더니. 공손무기가 일부러 저 아이를 보내 내게 위세를 자랑하는 건가?'
오전 내내 공손완아의 호감을 사려고 없는 말주변을 다 꺼낸 진선은 점심이 되자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자신을 알은체도 하지 않고 잔월만 졸졸 따라다니는 애마 때문에 크게 당황했다.
"부친. 무슨 일입니까?"
진우량의 머리가 팽이처럼 돌아갔다.
"저 말을 아이에게 선물하려 하는데, 네 생각은 어떠냐?"
진선은 머리가 잘 돌아가진 않지만, 그간 보고 들은 게 있었다. 부친이 이유 없는 일을 벌이지 않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진선은 고민을 거듭했다. 그러나 부친의 속을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무릇 왕이 되려면 많은 수하를 품을 만큼 그릇이 커야 한다. 애지중지하는 애마를 저 아이에게 줌으로써 네 그릇을 공손 소저에게 보이는 거다. 그리고 말이 없는 너는 굳이 아픈 척 안 해도 마차에 계속 탈 수 있지 않겠느냐?"
진선은 부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엔 쌀쌀맞은 공손완아가 마음에 안 들었지만, 오전 내내 대화를 나눠보니 지금까지 봐왔던 여자들과 달리 품위가 있었다. 같은 말도 공손완아가 하면 유달리 듣기 좋았다.
'이놈은 충성심 깊은 모사(謀士)가 필요하다.'
진우량은 잔월이 공손무기가 일부러 자랑하려고 보낸 아이라고 생각했다. 잔월의 뛰어남을 통해 무곡산장의 저력을 진우량 자신에게 과시하려 한다고 판단했다.
진선의 애마를 줌으로써 공손무기에게 화답하는 것이다. 고작 열 살짜리 어린아이에게 귀한 준마를 줄 정도로 재물이 넘친다는 과시였다. 거기에 공손무기가 어떻게 화답하는지에 따라 서로 원하는 게 드러난다.
그러나 진선의 표정을 보니 속에 숨겨진 뜻은 전혀 모르고 그저 부친의 말을 철석같이 믿는 모양새였다. 아들의 부족한 모습에 얼른 머리가 뛰어난 모사꾼을 찾아내 붙여줘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네가 직접 말하거라."
고기 죽을 끓여 점심을 해결했다. 식사가 끝난 후 바로 출발하지 않고 차를 끓였다. 차가 끓기를 기다릴 때 진선이 벌떡 일어서서 말했다.
"여기 소형제와 홍운이 합이 기막히게 맞는다고 들었소. 예로부터 보검은 영웅에게 주고 연지는 가인의 차지라고 했소. 내 비록 가인에게 줄 연지는 없지만, 소영웅에게 내 애마를 내주려 하오."
미리 언질을 받은 병사들이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며 환호했다. 단순한 편인 홍야차 역시 진선의 배포가 마음에 들어 고개를 끄덕였다.
"자고로 공이 없으면 녹을 받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홍운을 좋아하는 마음이 커서 진 공자의 진심을 거절할 수 없군요. 부끄럽지만 겸양의 말도 못 꺼낼 정도로 기쁩니다. 오늘 호의는 깊이 기억하고 언젠간 반드시 갚겠습니다."
잔월이 의젓하게 진선의 말을 받자 환호가 더 커졌다.
유독 동 파파와 공손완아만 저게 뭔 병신 짓이냐는 눈빛으로 둘을 바라봤다. 처음 보는 꼬마한테 비싼 말을 불쑥 주는 놈이나 왜 주는지도 모르고 덥석 받는 꼬마나 다 이상해 보였다.
공손완아는 그저 뭐 하는 짓이냐 정도로 끝났지만, 동 파파는 태만하지 못하고 아침부터 있었던 일을 꼼꼼히 적어서 전서구로 보고했다.
정식으로 홍운의 주인이 된 잔월은 오후 내내 말을 타고 들판을 헤집었다. 홍운은 자기 코로도 찾지 못하는 맛있는 것들을 잘 찾아내는 잔월 덕분에 여물을 거들떠보지 않을 정도로 배불리 먹었다.
저녁이 되어 객잔에 머물게 되자 진선은 직접 안장을 씌우고 벗기는 법을 가르쳤다. 마구를 다루는 법을 일일이 배운 잔월은 진선에게 흑표가 잡아 온 새 구이로 보답했다.
부친 지시대로 말을 줄 땐 아쉬움이 컸는데, 조금 지켜보니 잔월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저녁이 될 때 아쉬움이 싹 가셨다. 게다가 맛있는 새 구이까지 나눠 먹으니 호감이 무럭무럭 커졌다.
"잔월, 공손완아는 뭘 좋아하느냐?"
마음에 둔 여인이 있어 처음엔 공손완아를 거부했지만, 자세히 살피니 공손완아의 미색이 마음에 둔 여인보다 훨씬 뛰어났다.
"달고 짠 음식 좋아하고 색이 고운 천을 좋아하고 작고 특이한 동물을 좋아합니다."
"작고 특이한 동물? 쥐도 좋아해?"
"쥐는 싫어할 것 같은데요."
"면양에 흑서라고 까만 쥐가 있는데 털이 엄청 보드랍거든. 부자들이 흑서 가죽으로 전낭이나 향낭을 만들어서 갖고 다녀."
"고양이를 좋아하는 거 같아요."
"사람을 서안에 보내 파사국에 난다는 보석안을 구해야겠다."
"그거 엄청 비싸던데."
보석안은 고양이의 한 품종으로 눈이 보석처럼 빛났다. 어릴 때 본 적이 있는데 은자 백 냥을 넘었던 기억이 났다.
"홍운보단 안 비쌀 거야. 홍운은 대완마 혈통이거든."
안타깝게도 잔월은 한무제가 대완마를 얻으려고 수십만 규모의 군대를 동원해 전쟁을 벌인 일을 몰랐다. 그저 괜찮은 말인가보다 싶었다.
홍운이 비록 순수혈통은 아니라지만, 그래도 은자로 이백 냥은 쉽게 받는 준마였다. 순수 혈통의 대완마라면 은자 천 냥까지 받을 수 있다.
밤에 푹 쉬고 일어나니 일행이 늘었다. 전서구를 받은 공손무기가 심복에게 보검 한 자루 들려서 보냈다.
"무곡산장엔 이 보검을 들만한 영웅이 없습니다. 진 선위사의 대공자가 능히 천하를 품을 그릇이라고 소문이 자자하여 보검을 드립니다."
진선은 날이 단단한 보검을 선물로 받고 싱글벙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진우량 역시 기쁜 표정을 유지했지만, 속마음은 달랐다.
'재물은 나도 넉넉하니 필요 없다 이건가? 도대체 공손무기가 원하는 게 뭐지? 자기 딸 호위를 부탁할 땐 뭔가 필요한 게 있다는 뜻이 분명한데.'
공손무기가 낸 문제를 풀지 못하면 연합은 없다. 지금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는 자들을 살피면 어부 출신의 진우량 자신이 있었고, 농부 출신의 한림아, 포목장사 하던 서수휘, 소금을 배로 나르던 장사성이 있다.
유일하게 출신이 좋은 곽자흥은 이미 죽었고, 그 수하 중에서 유명한 주원장은 소작농에 스님 출신이다. 공손무기로선 누구와 손잡아도 괜찮은 상황이었다.
송나라 때 요와 금 그리고 원이 중원을 장기간 차지하며 정통을 자처할만한 자가 얼마 남지 않았다. 진우량은 공손무기의 마음에 들만한 무언가를 시급히 찾아내야 했다. 힘이 비슷할 땐 명분의 위력이 엄청 강하다.
'공손완아는 그저 징표일 뿐이다. 선아와 공손완아의 혼인을 허락한다면 나랑 손잡겠다는 뜻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진선에겐 공손완아의 마음만 사면 모든 걸 이룰 것처럼 말했지만, 사실 공손완아와의 혼인은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진우량 자신이어도 황제가 되기 위해 부모 형제건 자식이건 다 버릴 수 있다.
'멍청한. 이걸 놓치고 있었다니.'
진우량은 공손무기의 부탁이 딸의 호송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호송 목적지가 무극존자의 봉황산이라는 사실은 지금까지 무시했다. 무극존자가 최근 공개적으로 제자를 받으며 장안의 화제가 되었기에 무심코 넘겨버렸다.
'무극존자에게 공손무기가 탐내는 뭔가 있다.'
점심이 되자 진우량은 진선을 불러냈다. 공손무기가 심복을 통해 보낸 보검을 허리에 차고 싱글벙글하는 아들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왜 공손 가주가 보검을 선물로 줬다고 생각하느냐?"
"말에 대한 보답이 아닌지 짐작할 따름입니다."
'겉만 알고 속은 들여다보지 못하는구나.'
"무곡산장의 천금이 왜 무극존자의 제자가 되려고 할까?"
"천하제일에 가장 많이 거론되는 고수와 인맥을 쌓으려는 게 아닐까요?"
"그러면 아들을 보냈어야지."
진선은 말문이 막혔다.
"공손 소저는 뭔가 다른 목적이 있는 게 분명하다. 공손 가주는 이 보검을 네게 주면서 부탁하는 거다. 너도 무극존자의 제자로 들어가서 공손 소저를 보호해달라는 뜻이지. 너는 공손 소저를 몰래 보호하고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게 도움을 주거라."
殘月童 잔월 어린이
得馬 말을 얻다
- 작가의말
백마소서풍 사제제무성 소년불지수 낭성편황야
백마소서풍은 김용 선생님의 무협 제목입니다. 귀양 간 한족 처녀의 비극 로맨스 무협이죠. 말 하니까 백마소서풍이 생각나서 부족한 솜씨에 시 좀 지어봤습니다.
백마소서풍은 무협 소설 제목이고 소년불지수는 자주 나오는 문구여서 창작이라기보단 짜깁기라는 표현이 어울리겠네요.
보검증영웅 홍분증가인
寶劍贈英雄 紅粉贈佳人
보검은 영웅에게 주고 붉은 분은 가인에게 준다는 뜻입니다. 연예인 세 명이 거론되었군요. 원나라 때 나온 말입니다. 시대 배경이 원나라 말기여서 저 표현은 써도 아무 문제 없습니다.
김용 선생님이 신조협려에서 원나라 때 시를 가져다 쓰고 주해를 달았습니다. 그게 부러워서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되는데 TMI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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