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자의시대 2 (95)
이삐와 헤어진 팟원들은 은신한 체 즈라코드가 있는 건물 앞에 서 있었다. 이들이 즈라코드와 시간을 끄는 사이 이삐가 샤도임을 구출하는 게 계획이었다. 상대는 상급 마왕. 죽이면 좋고 실패하더라도 이삐가 샤도임을 구출해 내면 이번 작전은 성공이었다. 즉 이삐가 샤도임을 구출하는 작전의 미끼가 이들 팟원들의 임무였다.
“메이야, 이삐가 침투했으니 우리도 시작하자.”
가장 나이가 많은 칼제비가 말하자 쥰메이가 스킬을 준비했다. 은신이 풀리며 주문을 외우는 동안 쥰메이의 스킬이 성공적으로 이뤄지도록 다른 팟원들도 은신을 풀고 주변을 지켰다.
자연술사인 쥰메이의 스킬 특징은 위력에 비례해 준비시간이 길었다. 그나마 대마왕 헬사곤의 크라르의 지팡이를 얻은 탓에 주문 시전 시간이 좀 짧아졌다. 아이템의 능력에 따라 위력과 함께 시전 시간이 짧아진다.
주문을 끝마치고 쥰메이기 크라르의 나무 지팡이로 바닥을 힘차게 내려쳤다.
“쿠콰콰콰콰콰콰아아아아···.”
땅바닥 사방으로 검은색의 전류 같은 것이 빠르게 퍼져나갔고 뒤이어 낮은음의 굉음과 함께 땅이 흔들렸다. 도시의 중앙에 있는 왕궁. 그 주변이 이 도시의 중심으로 번화가였다. 땅이 춤추듯 흔들렸고 땅 위에 있는 모든 것들이 그에 맞춰 춤을 췄다. 건물들이 경련을 일으키는 것 같더니 바닥에 주저앉았다. 짧지만 강렬한 춤의 끝은 탈진이었다. 어둠 속에 무너진 건물들로 인한 먼지가 사방을 뒤덮었다.
쥰메이가 긴 숨을 내쉬며 호흡을 조절했다. 전력을 써서 스킬을 사용했다면 이 정도 도시는 모두 뭉개버릴 수 있을 테지만 지금의 스킬은 주의를 끌기 위한 것이어서 힘을 아껴두었다.
무너져 내린 다른 건물들과 다르게 왕궁은 끄떡없었다. 이삐 팟원들이 서 있는 곳은 즈라코드가 머무는 건물 앞이었는데 지진이 끝남과 동시에 문이 열리며 마족들이 쏟아져 나왔다. 병사들은 물론 왕궁에서 잡무를 보는 마족들까지 살기 위해 뛰쳐나온 것이다. 이들 사이로 이삐 팟원들이 왕궁 안으로 들어갔다. 마족들은 이삐 팟원들이 왕궁 안으로 들어가는 것에 관심이 없었다.
이삐 팟원들이 왕궁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문을 닫았다. 즈라코드의 왕궁은 따로 성벽을 갖고 있지 않았다. 외성과 내성의 구분 없이 도시를 둘러싼 외성 벽과 중앙의 왕궁. 왕궁은 다른 건물들과 함께 있었다. 다만, 왕궁답게 크고 화려한 문이 있었는데 이 문을 이삐 팟원들이 닫은 후 잠가 버렸다. 아직 왕궁을 빠져나가지 못한 일부 마족들이 닫힌 문 앞에서 멈춰섰을 때 그 옆에 있던 이삐 팟원들이 이들을 공격했다. 왕궁의 1층은 작은 운동장만큼 넓었다. 아마 이곳에서 각종 행사를 벌였으리라. 왕궁에 남아있는 비전투 마족들을 모두 죽일 때쯤 오모모 족의 우두머리 즈라코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건방진 인간 놈들이군. 죽고 싶어 환장했냐?”
매끄럽고 광택 나는 몸을 한 즈라코드를 보고 칼제비가 말했다.
“속도형 몬스터군.”
이삐팟원들은 즈라코드를 무시했다. 그저 하나의 보스몹으로 인식할 뿐이었다.
“촤라라라···.”
즈라코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기사인 삼식이가 속박 스킬로 즈라코드의 시선을 끌었다.
즈라코드가 삼식이에게 시선을 보낸 순간. 전사인 칼제비가 즈라코드의 뒷무릎을 칼로 베었다. 즈라코드는 3m 정도의 키였다. 왕궁 안이라 몸을 크게 키울 수 없었다. 즈라코드의 앞과 뒤에서 이삐 팟원인 삼식이와 칼제비의 합공이 펼쳐졌고 쥰메이가 뒤로 빠진 뒤 홀 한쪽 구석에서 새로운 스킬을 준비했다. 삼식이와 칼제비 모두 랭커였다. 렙과 장비, 전투 경험 등 무엇하나 부족한 게 없는 유저들이었다.
선공을 허용한 즈라코드는 정신을 가다듬고 반격에 나섰다.
“챙 챙 챙”
즈라코드는 단검을 양손에 한 개씩 쥐고 왼손과 오른손이 따로 공격과 수비를 겸했다.
“이면 몹이네요.”
즈라코드가 공격을 시도하자 뒤쪽에도 즈라코드의 모습이 생겨났다. 뒤가 없는 앞만 있는 모습. 앞쪽의 오른팔은 뒤쪽의 왼팔이 되었고 뒤쪽의 오른팔은 앞쪽의 왼팔이었다. 삼식이와 칼제비는 모두 앞면의 즈라코드와 싸워야 했다. 원래대로라면 2대1의 싸움은 앞과 뒤에서 공격하는 게 효과적이었는데 이면 몹인 즈라코드에겐 앞과 뒤로 따로 없었기 때문에 삼식이와 칼제비가 모두 정면에서 공격했다. 그러자 즈라코드는 다시 뒷면이 사라졌다. 그 순간 다시 칼제비가 즈라코드의 뒤쪽을 공격했다. 원래 이삐 팟원들은 패자의시대가 오픈하기 전부터 다른 게임에서도 쭉 같이 해왔던 터라 손발이 잘 맞았다. 두 사람이 한 몸처럼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공격과 방어를 했다. 한 명은 기사였고 한 명은 전사였다. 둘 다 방패를 가지고 있어서 공격력 못지않게 수비력도 좋았다. 즈라코드는 힘보다 속도 위주로 싸우는 마왕이었는데 방어력이 좋은 이들이 공격을 잘 막아내자 물리 공격으로는 재미를 볼 수 없다는 것을 안 즈라코드가 마법 공격을 시도했다.
“첨벙, 첨벙.”
바닥에 물이 차올랐다. 그 속도가 매우 빨랐다. 마계에서 수공 마법은 아주 드물었다. 마계라는 곳 자체가 황무지와 화산지대가 많았다. 물과는 상극이라 할 수 있는데 외곽지역의 마왕답게 주류에서 벗어난 즈라코드는 수공 마법이 장기였던 것이다.
바닥에 물이 차오르자 삼식이와 칼제비의 움직임이 느려졌다. 그에 비해 즈라코드는 미꾸라지처럼 물을 타고 더 빠른 속도를 냈다. 아마 이 홀이 물로 가득 찬다면 수중전을 벌여야 하는 삼식이와 칼제비는 절대적으로 불리하리라. 물이 무릎까지 차오른 순간 쥰메이가 스킬을 시전했다.
천장이 온통 화염에 휩싸여 불바다가 되었다. 즈라코드가 물을 타고 미끄러지듯 움직이다 홀의 천장이 화염에 휩싸이자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위로 들었는데 그 즉시 위와 아래가 바뀌어 버렸다. 천장에 물이 차고 있었고 바닥에 화염이 이글거렸다.
즈라코드가 놀라서 펄쩍 뛰었다. 하지만 곧바로 바닥에 발에 대야 했고 불타는 바닥의 화염 데미지를 입었다.
“놀라운 기술이군.”
삼식이와 칼제비는 화염데미지를 입지 않았다. 즈라코드만 불타는 석쇠 위에서 꿈틀대는 꼼장어처럼 날뛰었다. 그 사이사이 삼식이와 칼제비가 안정된 공격을 퍼부었다. 즈라코드는 스킬을 가속하며 물이 더 빨리 차오르도록 했다. 천장이 물이 빠르게 차오르며 아래로 내려왔다. 물이 아래에서 위쪽으로 차오르던 위에서 아래쪽으로 차오르던 홀이 물에 가득 차면 불리한 건 삼식이와 칼제비라 이들은 아직 물이 아래로 내려오기 전에 즈라코드를 상대로 최대한 피를 뺄 생각으로 공격에 집중했다.
쥰메이도 화염을 더 크게 일으키며 바닥을 태웠고 불과 물이 만나며 굉음과 함께 수증기를 만들어 냈다. 물과 불이 닿으면 아무래도 불이 꺼질 것이다. 홀 안이 수증기로 가득 차며 시야를 차단하자 삼식이와 칼제비가 공격을 멈추고 숨었다.
“비겁한 놈들아 어디 있느냐? 오늘 너희들이 날 즐겁게 하는구나. 하하하하.”
즈라코드는 오랜만에 제대로 된 싸움을 하며 이를 즐기고 있었다. 얼마 전 샨다족과 싸우면서 고르키에게 당한 것은 고르키의 강력한 마법 때문이었다. 즈라코드는 마왕이었고 마왕 대부분은 마법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주력 기술은 근접 전투형이었다.
즈라코드의 물이 차오를수록 쥰메이의 불이 작아지며 꺼져갔다. 수증기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사방으로 즈라코드가 공격을 해댔다. 상대를 맞추기보다 기분 좋아 흥이 나서 추는 춤 같았다.
수증기 가득한 홀 안 구석에서 쥰메이와 삼식이, 칼제비가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들은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수증기 속에서도 선명하게 볼 수 있는 아이템을 모두 착용하고 있었다.
“메이야, 좀 더 기다리자.”
물이 서 있는 이들의 머리에 닿을 정도까지 내려왔다. 3m 크기의 즈라코드는 이미 신체 일부가 물에 닿아 있어서 바닥에 발을 딛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었다. 화염의 피해를 보지 않았다.
“오빠들 언제까지 거기서 놀 건데?”
파티창으로 이삐가 나무랐다.
“구출했냐?”
“난 성벽에 올라왔다고.”
“그래? 그럼 우리도 곧 가마.”
“걔는 어쩌고?”
“혼자 놀게 놔두지 뭐.”
“가만있어 봐 내가 그리로 갈게.”
이삐가 은신을 유지하며 방문을 열자. 공중에 매달린 샤도임의 모습이었다. 발가벗겨진 샤도임이 채워진 쇠 팔찌와 연결된 쇠사슬이 천장에 붙어 있었다. 두 발목도 쇠사슬로 채워져 고정돼 있어 사실상 꼼짝할 수 없었다. 물론 지금은 정신을 잃은 상태여서 구속되어 있지 않아도 움직일 수 없었다.
방안에는 샤도임 말고 5m의 거한과 보통 사람 크기의 마족들 다섯 명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고문을 담당하는 마족들로 샤도임이 깨어나기만 기다리던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방문이 열리자 이들의 시선이 문 쪽으로 쏠렸다. 문은 열렸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삐는 샤도임의 모습을 보고 저절로 인상이 써졌다. 그리고 방안으로 걸어 들어가 테이블 위에 있던 끝이 휘어진 갈고리 모양의 기다란 꼬챙이를 집어 들었다. 테이블 위에는 각종 고문 기구들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를 집어 들어 가까이에 있던 마족놈의 턱을 아래에서부터 갈고리에 걸어 휘둘렀다. 턱에 갈고리가 걸린 마족이 비명과 함께 날아가 벽에 부딪히며 떨어졌다. 순식간에,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고 그와 동시에 은신을 풀고 암살자 5인방이 마족 고문술사들을 공격했다.
이삐는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거한을 향해 달려들었다. 암살자의 첫 공격은 원래 가장 셌다. 은신한 상태에서 무방비 상태의 적에게 뒤치기하는 것이라 더 크게 데미지가 들어갔는데 이삐는 은신을 푼 상태에서 공격했다. 거한은 이삐가 달려드는 것을 보고 주먹을 휘둘렀다. 거한은 쇠로 된 장갑을 끼고 있어서 그 자체로 무기나 다름없었다. 거한이 휘두른 주먹을 바람을 일으킬 정도로 빠르고 강했다. 이를 옆으로 흘려보내며 이삐의 단검이 거한의 쇠장갑을 따라 그어졌다.
쇠장갑이 끝나는 곳에서는 거한의 살을 이삐의 단검이 가르면서 피가 쏟아졌다. 그 피를 맞을 새도 없이 이삐의 단검의 끝이 거한의 겨드랑이를 타고 흐르며 가슴을 갈랐다. 키가 큰 거한이 상대적으로 작은 이삐를 치기 위해 몸을 수그린 덕에 거한의 상체에 상처를 입었고 이삐는 거한의 뒤로 돌아나가며 왼쪽 발의 아킬레스건을 잘랐다. 거한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왼쪽 무릎을 꿇자 땅을 박차고 뛰어올라 거한의 허리를 한번 밟고 재차 뛰어올랐다. 그리고 거한의 목덜미에 단검을 찔러넣었다. 그리고 단검을 몇 번 휘저은 뒤 바닥으로 뛰어 내렸다. 거한의 입에서 폭포수처럼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야, 너희들 연합기를 써.”
암살자 5인방은 이미 마족 고문술사들을 모두 죽인 후 이삐가 싸우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이삐의 명령에 암살자 5인방이 거한에게 달려들며 연합기를 썼다. 데미지가 가장 세다고 생각한 이삐가 마지막 여섯 번째에 연합기를 쓰려고 했는데 세 번째 연합기가 이뤄졌을 때 거한이 죽어버렸다.
‘음···. 얘네들 생각보다 센데······.’
이삐는 아무렇지 않은 듯 암살자 5인방에 명령을 내렸다.
“니들은 입구를 지켜.”
혹시 이곳 마족 병사들이 몰려올 것을 대비한 것인데. 이 건물의 마족병사들도 대부분 지진이 일어나자 건물을 빠져나간 뒤라 이 고문실에 들어오는 마족 병사들은 없었다.
이삐는 천장에 매달려 있는 샤도임을 끌어내렸다. 그리고 샤도임의 장비들을 챙겨 대충 입혔다. 그리고 샤도임의 장비들을 모두 챙겼다. 어마어마한 능력의 이 아이템들을 보고 이삐가 혀를 내둘렀다. 드래곤 유니크 풀템이라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엔피씨인 샤도임은 자신의 장비를 공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장비의 세부 옵션에 대해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이삐가 샤도임의 장비를 챙기며 얼핏 둘러보니 자기 팟의 모든 장비를 합쳐도 발끝에도 못 미칠 정도라는 것을 알게 되자 허무함과 함께 질투심이 끓어 올랐다.
‘이거 내가 빼돌려도 아무도 모르는 건데···.’
돈으로 환산하면 장비당 집값을 넘어 작은 건물 한 챗값이었다. 이삐가 평소에 없던 물욕에 잠시 망설이고 있을 때. 암살자 5인방의 뜨거운 시선을 느끼자 정신을 차렸다.
암살자 5인방들은 샤도임과 함께한 세월이 길어서 그런지 이삐가 그동안 보아왔던 그들의 눈빛과 지금 샤도임을 보는 눈빛이 다름을 알 수 있었다. 적에게 잡혀 고문당한. 그렇게 생각하는 듯한 암살자 5인방들의 눈빛은 여러 가지 감정이 복합적으로 나타나 있었다. 이 상황에서 이삐는 샤도임의 아이템을 훔칠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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