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자의시대 2 (84)
“슈피겐 부길마님 대화 가능하십니까?”
슈피겐은 퍼펙트 길드 부길마였다. 퍼펙트 길드원들과 임시 길드원들. 원래 다른 길드원이었지만 천마대전에 참여하게 되면서 임시로 길드에 들어온 유저들. 이들을 이끌고 이니라훈을 상대하기로 했었다. 하지만 이니라훈이 브로이만 쪽으로 날아가는 바람에 퍼펙트 길드원들은 헤임달이 지휘하는 군단 쪽으로 이동해 같이 휘스리힘을 치기로 한 상황.
“폭풍검님 지금 전투 중이라 대화하기는 곤란한 상황입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아주 급한 일인데, 멘솔러브 길드장님은 귓속말을 안 받으셔서 부길마님한테 연락드린 건데요?”
일반적으로 유저들은 중요한 전투나 퀘스트 중에는 귓속말을 받아도 무시했다. 특히 길드의 운영진들이라면 아예 귓속말을 차단해두기도 했는데 퍼펙트 길드의 길마인 멘솔러브가 그런 경우고 부길마인 슈피겐은 상대적으로 귓속말이 적게 오기 때문에 차단은 하지 않고 있었다.
폭풍검은 퍼펙트 길드의 중간 간부였다. 렙과 장비가 천마대전에 참여할 만큼은 아니라 비판텐시에 있는 차원의 문을 관리하는 책임자로 있었다. 일반 유저였다면 슈피겐도 귓속말을 무시했겠지만 그래도 길드의 말단 운영진이라 말을 받아주었다.
“무슨 일입니까?”
만약 슈피겐이 전투 중이었다면 귓속말을 안 받았을 테지만 지금은 이니라훈을 놓치고 휘스리힘이 있는 쪽으로 이동 중이라 이야기할 시간은 있었다.
“좀 전에 토르와 예전 동맹 길드 간부들이 단체로 차원의 문을 넘었습니다.”
“에?”
“정말입니까?”
“제가 직접 처리했으니까요.”
“몇 명이나 넘어갔습니까?”
“3,012명입니다.”
“이런 젠장.”
슈피겐은 토르가 패거리들을 이끌고 마계로 넘어갔다는데 화가 났다.
“그런데 언제 넘어갔습니까?”
“한 5분 된 것 같습니다.”
슈피겐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차원의 문과 전장은 아주 멀었다. 지금 마계로 넘어왔다고 해서 이번 전쟁에 영향을 미칠 바는 아니라고 보았다. 토르 패거리가 오기 전에 어떻게든 전쟁이 끝나지 않겠나···.
“폭풍검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혹시라도 그놈들이 되돌아오면 그때도 바로 연락 좀 주십시오.”
“아, 네. 그럼 필승하십시오.”
슈피겐은 곧장 지휘부 창에 이 사실을 알렸다.
“토르가 자기 쫄따구들하고 배신자 놈들 데리고 마계로 넘어왔다고 합니다.”
“인제 와서 뭐 어쩌려고 그러지?”
“쟁이 장기전으로 보고 도와주러 오려나 보네요.”
“하하하.”
“여기가 소마 대륙이라고 생각하나?”
유저들 지휘부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무쏘의뿔이 마계의 대장군이었기 때문에 소마 대륙에서 토르 패거리들이 수배령을 벗었다고는 해도 여기는 전혀 상황이 달랐다. 토르 패거리들은 마계에서 마을이나 도시를 이용할 수 없을뿐더러. 무쏘의뿔이 명령만 내리면 그냥 다 잡아 죽이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냥 잡아다 감옥에 평생 가둬둘 수도 있었다.
“근데 몇 명이나 넘어왔다고 하지?”
무쏘의뿔이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물었다.
“한 3,000명 된다고 합니다.”
“그럼 적은 인원이 아닌데···.”
“생각 없이 넘어오지는 않았을 겁니다. 뭔가 꿍꿍이가 있지 않을까요? 혹시, 걔들이 지금 뭐 하는지 알 수 있을까요?”
“차원의 문 너머 마을에서 쉬고 있다고 합니다.”
“바로 움직이지 않는 걸 보면 아마도 뭔가 기다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전쟁은 진행 중이었고 토르 패거리들이 움직이지 않자 유저들의 관심이 곧 흐지부지해졌다. 나중에는 어떨지 몰라도 당장 이번 전쟁에 있어 토르가 영향을 미치지는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
휘스리힘이 힘겹게 버티고 있었다. 마법 보호막으로 유저들의 파상공격을 막아내기 힘들었다.
“휘스리힘 무척 고생하네. 크크.”
흰색 날개를 활짝 펴고 하늘에 떠서 약 올리는 듯한 이니라훈에게 휘스리힘은 짜증이 났다.
신들은 모두 하늘을 날 수 있는 날개가 있었다. 날개를 접었다 폈다 하는 개념이 아니라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것으로 신들마다 날개의 형태가 달랐지만 모두 흰색의 날개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천사병들의 날개가 새의 날개 같다면 신들의 날개는 다양한 빛의 줄기들 모음 같았다.
이니라훈이 빛의 날개를 퍼덕이며 공중에 떠 있는 모습은 유저들로 하여금 혼을 빼앗을 정도로 아름답고 멋진 모습이었다.
“브로이만을 죽게 하더니 이제는 내가 죽는 꼴을 구경하려고?”
“무슨 소리. 설마하니 천계의 인기쟁이 휘스리힘을 인간들에게 죽게 하겠어? 그리고 브로이만은 내가 갔을 때 이미 회복 불가였어. 괜히 나까지 죽을 뻔했다고.”
“그래서 도망쳤다는 거네.”
“쪽팔린 게 대수냐? 내가 살고 봐야지.”
이니라훈은 신들치고 자존심이나 자긍심이 낮았다.
휘스리힘은 이니라훈에게 기대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일단 지금의 난관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인간들이 놓아주지 않았다. 지난번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짧은 시간 성장한 인간들의 능력에 속으로 놀라고 있었다.
유저들은 지난번과 다르게 수적으로도 늘었고 마계에 대한 패널티가 사라진 데다 지금 싸우는 곳이 신의 지역도 아니고 이슈미쥬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한 상태도 아니었다.
“자, 집중. 5, 6공격대 힐타임을 뺏어. 십 단위 공격대는 디버프가 끊기지 않게 해.”
“퍼버버버벙...”
휘스리힘의 마법 보호막이 유저들의 공격으로 터져 버렸다. 무쏘의뿔이 일점 공격으로 깨기는 했지만 지금 유저들은 그냥 화력으로 밀어붙여 깨버린 것이었다. 다굴에 장사는 없는 법.
휘스리힘 한 명에 8천 명의 유저들이 달려들었다. 물론 주변에 천족 병사들과 천사병들도 있었기 때문에 순수하게 휘스리힘한테 공격한 유저는 2, 3천 명 선.
“와아아아아아아아아······.”
유저들이 함성을 질렀다. 휘스리힘이 도망치지 못하게 붙잡아 둔 상태에서 마법 보호막을 깨버렸기 때문에 화력으로 휘스리힘의 힐량을 앞지르고 있었다. 누군가 훼방만 놓지 않는다면 휘스리힘을 죽일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순간.
하늘에서 어른 머리 크기의 우박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이니라훈이 흰색의 빛나는 거대한 날개를 퍼덕이고 있었는데 그 날개에서 우박이 떨어져 내렸다.
“펑”
“펑”
“펑”
이니라훈의 우박은 보통 우박이 아니었다. 땅에 떨어진 순간 우박이 폭탄처럼 터졌다.
‘냉기 폭탄.’
우박이 터지며 극저온의 냉기가 퍼져나갔고 주변에 있는 모든 사물이 얼어버렸다. 물론 유저들이 냉기 저항력으로 피해를 덜 보기도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냉기 피해를 많이 입거나 적게 입는 차이일 뿐. 냉기 피해를 본 유저들은 행동이 느려졌다. 당연히 휘스리힘에 대한 공격이 끊겼다. 그리고 유저들의 공격이 끊긴 틈을 타 휘스리힘은 회복으로 생명력을 채우고 정화 스킬로 모든 저주와 각종 디버프를 다 풀어버렸다. 자유롭게 된 것이다.
“귀여운 놈들.”
이니라훈은 휘스리힘을 죽음의 위기까지 몰고 간 유저들을 보며 한마디 했다. 휘스리힘을 중심으로 그 주변은 이니라훈의 냉기 폭탄으로 인한 광역 공격으로 유저들이 몸이 얼어 느린 동작으로 움직였다. 마음은 다급했겠지만, 몸이 따르지 않았다. 그리고 동결 효과가 풀리기 전에 이니라훈의 2차 공격이 펼쳐졌다.
이니라훈이 공중에서 몸을 회전했다. 그 회전으로 날개가 몸에 돌돌 감겼고 하나의 폭탄과 같은 모습이 되어 바닥으로 직격했다.
“꽈쾅.”
이니라훈의 몸이 바닥에 닿는 순간 핵폭탄이 터진 것 같은 대규모 얼음 폭발이 일어나며 그 일대를 모두 날려버렸다. 자살공격 같은 이 한 번의 공격으로 유저들의 진형이 무너져 버렸다. 뭉쳐 있던 수백 명이 즉사했고 폭발의 냉기 후폭풍에 휩쓸려 더 많은 유저들이 피해를 보았다. 냉기로 시작해 냉기 마법으로 이니라훈이 유저들을 끝장냈다. 소마 대륙에서 냉기 마법을 접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유저들이 화염계 마법을 많이 사용한 탓이고 몹들도 냉기 마법을 사용하는 몹은 아주 드물었다. 더러 보스 몬스터들이 냉기 마법을 사용하는 예도 있지만 이니라훈처럼 파괴적이지 않았다.
이니라훈은 냉기 마법을 연속으로 사용함으로써 연쇄효과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 바람에 더 큰 데미지를 입게 된 것이다.
“꾸르르르륵···.”
이니라훈의 자살공격 이후 사방에 흩어졌던 얼음 파편들이 한곳으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뭉치며 형상을 만들었다. 휘스리힘을 뒤에 두고 이니라훈이 모습을 갖췄다.
“어때, 계속할래?”
이니라훈은 신 치고는 특이한 놈이었는데 유저들은 전의를 상실해 있었다. 휘스리힘을 완전히 회복했고 이니라훈은 너무 강했다. 유저들은 자신들이 싸우는 상대가 신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휘스리힘은 힐러형 신이라 공격력이 떨어졌다. 방어력이 좋고 힐 능력으로 죽이기 힘들었지만 공격하는 데 큰 무리는 없었다. 그런데 이니라훈 같은 공격형 신은 아예 싸움이 되지 않았다. 힘의 차이로 인해 내 공격은 먹히지 않는데 상대의 공격으로 나는 죽는다.
무쏘의뿔도 없고 콩코노메 같은 고렙의 흑마법사들의 지원이 없자 유저들 힘으로 신을 상대하기는 아직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나마 지금까지 싸웠던 신들은 어떤 면에서 유저들과 상생이 좋아 쉽게 싸우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하죠?”
헤임달이나 멘솔러브는 붙어서 싸우는 직업이라 이니라훈의 공격으로 목숨을 잃었고 주로 후방에서 원거리 공격을 하는 유저들이 지금 남아있었다. 유저들 지휘부의 대다수가 죽었는데 이런 사태를 상상도 못 했기에 누가 남은 유저들을 지휘해야 하는지 감이 서지 않아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세크메트는 갈라시아 왕국의 여왕이자 헤임달의 아내. 그리고 탑클래스 유저였지만 유저들의 지휘부에 속해 있지는 않았다. 그래서 아무 말 않고 있었다. 그런데 유저들이 모두 세크메트에게 시선을 모았다. 지휘부에 속해 있는 유저가 있었지만, 자신이 나서서 남은 유저들을 지휘할 생각이 없었다. 쟁 지휘라는 건 하는 사람이 하지 안 해본 사람은 절대로 못 하는 법. 지휘만 받던 사람은 남을 지휘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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