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공·치료
잔월과 천희연은 전칠과 강 장로를 따라 동굴로 들어갔다. 자죽림은 바위산 자락에 있는 숲이었고 동굴은 자죽림을 벗어나고 얼마 안 되는 거리에 있었다.
전칠과 강 장로가 커다란 바위에 손을 대더니 끙 힘을 줬다. 바위는 겨우 손가락 한 마디 정도 움직였다.
바위를 움직여 사람이 드나들 정도 틈을 만드는 데 일각이나 걸렸다. 넷이 안으로 들어간 후 다시 바위를 움직여 입구를 가리는 데 또 일각이 걸렸다.
"이 바위를 옮기는 법을 아는 건 복룡이까지 셋이오. 셋 중에 둘은 있어야 출입할 수 있지."
석경협의 밀실도 대수인을 익혀야만 문을 열 수 있었다. 아마 동굴을 막은 바위에도 비슷한 기관이 있는 듯했다.
"흑옥령이 개방 신물이라면서요. 왜 여기 숨기지 않은 겁니까?"
"흑옥단속고를 만들 때 쓰는 물건이오. 약초 배합을 알아도 흑옥령으로 저어주지 않으면 흑옥단속고를 만들 수 없지. 강호에는 흑옥령이 방주와 같은 권위를 갖는다고 알려졌지만, 누가 멍청하게 시커먼 막대기를 든 놈의 말을 듣겠소."
전칠이 나무 대야에 검은 액체를 가득 담아왔다.
"천 장로. 발을 대야에 담그시오."
천희연이 신발을 벗고 발을 감싼 천을 풀었다. 하얀 발을 검은 액체에 담그니 시원한 기운이 다리를 타고 몸으로 올라왔다.
"견정혈이 간지러우면 얘기하시오. 그때부터 치료를 시작할 거요."
흑옥단속고의 약 기운이 용천혈을 통해 천희연 전신으로 움직였다. 보통 고약은 근육이나 힘줄 다친 정도만 치료한다. 그러나 흑옥단속고는 외상에 의한 골병도 치료할 수 있고 뼈가 부러진 상처에도 무척 효과가 좋다.
"견정혈이 간지럽습니다."
천희연의 말에 전칠과 강 장로가 내공을 끌어올렸다.
"조금 아프더라도 참으시오."
전칠과 강 장로가 눈길을 주고받은 후 동시에 주먹을 내질렀다. 둘의 주먹에서 내공 덩어리가 튀어 나가 천희연의 몸을 때렸다.
내공마다 성질이 다르다. 무극존자처럼 상대 기운을 부수는 내공도 있고 한대붕처럼 울리는 내공도 있다. 홍야차의 내공은 단단히 뭉치는 성질이었다.
전칠과 강 장로의 내공은 한대붕의 것과 비슷했다. 천희연의 몸을 때린 내공은 벽에 던진 눈뭉치처럼 부서져서 퍼졌다. 그때마다 천희연의 기운이 함께 출렁였다.
전칠과 강 장로가 천희연의 기운을 흩어놓으면 흑옥단속고의 기운이 그 사이로 비집고 들어갔다. 비집고 들어간 약 기운은 원래부터 천희연의 기운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전신으로 퍼져서 치료했다.
독이건 약이건 외부 기운이 들어오면 몸도 내공도 저항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전칠과 강 장로가 격공으로 본신 기운을 흩어놓으며 저항을 최소화하여 치료 효과를 높였다.
"나이를 먹으니 힘들구먼."
전칠이 시커먼 소매로 땀을 닦았다.
"격공장으로 전혀 타격을 안 주다니 정말 탄복했습니다."
잔월의 공치사에 전칠이 흐뭇하게 웃었다.
"보는 눈이 있구먼. 나랑 강 장로가 펼친 건 건곤십팔타(乾坤十八打)라오. 타구봉법과 함께 개방 최고의 무공으로 불리는 권장법이오."
"그렇군요. 강호의 일에 귀가 어두워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건곤십팔타는 초식이 열여덟인데 세 초식이 전해지지 않았소. 열여덟 초식을 다 익혀내서 하나로 이어 펼치면 황룡이 나타난다고 들었소. 예전에는 그저 사부가 취중에 한 농담이려니 했소. 그런데 무극존자의 봉황내의를 보니 사실인 듯하오."
백원선사의 백원노후도 있고 잔월의 광풍살 역시 마찬가지다. 잔월은 세 초식이 사라졌다는 말에 커다란 안타까움을 느꼈다.
시커먼 물에서 발을 꺼낸 천희연은 눈을 꼭 감고 운기에 몰두했다. 잔월은 전칠과 강 장로에게 타구봉법을 얻은 경위를 밝혔다.
"타구진이 타구봉법을 품었다는 말이오?"
"그렇습니다. 취룡보는 타구봉법에 대항하는 무공으로 여겨집니다."
전칠의 눈빛이 깊어졌다. 한참 지나서 고개를 번쩍 든 전칠은 뭔가 크게 깨달은 표정이었다.
"타구봉법은 집법 장로의 무공이오. 건곤십팔타는 방주 무공이지. 타구봉법은 건곤십팔타를 이기는 무공으로 알려졌소. 칠결 이상 제자들이 반드시 익히는 취룡보가 집법 장로를 견제하기 위함이었군."
개방은 남개방과 북개방으로 갈라질 때 큰 홍역을 치렀다. 내부 다툼과 외세의 간섭으로 방주와 장로들이 한꺼번에 죽거나 실종되며 하마터면 전승이 끊어질 뻔했다.
다행히 강 장로의 사부인 전대 전공 장로가 죽기 전에 강 장로를 제자로 받아 모든 무공을 전수했다. 강 장로는 자질이 출중하여 사부가 가르친 대부분 무공을 익혀내고 개방 장로가 되었다.
그러나 무공 가르칠 시간도 부족하여 다른 것들은 가르치지 못했다. 젊은 나이에 등 떠밀려 방주가 된 전칠도 아는 게 적어서 개방은 전통이 끊어지다시피 했다.
"방주. 귀동이를 집법 장로로 하는 게 어떨까 하오."
"그럼 문제 되지 않겠소? 아비가 방주고 자식이 집법 장로라면."
"아까 독고 장로가 펼치는 타구봉법을 봤는데 귀동이 익히면 딱 좋다 싶었소."
싸우면 전칠이 이기지만, 무공 관련한 안목은 강 장로 뒤꿈치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리고 강 장로는 단순히 귀동의 자질이 아까워서 한 말이 아니었다.
"집법 장로가 방주를 견제하고 칠결 이상 제자들이 집법 장로를 견제하는 형태는 개방이 강할 때에나 유용하오. 지금은 적은 힘을 모아 개방을 지탱해야 할 시기이니 방주와 집법 장로 사이가 끈끈한 게 나을 것 같소."
전칠과 강 장로는 잔월 앞에서 중요한 얘기도 서슴지 않았다.
"그런데 집법 장로가 우리가 만든 호법 장로랑 직책이 겹치는 듯하오."
전칠의 말에 강 장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집법당을 만들 테니 우선 독고 장로께서 당주를 맡아주시오. 귀동이 장성하면 그때 직책을 물려주는 게 어떻소?"
"제가 개방에 몸담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잔월이 거절 의사를 비치자 강 장로가 이미 예상했다는 듯이 준비한 답을 풀었다.
"독고 장로는 이름만 걸어놓으면 되오. 칠결 제자 둘이 귀동이를 보필해 집법 장로 역할을 대신할 거요."
잔월이 계속 주저하자 전칠이 거부하기 힘든 제안을 했다.
"화산에서 젊은 제자를 받아야 하지 않겠소? 우리 개방이 괜찮은 제자를 물색하는 데 도움을 드리겠소."
화산파는 사람이 겨우 스물을 넘었다. 대부분 고수고 독심호리를 비롯한 일부는 웬만한 문파에 한 명도 보기 힘든 수준이지만, 손이 여섯이고 머리가 셋인 건 아니다. 처리할 일이 많으니 도움이 절실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거절하는 게 예의 아닌 것 같습니다."
잔월은 전칠의 유혹에 쉽게 넘어갔다. 무력이 조금 아쉬운 개방과 손발이 아쉬운 화산의 협력은 서로 거부하기 힘든 제안이다.
"천 장로 상처를 보니 대수인 솜씨인 것 같소."
"환멸대수인입니다."
"대수인이라. 혹시 대수인의 전설을 아시오?"
"금시초문입니다."
전칠이 기억을 끄집어냈다.
"내가 소방주로 정해지면서 건곤십팔타를 처음 배울 때였지. 그때 사부가 천하의 유명한 무공을 내게 말해줬소. 특히 권장법에 관해 자세히 얘기했다오."
"아미의 통비권은 무공 이상의 무언가라고 평가했소. 익히는 자의 자질이 얼마나 대단해도 통비권이 아쉽지 않을 거라고."
아무리 대단한 자여도 통비권을 익히면서 무공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지 않을 거라고 전대 개방 방주가 평가했다.
"소림에서 가장 대단한 건 취권이오. 소림에서 처음으로 달마의 무공과 완전히 다른 권법이 만들어진 것이지. 달마의 위명에 눌려있던 소림의 첫 발버둥이라고 할 수 있소."
달마 덕분에 소림이 강한 무공을 보유했지만, 달마의 그림자가 너무 짙었다. 그러나 취권을 시작으로 소림에 달마가 전한 무공 외에도 새로운 유파가 생겼다.
"대수인은 팔인류로 알려졌소. 그런데 사실은 아홉 번째 인이 있소. 대수인의 여덟 인 모두 익혀내면 법왕 호칭을 받소. 그러나 아홉 번째 인을 찾아내면 부처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했소."
"그만큼 어렵다는 뜻이겠군요?"
잔월의 말에 전칠이 고개를 끄덕였다.
"버리고 버리고 또 버려야 한다고 했소. 그래서 내가 사부한테 물었소. 무엇을 버려야 하냐고."
잔월은 숨마저 멈추고 전칠의 말에 집중했다.
"버리지 말아야 할 걸 빼면 다 버리라고 했소."
말을 마친 전칠은 겸연쩍게 웃었다. 한껏 기대하던 강 장로와 잔월 보기 미안했다. 과연, 강 장로는 코를 실룩이며 무언의 항의를 보냈다. 슬쩍 눈알을 굴려 잔월을 쳐다보니, 어디를 보는지 모를 멍한 눈을 하고 입을 헤 벌린 채 입술을 바르르 떨고 있었다.
'아니, 이 개떡같은 말을 듣고 깨달았다고?'
약관도 안 된 핏덩이가 무형지기로 의심되는 기운을 다스리고 대타구진을 깨지기 일보 직전까지 흔들었으며 타구봉법을 발견했다.
그러나 강 장로 역시 약관 전에 개방 대부분 무공을 높은 수준으로 익혀낸 천재였고 전칠 역시 열 살에 소방주로 내정될 정도로 자질이 출중했다. 익힌 무공이 개인 성향과 꼭 맞아떨어지면 잔월의 성취도 이해하지 못할 게 아니다.
잔월은 바닥부터 천천히 익히는 대수인과 달리 답을 알고 과정을 구하는 구인류를 익혔다. 전칠은 잔월이 대수인과 아무 연관도 없다고 여겼기에 갑자기 깨달음을 얻은 데 관해 매우 놀랐다. 잔월이 구인류를 높은 수준으로 익힌 사실을 알았다면 전칠의 놀라움이 조금은 퇴색했을 것이다.
버리고 버리고 버리라는 말은 반대로 무언가를 꼭 잡고 있어야 함을 의미했다. 웬만한 건 다 버려도 괜찮지만, 버리지 말고 꼭 잡고 있어야 하는 뭔가가 있음을 깨우쳐주는 말이었다.
잔월은 무극인을 제외한 남은 여덟 인에서 버리지 말아야 할 공통된 뭔가를 찾으려고 애썼다. 여덟 인 모두에 있는, 없어선 안될 무언가가 무극인을 이루는 핵심이라고 여겼다.
시간이 반나절 흘러서 잔월과 천희연이 동시에 눈을 떴다. 천희연은 외상이 대부분 나은 덕분에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외상으로 느껴지는 통증이 사라진 것만으로도 다 나은 듯 상쾌한 느낌이 들었다.
잔월은 안타깝게도 결론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무극인으로 이르는 확연한 실마리를 얻은 덕분에 수련 기간을 대폭 단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확실한 깨달음을 얻지 못한 아쉬움이 조금 있었지만, 과욕은 금물이라며 애써 마음을 다스렸다.
"여유가 되면 며칠 머무르며 개방 형제들과 친분을 쌓는 것이 어떻겠소?"
"치료를 마치면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잔월과 천희연은 전칠과 강 장로에게 작별을 고하고 서쪽으로 향했다. 목적지는 무당이었다.
打功 때리는 방법으로
治療 치료하다
- 작가의말
좋은 일 했는데 보상받아야죠. 천희연 외상 치료하는 건 보상이 너무 약합니다. 구인류 관련해서 중요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전칠의 개떡 같은 말을 찰떡같이 알아들은 건, 잔월이 주인공이기 때문입니다.
개방은 얼추 형태나 구조 그리고 분위기를 그려낸 것 같습니다. 디테일은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그럼 이만 무당으로 가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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