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자의시대 2 (51)
18. 승전연.
노술도아의 마법진에 빛이 들어오며 한 무리의 유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노술도아의 궁전엔 여러 개의 고정된 마법진이 있었는데 지금 이곳은 무쏘의뿔 집무실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옥상에 있는 마법진이었다. 노술도아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위치였다. 노술도아의 한가운데가 다른 곳보다 언덕처럼 솟아나 있었는데 그 위에 왕궁이 있어서 더 높게 보였고 왕궁에서 보면 사방으로 노술도아의 건물들이 내려다보였다. 시야가 닿는 끝쪽으로 하늘에 닿을 정도로 높은 거대한 성벽이 둘러쳐져 있었는데 이삐팟원들은 마계에 사냥 때문에 오긴 했지만, 방송으로 노술도아를 보긴 했지만 직접 와서 보니 그 규모와 분위기에 압도되고 말았다.
“대단하군.”
내색을 안 하려고 해도 감탄이 절로 나오는 풍광이었다.
무쏘의뿔이 앞장서고 그 뒤로 일행들이 따랐는데 무쏘의뿔이 마법진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이미 좌우로 20명씩 40명의 근위대가 늘어서 있다가 뒤를 따랐다. 그 외에도 마족 흑마법사가 4명. 시종 8명이 따랐고 이들이 집무실로 가는 동안 인원이 더 늘어났다.
이삐팟원들이 알고 있던 무쏘의뿔이 아니었던 것이다. 적어도 마계에서 무쏘의뿔은 왕국의 국왕 이상이었다. 이삐팟원들은 일개 시민···.
크고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된 거대한 문이 열렸다. 이 문 앞을 지키는 병사들만 10명이었다.
이곳은 집무실로 원래 노술도아의 주인인 대마왕 컬리큠이 쓰던 곳이다 보니 크기나 시설이 엄청난 곳이다. 무쏘의뿔이 식물의친구 스킬을 연습하기 위해 한쪽을 치운 것 말고는 대마왕 컬리큠이 쓰던 그대로의 상태였다. 느낌상 한참을 걸어가니 앞쪽에 몇 사람이 앉아 있다가 일어섰다.
“개삐???”
암살자로 대양의바람 길드내 암살단인 ‘검은바람’을 이끌던 미스트가 이삐를 알아보고 놀라 소리쳤다. 이삐는 원래 유명했지만, 암살자들 사이에선 특히 ‘개삐’로 불렸다. 같은 암살자들도 꺼리는 존재.
이삐가 인상을 구기며 미스트를 째려봤다. 이곳엔 지난 뼈다귀해장국집 회식 이후 푹 자고 이제 막 접속한 까치산호랭이 길드와 퍼펙트 길드 운영진들이 모여 있었다. 전쟁이 끝난 지 며칠 안 됐고 운영진들 간 회의를 하기 위해 모여 있었던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반갑습니다.”
패자의시대를 하는 사람들치고 이삐팟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특히 거대 길드의 운영진급이라면 같이 사냥한 적이 있거나 한 다리 걸쳐 아는 사이라고 봐야 했다. 지금 이곳의 운영진들 대부분이 이삐팟과 사냥한 적이 있었다.
헤임달이 먼저 나와 이삐팟원들에게 악수를 청했다. 헤임달은 무쏘의뿔로부터 대충 귓속말로 전후 사정을 전해 들은 상태였고 다른 이들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이삐가 억지 미소를 지으며 헤임달과 악수를 했다. 유명한 유저중 한 명인 헤임달 역시 초빙받아 사냥을 도와주었던 적이 많았는데 그때 이삐팟과 함께 한 적이 있었다. 다만, 이삐와 성격이 안 맞아 단 한 번뿐이긴 했다. 이삐가 가장 싫어하는 스타일이 헤임달 같은 사람이고, 헤임달 역시 가장 싫어하는 스타일이 이삐같은 스타일이었다.
무쏘의뿔이 자리에 앉자 다른 유저들도 모두 자리에 앉았다. 14명의 유저가 앉아 있었고 80명의 근위대원이 곳곳에 배치돼 있었다. 마족 흑마법사가 13명. 시종은 2명이었는데 이들이 모두 엔피씨들이다 보니 중요한 회의를 한다고 해도 정보를 누설하지는 않았다. 이삐는 습관적으로 방의 구조와 인원을 파악했다. 이곳에 있는 무쏘의뿔을 암살하기 힘들 것으로 생각했다. 물론 암살하지는 않지만, 암살자로서 그런 생각을 해본 것이다.
“앞으로 이삐가족 분들은 나와 파티로 움직이게 될 겁니다.”
무쏘의뿔의 말에 놀라는 유저들이 있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삐가족 길드원들이 헤임달에게 인사를 했다. 헤임달은 이들에 대한 명성을 너무 잘 알고 있어 이들이 정말로 아군이 되어 천계와 싸운다면 엄청난 도움이 될 것으로 예상했다.
“좋은 분들과 함께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소개와 인사는 나중에 각자 알아서 하고, 오늘 안건을 소개해 주겠나?”
“지난 전투 때 물의를 일으킨 유저들 모두를 길드 추방했습니다. 길드 운영진들과 전쟁 참여한 유저들의 만장일치로 진행되었고 부족한 유저들을 채우기 위해 새롭게 500렙 이상의 유저들을 대상으로 곧 지원자를 받을 예정입니다.”
“혹시, 인원을 더 늘릴 생각인가?”
“지원자를 보고 결정하려고 합니다만, 최대로 늘릴 생각입니다.”
“사람이 많아지면 관리가 더 어려울 텐데.”
“그래서 이번 지원자들은 확실한 규율을 적용하려고 합니다.”
무쏘의뿔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쏘의뿔이 마계의 병력을 지휘했지만 유저들은 마계의 주민이 아니었고 인간으로 각 길드에 소속된 경우라 이래라저래라 할 권한은 없었다.
이번 전투에서 두 명의 신을 죽였지만 마계쪽도 잃은 피해가 커서 어떻게든 전력을 보충할 필요가 있었다.
“그럼 이번 승전연은 추방자들 제외하고 참석하기로 해야겠군.”
“모두 말씀입니까?”
지난 승전연 때는 무쏘의뿔만 참석했기 때문에 다들 의외라고 생각했다.
“대마왕 밧소뎀이 이번엔 모두 참석하라고 하더군. 아마도 공을 세운 유저들을 크게 치하하려고 그러는 것 같네.”
무쏘의뿔의 말에 이삐팟원들을 제외하고 다들 웅성거렸다. 이게 논란이 될 수 있는 게. 지난 천계의 사신으로 온 시헤로메를 죽였을 때 밧소뎀은 당시 참여자에게 ‘쥴레도르의 친구’라는 호칭을 주었다. 이 호칭 덕에 마계의 페널티가 사라졌고 모든 상점과 마을, 도시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게 되었고 그 뒤 첫 번째 전쟁을 마치고 승전연에서 모든 전쟁 참여자를 대마왕 밧소뎀이 마계 마을과 상점을 이용할 수 있는 특혜를 주었다. 초대했다는 것은 그에 따른 보상이 있다는 얘기였다. 게임의 특성상 퀘스트나 이런 초대의 경우 어떤 형태로든 보상이 있기 마련이었다.
이미 천이백여 명의 유저들을 전투 시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고 추방해 버렸는데 이들은 보상에 제외될 터였고 그 반발이 예상되었다.
“일단 가봅시다. 이런 일을 예상하지 못했지만, 우리가 감내해야겠지 않겠습니까?”
이미 엎질러진 물. 두 길드의 운영진들은 마음이 착잡했다.
즉시 모든 유저들에게 비상연락망이 가동되었다. 원래 접속을 못 할 상황의 유저들마저 대마왕 밧소뎀이 초청한 승전연에 참석하기 위해 부랴부랴 접속했다. 반나절 만에 4,800명의 유저들이 접속해 노술도아의 시티포탈을 타고 쥴레도르로 이동했다. 원래 마계엔 시티포탈이 없었다. 시티포탈은 인간계인 소마대륙에 설치되어 있었지만, 마계는 그동안 3개의 나라가 서로 적대적인 관계로 설정돼 있어서 시티포탈 자체가 없었던 것인데 마계가 통일된 이후 시티포탈이 생긴 것이다. 현재 마계의 3대 도시인 쥴레도르, 노술도아, 쟌코비아만 시티 포탈이 가동하고 있었다.
마계의 실질적인 수도인 쥴레도르의 시티포탈이 끊임없이 빛에 휩싸였다. 엔피씨들인 주민들이 시티포탈을 사용할 리가 없었고 전쟁에 참여한 4,800명의 유저들이 조를 이뤄 속속 시티포탈을 이용해 쥴레도르로 이동해오고 있었다. 이들은 먼저 도착한 순서대로 줄을 맞춰 섰다. 쥴레도르에 처음 오는 이들이 많았는데 승전연이 벌어지는 오늘이 있기 전부터 쥴레도르는 축제로 인해 한껏 분위기가 올라간 상태였다. 도시 곳곳에 마계의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징식물들로 채워지고 있었다. 게다가 시도 때도 없이 폭죽이 터지고 있었는데 도시 전체에 무질서하게 폭죽이 쏘아졌다. 마치 주민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쏘는 것처럼 중구난방 끊임이 없었다. 하지만 일반인이 상점에서 사 쏠 정도로 작은 불꽃은 아니었다.
시티포탈이 설치된 곳은 어느 곳이든 도시의 중심. 주로 광장 쪽에 설치돼 있었다. 마계 도시인 쥴레도르도 예외가 아니어서 시티포탈에서 나온 유저들이 광장에 늘어서게 되었는데 광장은 축제를 즐기려는 마족 주민들로 가득했다. 특히, 전쟁에 참여한 인간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순식간에 소문이 나 여기저기서 마족 주민들이 몰려들었고 이들은 그 험한 얼굴로 웃으며 반겼다. 일부 주민들은 유저들에게 빨간색 술을 뿌렸는데 마치 피 같았다. 소마 대륙이었다면 꽃과 색종이를 뿌렸겠지만, 마계는 소마 대륙처럼 화려한 꽃이 없었고, 꽃 자체가 드물었다. 게다가 육식이 주식이라 피를 상징하는 빨간색 술을 뿌린 것이다. 실제 피는 금세 굳어 사용할 수 없으니까 피를 상징하는 술을 뿌린 것인데 포도주와 다른 훨씬 붉었고 향이 진했다. 유저들은 모두 피 같은 술을 뒤집어썼지만, 이들은 가만히 있어야만 했다. 지금 마족 주민들은 전쟁 영웅인 인간들을 축하해주는 것이었다.
“이거 맛있는데요?”
얼굴에 뿌려진 술을 혓바닥을 내밀어 핥아 먹어본 유저들이 이구동성 하는 말이었다.
“마계의 술이 소마 대륙보다 나아요. 향이 진한데? 도수도 쎈 것 같고···.”
저마다 얼굴에 맞은 술을 맛보며 술 품평을 했다.
이내 모든 유저들이 도착하자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제일 먼저 도착한 앞쪽의 유저들은 이미 전신이 다 술에 젖어서 마치 붉은색 옷을 입은듯해 보였다. 유저들은 모두 전쟁에 참전한 그 상태 그대로 완전히 무장한 상태였다. 마계는 대마왕을 만나는 자리라고 해서 무장을 해제하지 않았다. 그것이 이곳의 예법이었다.
7명씩 짝을 이뤄 길게 늘어선 인간들의 행군이 마계 제 일의 도시 쥴레도르 중앙도로를 행진했다. 패자의시대 오픈 이래 최초로 벌어지는 일이었다. 인간이 마계의 수도를···.
노술도아는 무쏘의뿔이 주인이라 최근에 유저들이 돌아다니며 구석구석 공개되었지만 쥴레도르는 이번이 사실상 처음이었다. 헤임달을 비롯한 몇 명이 시헤로메를 죽이기 위해 왔을 때는 왕궁으로 곧바로 간 것이라. 이런 도시의 모습을 담지 못했다. 그렇다고 무쏘의뿔이 이런 모습을 동영상으로 저장해 공개하지 않았고.
왕궁으로 가는 길은 곧은 길이었지만 꽤 멀었다. 마족 주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이들은 왕궁으로 향했다. 소마 대륙에서도 받아보지 못한 환영을 마계에서 받으니 모두 감회가 새로웠다.
쥴레도르의 왕궁은 노술도아의 왕궁과 별반 차이가 나지 않았다. 같은 대마왕이 살던 곳이었기 때문인데 분위기나 시설이 좀 달랐지만, 규모는 차이가 없었다. 그래서 유저들은 압도되거나 하진 않았다. 여기까지 오는 길에 마족 주민들의 환영이 쥴레도르에 도착한 하이라이트 같은 느낌을 다들 받았다.
유저들이 왕궁의 대연회장에 도착했다. 대연회장의 한정된 크기로 인해 전쟁에 참여한 마족 간부 병사들과 마왕들만 있었다. 그 수가 일만여 명. 유저들이 끼자 만오천 명이 참여한 승전연이되었다.
다양한 음식들은 인간계에서 볼 수 없는 모습이었지만 맛은 아주 훌륭했다. 그 외에 술은 모두 피 같은 붉은 색이었는데 종류에 따라 도수와 향이 달랐다.
대마왕 밧소뎀이 자리에서 일어나 술잔을 높이 들어 올렸다.
“우리의 친구. 우정이 영원토록 함께하리라.”
일만여 명의 마족 병사들이 대마왕 밧소뎀의 말을 따라 외쳤다. 장내가 떠나갈듯한 소리에 귀가 먹먹할 정도였는데 왠지 손발이 오그라짐을 느끼는 유저들이었다. 곧이어 모든 유저들의 메시지창에 새로운 메시지들이 주르륵 올라갔다.
대마왕 밧소뎀이 승전연에 참여한 유저들 모두를 상대로 공적을 치하하며 자신이 다스리는 왕국의 주민과 같은 지위를 부여했다. 이는 그전에 받은 혜택. 마을과 도시를 이용하고 상점을 이용하며 마족들의 유저들에 대한 적대적인 행위의 금지. 즉 친구가 된 것이었다면. 이번은 사실상 영주권을 준 것이었다. 마계의 어느 곳에서든 집을 사고 거주할 수 있었다. 상점을 열어 장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마족과 같은 동등한 지위. 상점을 이용할 수 있는 권리 하나로 유저들이 물건을 사서 소마 대륙의 경매장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얻었는데 이제는 소마 대륙의 물품을 마족들에게 팔 수 있을뿐더러 같이 사냥을 하고 서로 부탁을 하거나 들어줄 수 있는 상태. 즉, 마계의 퀘스트를 받을 수도 있게 된 것이다. 소마 대륙에서 게임을 할 때처럼 수많은 다양한 퀘스트를 할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마계의 퀘스트가 유저들한테 열린 것은 혁명과 같은 대사건이라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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