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풍살·초현
잔월은 고개를 돌려 피를 울컥 뱉어냈다.
'큰일이다.'
잔월은 내상도 얼추 나았고 독도 다 사라졌다. 그러나 대수인에 맞은 천희연이 문제였다. 일부 혈도가 망가지고 십이경맥 중 반이 끊어졌다. 다른 경로로 흐르는 기운 덕분에 목숨은 부지했지만, 경맥 하나만 막혀도 드러눕는 게 사람이다.
정신을 잃은 천희연을 등에 업고 양의심공을 일으켰다.
'이상하다. 완전히 다른 진법이 되었구나.'
잔월은 천천히 걸었다. 방향이 명확하지 않으면 구양진경을 수련해 내공을 모았다. 게다가 주기적으로 천희연에게 내공을 주입해 기운을 강제로 돌려야 하기에 진법을 벗어나는 데 꼬박 사흘 걸렸다.
"어떻게 된 건가요?"
잔월이 내공을 주입해 기운을 돌려주면 천희연은 깼다. 그러나 기운이 가장 활발하게 움직여야 할 경맥이 반이나 멈춘 탓에 깨어있는 시간은 얼마 안 되었다.
"무공 비급이 탐나 자기들끼리 죽인 것 같습니다."
눈에 피딱지 굳은 돌부처 주변에 우덕을 비롯해 스물이 넘은 스님 주검이 널려있었다. 독편복 시체 역시 멀지 않은 곳에 있는데 이미 썩기 시작했다.
잔월은 스님들이 짐을 모아둔 곳에 가서 계도를 비롯한 자기 짐을 수습했다. 그리고 눈을 뜬 채 죽은 우덕 등에서 불경을 발견했다.
"불길한 물건 같아요. 내용도 다 아는데 그냥 태우는 게 낫지 않을까요?"
천희연이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걸로 대환단 바꿀 겁니다. 대환단이면 소저 경맥을 다시 이을 수 있습니다."
잔월은 우물을 막은 돌을 치우고 맑은 물로 목을 축였다. 천희연은 물 몇 모금 마시고 바로 잠들었다. 건량과 물을 충분히 챙긴 잔월은 천희연을 업고 다시 진법으로 들어갔다.
"진법이 변한 것 같아요."
열흘 후에 진법을 벗어나니 다시 무너진 절간 앞이었다. 건량과 물을 섭취하고 기운을 얻은 천희연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저들이 진법을 파훼하려고 핵을 부순 것 같아요."
"핵을 부수면 어떻게 되나요?"
"대부분 진은 천천히 효력을 잃습니다. 그러나 늘 예외는 있는 법이죠."
천희연이 잠깐 쉬고 말을 이었다.
"저는 이게 오양월음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도 월음만 구현한 반쪽이 아닌 완벽한 오양월음진입니다."
잔월은 천희연 어깨에 손을 대고 견정혈로 내공을 주입했다. 기운이 세차게 흐르자 천희연의 목소리에도 힘이 실렸다.
"오양월음진은 핵이 둘입니다. 오양의 핵을 먼저 부수지 않으면 오히려 문제가 됩니다. 오양진이 기본이고 월음진은 오양진을 통제하는 역할입니다. 저들이 통제 역할을 하는 오음진을 완전히 부쉈다면 우린 여길 벗어날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월음진의 핵이 완전히 파괴되지 않았기를 바라야죠."
잔월은 독편복을 비롯한 스님들 시체를 모아서 태웠다. 땅에 묻자니 우물물이 더러워질 것 같았다.
"사리자 없는 걸 보니 다 엉터리 스님이었네."
뼛가루는 모두 진법 안으로 날려 보냈다. 우물물을 길어 돌부처의 핏자국도 깨끗이 닦아줬다. 천희연을 이불로 감싸 단상 밑에 눕히고 무너진 절간 잔해를 정리했다.
하루 꼬박 걸려서 대부분 잔해를 치우고 스무 개가 넘는 돌 구슬이 놓여있던 곳에 이르렀다.
"다행이네요. 핵이 하나라도 남아서."
잠에서 깬 천희연이 기쁘게 말했다.
"이제 뭘 해야 합니까?"
"월음진을 복구해야죠."
잔월은 천희연을 업고 절간 주변을 돌아다니며 적당한 크기의 바위를 찾았다. 천희연은 바위에 손을 대고 내공을 투사해 돌 구슬 만들기에 적합한지 판단했다.
"이걸 동그랗게 깎으세요."
잔월은 왼손을 천희연 명문혈에 대고 내공을 주입하며 오른손으론 바위를 깎아 돌 구슬을 만들었다.
"멈추세요."
어느 정도 모양새가 잡히자 천희연이 멈추라고 했다. 잔월의 도움을 받아 돌 구슬에 손을 댄 천희연이 한참 지나서 말했다.
"이건 안 돼요. 다른 바위를 깎아야 해요."
갑자기 내공이 많아진 잔월은 힘 조절이 미숙했다. 도구도 없이 손에 내공을 집중해 조금씩 돌을 갈아야 하는데 힘이 조금만 과해도 바위에 금이 생겼다.
"그냥 저 오양진의 핵을 부수면 안 될까요?"
건량이 무한정 많은 것도 아니고 천희연도 제대로 된 치료를 받아야 하기에 잔월은 마음이 급했다.
"협곡이 무너질지도 몰라요."
넓지는 않아도 꽤 깊은 협곡이다. 정말 협곡이 무너진다면 무사히 벗어날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저 돌부처가 오양진의 핵이라고 확신하나요?"
잔월은 손바닥에 외혈을 생성한 후 손날에 내공을 씌웠다. 손바닥으로 가는 것보다 내공을 칼날처럼 예리하게 해서 깎는 쪽을 선택했다.
천희연에게 내공을 주입해 순환하는 것만 해도 어려운 일이다. 잔월은 손바닥에 내공을 씌워 바위를 깎으면서 입을 열어 대화까지 했다. 엄청 놀라운 일이지만, 천희연도 이젠 그러려니 했다.
"월음진 핵을 파괴하면서 기운이 마구 날뛰어 절간이 무너졌을 겁니다. 그런데 이 불상만 전혀 미동도 없죠. 그리고 처음 왔을 때 돌부처가 피범벅이었던 걸 보셨죠?"
"그 많은 피가 어디서 왔는지 궁금할 정도더군요."
누가 일부러 피를 돌부처 얼굴에 발랐다고 생각하는 건 너무 비약이었다.
"월음진 핵이 대부분 파괴되면서 진법이 바뀌었습니다. 그때 진법에 있던 피가 오양진 핵으로 몰렸습니다. 어떻게 한 건지 모르지만."
우덕 일행은 돌부처가 피눈물을 계속 흘리자 혼란을 느꼈다. 마음이 흔들린 상황에서 우덕이 불경을 찾은 사실을 감춘 게 발각되어 말다툼이 벌어졌다.
평소라면 충분히 대화로 풀 일이지만, 마음이 격동한 나머지 대화보단 주먹으로 자기 의사를 표현했다.
안위를 돌보지 않고 싸우다 보니 승자인 우덕도 깊은 내상을 입었다. 내상에 심마가 겹쳐 우덕 역시 피를 잔뜩 토하고 혼절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뜨지 못했다.
"그런데 천 소저는 어떻게 오양월음진을 이렇게 잘 압니까?"
"이 진법은 아미파에서 만든 겁니다. 제갈무후가 재상으로 지낼 때 아미파에 와서 진법을 배워갔습니다. 아마 이 진을 만든 건 제갈무후 혹은 그 후손일 겁니다."
꼬박 보름이 걸려서 겨우 돌 구슬을 만들었다. 잔월이 내공 다루는 솜씨도 일취월장했다. 그러나 돌 구슬을 만들었다고 끝나는 게 아니었다.
"돌 구슬과 진법이 공명해야 합니다."
잔월은 돌 구슬에 외혈을 만든 다음 외혈이 진법과 공명하게 했다. 그러나 외혈과 진법의 공명이 언제나 되는 게 아니고, 공명을 돌 구슬로 옮기는 과정에 자주 실패했다. 그리고 가끔 내공이 통제를 벗어나 돌 구슬을 부수기도 했다.
그 과정을 통해 잔월은 무수한 깨달음을 수습했다. 아무것도 모를 때 보고 느꼈던 것들이 명확하게 정리되며 옥녀공과 구인류에 대한 이해가 점점 깊어졌다.
"다행이네요. 건량이 다 떨어지기 전에 월음진을 구성해서."
잔월이 극음의 내공을 천희연에게 주입했다. 치료 목적이 아니라 천희연이 잔월의 내공을 이용해 진법에 생로를 열려는 것이다.
통제실을 못 찾았을 땐 스물여덟 명이나 필요했던 일을 구슬을 옮겨 쉽게 해냈다.
"반 시진이면 진이 다시 닫힙니다."
천희연의 말에 잔월은 이마를 찌푸렸다.
"이 절간에 계속 사람이 살면서 진을 열어주는 게 아닐 텐데요. 밖에도 진법을 조절할 수 있는 핵이 있는 건가요?"
"아마 안에서 진법을 발동했을 겁니다."
잔월은 대륜법왕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래요. 대륜법왕이 중독된 걸 발견하고 진을 발동했다고 말했습니다. 진을 아예 멈출 수는 없을까요? 무고한 사람이 골짜기에 잘못 들어오면 목숨을 잃을 텐데요."
천희연이 한참 고민했다. 오양월음진을 배우긴 했지만, 아주 깊이 파진 않았다. 그저 가르쳐준 내용만 숙지했기에 고민을 오래 했다.
"월음진이 생겼기에 오양진 핵을 부수면 됩니다. 문제라면, 월음오양진이 영원히 사라진다는 것이죠. 아미파도 이론만 알고 실제로 펼치기 힘든 진법입니다. 이대로 없애는 것도 조금 아깝네요."
"그래도 무고한 목숨이 사라지는 것보단 나은 것 같습니다. 천 소저도 빨리 치료받아야 하니 그냥 부수도록 하죠."
잔월은 양손을 단전 부위에 모은 후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잔월 몸에서 십수 가닥의 내공이 면처럼 뽑혀나갔다. 내공이 허망하게 사라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백원동에서 봤던 수많은 흔적을 떠올렸다.
'심상과 실제 초식이 일치하여야 한다.'
왼손이 단전 위치를 떠났다. 춤추듯 너울대던 왼팔이 마보를 펼칠 때처럼 어깨높이에서 앞으로 쭉 뻗었다.
왼팔이 멈추자 오른팔이 움직였다. 엄지와 중지와 소지를 모으고 식지와 약지는 곧추세웠다. 너울대던 오른팔도 왼팔처럼 수평으로 뻗었지만, 방향은 왼팔과 달랐다.
앞으로 쭉 뻗은 왼팔과 옆으로 쭉 뻗은 오른팔이 다시 너울거렸다. 뼈 없는 것처럼 사람 몸으로는 불가능한 궤적을 그리던 두 팔이 다시 단전으로 모였다. 열여섯 개의 외혈을 단전과 공명한 잔월은 두 팔을 새가 날개 펴듯 활짝 펼쳤다.
"광풍살!"
열여섯 가닥의 내공이 그물처럼 엮여 돌부처를 향해 날아갔다. 너무 집중하여 무척 느리게 느껴졌지만, 실상은 눈 깜짝할 사이였다. 천희연 눈에는 잔월 두 팔이 새 날개처럼 파닥거리다가 순식간에 끝난 것으로 보였다.
"독고 사부. 방금 사부 앞에 흑표가 나타났어요."
"네? 제 눈엔 안 보였는데요."
"백원선사께서도 본인이 초식 펼칠 때 백원 모습을 보진 못합니다. 기록이 있고 저희가 말해줘서 아는 거죠."
안타까움이 일었다. 광풍살을 펼칠 때 심상에 흑표가 떠올랐다. 그 모습이 실제로 천희연에게 보인 점은 무척 기쁘지만, 자신이 볼 수 없다는 아쉬움이 기쁨보다 훨씬 컸다.
"그런데 돌부처는 멀쩡하네요?"
"돌부처라는 본질과 오양진의 핵이라는 본질 둘이 있습니다. 저는 오양진의 본질만 파괴했습니다."
"독고 사부. 대단해요."
천희연이 순수하게 감탄했다.
바람이 슬슬 세지자 잔월은 천희연을 등에 업고 천으로 자기 몸에 단단히 묶어두었다. 작은 돌은 그냥 몸으로 맞아주고 커다란 돌이 날아오면 주먹으로 때렸다. 날아다니는 돌이 한둘이 아니어서 피하려다가 궁지에 몰릴 수도 있다.
월음진 핵이 파괴되었을 땐 땅이 흔들렸는데 오양진 핵을 부수니 바람이 기승을 부렸다.
오양진 핵이 있던 곳과 가까워서인지 강한 기운이 휘몰아치며 크고 작은 돌멩이가 잔뜩 날아다녔다.
그러나 아직 무너지지 않은 진법에 들어갈 엄두는 나지 않았다. 잔월이 있는 곳보다는 날아다니는 돌멩이나 나무가 적지만, 가끔 나무나 돌멩이가 허공에서 그냥 부서지기도 했다. 전혀 잔월이 있는 곳보다 안전해 보이지 않았다.
약 반 시진 정도 강한 바람이 협곡에 휘몰아쳤다. 오양진이 파괴되면서 오랜 세월 잡아뒀던 강한 기운이 흩어지기 전 마지막 발악을 했다. 어마어마한 바람이 협곡 일부를 허물고 수많은 나무를 뿌리째 뽑았다.
"독고 사부. 소림에서 대환단 내줄까요? 소환단도 무척 귀하게 다룬다고 들었거든요."
"안 주면 구양진경 구결을 천하에 뿌린다고 협박할 겁니다."
천희연이 풋 웃어버렸다. 잔월이 이를 갈며 대답하는 게 너무 귀엽게 느껴졌다.
"그래도 안 주면요? 소림에서 작심하면 우리 둘을 몰래 죽이는 건 일도 아니잖아요."
잔월은 천희연을 업고 달리면서 계속 고민했다.
'검선 사조와 함께 소림사에 가면 화산파에 화가 미친다.'
구양진경 구결이 화산파에 흘러들었다고 판단하면 소림이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 전력을 다해 화산파를 지우려고 할 가능성이 무척 크다고 잔월은 판단했다.
'신중히 생각하자.'
진법을 벗어나 보니 어느새 완연한 여름이 되어 무더위가 찾아왔다.
"독고 사부. 저기서 좀 쉴까요?"
협곡을 벗어나 반 시진 정도 달리니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곳이 보였다. 원숭이들이 신나게 뛰어다니는 걸 보면 온도가 적당한 온천이 틀림없었다.
잔월이 다가가자 원숭이들이 화닥닥 도망쳤다. 비록 잔월이 사람 모습을 했지만, 동물들은 모두 잔월을 맹수 취급했다.
물에 젖어서 안 되는 물건은 한데 묶었다. 묵직한 돌로 눌러둔 다음 잔월과 천희연은 온천에 들어갔다. 물이 생각보다 미지근했지만, 그래도 따끈한 물에 몸을 담그니 피로가 다 씻기는 느낌이었다.
"독고 사부. 이제부터 절 희연이라고 부르세요."
천희연이 빨간 얼굴로 잔월에게 말했다.
狂風煞 광풍살이
初現 첫 모습을 드러내다
- 작가의말
마지막 반전. 돌부처가 피눈물 흘린 건 오양진의 핵이었기 때문입니다. 전혀 초자연적 현상이 아니었습니다. 진법에 따른 과학이었습니다.
글을 읽으면서 지루한 부분과 설명이 너무 적어 이해가 어려운 부분 지적 바랍니다. 완급조절이 너무 어렵습니다. 이번 에피소드는 안 그래도 주인공 활약이 적고 설명이 많아 지루하지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원래는 훨씬 시원한 전개였는데 개연성 챙기기 너무 힘들어서 갈아엎었습니다. 남의 잔치에 주인공이 너무 활약하는 건 별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응원과 조언 모두 감사드립니다. 가끔 비난처럼 들리는 댓글도 있지만, 그 역시 제겐 도움 됩니다. 바다가 되려면 모든 물을 가리지 않고 받아야죠.바다가 되려 하지 않는 물웅덩이는 작은 연못조차 되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Comment '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