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자의시대 2 (78)
“우도벨, 이리오스로부터 연락은 받았나?”
“내가 모두에게 소집령을 내렸을 때. 이리오스는 마계로 넘어간 뒤였어. 며칠 안으로 이리오스가 다리를 놓아 줄 거로 믿어.”
“크흐흐흐. 이리오스 녀석이 우리 부탁을 들어줄 줄은 몰랐는데···.”
“이리오스는 욕심이 많고 속마음이 검은 놈이야. 데리디아를 얻을 수 있다면 이그드라실을 배신할 정도로 말이야.”
“다들 말 잘했어. 그러니 마계로 내려가는 순간 브로이만 너는 데리디아를 먼저 찾아.”
“웃기는군. 데리디아가 어디에 있는 줄 알고 마계를 뒤진단 말이야?”
“데리디아를 넘겨주면 이리오스를 우리 편으로 끌어 올 수 있어. 그럼 우리 일이 아주 쉬워지지.”
“됐어. 이리오스가 도움이 많이 될 놈이란 건 알지만 나 혼자 데리디아를 찾으러 가긴 싫어.”
“그럼 누가 데리디아를 찾으러 갈 거지?”
젠라츠의 말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마계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고 사방에 온통 적밖에 없는 곳에서 어디 있는지 모르는 대상을 찾으라는 건 누가 봐도 미친 짓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이곳은 노르위 지역에 세워진 우도벨의 임시 막사였다. 마계로 쳐들어갈 신들이 자신의 병사들과 마족과의 전쟁을 원하는 천족들 일부가 이곳에 모여 있었다.
이리오스가 마계에서 천계를 잇는 다리를 놓으러 갔고 그 다리가 놓일 곳이 바로 노르위 지역이었다. 그 다리가 완성되면 노르위 지역을 뒤덮고 있는 병사들이 마계로 넘어가는 것이다.
이제 이그드라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고. 우도벨을 지지하는 신들이 모두 한꺼번에 내려감으로써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지금껏 천계가 마계와 전쟁을 하면서 8명의 신이 병력을 이끌고 한 번에 내려간 예가 없었다.
오래전 마계를 최초로 통일한 대마왕 키개람 때도 이그드라실의 거부로 인해 최대 5명의 신이 고작이었다. 그러다 보니 다들 이번 출진에 승리를 확신했다.
“젠라츠, 네가 데리디아를 찾으러 갈 것이 아니라면 마계를 차지하고 난 뒤에 데리디아를 찾아도 충분할 것 같은데?”
다들 우다르바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서 마계를 돌아다닌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젠라츠가 다들 얼굴을 보니 절대로 데리디아를 찾으러 갈 것 같지 않자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좋아. 밧소뎀을 처리하고 난 뒤에 데리디아를 찾도록 하지.”
우도벨과 젠라츠는 데리디아를 한시라도 빨리 탈취해서 이리오스를 같은 편으로 끌어오길 기대했다. 하지만 다른 신들이 맘같이 움직여주지 않자 내심 마음이 상했다.
“그건 그렇고 다른 신들의 방해는 없네?”
“있을 수가 없지. 우리의 수가 적은 게 아니니까 말이야.”
“아마, 어딘가에서 우릴 지켜보고 있을걸?”
“겁쟁이 자식들.”
“앞에선 온갖 착한 척 다하고 정의로운 척하면서 뒤로는 계산기 두드리는데 열심인 녀석들.”
“이니라훈, 너무 그렇게 보지 마. 게네들이 손익계산을 해서 우리가 천계를 뒤엎어도 적극적으로 막지 않을 테니까. 흐흐흐.”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이제 각자 막사로 돌아가 출병준비들 해.”
우도벨, 젠라츠, 휘스리힘만 남고 다들 막사로 돌아갔다. 해가 지고 있어 다들 쉬어야 하는 시간이었다.
“이리오스를 화나게 하면 우리에게 득이 될 게 없을 거야.”
“당연하지. 데리디아를 약속대로 꼭 넘겨주면 돼.”
“젠, 너는 데리디아를 이리오스에게 줄 수 있을 거로 생각하니?”
“뭐가 문제인데?”
“나도 데리디아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우리에게 이그드라실이 있고 데리디아가 마계에서 그 역할을 한다고 하면 데리디아는 우리가 모두 가도 어쩌지 못할 거란 거야.”
젠라츠가 휘스리힘의 말에 말문이 막히자 지금껏 가만히 있던 우도벨이 나섰다.
“힘, 우리가 이리오스에게 데리디아를 주겠다고 했지만, 언제까지 주겠다는 말은 안 했어. 그리고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데리디아가 더 큰 가치가 있다면 이리오스와 재협상을 할 거야.”
“이리오스가 싫어할 텐데?”
“데리디아를 얻기 위해 발을 들인 이상 협상은 우리가 유리해.”
어둠이 물러나는 이른 새벽의 시간.
노르위 지역이 굉음과 함께 크게 흔들렸다.
“쿠쿠쿠쿠쿠 쿠쿠쿠쿠쿠쿠쿠쿠..........”
얼마나 크게 땅이 흔들렸는지 노르위 지역의 주변 높은 산들의 꼭대기에 쌓여있는 눈들마저 눈사태로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노르위 지역에 모여 있는 동요하는 일반 병사들을 신들이 진정시켰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징조는 마계에 내려가 있는 이리오스가 천계와 마계를 잇는 다리를 놓는 중이란 것을.
이리오스가 말로만 듣던 아디베흐 산에 도착했을 때 그 거대한 크기에 압도되고 말았다. 자신이 며칠 동안 걸어왔던 곳이 아디베흐 산 아래였다는 것을 알았을 때 맥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이제야 산의 정상이 보였는데 그것은 자신의 시력으로 볼 수 있는 최고의 높이였고 실제 산 정상은 그보다 더 높이 있었다. 마치 지평선이 기울어진 것 같은 며칠이었다.
이리오스는 아디베흐 산을 살펴보며 지난 두 차례의 전쟁이 치러진 곳도 보았다. 그리고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한 곳에 서서 한숨을 돌렸다.
아디베흐 산 아래쪽 땅이 조금 올라온 언덕. 그 한가운데 서서 이리오스가 씨앗 한 개를 바닥에 놓았다. 지난 전쟁이 벌어졌던 곳이 산 중턱 정도 된다면 이곳은 완전 아래쪽으로 산이란 생각보단 그냥 산 밑 평지에 가까웠다.
이그드라실 씨앗. 이리오스가 주문을 외우자 씨앗이 발아되며 폭발적으로 뻗어 나갔다. 땅속과 하늘. 양쪽으로 뻗어 나가는 줄기는 똑바르지 않고 45도 정도의 기울기로 하늘로 뻗어 나갔다.
무쏘의뿔이 사용하는 ‘식물의 친구’ 스킬은 엘프 여왕으로부터 받은 것이니 사실상 엘프의 창조자 어머니 신인 이리오스가 식물의 친구 스킬의 원조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원조답게 숙련도는 만숙.
무쏘의뿔과는 비교할 수 없는 증식 속도로 이그드라실의 씨앗은 뻗어 나갔다. 줄기가 높이 오를수록 굵기도 함께 굵어졌고 지름이 수십 미터에 다다랐을 때 증식이 멈추었다.
‘이로써, 이그드라실과는 안녕이군.’
이그드라실과 친구로 지내는 이리오스. 친구인 이리오스에게 이그드라실은 자신의 씨앗을 몇 개 주었는데 그중 하나가 전대의 엘프 여왕 은나우스가 엘프 마을의 이공간에 심었고 그 후손 이그드라실을 탐낸 고르키가 엘프 마을을 침략해 쑥대밭으로 만든 일이 있었다. 은나우스 여왕은 후손 이그드라실을 보호하고 고르키를 막기 위해 후손 이그드라실이 있는 이공간으로 넘어온 고르키를 상대로 이공간을 봉인해 다 같이 갇혀 영원히 빠져나갈 수 없게 했는데 ‘리치’였던 고르키가 자신의 육체를 폭파하며 다시 소마 대륙에서 부활했지만 은나우스 여왕은 후손 이그드라실과 함께 영원히 봉인된 일이 있었다. 그리고 이리오스가 가지고 있던 또 다른 이그드라실의 씨앗을 마계와 천계를 잇는 다리로 지금 사용한 것이다. 이그드라실은 자신의 씨앗을 침략 전쟁을 위한 도구로 사용한 것에 대해 분노로 이리오스와 절교할 것이란 것을 이리오스는 예상했다.
그런데도 이렇게 하는 이유는 이그드라실과 친구로 지내며 자신이 얻을 수 있는 것 보다. 우도벨을 도와줌으로써 데리디아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더 이득이라 보았기 때문이었다.
“내 역할은 여기까지야.”
이리오스가 하늘로 뻗은 증식된 이그드라실 씨앗을 따라 걸어 올라갔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밀물처럼 내려오는 천족 병사들과 천사병들을 마주쳤다. 서로가 가는 길이 전혀 달랐다.
“이리오스, 잘 해냈군.”
“약속을 꼭 지켜.”
“물론이지.”
연결 다리 주변의 하늘에서 비처럼 기둥이 떨어져 내렸다. 신의 기둥이 땅에 박히며 굉음과 함께 큰 진동을 일으켰다. 이리오스는 일체의 관심 없이 위로 위로 걸어갔다. 이 연결 다리의 끝은 천계다. 아름다운 노르위.
우도벨이 막사 밖으로 나가자 앞쪽 호수와 강의 물이 빠지며 잎이 무성한 가지들이 바닥에서 솟구쳐 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병사들이 서둘러 자리를 피했고 지름 1.5km는 될 듯한 나뭇잎 무성한 가지들이 노르위 지역에 모습을 드러냈다. 원래 있었던 호수와 강의 물이 밑 빠진 독에 물이 빠지듯 다 새 나가고 그 자리를 거대한 나무의 윗부분이 차지한 것이다.
“모두 진격하라.”
우도벨이 노르위 지역 전체에 울려 퍼지는 명령을 내리자 사방에서 가까운 곳에 있던 병사들부터 나무를 밟고 내려갔다. 거대한 증식된 이그드라실 씨앗의 연결 다리는 너무 커서 충분히 대군이 기울어진 다리처럼 타고 내려갈 수 있는 크기였다. 이들이 어느 정도 다리를 타고 내려갔을 때 짙은 안개가 시야를 가렸다. 시선을 아래로 두면 겨우 나무 바닥이 보이는 터라 조심히 따라 내려갔는데 얼마 동안 그렇게 내려가자 시야가 밝아지며 마계의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천계에서 마계로 넘어온 것이다.
마계의 위가 천계가 아니다. 당연히 천계의 아래가 마계인 것은 아니었다. 두 차원은 위아래의 위치가 아니었고 증식된 이그드라실 씨앗의 다리는 서로 다른 두 차원을 연결한 것이다. 위와 아래로 느껴졌지만···.
우도벨을 비롯한 신들이 마계의 전경이 보이자마자 신의 기둥을 소환했다. 신의 기둥은 연결 다리 주변으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땅에 박혔다. 그리고 ‘생산과 기술의 신 타타노드.’
타타노드가 주문과 함께 전신에서 폭발하듯 빛의 가루를 뿌렸다. 타타노드의 병사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하늘을 날아 신의 기둥 쪽으로 가며 타타노드가 흩뿌린 빛의 가루를 끌어당겼다. 엄청난 양의 빛의 가루들은 타타노드를 따라온 병사들에 의해 가루가 선이 되고 선이 면이 되면서 벽을 만들었다. 신의 기둥과 또 다른 기둥을 이으며 벽은 성벽이 되어갔다. 성벽은 형태를 갖추고 세밀해지며 두터워졌다. 이 과정이 엄청난 속도로 진행되었는데 원래 천계는 성 이란 게 없었다. 침략당해본 역사가 없는 데다 서로 전쟁을 벌인 적도 없다. 도시 자체도 없었고 대형 건축물은 모두 신전이었다. 그 신전들 역시 대부분이 신들의 공중섬에 있었고 지상에는 신전이 많지 않았다. 게다가 성벽이나 담, 울타리 같은 구획을 정하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그런데, 타타노드의 병사들은 숙련자들처럼 빠르게 크고 튼튼한 성벽을 지어나갔다.
빛의 가루를 뿜어대던 타타노드가 성벽이 형태를 갖추자 가루가 아닌 빛의 선을 사방으로 쏘았다. 수천 가닥의 빛의 선들이 마치 천을 짜는 것처럼 움직이며 성벽을 완성해나갔다. 그사이 수많은 천사병들과 천족 병사들이 끊임없이 증식된 이드드라실 씨앗의 연결 다리를 통해 지상으로 내려왔다. 절대 중단되지 않을 것 같은 병력의 이동도 타타노드에 의해 성벽이 완성될 때쯤 끝이 났다. 완성된 성벽은 전체가 한 덩어리로 흰색의 경질유리처럼 단단해 보였으며 빛을 반사해 예쁘게 빛났다. 흰색의 유리성벽. 마계에 천계의 거점이 생긴 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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