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자의시대 2 (99)
무쏘의뿔이 불타는 하늘을 한번 올려다본 뒤 오른손의 단검과 함께 왼손에 채찍을 꺼내 쥐었다. 무쏘의뿔은 자신의 암살자 직업 스킬 외에 아이템에 붙어 있는 스킬과 호칭을 얻어 생긴 스킬이 많았는데 평소에 쓰던 스킬만 쓰다 보니 전혀 사용하지 않는 스킬도 있었다. 패자의시대 게임의 특성상 어떤 스킬이든 숙련도를 통한 성장으로 그 데미지가 올라갔다. 따라서 그 자체로 강력한 스킬은 없었다. 새로운 스킬을 얻었다고 해도 그 스킬의 숙련도를 올리기 위한 시간을 투자할 정도로 가치가 있는 스킬이 아닌 이상 그 스킬을 아예 사용하지 않았다. 마스터, 그 이상을 넘어 그랜드 마스터가 되기 힘든 이유가 바로 잘 사용하지 않는 스킬까지 숙련도를 올려야 하는 데 있는 것이다.
무쏘의뿔은 우다르바의 불타는 하늘을 보니 저절로 채찍에 손이 갔다. 마법 불길이 항상 불타고 있는 그의 채찍은 메제크로부터 화염의 용자 호칭을 얻은 뒤 더 진하고 농축된 화염이 타고 있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용암 병사’들을 소환했다. 암흑력의 바다가 곳곳에 끓어오르더니 그곳에서 용암 덩어리가 솟아올랐다. 용암 덩어리들은 암흑력의 바다 위에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사람의 형태를 만들었다. 3m의 키에 둥글둥글한 체형 전신에 용암이 살아 있는 듯 끓어올랐다. 그리고 오른손에 자신의 키보다 더 크고 넓적한 도를 한 개씩 들고 있었다. 그 수가 수백. 우다르바가 태양의 신으로 화염계 공격력을 자랑하니 무쏘의뿔도 마계의 화염 마스터인 메제크의 힘을 빌린 것이다. 원래 암흑력과 화염은 친화력이 좋았다. 마계는 암흑과 불의 땅. 게다가 우다르바가 하늘을 들끓는 태양의 표면처럼 바꾸자 용암 병사들로서는 최고의 활동 조건이 되어 모든 능력치가 극상까지 올라갔다.
“가서 공격해라.”
무쏘의뿔의 손끝이 우다르바를 가리키자 산개해 있던 용암 병사들이 함성과 함께 우다르바에게 달려들었다. 우다르바는 용암 병사들의 공격을 막기 위해 그리고 아군의 퇴각을 돕기 위해 또 다른 주문을 외웠다. 그리고 스킬이 시전됐을 때. 마계의 하늘을 뒤덮던 태양의 표면이 지상에 펼쳐졌다. 하늘에서 땅으로 위치가 바뀐 것이다.
우다르바는 암흑력으로 가득한 지상의 모든 존재를 태워버린 자신의 스킬에 만족했다.
조용히 눈을 감고 타버린 적군의 냄새를 감상했다. 태양의 표면은 타는 냄새까지도 태웠지만 우다르바는 그 어떤 향기보다 더 오감을 자극함에 오르가슴을 느꼈다.
“폭 폭 폭 폭······.”
태양 표면이 된 지상의 곳곳에 커다란 기포가 떠오르더니 터졌다. 기포 안에는 잘 다듬어진 사람 형태의 용암 병사들이 기지개를 켜며 몸을 세웠다. 용암으로 만들어졌을 때보다 더 세밀하고 균형 잡힌 멋진 몸으로 우다르바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달렸다.
“첨벙첨벙······.”
더 커진 키만큼 그들의 칼도 더 커졌고 공격력은 더 올라갔다.
우다르바는 잠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사고가 정지했다. 그리고 저 앞쪽에서 용암 병사들 뒤쪽에서 미소 지으며 팔짱을 끼고 있는 놈과 눈이 마주치자 지금의 상황에 대한 이해가 봇물 터지듯 쏟아져 들어왔다.
‘내가 실수한 건가···.’
화염에 완전한 면역을 가진 무쏘의뿔.
‘루’는 태양의 신을 모시는 사제였다.
우다르바가 참전한 이번 전쟁에 있어 늘 찜찜했다. 자신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우다르바와 싸운다는 게 여러모로 불편했고 의문이었다. 한편으로 세크메트가 주신인 젠라츠에게 아이템을 강탈당하고 파문당한 것을 보고 자신도 우다르바한테 쫓겨나는 건 아닌지 걱정되기도 했다. 세크메트는 암흑 사제로 전직했지만, 자신은 그 정도로 분노와 복수심을 우다르바에게 쏟을 자신이 없었다. 이는 천계의 신들과 싸우는 모든 관련 직종의 유저들이 공통으로 겪는 고민이기도 했다.
“응?”
루는 우다르바가 펼치는 스킬이 무엇인지 알았다.
“아, 씨발. 모두 내 주변으로 빨리 모여.”
절규에 가까운 루의 외침은 전투 중인 유저들에게도 똑똑히 들려왔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걍 닥치고 내 주위로 모여. 어서 빨리···.”
신들이 철수하고 있었다. 그런 신들을 향해 더 신나서 공격을 퍼붓던 유저들이었지만 루의 말은 거역하면 안 된다는 느낌이 들어 서둘러 유저들이 루의 주변으로 몰려갔다. 루는 직업이 사제였기 때문에 후방에서 힐링 위주로 공격대원들을 지원하며 간간이 공격스킬을 사용하고 있었다.
“헤임달 오빠 저쪽 마왕 애들도 이쪽으로 오라고 좀 하세요.”
“알았다.”
평소 같지 않은 루의 모습에 군소리 없이 헤임달도 긴급 명령을 내렸다. 유저들이 헤임달의 지시를 받고 루의 주변으로 몰려드는 사이 하늘을 뒤덮은 태양의 표면이 지상으로. 지상이 태양의 표면으로 바뀌었다. 유저들은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태양의 표면에 노출되자마자 소멸해버렸다.
“아······.”
루는 우다르바가 시전하는 스킬을 알고 있었기에 유저들을 자신의 주변으로 오게끔 한 것이다. 루는 태양신 우다르바의 사제로 우다르바의 스킬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중심으로 일정 지역을 태양의 표면을 중화시켰다. 안전지역으로 만들 것으로 태양신의 사제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숙련도가 낮아 주변으로 몰려든 모든 유저들을 보호해 줄 수 없었다. 빨리 온 순서대로 화를 면했고 늦게 온 유저들은 모두 소멸해버렸다.
“이건 사기다······.”
“너무하네! 정말.”
원래 마족들과 많은 몬스터들이 화염에 대한 면역력이 높았지만 무용지물이었다. 찍소리 한번 못하고 모두 소멸해버렸는데 그 수가······. 최소 수십만, 많게는 백만이 넘을 듯했다.
천사병들과 천족들이 모두 죽고 목표가 신과 천사장으로 좁혀진 상태에서 모든 마족이 총공격을 퍼붓던 상황. 좁은 지역에 수많은 마족이 모여 있었다. 그곳에 태양의 표면이 펼쳐지자······.
개쫑이는 이런 일이 벌어질 때마다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어졌다.
“내가 봐도 이건 좀 너무하군. 밸런스 파괴 아닌가?”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최고야였지만 개쫑이는 반박할 수 없었다.
“앞으로가 걱정이군.”
무쏘의뿔이 가진 병력 대부분이 이번에 다 죽어버렸다.
개쫑이는 애써 침착해 하며 최고야에게 말했다.
“일반 엔피씨들은 시간이 지나면 복구됩니다. 좀 시간이 걸리겠지만요.”
“그래도 이건 좀···.”
개쫑이는 반박할 수도 변명할 수도 없었다. 굳이 변명하자면 할 수 있었지만 포기했다. 모든 것은 상황에 따라 달라졌다. 최강의 몬스터인 드래곤도 좁은 곳에서 유저들과 싸우면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사냥당하는 법이다. 그건 신이나 마왕들도 마찬가지로 쓸 수 있는 능력이 100이라고 해도 상황에 따라 10도 못 쓰는 경우가 있다. 그와 반대로 150, 200을 발휘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개쫑이는 무쏘의뿔이 메제크로부터 받은 호칭의 힘으로 화염에 대해 완전한 면역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개쫑이의 시선은 살아남은 유저들을 벗어나 저 멀리 무쏘의뿔에게 향했다.
“루, 우리를 우다르바의 공격 사정권 안으로 데려다줄 수 있니?”
“해볼게요.”
루가 생성한 태양의 표면 안전지역에서 일자로 길게 통로가 생겨났다. 태양의 표면을 갈라놓은 것 같은 좁은 길이었는데 이 길은 안전지역을 길게 늘인 형태였다. 따라서 유저들은 선택의 여지 없이 그 길을 따라 이동해야 했다. 살아남은 유저는 약 3천 명. 5천 명의 유저들이 죽은 것이다.
지금 무쏘의뿔이 우다르바와 싸우고 있었다. 유저들은 무쏘의뿔을 도와주기 위해 그리고 현재 유일하게 남아있는 우다르바를 치기 위해 그쪽으로 향했다.
세크메트는 몽크가 소환돼있는 20분이 젠라츠를 없앨 기회라고 보았다. 당장은 몽크의 손에 붙잡혀 젠라츠를 공격할 수 없었지만 젠라츠가 언제까지 몽크의 손바닥에 붙잡혀 있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4명의 암흑력의 거인을 소환해 젠라츠를 향한 공격을 준비했고 젠라츠가 붙잡혀 있는 몽크의 손 주위로 저주 스킬을 중첩했다.
젠라츠는 몽크의 손에 잡혀 바닥에 눌린 채 세크메트의 저주 스킬로 생명력이 줄어들었다.
“쿠우웅.”
몽크가 완전히 몸을 빼내 바닥으로 내려왔다.
“끄그그그그그으으으으으······.”
몽크가 완전히 소환되어 지상으로 내려오자마자 길게 비명 같은 소리를 토해냈다. 그리고 자신의 오른손을 들어 입 쪽으로 갖다 댔다.
‘식귀 몽크’. 그 이름답게 몽크는 오른손에 쥐고 있던 젠라츠를 입안에 넣었다. 원래 몽크는 모든 것을 잡아서 입안에 털어 넣는 괴물이었다. 얼굴의 절반이 입으로 왼쪽 귀에서 오른쪽 귀에 이어지는 큰 입에는 톱니 같은 이빨이 몇 겹으로 이 겹겹의 이빨이 위아래로 맞물리면서 대상을 갈아버렸다. 따라서 몽크의 입안으로 들어가면 살아날 수 없었다. 운이 좋아 어떻게 죽지 않았다고 해도 목구멍 안으로 넘어가면 무한의 공간으로 떨어지게 되는데 아직 죽지 않고 목구멍으로 넘어간 예는 없었다.
“가각 가가각 가각······.”
최상급 중갑으로 완전무장한 젠라츠는 몽크의 입안에서 요란한 소리를 냈다. 젠라츠의 크기가 컸지만 몽크의 입은 훨씬 더 컸기 때문에 몽크가 젠라츠를 씹는 데는 충분했다.
세크메트는 몽크의 입안에서 갈려 나가고 있을 젠라츠를 생각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젠라츠의 사제로 그녀를 섬기며 10년 넘게 게임을 했고 지금은 그런 젠라츠에게 복수하기 위해 싸우고 있었다. 젠라츠가 막상 몽크의 이빨에 갈려 나가는 소리를 듣자 허무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퍼펑 펑 펑···.”
몽크가 젠라츠를 씹는 소리와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그쪽으로 다들 시선을 돌릴 때 몽크의 오른쪽 입이 무너져 내리며 폭포수 같은 피를 흘렸다.
“후두두드드드드······.”
곧이어 몽크의 오른쪽 입까지 터져 나갔다. 몽크의 머리 절반이 날아가며 몽크가 앞으로 쓰러졌다. 산이 무너지는 것 같은. 어지간한 산보다 더 큰 몽크가 앞으로 고꾸라지며 이계로 역소환됐다. 몽크는 소환시간 20분을 채우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몽크가 사라진 자리에 전신에 몽크의 피를 뒤집어쓴 젠라츠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서 있었다.
“또 네년이냐?”
“몽크한테 쳐 죽는 줄 알고 아쉬웠는데 날 기쁘게 해줘서 고맙다.”
젠라츠와 세크메트가 뜻하지 않게 마주 보며 서 있었다. 젠라츠는 몽크의 입에서 탈출했지만, 만신창이 상태로 큰소리친 것과 다르게 여러모로 상황이 안 좋았다. 자신을 도와줄 아군이 전혀 없는데 적진 한복판에 있었다.
세크메트가 젠라츠에게 스킬을 시전했다. 그와 동시에 암흑력의 거인들은 물론 주변의 마족 병사들이 모두 젠라츠에게 총공격했다. 세크메트의 스킬은 아군의 사기를 올려 능력치를 향상하게 시켰고 저주로 젠라츠를 약화했다. 몽크의 입안에서 방패를 잃어버린 젠라츠는 암흑력의 거인들을 상대로 검으로만 싸웠다. 처음부터 불리한 싸움. 필살기를 몽크의 입에서 써버린 탓에 뭐하나 내세울 만한 게 없었다. 죽는 것으로 예정된 싸움이 이어지는 가운데 젠라츠와 세크메트는 모두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그 고민에 대한 결단은 젠라츠가 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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