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자의시대 2 (80)
“우리는 여기서 아군을 기다리도록 하자.”
무쏘의뿔이 보고를 받았듯이 대마왕 밧소뎀도 보고를 받았을 것이다. 무쏘의뿔은 자신의 휘하에 있는 부하들에게 소집령을 내렸다. 그들은 무쏘의뿔이 있는 곳으로 모일 것이다. 대마왕 밧소뎀의 명령과 상관없이 무쏘의뿔을 따른다.
5일 뒤.
사냥터에서 8천 명의 유저들이 도착했다. 노술도아에 있는 무쏘의뿔의 병사들은 걸어오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유저들은 거리상 노술도아보다 더 멀었지만, 탈것을 타고 왔기에 일찍 도착할 수 있었다.
“공성전을 치르겠는데요?”
소마 대륙에서 다들 공성전이라면 수없이 치러봤기 때문에 공성전이 낯설지 않았다. 게다가 마계의 전통적인 성들은 성벽이 엄청나게 높았는데 백색 거성은 마계의 성들에 비하면 아주 낮은 편이었고 소마 대륙의 성과 비교하면 조금 더 높은 정도. 충분히 싸울 만하다는 생각들을 했다.
아직은 백색 거성과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는데 혹시라도 신들의 공격을 받을까 봐 걱정해서였다. 그런데 일부 유저들이 호기심으로 백색 거성 가까이 접근해 구경하다 오곤 했다.
“지난번 전투 때와는 아무래도 다른 방식으로 싸워야겠습니다.”
유저들을 이끄는 간부진급 회의가 임시 막사에서 열렸다.
“공성전이라면 아무래도 수성 쪽이 유리하지 않습니까? 게다가 마법 성으로 보입니다.”
소마 대륙의 공성전에서 마법으로 성벽과 성문을 강화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 경우 수성하는 쪽이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원래 수성하는 쪽이 유리한데 마법으로 강화하면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성을 지었다는 건 지킨다는 뜻일까요? 아니면, 성을 거점으로 앞으로 적극적으로 싸움에 임하겠다는 뜻일까요?”
“천계와 연결 다리를 놓은 것으로 보아 거점을 세우고 적극적으로 싸우겠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저쪽도 병력은 백만여. 그리고 8명의 신이 참전한 만큼 이번 전쟁은 절대 쉽지 않을 듯 보입니다.”
자유롭게 이야기가 오고 가던 중 모두의 시선이 무쏘의뿔에게 향했다.
무쏘의뿔은 시선을 의식한 듯 입을 열었다.
“역대 천마대전이래 8명의 신이 참전한 경우는 처음이라고 하네. 저렇게 성을 지은 것도 처음이고. 다들 예상하지만 보통 성이 아닐 것이야. 그에 비해 우리는 공성 장비도 없고 거대 몬스터도 없어서 직접 성을 공략하긴 힘들다고 보이네. 성을 포위하고 장기전을 대비해야 할 거야.”
무쏘의뿔은 신중한 모습이었다. 헤임달은 이런 무쏘의뿔을 충분히 예상했다. 무쏘의뿔은 자신이 데리고 있는 엔피씨들을 쉽게 죽이지 않는 스타일. 수적 우위에 있다고 해서 마구 돌격하진 않는다. 상대가 성안에서 지키려고 하면 확실한 방법이 없는 한 장기전을 치를 것으로 생각했다.
“적들이 성을 지키기 위해 수성전을 펼치진 않을 것으로 봅니다. 저희가 포위만 하고 기다리면 적들이 스스로 성 밖으로 나올 겁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저들은 침략자야. 도시를 함락시킨 것도 아니고 이런 불모지에 성을 지은 것은 아마도 마족들의 성향을 보고 판단한 거겠지. 하지만 지금 마족을 움직이는 건 우리 인간이야. 천족과 인간. 신과 인간의 싸움이 된 것이지. 이를 아직 이해 못 한 것으로 보이네.”
무쏘의뿔의 설명은 이랬다.
저 정도의 병력이라면 신이 8명이나 참전하고 병력이 백만.
굳이 아디베흐 산 아래쪽에 성을 지을 필요 없이 곧바로 마계 3대 대도시를 공략했어도 성공했을 것이다. 마족들은 공중 병력이 부족했지만, 천계는 공중 병력이 강했다. 마계 3대 대도시는 워낙 높은 성벽과 지리적인 이점으로 인해 마계 역사상 무쏘의뿔 말고는 침공해서 함락한 예가 없었다. 만약, 천계가 3대 도시 중 한 곳을 함락해버렸다면 천계는 당연히 그럴 능력이 있었고. 마계는 속수무책. 그 도시를 재탈환할 수 없을 것이고 3대 도시를 함락당함으로써 오는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상 마계침공의 성공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 곳에 성을 지어 버림으로써 스스로 기회를 날린 것이고. 마계 입장에선 한숨 돌린 것이 된 것이다.
“시간을 끌수록 이 싸움은 우리에게 유리해.”
이 한마디로 모든 게 정리되어 버렸다.
그로부터 3일이 지나 무쏘의뿔에게 충성서약을 한 상급 마왕들이 이끄는 병력이 속속 도착했다. 노술도아에서 오는 병력은 약 보름이 걸릴 테고 가장 늦게 도착할 것으로 예상하였다.
백색 거성을 마족 병사들이 에워싸기 시작했다. 백색 거성은 작은 성이 아니었다. 백만의 대군이 머무는 성이었고 그 중심에 천계를 연결하는 다리가 놓여 있었다. 중도시 크기의 성을 마족 병사들이 에워쌌는데 사방으로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마치 바다 위에 떠 있는 조각배처럼 백색 거성은 에워싸여졌다.
백색 거성은 성문이 없었기 때문에 어디가 정면이라고 특정할 수는 없었는데 마족 대군의 핵심 세력이 아디베흐 산을 기준으로 아래쪽. 남쪽에 자리 잡으면서 저절로 백색 거성의 정면은 남쪽이 되었다.
대마왕 밧소뎀이 도착하자 인사를 드리기 위해 무쏘의뿔이 나섰다. 무쏘의뿔은 충성서약을 한 4명의 상급 마왕과 8천 유저들의 지휘부와 측근들과 함께였다. 대마왕 밧소뎀이 있는 막사로 향하는 길은 그가 데리고 온 수백만의 병사들 사이를 가로 질러야했다. 보통 대마왕이 전쟁에 나서게 되면 건물 한 채를 통째로 이동시킨다. 피라밋 형태의 이 건물은 이동 마법진이 있었기 때문에 그걸 바로 이용해도 됐지만 무쏘의뿔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멀리 삼각형의 건물이 보였고 그곳으로 가는 길이 곧게 뻗어 있었다. 길 양옆으로 정예 마족 병사들이 오른손에 쥔 무기를 바닥에 짚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수 킬로미터는 족히 될듯한 병사들의 길이었다.
무쏘의뿔이 굳이 병사들 사이로 걸어가는 이유는 일종의 시위이자 과시였다. 마계 역사상 상급 마왕이 대마왕에게 충성을 맹세한 적이 없었다. 그런 상급 마왕 4명을 거느리고 걸어감으로써 병사들에게 존경과 경외심을 높여 사기를 최대한 끌어내기 위함이었다. 또한, 대마왕 밧소뎀 주변에 있는 다른 상급 마왕들에 대한 경고이기도 했다.
마계에서 상급 마왕 4명을 거느린다는 것은 사실상 대마왕과 같은 지위였다. 그런 무쏘의뿔이 밧소뎀에게 무릎을 꿇고 복종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다른 상급 마왕들로 하여금 밧소뎀에게 허튼수작하지 말라는 경고.
무쏘의뿔이 피라밋 같은 건물의 계단을 오르며 양옆에 있는 마왕들의 뜨거운 시선을 이끌었다.
그리고 계단의 마지막 칸을 밟고 올라서자마자 무쏘의뿔을 반기기 위해 일어선 대마왕 밧소뎀의 발아래에 무릎을 꿇었다. 무쏘의뿔이 무릎을 꿇자 충성서약을 한 4명의 상급 마왕들도 무릎을 꿇었다. 밧소뎀 주변의 상급 마왕들의 얼굴이 심하게 구겨졌다. 그에 비례해 밧소뎀의 얼굴은 활짝 피었다. 밧소뎀은 여태껏 하지 않은 행동을 하는 무쏘의뿔의 의도를 파악했던 것이다.
전쟁이 길어지고 치열해지면 마족들의 사기가 떨어지고 민심이 흉흉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경우 상급 마왕들에게는 기회가 되는 것이다. 실제로 마계의 역사로 대마왕의 지위가 바뀐 때는 주로 큰 전쟁을 치르는 도중이거나 치른 이후였다.
이번 천마대전은 처음으로 8명의 신이 참전을 했다. 게다가 마계에 성까지 지었다. 아주 작심하고 나섰다는 것인데 과거의 천마대전과 다르게 아주 힘들고, 치열하고 길게 이어질 공산이 컸다. 무쏘의뿔은 이를 예상하고 선수를 친 것이다.
“폐하, 저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적들이 우리의 성지를 더럽히는 성을 짓는 동안 아무것도 모르고 내버려 둔 죄는 이 자리에서 목숨을 다해도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이옵니다. 죽여 주시옵소서.”
무쏘의뿔이 전혀 하지 않던 뻔한 연기를 했지만,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신들이 며칠 만에 뚝딱 지어 버린 성을 누가 알았으며 누가 막았겠는가. 무쏘의뿔을 벌주려 한다면 모두가 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무쏘의뿔보다 아디베흐 산과 가까운 곳을 지배하는 마왕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들도 몰랐고 이곳에 제일 먼저 도착한 이도 무쏘의뿔이었다.
“그대의 죄는 크다. 적을 막아야 하는 대장군으로서 적들이 태초의 성지에 발을 딛게 한 죄는 죽어도 용서받지 못할 정도로 크다. 하여, 짐은 그대에게 벌을 내리노라. 이번 사태와 관련 있는 모든 이들은 대장군과 함께 목숨을 저 성과 함께 하도록 하라. 그대들이 살길은 태초의 성지를 원래대로 되돌리는 것뿐이다.”
“폐하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대마왕 밧소뎀이 무쏘의뿔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어 일어나라는 시늉을 했다. 무쏘의뿔이 그 손을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서자 마족 병사들이 가지고 있던 무기들을 하늘 높이 쳐들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수백만이 터뜨리는 함성. 마족 병사들의 사기가 거대한 해일처럼 밀려가 백색 거성을 휩쓸었다. 지금 이 순간 명령만 내린다면 기쁘게 한목숨 한순간에 태워버릴 태세였다.
“어르신에게 저런 모습이 있는지 처음 알았습니다.”
같은 자리에 있는 유저들이 파티창으로 지금 상황에 관해 이야기했다.
이들이 알고 있던 무쏘의뿔은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꼼수 부리지 않는 정직한 게이머였는데···.
“나도 의외라고 생각해요.”
지금 파티원들은 모두 무쏘의뿔과 가깝다고 할 수 있는 이들이었는데 새로운 모습에 적이 놀랐다.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닐까요? 수백만을 이끌고 전쟁을 하려다 보니 이것저것 시도하는 것으로 보입니다만.”
“어쨌든 대단하네요. 이기기 위해 자신이 하기 싫은 것, 금기도 깨버리고 있으니까요.”
“뭐···. 그만큼 이번 전쟁을 어렵다고 생각하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다들 이점에 고개를 끄덕였다. 힘든 전쟁일 것으로 예상하고 미리 문제가 될 것들을 쳐내는 것으로. 사실 한창 전쟁 중인데 대마왕이 바뀌면 이처럼 난처한 일이 또 어디 있으랴···.
성 주변으로 꾸역꾸역 몰려드는 마족 병사들을 보며 신들은 서로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 마른 침을 삼켰다. 전쟁에 처음 참여하는 신도 있었고 세 번째 전쟁을 치르는 신도 있었지만 모두 이번 전쟁은 쉽지 않아 보였다. 일단 전쟁에 참여한 적군의 병력이 엄청났다. 앞의 두 번의 전쟁보다 적군이 늘어나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거대 몬스터가 별로 안 보인다는 점.
하지만, 인간들이 수가 늘었다는 것은 커다란 위협이었다.
“우도벨 우리의 목적은 이 성을 지키는 것이 아니란 것을 잘 알고 있겠지?”
“물론이지. 이곳은 저놈들과의 싸움을 위한 거점일 뿐이야. 이곳을 시작으로 우리는 마계의 대도시들을 점령할 것이고 밧소뎀을 비롯한 마왕들의 목을 모두 따는 것이니까.”
“그런데, 저곳을 뚫고 안쪽으로 진격할 수 있겠어?”
탈로스가 현실적인 문제를 지적했다.
사방 전체가 끝없이 적들로 가득했다. 아디베흐 산은 마계의 변방이라 할 수 있었다. 마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다는 것은 대마왕 밧소뎀을 죽이거나 3대 대도시를 점령하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처한 상황은 성 밖을 한 발짝도 벗어 날 수 없는. 사실상 자신들이 성안에 갇혀 있는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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