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자의시대 2 (72)
‘저 바다를 건너면 파니타가 있다는 거지···.’
“와이번 타고 한번 갔다 와.”
검은 하늘에 둥근달 하나 떠 있었다. 달빛 아래 무쏘의뿔이 바다를 보고 있었는데 언제 왔는지 뒤에서 이삐가 말을 걸었다.
“나 혼자 있을 때는 주둥이 닥치고 있어.”
“별거 아닌 걸 걱정하니 딱해서 그렇다.”
이삐의 퀘스트와 약속으로 인해 무쏘의뿔은 이삐팟을 항상 데리고 다녀야 했다.
다른 사람들은 우루,두루와 같이 있었는데 이삐는 무쏘의뿔을 따라 바닷가까지 온 것이다.
무쏘의뿔은 올두바이에게 이런저런 얘기를 듣고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자 땅끝까지 날아와 바다 앞에 섰다.
무쏘의뿔은 대꾸하지 않고 바다 끝쪽으로 시선을 두었다.
울포 족의 지역 끝은 바다였다. 이 바다를 건너며 대마왕 수라시가 사는 파니타가 나온다고 한다.
파니타는 섬인데 어지간한 국가 수준의 크기였기에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는 섬이었다.
대마왕 수라시가 죽은 것은 이미 오래전이었는데 그 뒤로 파니타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려진 바 없었다. 무쏘의뿔은 울포 족의 올두바이에게 이런저런 정보를 들었다. 하지만 올두바이도 파니타를 가 본 적이 없었고 올두바이가 아는 정보는 대마왕 수라시가 살아 있던 때의 것이라 너무 오래되어 지금은 어떻게 변했는지 알지 못했다.
무쏘의뿔의 침략 전쟁은 사실상 여기서 끝이 난 셈이었다.
바다 건너 ‘파니타’는 섬이었고 100만 대군이 바다를 건너는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거대 몬스터들을 빼앗더라도 노술도아로 보낼 방법도 없었다. 섬인 파니타를 정복하는 것은 이래저래 영양가가 없었다.
무쏘의뿔이 한참 동안 바다를 보다가 몸을 돌리자 이삐가 다시 물었다.
“이제 집으로 가는 거냐?”
무쏘의뿔은 대꾸 없이 우루,두루쪽으로 향했다. 우루,두루 앞에는 암살자 5인방과 콩코노메. 이삐팟이 서 있었다. 이들은 본의 아니게 함께 다니게 된 것인데 우루,두루가 쌍두 와이번이라 모두가 함께 다닐 수 있었다.
우루,두루가 수직으로 상승했다. 앞으로 가면 바다를 건널 수 있었지만 우루,두루는 방향을 틀었다. 일행이 있는 울포 족의 성으로.
무쏘의뿔이 울포 족의 성에 임시로 거처하는 방에 들어섰을 때 유저단 운영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늦은 시간이기 때문에 회의가 있다면 내일 아침에 했어야 했다. 그런데 운영진들이 있다는 것은 뭔가 중요한 일이 있었던 것이다.
“원래 내일 아침에 보고 드리려고 했는데 우루,두루를 타고 외출하셨다고 하길래 혹시나 하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귓속말이라도 하지 그랬나.”
무쏘의뿔을 찾아온 유저단 운영진은 까치산호랭이 길드 운영진과 퍼펙트 길드 운영진들이었다.
모두가 자리에 앉자 헤임달이 다시 말했다.
“어르신도 아시죠? 댕기동자라고.”
헤임달이 마법사 유저 한 명을 소개해 주었다. 댕기동자는 까치산호랭이 길드 운영진은 아니었다.
“오랜만이오.”
‘댕기동자’는 마법사 유저로 대양의바람 길드와 싸우던 정의 연합 시절. 정의 연합에 속해 있던 무쏘의뿔에 대한 정보를 유출해 무쏘의뿔이 배신당해 죽어 감옥에 갇히게 한 유저였다. 자기 뜻과 다르게 그런 결과를 가져왔고 댕기동자는 반성하고 사과해 용서받았었다. 지금은 까치산호랭이 길드 길드원인데 유저로선 드문 8서클의 백마법사였다.
무쏘의뿔은 댕기동자를 알고 있었다.
“이렇게 얘기하게 돼서 영광입니다.”
“무슨 용건이라도?”
댕기동자가 헤임달을 쳐다보자 헤임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댕기동자가 입을 열었다.
“아시겠지만, 저희 사촌형이 해체당한 좋은친구들 길마 메쉬포테토입니다. 좀 전에 사촌 형한테 들은 얘긴데 토르가 과거에 같이 했던 유저들을 모아서 천계 편에 서서 곧 마계로 넘어온다고 합니다.”
무쏘의뿔이 댕기동자의 말을 듣고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헤임달이 부연 설명을 했다.
“토르가 우도벨로부터 무언가 지시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 뒤로 유저들을 모으고 있는데 대양의바람 때 함께 했던 운영진, 간부들 외에 동맹 길드 운영진들도 섭외했다고 합니다.”
“토르는 수배자 아니었나?”
“그게···. 토르가 신의 도움을 받아 모두 수배령을 벗었다고 하네요.”
뭐가 뭔지 몰라도 무쏘의뿔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토르는 원래 시헤로메를 복권하며 ‘시헤로메의 축복을 받은 자’라는 호칭을 하고 있었다. 원래 신과 천계와 가깝다고 할 수 있었다.
따라서 우도벨로부터 무언가 받아냈을 거란 것을 예상할 수 있었다.
“토르 패거리를 걱정하는 건가?”
“아무래도 대양의바람 주축 멤버와 해체당한 대형 길드들의 주축이 뭉치면 사실상 대양의바람 동맹과 정의 연합의 싸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마계와 천계의 대리전이 되겠죠.”
대양의바람 동맹은 패자의시대 게임의 가장 크고 센 길드들의 동맹이었다. 그에 반해 정의 연합은 중소길드와 일반 유저들의 연합이었고 결과는 정의 연합이 이기면서 대양의바람 동맹이 모두 길드 해체를 당했고 거기에 속해 있던 유저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졌는데 그 길드 쪽 운영진이나 간부들은 일반 유저들이 배척하는 바람에 특별히 어디에 소속되지 못하고 죽어 지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랭커들이라 장비나, 렙, 실력이 최상위였다. 그들이 다시 뭉친다면 어떤 면에서 신들과 싸우는 것보다 더 힘들었다. 유저들은 엔피씨가 아니었으니까.
“게임이 문 닫기 전까지 그들은 우리의 적이군. 그래서 그들이 어떻게 한다고 그러지?”
“조만간에 신들과 함께 마계로 쳐들어오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확실히 힘든 싸움이 되겠네.”
무쏘의뿔도 인정하는 사실에 다들 시무룩해졌다. 고렙 유저들로 8천 명을 이끌고 있었지만 대양의바람 동맹 주축 세력들이 모인다면 그들은 고렙 중의 고렙인데다 최소 수백 명. 많게는 수천 명이 될 터였다. 수적으로 마계 연합이 더 많을지 몰라도 질적으로 천계 연합이 더 나을 수 있었다.
“그래도 비판텐 시에서 싸우던 때보다 더 낫지 않은가? 다들 기운 내지그래.”
“아, 물론입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풀이 죽은 모습이었다. 정의 연합이 대양의바람을 이긴 것은 세크메트가 가지고 있던 성물 때문이었는데 성물도 빼앗긴 상황.
“헤임달 쫄았나?”
“니가 낄 데가 아니야.”
이삐의 비아냥에 미스트가 나무랐다. 이삐는 무쏘의뿔과의 계약으로 함께 다니고 있지만, 그것이 유저들 운영진 회의에서 발언권을 갖지는 않았다. 주제넘게 나서긴 한 것인데 원래 그런 성격이라 다른 이들은 딱히 뭐라고 하지 않았다.
“그렇게 보였나?”
“응. 평소의 니가 아니야. 토르가 그렇게 겁나나?”
헤임달이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토르와 함께 대양의바람 길드를 만들었던 헤임달이었고 같이 수많은 전투를 벌였던. 그래서 패자의시대 최강의 길드로 만든 장본인이었으며 얼마 전 그 대양의바람 길드와 전쟁을 벌였던 헤임달이었다. 또다시 토르와 싸우게 된 데 대해 생각이 많았다.
“의외군. 너희가 불리한 게 하나도 없는데 싸워보지 않고 쫄아버리다니···.”
이삐의 말에 다들 화가 났지만, 딱히 반박도 하지 못했다. 자신들이 요즘 마계에서 렙업하고 장비 맞추고 꿀빨았지만 그래 봐야 대양의바람 이나 해체당한 대형 길드들의 간부급들에 비하면 이류라고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패자의시대 초창기 때부터 이름을 떨쳤던 유저들이 뭉쳐 적이 된단다. 자신감이 떨어지고 기가 죽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들은 무쏘의뿔이 아니었고 이삐가 아니었다.
자신감이고 뭐고를 떠나 모든 상황을 그냥 받아들이고 결과를 생각하지도 않으며 이것저것 재지도 않는 무쏘의뿔도 아니며. 상대가 누구든 어떤 상황이든 기죽지 않고 머리 숙이지 않으며 항상 싸울 준비가 되어 있는 이삐가 아니었다.
“바다를 건너실 생각입니까?
”
헤임달이 화제를 돌려 무쏘의뿔에게 파니타에 갈지를 물었다. 유저들 모두 바다 건너 섬이 있었고 그곳이 지금은 죽어 없지만, 대마왕 수라시의 영토 파니타라는 것을 알았다.
“바다를 건너는 것은 무리고 일단 노술도아로 갔다가 다른 쪽 외곽지역을 돌아볼 생각이네.”
“그럼 저희는 철수 준비를 하겠습니다.”
“그러게 일단 사냥터로 가 있게나.”
27. 대자연의 신 이리오스.
노인이 접속했을 때 바닷속이었다. 당장 숨을 쉴 수가 없었는데 사방 방향을 알 수 없었다. 노인은 일부러 숨을 내쉬었다. 기포가 올라가는 방향으로 힘차게 발을 차며 올라가는데 수면과 가까워지자 주변이 점점 눈에 들어왔다. 아직은 물속이었는데 곳곳에 검은색 전신 타이즈를 입은 남자들이 수면으로 올라가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보였다. 노인은 문득 접속하기 전에 연구원들에게서 들은 말이 생각났다.
“이것은 일종의 실험입니다. 어르신께서 하실 일은 접속하시거든 주변의 모든 사람을 상대로 싸워 이기시면 됩니다. 상대도 어르신을 적으로 인식할 것이기 때문에 서로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가상현실 게임을 하신다 생각하시고 어떤 상황이 펼쳐지든 당황하지 마시고 싸워 이기시면 됩니다. 이 실험은 가상현실을 이용한 인공 신체에 대한 적응력을 실험하기 위한 것이니 마지막 생존자는 자신이 될 거란 생각으로 열심히 해주시면 됩니다.”
노인이 연구원의 말이 떠오른 순간 이미 가장 가까이에 있는 남자에게 헤엄쳐 다가갔다. 남자는 물속에 적응을 못 하고 호흡곤란을 겪고 있었다. 수면으로 올라가려고 애쓰고 있었는데 수면으로 올라가기 전에 이미 숨이 다한 모습이었다. 노인은 손쉽게 남자의 허리를 두 다리로 감고 양팔로 남자의 목을 감싸 꺾어 버렸다. 이 남자도 접속했을 때 물속인 것을 알았을 텐데 노인처럼 생각하고 움직이지 못했다. 결국, 노인에게 죽임을 당했고 노인은 인근 또 다른 남자에게 향했다. 노인은 마치 인어처럼 자연스럽게 수중에서 헤엄을 쳤다. 그리고 또 호흡곤란을 겪는 남자의 목을 꺾고 주변을 둘러봤다. 좀 전까지 보이지 않던 검은 타이즈를 입은 남자들이 많이 보였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물속에서 다들 접속하고 있는 것이다. 노인은 일단 빠르게 헤엄쳐 수면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수면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크게 호흡을 한 뒤 다시 물속으로 잠수했다.
다른 남자들과 다르게 호흡을 성공한 노인은 최고의 몸 상태였다. 아직 물 위로 올라가지 못해 호흡곤란을 겪는 남자들과 달랐다. 노인은 마치 사냥하듯 수면으로 올라가려는 남자들을 계속 사냥했다. 10명 이상을 죽였을 때. 노인은 갑자기 떨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물속에서 모든 물이 사라지고 아래로 떨어진 노인은 바닥에 착지했을 때 자신의 주변에 가득한 나무들과 초록색 잎사귀들을 보았다. 어느새 주변이 숲으로 변한 것이다. 노인은 갑자기 바뀐 환경에 일단 몸을 숙이며 주변을 살폈다. 호흡까지 죽이며 주변의 모습을 눈에 담았고 얼마 안 가 나무 밑 작은 식물들의 잎사귀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노인은 가까이에 있는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져 있는 가느다란 마른 나뭇가지 하나를 조심스럽게 꺾어 한 뼘 크기로 만든 뒤 오른손에 쥐고 슬금슬금 이동했다. 잡목 잎 사이로 사람의 모습이 보였고 그쪽으로 다가가는 노인을 향해 고개를 돌린 순간 노인이 왼손에 쥐고 있던 흙을 뿌렸다. 그와 동시에 몸을 날려 상대의 목에 오른손에 쥐고 있던 나뭇가지를 찔러넣었다. 그와 동시에 입을 막고 목을 꺾었다. 무성한 잡목들로 인해 시야가 가려 사방을 관찰하기 어려운 노인은 주변의 나무를 타고 올랐다. 이 숲의 나무들은 아주 큰 열대의 원시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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