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진·침기
진법가들은 동쪽 지하를 확인한 후 어렵지 않게 남은 세 곳을 찾아냈다. 서쪽에는 미처 수습하지 못한 재물이 있었고 북쪽에는 쌀가루와 말린 고기가 가득했다.
"누구지? 흑 장로. 독편복이 죽은 게 확실하오?"
남쪽에는 술이 가득했다. 그러나 모조리 확인해도 무형지독은 없었다. 도망가는 주제에 술독을 챙기진 않았을 것이다. 이틀이나 사흘에 한 번씩 새 술로 바꿔줘야 하기에 목적지가 어딘지 몰라도 크고 무거운 술독은 짐이다.
"내가 직접 화장했소. 아무래도 무형지독이 예전에 무곡산장 손에서 벗어난 게 아닐까 생각하오."
그때 칠신병이 끼어들었다.
"맞다. 여기 냄새로 보아서는 최소 몇 년은 술독을 개봉한 적 없다. 자주 술을 갈았다면 쏟고 부으며 술 냄새가 가득해야 한다."
미련을 떨치지 못한 당한백은 커다란 지하를 망치로 골고루 두드렸다. 원래는 돌아오는 소리를 듣고 기관이나 숨긴 공간이 있을 가능성이 큰 곳만 찾아 두드렸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바닥과 벽은 물론 천장까지 꼼꼼하게 두드렸다.
잔월 역시 지청술을 펼치고 내공을 뿌리며 당한백을 도왔지만, 전혀 성과가 없었다.
"준비 끝났습니다."
무곡진을 허물 준비에만 꼬박 닷새 걸렸다.
"진법이 깨지면 어마어마한 일이 벌어집니다. 지진이 올지 광풍이 올지 산사태가 올지 모르니 다들 잘 대비하세요."
진법가들은 분지에 진법 하나 만들었다. 진법으로 기운을 모아 무곡진과 충돌시키면 핵이 무너질 가능성이 크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고 기운 흐름이 하도 난잡하여 진법가들도 딱히 어느 산이 핵인지 확신하지 못했다.
"시작하시오."
진법가들이 쇠꼬챙이를 꽂고 구슬을 옮기며 난리를 피웠다. 넷이 사방진에서 한 방위씩 맡았다. 중앙에서 황룡을 자처한 자가 백호와 현무 그리고 주작과 청룡을 지휘했다.
"성공입니다."
시간이 조금 흐르고 사방진의 기운이 싸움을 시작했다. 균형을 절묘하게 맞춰 네 기운이 팽팽하게 대치하자 힘을 키우려고 주변 기운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사방진과 무곡진이 기운을 두고 실랑이질했다. 그러나 지하의 네 보조용 진법이 무너진 바람에 무곡진은 커다란 덩치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잔월 등이 급하지만 않았다면 한두 달 후에 무곡진이 약해지기를 느긋하게 기다려서 쉽게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사방진은 넷이 하나고 하나가 넷입니다. 발동하면 하나가 셋을 잡아먹을 때까지 싸우지만, 외부에 적이 나타나면 지금처럼 단합하기도 합니다."
진법가의 친절한 설명에 당한백이 의문을 표했다.
"사방진은 무슨 용도요? 자기끼리 싸우다가 사라진다면 무슨 의미요?"
"이긴 쪽으로 기운이 몰립니다. 그러면 그 방향으로 강한 기운이 흐릅니다. 제갈량이 적벽에서 동풍을 빌었던 것도 아마 사방진을 이용한 게 아닌가 추측합니다."
"그건 아니요. 적벽에서 동풍 빌어온 건 제갈량이 아니라 주유였소. 주유 수하에 있는 진법가가 한 일이지."
당한백의 말에 진법가가 소매에서 짧은 붓과 두꺼운 종이를 꺼내 황급히 적었다.
"그때 사용한 진법이 뭡니까? 사방진에서 백호만 키운 서방진 맞습니까?"
"그것까진 모르오. 내 친우 중 제갈가 후손이 있어 얼핏 들었을 뿐이오."
진법가가 진법 미상 네 글자를 적고 애처로운 눈빛으로 당한백을 계속 바라봤다. 당한백은 눈빛 공세를 이기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내가 여겨듣지 않아서 확실하진 않은데, 오행진을 거꾸로 펼친 거라고 들었소."
진법가는 황급히 종이에 글자를 적었다. 종이에 글자가 빼곡히 차면 새 종이를 꺼냈다. 당한백이 달랑 두 마디 했는데 진법가는 종이에 수백 글자를 적었다. 마음이 급해 가끔 먹을 찍지 않고 붓을 입에 물어서 침으로 적셨다.
잔월도 이젠 사용하지 않는 옛날 글자를 가득 적는 걸 보고 흥미를 잃었다. 한 글자에 십수 개 혹은 수십 개 뜻이 있고 지방에 따라 같은 글자도 다른 뜻으로 쓰이는 게 옛날 글자다. 쓴 사람이 글자를 어떤 의미로 사용했는지 알아내려면 웬만한 학식으로 힘들다.
"청룡이 이길 것 같습니다."
진법가들은 기운 느끼는 방법을 따로 익힌 듯했다. 내공이 조금 있지만, 겨우 토납법 수준이어서 고수는 절대 아니었다. 삼백 명 가까운 무인 가운데 잔월을 포함해 사방진 기운을 느끼는 사람은 열 명도 안 되었다.
"동쪽 진법이 제일 먼저 파괴되어서 그런 거요?"
"그럴 수도 있고 핵이 동쪽에 있을 가능성도 큽니다. 진이 안정을 유지할 땐 핵이 있는 곳이 제일 강합니다. 반대로 진이 무너질 땐 핵이 있는 곳이 오히려 약합니다."
잔월은 오양진 핵을 부술 때 불상 주변이 상대적으로 안전했던 것을 떠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무곡진의 동쪽이 가장 약하여 청룡이 점점 기운을 불렸다. 사방진은 무곡진과 싸우면서 자기들끼리도 견제했다. 그러나 점점 격차가 벌어지며 청룡이 남은 셋을 압도했다.
홀로 남은 청룡의 기운이 무곡진을 강하게 타격했다. 무곡진 동쭉에 있던 산봉우리 하나가 높게 쌓은 모래 산이 소나기에 허물어지는 것처럼 느리지만 확실하게 무너졌다.
"저게 핵이었군요. 너무 강한 기운에 산이 가루가 되어 흐르는 겁니다. 저기 사방진이 있던 곳도 곧 반동으로 무곡진의 기운이 닥칠 것입니다. 여기가 가장 안전한 곳은 맞지만, 그래도 다들 조심하셔야 합니다."
"진법 하나 쳐서 보호하는 건 어떻소?"
잔월의 말에 진법가는 고개를 세게 저었다.
"진법은 강한 기운을 뭉치고 그 기운을 비틀어 이용하는 방식입니다. 곧 어마어마한 기운이 흐르고 모든 진법이 무너질 겁니다. 정확히 계산된 진법은 두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부 무너진 진법은 어떻게 작동할지 누구도 모릅니다. 보호하려고 친 진법이 되레 해를 끼칠 수 있습니다."
"나한진, 개진."
사방진이 무곡진 동쪽을 허물었다. 그 반동으로 남서북 세 방위에서 어마어마한 기운이 몰려와 사방진을 무너뜨렸다. 그리고 동쪽의 핵이 절반 이상 사라지고부터 남서북 세 방위의 기운들이 마구 날뛰었다.
일부는 밖으로 나갔지만, 대부분은 지형이 낮은 분지로 쏟아졌다. 특히 사방진이 있던 곳을 목표로 덮치는 기운이 많았다.
나한승들이 나한진을 펼쳐 날뛰는 자연의 기운에 저항했다. 다행히 대처하기 어려운 지진이나 산사태가 아닌 광풍이었다. 나한승들은 두 개의 소나한진으로 기운의 방향을 조금씩 틀었다.
그러나 바람이 점점 강하게 불어오면서 나한승들이 휘청였다.
'진법으로 모은 기운이어서인가? 자연스럽지 않다.'
진법으로 억지로 모은 기운이어서인지, 아니면 진법을 억지로 깨서 그런지. 잔월은 몰려오는 기운에서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깨달음이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흐릿한 모습으로 뇌리를 간질이며 잔월을 괴롭혔다.
"나도 좀 도와야겠소."
잔월이 경공을 펼쳐 가장 강한 바람이 불어오는 곳으로 향했다.
"흑 장로는 도대체 정체가 뭐요?"
"내 사부다."
칠신병의 대답에 당한백이 실소했다.
"지금 저 모습은 누가 봐도 암흑교의 건곤대나이를 극성으로 익힌 모습 아니오."
당한백은 어마어마한 기운을 돌려서 여섯 방위로 흩어버리는 잔월 모습에서 건곤대나이를 떠올렸다.
"내공이 강하고 훌륭한 무공 익히면 가능한 것 아닙니까?"
곁에서 듣던 청강이 질문하자 당한백이 한숨을 푹 쉬고 대답했다.
"지금 엄청나게 강한 기운을 정면과 뒤를 제외한 남은 여섯 방위로 적절하게 분산해 보내고 있소. 저거 무작정 돌려주면 소용돌이가 되면서 회오리바람을 만들 수 있소. 웬만한 수준으로는 절대 해낼 수 없는 일이오. 강호의 소문이 사실이라면 고작 열다섯이오. 좋은 무공 익히고 기연을 만나 내공이 깊은 건 이해할 수 있소. 그러나 저 나이에 부합하지 않는 통찰력은 어떻게 해석하겠소? 타고나서 통찰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머리로 이해한 걸 몸으로 정확히 펼치는 저 능력은? 십오 년이 아니라 오십 년 수련해도 힘들 것이오."
당한백에게 의문을 잔뜩 선사한 잔월은 무형지기에 관한 깨달음을 정리하며 무척 신나 있었다. 서른여섯 나한이 진법을 구성하고도 쩔쩔매는 기운을 단독으로 상대하며 흐릿하던 깨달음이 차츰 모습을 드러냈다.
'그래. 무형지기는 바르지 못한 걸 바로잡는 힘이다. 삼태극에서 덕이라고 부르는 기운이 틀림없다.'
음양이 태극을 이루는 건 너무 힘들다. 서로 대치점에 있는 두 기운이 화합하여 태극을 이루고 그 상태를 유지하는 건 자연적으로 발생하기 힘들고 인위적으로 만들기도 어렵다.
그래서 덕(德)이라는 가상의 기운을 이론으로 만들어 삼태극으로 균형을 잡았다. 잔월은 광풍살이 다루는 무형지기가 덕이라고 생각했다.
'기운을 무수한 음양으로 나눈 다음 무형지기로 균형을 잡으니 날뛰지 않고 내가 이끄는 대로 움직여준다. 무형지기는 세상을 바로잡는 힘. 바르지 않은 일엔 사용할 수 없는 힘이다.'
잔월은 환속승한테서 배운 음양무계를 체외로 확장했다. 일행을 덮치는 기운을 음양으로 나눈 다음 무형지기를 추가해 삼태극을 이뤘다. 균형을 이룬 기운은 잔월 통제에 따라 고분고분 방향을 돌려 사방으로 흩어졌다.
"아미타불. 부처님 현신이다."
아무리 무공이 강한 사람이어도 홍수나 산사태 앞에선 무력했다. 산에서 굴러내린 천 근짜리 바위도 막지 못하는 게 대부분이다. 일행을 덮친 기운이 홍수나 산사태 정도는 아니지만, 사람 힘으로 깔끔하게 막을 정도로 하찮은 것도 아니었다.
잔월 덕분에 할 일이 사라진 나한승들은 뒤로 물러섰다. 낮지만 힘있게 울리는 서른여섯 나한승의 송경(頌經) 소리가 사람들 마음에 평온을 선사했다.
시간이 느리고도 빠르게 흘러 어느새 무곡진과 사방진이 사라졌다. 마지막엔 사방으로 기운이 덮쳤다. 그래도 가장 강하게 오는 정면을 잔월이 막아냈기에 찰과상을 입은 사람은 있어도 크게 다친 사람은 없었다.
"독고 대협. 우리 삼 형제는 대협을 따르겠습니다."
하후가의 셋은 가문에서 버림받았다. 원래는 숨어서 관악창과 충명심법을 익힌 후 가문으로 돌아가려 했는데 마음이 바뀌었다. 무공만 따지면 하후가에서 다섯 안에 들 자신이 있는 셋이다. 더 강한 무공을 익혔다고 가문에서 달리 대할 것 같지 않았다.
"편지를 써드릴 테니 화산으로 가시오."
잔월은 짧게 편지를 써서 하후청에게 넘겼다. 하후가의 셋은 뭐가 그리 급한지 바로 작별하고 경공을 펼쳐 동쪽으로 달렸다.
"옥면금강께 입은 은혜 팽가는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이후 화산의 일이 곧 팽가의 일입니다."
팽궐기도 잔월을 찾아와 인사하고 급히 떠났다.
"출가한 자로서 분쟁은 최대한 피해야 합니다. 우리도 이만 떠나겠습니다."
소림 나한승들도 음식을 넉넉히 챙겨서 바로 떠났다.
"겁쟁이들. 뭐가 두렵다고 도망쳐."
칠신병은 소림 나한승과 대련하고 싶어 손이 근질거렸지만, 진법 깨는 일이 중요하기에 꾹 참았다. 그런데 진법이 깨지자마자 나한승들이 떠나자 심술이 잔뜩 났다.
"아마 이곳으로 수많은 무인이 몰려오고 있을 거요. 귀찮음을 덜려면 우리도 바로 떠나야 하오."
"아미로 가야겠소."
"훌륭한 선택이오."
무곡산장 무인은 이대로 두면 강호 세력들에게 잡혀가 고문당한다. 이들을 보호할 능력이 되는 문파는 몇 없다. 소림은 스님들이 사는 곳으로 육식과 술을 금한다. 스님이 아닌 자가 살기 좋은 곳이 아니다.
화산은 문도가 겨우 스물이 넘는다. 개방은 거지 무리여서 오랜 기간 이들을 보호할 능력이 없다. 힘이 있어도 그 힘을 올곧이 모으는 게 힘든 조직이다.
변방에 있고 천칠백 년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는 아미가 적격이다. 게다가 대성당도 대리를 통해 섬라로 돌아가야 하기에 동행할 수 있다.
황실 무인과 환관 그리고 숙수 등도 이대로 놔주면 목숨 부지하기 어렵다. 이들도 일단 아미까지 데려간 다음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 게 좋다.
"게다가 공손가 무리의 흔적도 그쪽이니 딱 좋고."
당한백은 봇짐에서 작은 매를 꺼내 다리에 죽통을 매달아 날렸다.
"다행히 원 황실 매에게 당했던 상처가 어제 다 나았소. 우리 가문 사람들이 공손가 종적을 찾을 것이니 급하게 길을 재촉할 필요 없소."
필요한 물건을 수습하고 출발했다. 삼불살과 칠신병이 앞장서고 잔월과 당한백은 가장 뒤에 처졌다.
"흑 장로. 삼처사첩에 관한 생각은 변함없소?"
破陳 진을 깨고
沈氣 기운을 잠재우다
- 작가의말
진법에 관해 조금 풀어봤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진법은 자연의 기운을 모으고 그 기운을 이용해 뭔가를 하는 겁니다. 무인이 내공 사용하는 것처럼 진법도 기운을 특정 경로로 움직여서 목적을 달성합니다.
무형지기가 덕이라는 건 잔월 생각입니다.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습니다. 맞든 틀리든 힘의 본질에 관한 생각이 깊어졌기에 광풍살 초식 위력은 강해집니다.
“아미로 가야겠소.”
“미쳤군. 처가로 자발적으로 기어들어 가겠다니? 혹시 첫 결혼이오?”
당한백의 결사반대로 잔월은 아미 대신 구채구(아미보다 더 핫한 여행지)로 향했다고 한다. 태국에서 온 대성당 애들에게 한 그릇에 은자 한 냥 부르는 호텔 음식 똠얌꿍을 먹이고 환관들한테 비아그라와 면도기를 팔았고 황실 무인은 민속촌에 데려가 궁궐 체험을 시켰다고 한다.
‘잔월, 다시 없을 전설의 가이드 - by 글쇠’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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