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경제적 대한민국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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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25 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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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전쟁과 경제 (9)

DUMMY

다큐멘터리• 경제적 대한민국 스토리



제1권 개척경제시대



제24회



소리글




Ⅲ 전쟁과 경제 (9)




아우야, 너를 위하여-- 정주영- 3


중일전쟁을 태평양전쟁으로 확산시킨 일제는 식민지 조선에 기업정리령을 내렸다.

무기재료도 부족하고 군수물자도 부족했던 일제는 기업정리령으로서 군소기업을 통폐합시켰다.

정주영의 아도서비스는 종로 5가의 일진공작소와 합병하라는 명령이었다.

무허가 아도서비스와 허가 있는 일진공작소가 동등한 자격으로 합병될 리는 없었다.

아도서비스가 일진공작소에 흡수통합된 뒤 정주영은 자동차 수리업에서 손을 떼고 나왔다.


정주영이 새롭게 잡은 일은 운송업자의 하청업자였다.

황해도 수안군 홀동광산의 운송사업권을 가진 운송업자에게 보증금 3만 원을 주고 하청권을 땄다. 홀동광산에서 캐낸 광물을 평양 선교리까지 수송하는 일이었다.

트럭이 새 트럭 헌 트럭 합해서 30대나 되고 길도 험해서 매일 두서너 건씩 고장 없는 날이 없었다.

트럭 정비책임은 매제 김영주에게 맡겼다.

정주영이 홀동광산 운송업자의 하청 일을 하게 된 것은 오로지 아우들 때문이었다.

둘째 인영과 셋째 순영이 일제의 강제징용 대상자였는데 군수산업체에 근무하면 징용을 면제받을 수 있었다.

정주영은 자동차 수리공장을 할 때 안면 익힌 광업 관련 고위인사를 찾아가서 아무 데나 군수산업체에 줄 좀 대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소개받은 곳이 홀동광산이었다.

무기원료가 되는 광물을 캐내는 곳이니 군수산업체에 해당되었다. 정주영은 가족을 이끌고 황해도 홀동광산으로 이주했고, 징용 대상자인 두 아우를 홀동광산 운송업체의 하청업자인 자신의 사무실에 근무시켰다. 두 아우의 강제징용을 면제받기 위해서 생각지도 않은 사업을 하게 된 것이었다.

장남에게는 아우들을 어버이의 입장에서 보호할 의무가 있었고, 그 의무는 정주영이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일이었다.


홀동광산의 정주영은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 광산 관리책임자가 사사건건 정주영을 물고늘어지며 괴롭혔다.

너무 많이 실었느니 너무 적게 실었느니, 금덩이같은 광석을 질질 흘리고 다닌다느니, 얼토당토 않는 온갖 생트집을 다 잡아서 사람을 고달프게 했다.

관리책임자는 광업소장의 학교 동기생으로서 정주영을 밀어내고 다른 사람을 들어앉히려는 속셈이 있는 인물이었다.

정주영은 두 아우들 때문에도 참아야만 했다. 성격이 불 같은 그가 관리책임자로부터 온갖 수모를 다 당하며 2년이나 버텼다면 아우들에 대한 배려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참는 데도 한도가 있었다.

2년 남짓 버티던 정주영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관리책임자가 들여앉히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운송사업 하청계약권을 넘겼다. 계약보증금 3만 원과 하청계약 인도금 2만 원을 받는 조건이었다.

5만 원을 받아들고 가족과 함께 홀동광산을 떠나 서울로 돌아온 것이 1945년 5월이었다.


정주영이 타고난 천우신조의 대운을 설명하자면 홀동광산의 그후를 얘기해야 한다.

정주영이 홀동광산을 떠나온지 3개월만에 8‧15광복이 되었고, 곧바로 삼팔선 이북을 소련군이 점령했다. 소련군은 홀동광산을 폐광 처분하고 거기서 일하던 일본인을 모두 시베리아로 끌고 갔다.

정주영이 거기 그대로 버티고 있었다면 5만 원의 재산도 날아가고 자신은 소련군에 의해 시베리아로 끌려갔을 일이었다.

정주영은 창씨개명을 할 때 본관인 ‘하동’의 일본음 ‘가도오’를 성으로 썼기 때문에 소련군이 보면 영락없는 일본인인 것이다.


1946년 초 정주영은, 미 군정청이 일제 당시 일본인의 재산이었던 적산을 불하할 때 서울 중구 초동 106번지 일대의 땅 2백 평을 불하받았다.

그 해 4월 그 자리에 ‘현대자동차공업사’의 간판을 걸고 자동차 수리공장을 시작했다.

개업 2개월 뒤, 맏아들이 일등농사꾼이 된 모습을 보지는 못 했지만 상공업자로서의 확실한 장래성은 확인한 아버지가 별세했다.


자동차 수리공장의 이름을 ‘현대’라고 정한 것은 그 이름이 웬지 좋아서였다. 오늘날 현대그룹의 상호는 현대자동차공업사에서 비롯되었다.

현대자동차공업사는 처음 1년동안 미군 병기창의 사소한 일꺼리를 청부받아서 했다.

1년이 지난 뒤에는 일제 고물자동차를 용도에 따라 개조하는 일을 했다. 1.5톤 트럭의 중간을 이어붙여서 2.5톤 트럭으로 개조한다거나 휘발유차를 목탄차나 카바이드차로 개조하는 일을 주로 했다.

자동차가 늘어나면서 자동차 수리업의 수요도 급증했다. 현대자동차공업사는 날로 번창해서 창업 1주년이 된 때에는 종업원의 수가 80명에 이르렀다.

종업원의 야유회가 있는 날이면 정주영의 아내 변중석은 물론이고 인영의 아내, 순영의 아내, 김영주에게 출가한 누이동생 희영이까지 야유회 현장에 동원이 되었다. 그 여자들의 남 챙겨먹이는 손이 하나같이 커서 현대자동차공업사 야유회의 음식은 언제나 푸짐했다.


현대건설의 모태인 ‘현대토건사’가 출범한 것은 1947년 5월 25일이었다.

당시 자동차 수리공장의 일거리 대부분이 관청이나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견적 넣고 수금하느라고 관청과 미군부대를 드나들던 중에 정주영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자동차 수리업을 하는 자신의 수금액은 많아야 3~40만 원인데 토건업자들은 한번에 1천만 원씩 수금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니, 자동차 수리업이나 토건업이나 힘들기는 마찬가진데, 내 수금액은 3~40만 원이고 토건업자들 수금액은 몇백만 원에서 천만 원까지, 이건 너무 불공평하잖아.”


공업사로 돌아온 정주영은 매제 김영주와 친구 오인보를 불러놓고 의논을 했다.


“우리도 토건업을 해야겠어.”

“자동차 수리공장이 잘 되고 있는데 무슨 소리요?”


토건업을 하겠다는 정주영의 주장에 다들 반대였다.


“견적 넣고 일 따내서 수리하고 돈 받기는 자동차 수리나 토건업이나 다 똑 같은데 수금액이 그렇게 차이가 나다니 말이나 돼? 토건업이 뭐가 어렵다고 그래? 나도 고려대학교, 보성전문학교 시절에 교사 신축공사할 때 막노동 해봐서 토건업이 뭔지 잘 알아. 못 할 거 뭐 있어.”

“공사장에서 막노동한 경험을 가지고 어떻게 토건업을 안다고 할 수가 있소?”

“건설업이건 토건업이건 그거 별 거 아니야. 왜 다들 해보지도 않고 안된다고만 그래? ‘반드시 된다’는 확신 90프로에 ‘되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 10프로를 보태면 100프로가 되잖아. 100프로 되는 일인데 왜 안된다고 야단이야. 해. 현대자동차공업사 간판 옆에 간판 하나 더 달면 돼.”


정주영은 공업학교 교사 출신 한 사람을 기술자로 영입하고 기능공 10명을 모집했다. 그리고 현대자동차공업사 간판 옆에 ‘현대토건사’ 간판을 달았다.

당시 한국의 토건업계는 15개의 일류업체가 큼직한 일거리를 대부분 차지하고 나머지 부스러기 일감을 놓고 3천여 개의 군소업체들이 치열한 수주경쟁으로 나눠먹고 있었다. 군소업체의 끄트머리에 줄을 선 현대토건사가 제대로 된 실적을 올릴 리 없었다. 현대토건사의 사무실을 광화문 동아일보 옆 평화신문사 빌딩으로 옮기고나서야 비로소 미군부대의 일거리를 조금씩 따낼 수 있었다.


1950년 1월, 정부의 건설행정 정비작업에 발맞추기 위해 현대자동차공업사와 현대토건을 합병한 ‘현대건설주식회사’를 설립했다.


“건설업은 공사 따내기가 어렵지, 일만 하면 이익이 많이 남아서 해볼만한 일이걸랑.”


정주영은 인생의 승부를 건설업에 걸어보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런데 때를 맞춘 듯이 6‧25전쟁이 터져버렸다.

정주영이 병석의 모친과 20명이 넘는 가족을 두고 피난을 떠난 것은 동아일보 외신부 기자인 아우 인영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기자 정인영은 주한 외교관 취재기사를 많이 썼을 뿐만 아니라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지식인이기 때문에 공산당 치하에서는 안전하기 어렵다는 것이 그를 아끼는 형 정주영의 판단이었다.

일본유학까지 한 똑똑한 아우를 지켜야 한다. 정주영에게 있어 바로 밑의 똑똑한 아우 하나를 지키는 것은 그 아래의 여러 아우들을 동시에 지키는 일이었다.

아버지는 장남을 키우고 장남은 차남을 키우고 차남은 삼남을 키운다, 장남은 아버지를 대신한다...

정주영, 그는 곧 가부장이었다.


---


막다른 피난지 부산에 닿았을 때 정주영 인영 형제는 서울을 떠나올 때 입은 단벌 노동복에 무일푼이었다.

차고 있던 손목시계를 잡히려고 전당포를 찾았는데 값을 너무 야박하게 불러서 도로 나와버렸다.

그저 막막한 심정일 뿐이었다. 너나 없이 다들 피난민인데 일자리가 있을 리도 없었다.

부자와 권력자는 위급한 상황이 닥치면 언제라도 떠나기 위해 밀항선을 주문해놓았고 가난한 사람들은 절망의 정점에서 맥을 놓았다.


“채애궈언 삽니다아, 지가증권 삽니다. 왜정 때 채권도 받습니다아, 채권 삽니다. 지가증권 삽니다.”


가죽가방 든 채권장수가 하릴없이 거리를 배회하는 정주영의 곁을 지나가고 있었다.


“인영아, 봐라, 세상 막다른 골목에서도 경제는 살아있다.”


경제가 살아있은들 돈이 없는 사람에겐 허상이요 죽은 경제였다. 정주영에게는 당장 피난살이를 이겨낼 일거리가 필요했다. 배고픔도 배고픔이지만 타고나기를 워낙 부지런하게 타고났는데 일거리 없어 빈둥거리고 있자니 미칠 지경이었다.


“아니, 이게 뭐야?”


전신주에 붙은 광고였다.


“인영아, 이 광고 좀 봐라. 미군사령부에서 통역을 모집한단다.”


인영은 일본 미자키 영어학교 고등과를 졸업했고 일본 아오야마학원 영어과를 중퇴했다. 그리고 현직이 외신부 기자인 것이다. 정인영이 전시의 피난지에서 구할 수 있는 최상의 일거리가 미군의 영어통역이었다.

형제는 당장 서면의 초읍에 있는 미군사령부를 찾아갔다. 볼 일이 없는 정주영은 밖에서 기다리고 볼 일 있는 인영은 사무실에 들어가서 통역 심사를 받았다. 동아일보 외신부 기자라는 점이 심사장교의 호감을 샀다.


“부대 안에서도 통역을 필요로 하는 부서가 여러 곳이 있는데 미스터 정이 특별히 원하는 부서가 있다면 말하세요.”


정인영은 순간 형을 떠올렸다.

형은 곧 아버지이자 바로 자신이었다. 당연히 형에게도 일거리를 제공할 수 있는 부서여야 하는 것이다. 토건업자인 형을 위해서 인영은 공병대를 선택했다.


“좋습니다. 공병대의 통역을 맡으세요. 지금 바로 공병대 맥칼리스터 중위를 찾아가세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한국전 참전을 결의한 이후로 서방 16개국 참전군들이 부산항에 속속 들어오고 있을 때였다.

유엔군이 움직이는 곳이면 어디든 토건공사가 선행되었고, 유엔군의 지휘권을 미군이 쥐고 있었기 때문에 미군부대의 토건공사는 곧 유엔군의 토목공사였다.

부산 서면 초읍리의 미군 하야리아부대는 속속 입항하는 유엔군의 숙소를 마련하기 위해 끊임없이 토건공사 발주를 해야 했다.


“미스터 정.”

“예, 중위님.”


맥칼리스터 공병중위가 통역원 정인영을 불렀다.


“나가서 건설업자를 찾아서 데리고 오시오.”

“건설업자라고 하셨습니까?”

“그렇소. 건설업자요.”


건설업자라면 형 정주영이 아닌가. 신바람나게 달려나간 정인영은 한 시간도 안 돼서 형 정주영을 맥칼리스터 공병중위 앞으로 인도했다.

맥칼리스터가 정주영을 면접했다.


“당신은 어떤 일을 할 수 있소?”

“시키시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유엔군이 진주해서 하룻밤 자고 다음날이면 전방으로 떠나는 일이 매일 반복됩니다. 임시숙소가 무한정으로 필요합니다. 유엔군의 임시숙소를 지을 수 있습니까?”

“지을 수 있습니다. 녜, 짓습니다.”

“좋습니다. 지금 당장 공사를 시작하세요.”


옆에서 통역을 하던 정인영의 입이 절로 벌어졌다.

정주영은 곧바로 서면으로 나가서 공사장 인부 구인광고를 전신주에 붙였다.

부산항에는 매일같이 미군부대의 건설물량이 쏟아져 들어왔고, 정주영 등의 건설업자는 그 산더미같은 건설물량으로 유엔군의 임시숙소를 지었다.

정주영이 처음 맡은 공사는 휴교 중인 학교 교실을 소독하고 벽면을 카세인 페인트로 바른 뒤에 널빤지로 바닥을 깔아 숙소로 개조하는 일이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이었다. 하루 3시간을 자면 많이 자는 날이었다. 아우 인영도 낮에 통역일을 마치면 공사현장에 와서 일을 거들었다.

한 달동안 그렇게 일을 하고나니 커다란 가방에 돈이 가득이었다.


미군부대의 건설공사는 전선을 따라다니면서 하는 것이었다. 유엔군이 전투에 이겨서 전선이 북쪽에 형성되면 미군 공병대와 건설업자도 따라올라가서 유엔군의 임시숙소를 지어야 했다.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고 유엔군이 수도 서울을 탈환하면서 전선도 북으로 올라갔고 정주영은 미군 공병 선발대를 따라 서울로 올라왔다. 장기영이 한국은행 선발대로 올라가던 그 즈음이었다.


커다란 돈가방을 들고 서울 용산의 유엔군사령부에 도착한 정주영 인영 형제는 곧바로 어머니와 20여 명의 가족이 기다리는 집을 향해 달렸다.

보리쌀 반 가마니와 쌀 두 말로 그 많은 식구가 3개월을 어떻게 버텼을까, 그러나 이제 걱정 없다! 그리웠던 집의 대문을 밀고 뛰어들면서 정주영은 소리쳤다.


“이거 봐라, 돈이다! 돈, 돈 벌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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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Ⅴ 전쟁이 끝난 뒤에 (1) +2 19.05.12 170 3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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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Ⅳ 전장과 시장의 빅 브러더(Big Brother)들 (9) +1 19.05.10 116 3 19쪽
32 Ⅳ 전장과 시장의 빅 브러더(Big Brother)들 (8) +4 19.05.10 148 4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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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Ⅲ 전쟁과 경제 (9) +1 19.05.06 147 3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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