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자의시대 2 (104)
“우도벨, 너 이 녀석.”
여기저기서 우도벨을 향해 비난의 말들이 쏟아졌다. 우도벨은 이들을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보시다시피, 천계가 침략당했다. 너희들은 어떻게 할 거지? 밧소뎀과 협상할 텐가?”
지금껏 천계는 그 어떤 세력에게도 침략당한 적이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차원의 존재들이 천계로 넘어온 일이 극히 드물었다. 물론 그때마다 천계에 온 놈들은 혹독한 대가를 치러왔었다. 그런데 한둘도 아니고 8천 명의 마계의 편에 선 인간들이 천계에 발을 내디딘 것이다. 실황중계처럼 이그드라실 연결 다리를 오르는 인간들의 모습이 보였다.
마계와 협상이 안 된다는 것은 다들 알고 있었다. 예전부터 전쟁이 벌어졌을 때마다 협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한 번도 성공한 적은 없었다. 애초에 마계는 협상이 안 되는 대상이었고 천계의 신 중에도 싸움 좋아하는 이들이 많아서 협상이 안 됐다.
천계가 침략당했다. 협상이 안 된다. 그렇다면 싸워야 한다. 나와 가족과 우리를 지키기 위해서······. 우도벨에 대한 벌을 내리기 위한 자리에서 다들 마계와의 싸움이 자기 일이 되어 다가오자 전의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우도벨님, 저들은 인간들이죠. 마족들이 아닙니다. 대화할 수 없지 않습니다. 그리고 제가 아는 바로는 우도벨님과 일행분들이 이미 인간들은 사도로 임명해 3천 명의 무장한 병력이 오라몬 산맥 쪽으로 향하고 있더군요. 왜 인간들을 오라몬 산맥으로 보낸 것이죠? 그들이 금지된 지역으로 가도록 지시한 게 아닙니까?”
신들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천족 한 명이 나서서 말했다. 원래 신들은 천계의 최상위 계급.
천계에 같이 살고 있지만 천족이 신들의 대화에 껴드는 일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신들의 회의 장소에 천족이 끼어 있다는 것 자체가 처음이었는데 중간에 나서기까지 한 것이다.
‘디야우스’.
천족들의 교육을 책임지는 최고의 위치에 있는 ‘대학장’으로 120명의 장로회의 의장이기도 했다.
대부분의 천족 장로들이 나이가 많은 데 비해 디야우스 대학장은 젊었다. 게다가 일부 신들과 관계도 좋았다. 특히, 대자연의 신 이리오스와 가까웠는데 이리오스가 전대의 엘프 여왕이 어렸을 때 교육을 디야우스에게 맡겼었고 그게 인연이 되어 인간계인 소마 대륙의 엘프 마을까지 직접 가서 한동안 엘프 여왕의 선생으로 머문 적이 있었다. 그게 인연이 되어 전대의 엘프 여왕과 결혼까지 했고 자식까지 낳은······. 나중에 혼자 천계로 돌아가면서 전대의 엘프 여왕 은나우스가 그리워했고 퀘스트 형식으로 무쏘의뿔이 디야우스와 은나우스 여왕을 다시 만나게 한 적이 있었다. 디야우스는 영상을 통해 무쏘의뿔을 보았다. 천계에 발을 디딘 마계 편에 선 8천 명의 인간들 제일 앞에 무쏘의뿔이 있었다.
디야우스의 말에 다들 웅성거렸다.
“맞습니다. 나는 마계의 인간들을 처리하기 위해 우리를 대신해 싸워줄 수 있는 인간들을 대상으로 사도로 임명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금지된 지역으로 가서 떼세로의 눈을 가져오라고 지시했습니다.”
“이런 미친······.”
“제정신인가?”
“보시다시피 나는 싸우다 눈을 잃었소. 내 목숨이 끊기지 않는 한 나는 싸울 것이오. 그런데 두 눈을 잃어 싸우기 힘드니 아버지의 눈으로 내 눈을 대신할 생각이오. 난 이번 전쟁의 승리를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생각이오.”
“우도벨, 당신이 두 눈을 잃은 것은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어요. 하지만 아버지의 눈은 아버지께서 그들에게 직접 준 것으로 우리의 것이 아니에요. 게다가 그들도 당신에게 아버지의 눈을 줄 리도 없고. 결국, 그들에게서 아버지의 눈을 빼앗아야 하는데, 이는 또 다른 싸움을 의미하는 거예요. 우리는 그들에게 이미 과거에 큰 죄를 지었는데 지금 또 죄를 지을 수는 없어요.”
“이슈미쥬, 난 내 잃어버린 눈을 대체하기 위해서만 아버지의 눈이 있어야 한 게 아니야.”
우도벨은 다시 주변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마계는 키개람 이후 밧소뎀에 의해 통일이 되었어. 키개람은 자신의 힘으로 마계를 통일했기에 우리가 마계를 침공했을 때 상대하기 무척 어려웠지 그만큼 키개람은 강했고······. 우리 몇이 동시에 덤벼도 상대할 만큼 강했지. 그런데 밧소뎀은 키개람 같은 능력으로 마계를 통일한 것이 아니야. 인간 영웅의 도움으로 마계를 통일한 것이야. 난 그 틈을 노려 우리가 지난 키개람의 통일 마계를 접수하지 못했던 것을 이번에 이루려고 했어. 그런데 인간들의 능력이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더 세서 번번이 실패했던 거야. 난 이번 기회에 아버지의 눈의 힘을 빌려 마계를 점령할 생각이야. 애초에 너희들이 나를 도왔다면 아버지의 눈도 필요 없었겠지만······. 후훗 결과적으로 난 너희들의 도움 없이 마계를 얻기 위해 아버지의 눈을 얻을 생각으로 인간을 보낸 것이지.”
우도벨은 다시 몸을 이슈미쥬 쪽으로 돌리며 말했다.
“나는 다시 그들에게 죄를 짓지 않기 인간들을 사도로 임명해 아버지의 눈을 얻도록 보낸 거야. 인간들이 가면 혹시 대화가 될 수도 있으니까······.”
분위기가 바뀌었다. 우도벨의 말은 진심이었고 진심 어린 말이 모두를 설득했다.
“나에게 벌을 내리겠다면 그렇게 해. 하지만, 이미 벌어진 전쟁이야. 우리 땅에 적들이 발을 들인다면 아마도 나를 가둬두기보다는 전장에 내보내는 게 더 나을 거야.”
“그만, 그만. 우리가 언제까지 우도벨의 변명을 들을 생각인가? 우도벨은 우리의 형제와 친구들을 죽게 했고 그것만으로도 중죄야. 그런데 인제 보니 우리 땅에 적들이 발을 내딛게 한 죄까지 추가했어. 우리끼리 얘기한 대로 저들에게 벌을 내려야지.”
“뭐야? 이미 답은 정해놓고 쇼를 한 거야?”
지금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던 탈로스가 불쾌해하며 말했다. 그와 함께 이니라훈과 젠라츠가 전투태세를 갖췄다. 순순히 벌을 받을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원래 이 자리는 서로가 대화를 통해 방법을 찾는 자리였다. 천계는 신들이나 천족이나 어떤 문제가 있을 때 이런 식으로 진행했다. 누가 죄를 지었다고 해서 일방적으로 벌을 내리지 않았다. 그런 일이 벌어진 전후 사정을 서로 얘기하며 서로가 이해하는 수준에서 벌이 내려졌다. 그렇기에 벌을 받는 자가 순순히 벌을 받았다.
그런데 이미 자기들끼리 결정해 놓고 이런 자리로 형식만 갖췄으니 우도벨 일행들이 화가 났던 것이고 쉽게 죄를 받아들일 마음이 없었다.
“다들 됐어. 그래서 여러분들이 우리에게 어떤 처벌을 내리겠다는 거지?”
“간단해. 너희들 각자 집에 처박혀 있으면 돼.”
“하하하하. 정말 간단하군. 그런데 한 가지 물어볼 게 있는데, 너희들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지?”
“타타노드가 지은 백색 거성을 회복할 거다. 그리고 마족들이 천계로 못 오게 지켜야겠지.”
“그게 가능했으면 좋겠다. 그럼 나중에 봄세.”
천계는 감옥이 없었다. 범죄자가 없기 때문인데, 가끔 공동의 이익에 반하는 일을 했을 때 집에만 머물게 하는 게 가장 큰 벌이었다. 집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누구하고도 만나지 못했다. 보통은 연금 기간이 정해져 있지만 우도벨과 그 일행들은 따로 기간을 정해놓지 않았다. 하지만 영원히 집에 연금당하리라곤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우도벨이 저항 없이 받아들이자 일행들이 툴툴거리긴 했지만 모두 받아들였다.
신들은 다들 공중섬에 살았기 때문에 각자의 공중섬에 갇히게 된 것인데. 원래는 하인들이나 일꾼들이 많았지만, 벌을 받는 것이기 때문에 이들은 모두 공중섬에게 나가야 했다. 결국, 자신의 공중섬에 혼자 있어야 했다. 이것이 어려움이라면 어려움이었고 벌이었다.
“토르님 저 앞에 보스몹이 있는 것 같습니다.”
토르가 이끄는 사도 연합은 무쏘의뿔이 이끄는 추격대와 다르게 따로 정찰대를 두지 않았다. 추격대는 본진 외에 앞쪽에서 정찰대가 활동하며 정보를 알려줬지만 사도 연합은 그냥 다 같이 뭉쳐서 이동 중이라 가는 길에 뭐가 있는지 닥쳐서야 알게 되었다.
“아무래도 이곳은 천계의 사냥터 같습니다.”
“뿌우우우 뿌우우 뿌우···.”
맘모스를 닮은 거대 몬스터가 사도 연합을 먼저 발견하고 달려들었다. 아무 준비 없이 서 있다가 거대 몬스터가 달려들자 사도 연합의 유저들은 피하기 급급했다.
키가 40여 미터쯤 되는 이놈은 큰 덩치로 밀어붙이고 코를 휘두르고 그 큰 발로 밟았다. 물론 이 몹에 밟힐 유저는 없었지만, 맨땅에 발 구르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근처의 유저들은 지진 속에 던져진 것처럼 중심을 잃고 휘청거려야 했다.
“언제까지 도망칠 거야. 모두 정신 차려.”
서로 역할 분담이 안 돼 있고 사도 연합이 꾸려진 이후 제대로 된 싸움을 해본 적이 없어 서로가 미루느라 많은 인원과 개인 능력에 비해 필드 보스몹 한 마리에 우왕좌왕했는데 토르가 소리를 치자 각자 알아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사도 연합은 무엇보다 힐러 사랑 길드 소속의 강력한 힐러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몹을 잡다 죽는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것이 처음 보는 몹을 상대로 안정적인 공략을 하게 만들었다. 좀 전까지 우왕좌왕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사방에서 강렬한 빛과 함께 유저들의 스킬들이 쏟아졌다. 유저들과 거대 몬스터와의 렙 차이로 인해 속박 스킬의 빗나가는 게 대부분이었지만 워낙 많은 유저들이 스킬을 사용하다 보니 그중 한두 개가 성공했다. 그리고 몇 초에 불과했지만, 거대 몬스터가 멈춰선 순간 집중포화가 쏟아졌고 생명력과 방어력이 깎여 나가자 상대적으로 유저들의 스킬이 더 잘 박히며 순식간에 죽고 말았다.
“이놈 810렙이었네요.”
사도 연합 유저들이 죽은 몹의 주변에 몰려들어 천계에서 처음 잡는 몹을 감상했다. 마계의 사냥터 필드 보스몹들이 700대에서 800대 초반이었는데 천계에서 만난 보스몹은 800대 초.
“천계가 마계보다 상위 사냥터 같아요.”
“이곳은 천계의 사냥터인 것 같습니다.”
누군가의 말에 다들 수긍했다. 마계도 유저들의 사냥터와 마족들의 삶터가 달랐다. 천계도 그런 구조로 보였던 것이다.
이곳이 천계의 사냥터라면···. 앞으로 계속해서 필드 보스몹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서로 드는 생각이 있었지만, 말을 하진 않았다. 뜻하지 않게 신규 사냥터를 개척하게 된 것이다. 거기다가 삼천 명에 달하는 최고의 유저들로 구성된 사냥팀. 사도 연합의 유저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잃고 천계의 사냥터에 대한 기대감에 부풀었다. 그리고 그 기대는 머지않아 확인됐다.
몇 시간 더 갔을 때 새로운 보스몹을 보게 된 것이다. 이 보스몹도 사도 연합 유저들이 인식하기 전에 먼저 달려왔다. 200렙 이상 차이가 나다 보니 천계의 보스몹들이 알아서 달려들었다.
‘좋아할 일만은 아닌 것 같은데···.’
이번에 사도 연합 유저들에게 달려든 거대 몬스터는 거미를 닮아 있었다. 웅크리고 있을 때는 커다란 바윗덩어리 같아 보였는데 다리를 세우자 작은 산처럼 컸다.
“젠장, 880렙이야.”
사도 연합 유저들이 좌우로 갈라지며 거대 거미 몬스터를 에워쌌다. 겉보기엔 많은 유저들이 거대 몬스터를 에워싸고 공격했기 때문에 유리한 듯 보였지만 사실은 우왕좌왕했다. 게임에서 보스몹을 잡을 때는 탱이 어글을 먹고 보스몹을 붙잡아둬야 했는데 사도 연합의 누구도 거대 몬스터를 상대로 고정적 어글을 먹어 붙잡아 둘 유저가 없었다. 얼떨결에 어글이 잡히면 공격을 중단하고 도망치기 바빴다. 결국, 데미지가 센 유저가 어글을 먹었기에 열심히 공격하지도 않았다.
“이대로는 안 돼. 누가 탱을 잡아봐.”
“기사분들 뭐하십니까?”
중갑과 방패를 착용한 유저가 방어력이 높았고 당연히 이들이 탱커 역할을 해야 했다. 그러나 사도 연합의 방패를 든 직업군의 유저들은 모두 공격형 딜러들이라 탱커 역할에 대한 경험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이들도 서로 눈치를 보고 있었다.
“플루마님이 나서주셔야겠습니다.”
개인적으로 ‘동해의별’이라는 기사단을 운영하며 단장을 맡은 플루마는 렙과 장비 모든 면에서 사도 연합의 최고 유저라 할 수 있었다. 탱을 한다면 플루마가 최적이라 할 수 있었는데 정작 플루마는 탱커 역을 해본 적이 없었고 상대가 소마 대륙에서 접할 수 없는 880렙의 거대 몬스터이다 보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게다가 동해의별 기사단은 모두 말을 타고 다녔는데 마계로 넘어올 때부터 이들은 말을 차원의 문이 있는 오인트제국 비판텐시에 두고 온 터라 말을 타지 않고 사냥을 하거나 싸우는 데 익숙지 않아 무척 낯설었다.
플루마 본인도 자신이 나서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선뜻 나서지 못하고 망설였다. 플루마가 고민하는 짧은 시간···.
“제가 탱을 맡을 테니 플루마님도 딜에 신경 써주세요.”
“엘리야, 가능하겠어?”
“힐탱은 전에도 몇 번 해봤어요. 이번 상대가 상상 이상이긴 하지만 저희 길드원들이 도와주면 못할 것도 없지 싶네요.”
“그럼 엘리야님이 탱커를 잡는 동안 다들 딜에 최선을 다해주십시오.”
엘리야.
패자의시대 최고의 힐러로 알려진 유저로 ‘힐러사랑’길드의 길마이기도 했다. 사도 연합에는 엘리야를 비롯해 힐러사랑 길드에 소속된 고렙 힐러들이 다수 가입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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