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기교
"진법?"
칠신병을 제외하면 모두 진법을 감지했다. 그때 일전에 셋을 호법 장로에게 안내했던 서역인이 다가왔다.
"공손평천이 이미 모습 드러냈다. 도망치기 어렵게 진법으로 가둘 생각이다."
"공손평천을 어떻게 끌어낸 거지?"
"무극존자가 천주봉 무공 지운다고 했다."
공손평천은 진짜 천마가 아니다. 수백 장 용암 위를 날아 지나갔지만, 결국 심한 화상을 입어 다리를 잘라야 했다.
개인 무력은 무극존자보다 강하다. 피해를 감수하면 무극존자를 죽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력만으로 천하를 횡행할 정도는 절대 아니다.
천주봉 무공이 사라지면 심마해의 멸세교는 존속할 수 없다. 그러면 공손평천도 부릴 부하가 사라진다.
"야심이 클수록 약점이 두드러진 법이지."
안으로 들어가니 공손평천이 수백 명 무인을 거느리고 호법 장로와 대치하고 있었다. 예상 밖으로 호법 장로 뒤에 훨씬 많은 사람이 있었다. 무극존자를 지지하는 자들은 물론 혈수파도 호법 장로 편에 섰다.
혈수파는 앙숙인 선천파의 절반 이상 무인이 공손평천 밑으로 들어갔기에 선택 여지없이 반대편에 섰다.
"구결의 필체, 깊이, 글자 크기, 글자 간격 모두에 깨달음이 담겨있다. 멸세교 창시자의 무공에 훨씬 못 미친다는 걸 아는 공손평천이니 천주봉의 무공이 지워지는 게 죽도록 싫을 것이다."
무극존자의 말에 당한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잔월은 석연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호법 장로가 이 정도 규모의 진법을 하루 사이에 만들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인력을 충분히 투입하면 하루 사이에도 가능하지만,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았을 때 얘기다.
"저자가 공손평천이오?"
잔월은 공손평천을 보고 깜짝 놀랐다. 북무산에서 잔월과 당한백을 공격해 큰 내상을 입힌 자가 공손평천이었다.
"다리 잃었다는 소문은 거짓이었소?"
당한백은 아무리 살펴도 가짜가 아닌 공손평천 다리를 보며 무극존자에게 질문했다.
"제길. 저건 내 다리다. 내 모친이 저놈 여동생이니까. 내가 다리 잘리지 않았으면 공손무기 다리를 잘라 붙였을 텐데. 내가 좀 더 참을걸."
잔월과 당한백은 상상을 초월한 무극존자의 대답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가까운 혈연관계여서 무극존자 다리를 잘라 자기 몸에 붙였다는 말이다.
그제야 공손무기가 왜 멸세교로 가는 걸 최후 수단이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겉으로는 멀쩡한 듯 보이지만, 공손평천은 미치광이가 틀림없었다.
"왼눈 눈두덩이가 약점이라고 했소."
잔월의 말에 무극존자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거짓말이야. 약점 들킨 놈이 널 왜 살려 보내겠어. 독이 발작하거나 해서 거짓말하고 도망친 거야. 중독된 게 들켰다기보다 무공 약점이라고 변명하는 게 훨씬 타격이 작으니까."
잔월은 크게 심호흡했다. 공손평천을 상대할 때 심령제압에 걸리진 않았지만, 아무 영향도 받지 않은 건 아니었다. 순진하게 공손평천의 말을 고대로 믿은 건 마음의 압박이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
"호법 장로. 나와 조카 일을 먼저 매듭지어야겠소."
목소리는 점잖았다. 광기가 전혀 없었다. 공손평천의 요구에 양측 무인이 뒤로 물러나서 자리를 만들었다.
"산월, 네 몸에 흐르는 절반 피가 우리 공손가 것이다."
"피가 뭔 잘못이겠어. 공손이라는 성이 괴물이 되어 너희를 삼킨 것이지. 그렇게 말하면 네 피 절반은 공손의 것이 아니야."
공손평천이 화를 참지 못하고 무극존자를 덮쳤다. 잔월은 조금씩 존재감을 숨겼다. 당한백은 오히려 기세를 천천히 키웠다. 흑룡추산을 펼치려면 기세를 키워야 한다. 갑자기 기세를 확 키우는 것보다 둘의 대결에 몰두한 것처럼 조금씩 키워가는 게 의심을 덜 받는 길이다.
"강기!"
구경하던 자들 입에서 경탄이 튀어나왔다. 공손평천 손에서 검은색에 가까운 덩어리가 튀어나왔다. 무극존자는 내공을 두른 주먹으로 강기를 부쉈다.
'기운 다루는 솜씨가 장군보 스승보다 훨씬 부족하다.'
장군보는 자기 기운을 잘 다룰 뿐 아니라 상대가 기운을 제대로 못 다루게 방해하기도 했다. 무극존자는 무혈지체 덕분에 자기 기운은 정말 자유자재로 다루지만, 상대 기운을 다루는 솜씨는 부족했다.
'공손평천의 강기 다루는 솜씨도 평범하다. 나라면 차라리 강기 주도권을 빼앗은 다음 상대에게 돌려줬을 텐데. 힘도 중요하지만, 기교 역시 중요하다. 기교를 이기는 힘도 있겠지만, 힘을 이기는 기교도 분명히 존재한다.'
아미의 개파조사 공령자가 홍수를 잠재웠다는 말이 언뜻 기억났다. 곤륜의 무곡산장에서 잔월이 소림 나한승들도 어려워했던 기운을 쉽게 막아냈다. 공령자의 일화가 사실이라면, 절대적인 힘을 잠재우는 기교는 분명히 존재한다.
'벌써 봉황내의를?'
무극존자는 왼손을 가슴에 붙이고 오른손을 오른쪽 태양혈에 붙였다. 지금까지 본 것 중에 가장 작은 봉황이 날아갔다. 봉황이 출발하자 무극존자는 바로 자세를 바꿨다. 오른손이 오른 가슴으로 가고 왼손이 왼쪽 태양혈에 붙었다.
'두 번 연속 펼친다고?'
마찬가지로 작은 봉황이 날아갔다.
'봉황에서 봉은 수컷이고 황은 암컷이다. 무극존자는 무극을 음양으로 나눠 위력을 낮춘 대신 두 개를 연속 펼쳐 상대가 피하기 어렵게 했구나.'
음양의 기운이 섞인 봉황내의가 아니라 양의 기운이 성한 봉과 음의 기운이 센 황으로 나눴다.
'저게 밖에서 다시 봉황으로 합쳐지면 위력이 어마어마할 텐데.'
공손평천 역시 피하지 않았다. 왼손에 음의 기운을 뭉치고 오른손에 양의 기운을 뭉친 다음 각각 봉과 황을 때렸다.
'오양월음진!'
잔월은 공손평천의 주먹질에서 생뚱맞게 오양월음진이 생각났다.
'설마 팔진도해를 보고 무공을 깨달은 건가?'
천년 세월이 흘렀으니 진법에서 무공을 깨달았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한차례 공방을 주고받은 둘은 앞으로 천천히 걸었다. 손을 뻗으면 상대 뒤통수를 만질 거리까지 접근하고 동시에 상대를 공격했다.
'한 호흡에 세 초식.'
초식을 다 펼치는 법이 없었다. 절반도 펼치기 전에 상대는 이미 알고 대비했다. 그러면 원래부터 그러려고 했다는 듯이 간단히 다른 초식으로 변했다.
주먹과 주먹 혹은 손바닥과 손바닥이 부딪히는데 쇠붙이처럼 깡깡 소리가 났다. 둘 다 상대 내공이 자기 몸으로 침입하는 걸 추호도 용납하지 않았다.
'나라면 일부를 흡수해서 제압한 다음 돌려줄 텐데. 그럼 상대가 나보다 내공이 많아도 제압할 수 있다.'
무혈지체라고 진짜 혈도가 사라진 게 아니다. 오래 싸우면 혈도가 지쳐 운기가 어려워지는 건 똑같다. 무혈지체가 그 정도로 지치려면 최소 보름은 쉬지 않고 싸워야겠지만, 무혈지체라고 내공이 무한하고 운기가 숨 쉬듯 쉬운 건 아니었다.
반 각 정도 지났는데 벌써 둘은 각자 오백 초식 이상 사용했다. 이미 사용한 초식은 다시 펼치지 않았다. 앞부분만 비슷하게 꾸며 속임수 쓰는 건 그저 심력 낭비일 뿐이다.
내공이 고갈하거나 몸이 지치기 전에 정신이 먼저 버티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힘으로 단순히 부딪히면서 상대가 지치기를 기다리는 게 훨씬 나은 선택이다.
둘의 대결에서 흠만 찾던 잔월도 시간이 흐르며 그걸 감지했다.
'집착. 내가 기교에 집착하고 있다. 취접, 무극존자, 공손평천. 나보다 내공이 많은 자들이 있으니 기교를 도피처로 삼았다. 집착을 버려라.'
그제야 둘에게서 배워야 할 장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간결하면서도 전환이 부드러운 초식, 강한 힘을 사용하면서도 수발이 자유로운 점, 공격과 방어를 함에 있어 머뭇거림이 전혀 없는 점.
기교보다 힘에 치중한 무인이 보일 수 있는 최고의 모습이었다.
또 반 각이 지나 둘이 사용한 초식이 천 개 넘었다. 그런데도 둘은 계속 새로운 초식을 뽑아냈다. 이미 사용한 초식을 또 펼치면 상대는 훨씬 빠르게 대비할 수 있다. 초식이 먼저 고갈 난 자가 점점 궁지에 몰릴 수밖에 없는 싸움 방식이었다.
'나도 초식 수련에 힘써야겠다.'
또 일각이 지났다. 공손평천 모습이 조금 더 잘 보였다. 처음엔 무극존자의 커다란 덩치에 가려졌는데 지금은 몸 일부가 늘 보였다.
무극존자가 당한백에게 기회를 만들어주려고 싸우면서도 조금씩 위치를 바꿔 공손평천의 몸이 드러나도록 한 것이었다.
털썩.
또 일각이 지나니 쓰러지는 무인이 속출했다. 두 고수의 싸움은 넋 놓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심력을 고갈케 했다. 무공 위력에 비교해 정신 수양이나 무공 이해가 낮은 자가 대부분이니 버티지 못하고 혼절했다.
- 둘의 대결에 마음을 뺏기지 마시오.
잔월은 당한백 등에 글자를 적었다. 당한백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시간이 흐르며 저도 모르게 둘의 대결에 빠져들었다.
심령제압의 여파가 남아 공송평천이 두려운 탓이었다. 두려움을 극복하려고 공손평천의 약점 캐는 데 집중하다 보니 어느새 대결에 몰입했다.
흑룡추산이 쉽게 펼칠 수 있는 초식이 아니기에 당한백은 다시 마음을 다스렸다.
'무극존자가 우위를 차지해야 한다. 그래야 기습하기 좋다.'
궁지에 몰리면 사고가 제한된다. 위기를 벗으려고 무극존자에게 더 집중할 가능성이 크다.
만약 공손평천이 우위를 점한다면 상대가 수작 부릴 걸 대비하여 오히려 더 집중할 것이다.
"불공평한 싸움이야."
무극존자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당한백은 기세를 최고로 키웠다. 다행히 둘의 대결을 구경하는 무인 대부분이 기세를 강하게 키웠기에 이상하진 않았다.
"난 상처만 입혀도 이긴 셈이니까. 안 그래?"
무극존자의 몸에서 수백 가닥 내공이 뻗어 나와 엉켰다. 비록 자세를 잡지 않았지만, 잔월은 봉황내의 초식임을 깨달았다.
'무혈지체여서인가?'
잔월이 광풍살 펼치기 전에 팔을 움직이는 건 외혈 위치를 바꾸기 위함이다. 그러나 무극존자는 공손평천을 상대로 초식을 계속 바꾸면서도 외혈을 자유자재로 움직였다.
'지금이야!'
잔월은 입 밖으로 나가려는 소리를 겨우 눌렀다. 당한백 역시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매화정을 던졌다.
하얀 매화정은 당한백 손을 떠나기 무섭게 검은색으로 변했다. 흑룡의 기운에 매화정은 가루 한 점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공손평천은 정면으로 무극존자의 봉황내의를 받아야 하고 옆구리는 당한백의 흑룡추산이 노렸다. 노린 시기도 절묘하여 잔월이라면 절대 못 피할 조합이었다.
"공평해."
공손평천의 손이 신기한 궤적을 그렸다. 궤적대로라면 양팔이 타래처럼 꼬여야 했다. 그러나 둘 다 환영인 것처럼 서로 충돌조차 없었다.
"알지? 건곤대나이라고."
力 힘과
技巧 기교 모두 중요하다
- 작가의말
잔월이 드디어 깨달았습니다. 힘과 기교 모두 중요합니다.
압도적은 아니지만, 5번이 많네요. 공부 좀 해야겠습니다. 남은 넷은 자료 조사 좀 하면 되는데 판타지는 동서양 봉건 시절 사회상을 공부해야 하거든요. 주로 서양 쪽을 공부해야겠습니다.
Comment '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