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자의시대 2 (61)
22. 신의 대리인.
“따다다다다다다···.”
라면왕의 회심의 일격이 모두 방패에 막히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홀 안에 메아리치는 소리는 팟원들의 절망과 같았다.
“토르 형님, 역시 힐러 없이 던전 보스를 공략하는 게 아니었어요.”
“미안하구나···.”
“일진짱 형님이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잖아요?”
“죄송합니다. 형님. 제가 괜한 말을···.”
파카누 산맥의 북쪽 면은 한창 개척되고 있는 남쪽 면과 다른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수배자 토르 일행은 상대적으로 유저들이 드문 파카누 산맥 북쪽 면에서 사냥했는데 3일 전 우연히 발견한 던전을 공략 중이었다. 모험가나 탐험가가 없는 파티가 새로운 던전을 발견하는 일 자체가 아주 드문 일이었기에 토르 팟에서 고랩 사냥터인 파카누 산맥에서 신규 던전을 발견한 것은 아주 놀라운 일이었다. 중요한 건, 힐러가 없는 토르 팟이 발견한 던전을 공략하기 위해 나선 것인데. 워낙 파티원들이 고렙에 대단한 실력자들이다 보니 물약빨로 어찌어찌 던전 공략을 진행했고 마지막 보스방에서 이들은 좌절하고 있었다. 벌써 세 번째 보스 공략이 실패로 끝난 것이다.
던전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마을의 입구에서 토르가 부활하자 이미 먼저 와있던 도나토가 반겼다.
“오래 버티셨네요. 하하.”
“뭐하러 기다리냐?”
“다른 형님들은 마을 안쪽에 있습니다.”
“그래, 가자.”
산속의 작은 마을은 얼마 전에 토르 팟에 의해 점령당해 주민들이 모두 죽어 아무도 없었다. 마을에 들른 최초의 유저에게 마을을 빼앗긴 것이다. 파카누 산맥의 북쪽 면은 남쪽 면과 다르게 국가나 도시가 없었기 때문에 누가 사는지 마을이 있는지 아무도 몰랐다. 그러다 보니 이곳처럼 토르 파티 때문에 주민들이 몰살되어도 아무도 몰랐다.
마을 안쪽 식당 안은 이미 술판이 벌어져 있었지만, 토르가 들어서자 다들 자리에서 일어섰다.
토르가 자리에 앉자마자 한마디 했다.
“너희들 말대로 엘리야를 부르자. 힐러없이 던전 공략은 무리다.”
파티원들이 다들 서로 얼굴을 보며 활짝 웃었다.
“그런데 엘리야가 우리 요청을 응할까?”
“그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토르가 메시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인 메시아와 사제인 엘리야는 현으로도 알고 지내는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패자의시대 게임의 가장 유명한 힐러라면 단연 원탑으로 ‘엘리야’를 꼽았다. 전투형 사제로 ‘세크메트’가 가장 유명하다면 순수 힐러형 사제로는 ‘엘리야’가 있었다.
엘리야는 ‘힐러사랑’길드의 길드마스터로 힐러사랑 길드는 오직 힐러들만 가입할 수 있는 길드로 유명했다. 보통 힐러라고 하면 사제들이 많았는데 패자의시대는 사제가 아니라도 직업에 따라 힐링이 가능한 캐릭들이 있었다. 마법사도 힐링할 수 있었고, 자연술사, 정령사도 힐링이 가능했다. 그 외에도 다양한 직업들이 있었는데, 다만 전문 사제보다 힐량이 떨어져 사제가 아닌 다른 직업의 경우 힐러로 게임을 하는 경우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
힐러사랑 길드는 따라서 사제 외에도 다른 직업을 가진 유저들이 있었지만 90% 이상이 사제였다.
흔히 하는 얘기로 힐러사랑 길드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면 공성전이든 전쟁이든 승리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럼, 메시아, 라면왕, 도나토가 엘리야를 데리고 오도록 해. 엘리야가 오는 대로 다시 던전을 공략하도록 하자.”
이틀 뒤.
마을 입구 부활 장소에 빛이 뿜어지더니 4명의 모습이 드러났다. 주변에는 토르를 비롯한 토르 팟원들이 모두 서서 이들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어서 오십시오.”
로브로 전신을 숨기고 있던 유저가 모자를 벗으며 말했다.
“다들 오랜만이네요. 모두 건강해 보이는군요.”
패자의시대 최고의 힐러로 불리는 엘리야가 메시아의 이동 마법진에서 토르 팟원들에 인사했다.
이들은 모두 구면이었다. 유명 고렙 유저들중 과거에 엘리야와 파티 사냥 안 해본 사람이 없었고.
토르가 대양의바람 길드 시절. 정의연합과의 전쟁시 엘리야의 힐러사랑 길드는 대양의바람 길드 편에서 전쟁에 참여했었다. 그 바람에 과거에 엘리야와 같이 파티 사냥을 안 했어도 지금의 토르 팟의 유저들은 엘리야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현 토르팟의 유저들은 모두 대양의바람 길드의 간부 출신이었다.
“괜히 우리 때문에 위험해지지 않을까 걱정이군.”
“괜한 걱정 하지 마세요. 지금 유저들은 모두 천마대전에 빠져서 토르 길마님에겐 관심도 없어요.”
“하하 그런가···.”
토르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한때는 최강의 길드 길드장으로 유저 최초의 국왕이었으며 항상 화제를 일으켰던 토르가 일 년도 안 돼 유저들에게 잊힌 인물이 되었다.
“천마대전 애들이 고렙 사제들도 모집한다고 하던데요?”
토르팟 천랑의 질문에 엘리야도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맞아요. 그래서 우리 길드의 힐러들이 여러 명 길탈했어요.”
“그런 일이···.”
현재 마계에서 천마대전을 치르고 있는 유저들은 까치산호랭이 길드와 퍼펙트 길드가 주축이었다. 일반 유저들은 천마대전에 참여하려면 필연적으로 두 길드 중 한 군데에 가입해야 했는데 그러기 위해선 현재 길드를 탈퇴해야만 했다. 게다가 힐러사랑 길드는 정의연합이었던 두 길드의 적이었던 대양의바람 길드 편에서 정의연합과 싸웠었다. 전쟁 막판에 갈라시아 왕국 카상가 시를 쳐들어오는 정의연합에 맞서 대규모 사제들이 카상가시 성벽을 마법으로 방어했는데 그때 힐러사랑 길드와 토르가 믿는 시헤로메 교단의 사제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었다.
당시 전쟁에서 승리한 정의연합 측에서는 대양의바람 길드에 협력한 길드들에 대해서도 징벌로 길드 해체를 요구했는데 힐러사랑 길드는 전쟁 막판에 대양의바람 길드 편에 섰었기 때문에 길드 해체를 피하기는 했었다. 다만 정의연합에 있다가 배신하고 대양의바람 길드에 섰던 길드들은 크고 작고를 떠나 모두 해체당했다.
전쟁에서 패한 자들의 모임 같은 무거운 분위기가 형성되자 무휼이 분위기 반전을 위해 팟원들을 다그쳤다.
“최고의 힐러까지 모셨으니 빨리 던전으로 갑시다. 오늘은 바리타를 꼭 잡아 죽입시다.”
“당연하지요. 지금까지 바리타가 세서 우리가 실패한 게 아니라 힐러가 없었기 때문인데. 엘리야 님이 오셨으니 다 함께 고고···.”
다들 두말할 필요 없이 던전으로 향했다. 이들이 있는 마을이 던전과 제일 가까운 마을이기는 했으나 파카누 북쪽 면은 마을의 수가 워낙 적어서 던전에 가려면 한참 걸렸다.
“정비는 던전에 가서 하죠.”
“뭐여, 뛰어가게?”
메시아가 가방에서 예쁘게 생긴 병을 하나 꺼냈다.
“진작에 좀 쓰지.”
“이거 비싼 거다.”
마법사들이 이동 마법진을 그릴 때 사용되는 아이템은 거리에 비례해 가격이 비쌌다. 또한, 좌표가 공개된 마을이나 도시, 공공건물 같은 곳은 상대적으로 비용이 쌌지만 한두 번밖에 가보지 않은 곳. 사냥터에 대한 좌표 이동은 높은 숙련도와 함께 비싼 값의 아이템이 필요해서 숙련도를 갖췄어도 그냥 뛰어가는 게 일반적이었다.
메시아가 팟원들을 한쪽에 모아놓고 주변으로 마법진을 그렸다. 마법진을 완성하고 주문을 외우자 마법진이 빛을 뿜었고 빛이 사그라졌을 때 이들은 ‘바리타의 던전’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기사 바리타’는 고대 소마 대륙의 북쪽을 지배했던 ‘소운’왕국의 ‘기사장’이었다. 기사들의 우두머리인 기사장 바리타는 소운 왕국의 3인 기사장 중 하나로 국왕의 사랑과 백성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은 충신으로 소운 왕국의 한 지역을 관리하던 영주이기도 했는데 소운 왕국의 국왕이 병으로 갑자기 죽으면서 첫째 아들 ‘봉광’이 왕위를 이어받았고 젊은 국왕 봉광이 주지육림에 빠져 국정을 돌보지 않자 그나마 인품이 좋은 국왕의 동생인 ‘동광’을 왕위로 앉히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으나 나머지 두 명의 기사장을 앞세운 봉광의 세력에 패하고 파카누 산맥에 숨어들어 농성을 벌이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한 인물이었다. 소운 왕국은 얼마 뒤 기상이변으로 전 국토가 얼어붙고 눈보라가 사시사철 불어 멸망하게 되는데 기상이변을 피해 상대적으로 남쪽인 파카누 산맥 북쪽 면에 자리 잡은 소운 왕국의 백성들이 기사장 바리타의 저주로 소운 왕국이 멸망했다는 이야기가 지금까지 전설처럼 내려왔다.
후에 헤임달 팟이 성물 퀘스트를 하기 위해 건넜던 파카누 산맥 너머 그린랜드가 바로 소운 왕국의 땅이었다.
“자, 바리타 방까지 직행한다.”
이미 세 차례나 시도한 던전이다보니 잡몹을 잡기보다는 보스몹에 집중했다. 던전 보스인 바리타를 잡음으로써 이 던전을 졸업하고픈 마음이라 다들 바리타가 있는 방까지 그냥 내달렸다. 길도 잘 알겠다 최고의 힐러까지 모셔왔기 때문에 다들 발걸음이 가벼웠다. 원래 보스 레이드 할 때는 보스 방 앞에서 재정비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이들은 그런 것도 없었다. 그동안 힐러 없이 바리타와 싸우다 죽은 게 마음 상했는지 누가 말할 것도 없이 보스 방으로 뛰어들어서 마치 경쟁하듯 바리타에게 일격을 날렸다.
바리타는 넓은 홀 안에서 자신의 부하들을 훈련하고 있었다. 산속으로 숨어든 바리타가 훗날을 기약하며 자신을 따르던 부하들을 더 강하게 만들 생각으로 훈련에 매진한 것인데 그 수가 60여 명이나 되었다. 토르팟이 바리타를 잡으려다 실패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바리타의 부하들로 이들 모두 정예 기사들이었다. 힐러가 없는 상태에서 이 정예 부하들과 싸우며 만신창이가 되었고 마지막에 쌩쌩한 기사장 바리타를 맞아 힘에 부쳤던 것이다.
토르와 무휼의 검을 바리타가 방패와 검으로 쳐내며 막아냈다. 너무 갑작스러운 공격이라 바리타의 부하들이 보고도 막지 못했는데 바리타는 보스몹 답게 두 유저의 합격을 여유 있게 막아냈다.
“애송이들이 또 왔느냐? 너희는 아직 멀었다.”
바리타가 검을 옆으로 휘둘렀는데 태풍 같은 바람이 토르와 무휼을 홀의 벽까지 날려버렸다. 그 뒤 바리타가 한걸음 뒤로 빠졌고 바리타의 부하들이 함성을 지르며 토르 팟원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8서클의 마법사 메시아가 냉기 마법으로 바닥을 얼리고 눈보라를 일으켜 바리타의 부하들을 얼려 달려오는 속도를 늦췄다. 그때를 맞춰 라면왕이 화살 비를 퍼부어 메시아의 냉기 마법으로 방어력이 약해진 기사들에게 치명상을 입혔다. 뒤이어 다른 팟원들이 가세해 바리타의 부하들과 격전을 벌였다.
힐러가 없을 때는 몸조심하며 소극적으로 싸웠는데 이젠 뒤에 힐러가 있다고 다들 생각하니 얼마 전의 싸움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다른 모습을 보였다. 폭풍이 몰아치듯 바리타의 부하들을 몰아붙였는데 지친이가 아무도 없었다. 전투의 처음처럼 팟원들의 생명력이 누구 하나 빠진 사람이 없었다. 기사장 바리타가 뒤에서 이 모습을 보다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부하들을 돕기 위해 나섰다. 이 역시 앞선 싸움과 다른 경향을 보인 것인데 지금 같은 상황에서 자신이 위험하다고 생각한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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