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자의시대 2 (109)
노인이 테러범들의 무리 속으로 뛰어들어 난전을 벌이는 동안 쓰러져있던 아머슈트가 몸을 일으키는 모습을 보았다. 노인은 가장 위험한 것이 아머슈트란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있는 힘껏 아머슈트 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 속도를 이용해 무릎으로 아머슈트의 옆구리를 찍었다.
“까앙”
그 육중한 아머슈트가 옆으로 굴렀다. 빗발치는 총알과 함께 노인은 아머슈트의 뒤로 숨었다. 바닥에 쓰러져있는 아머슈트가 좋은 엄폐물이 되고 있었다. 노인은 아머슈트 뒤에서 총알도 피하면서 등 쪽 장갑을 뜯어내 집어 던졌다. 그리고 장갑이 뜯긴 등에 손을 찔러 넣었다.
아머슈트의 키는 2m 50. 사람이 뒤쪽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형태였다. 노인의 손은 아머슈트의 조종사의 심장을 터트렸다. 당연히 아머슈트 조종사는 죽었을 것이고. 노인은 아머슈트와 같이 누워있다가 두 발로 힘껏 아머슈트를 밀었다. 노인에 의해 밀린 아머슈트가 총을 쏘아대던 테러범들 쪽으로 밀려가자 테러범들의 진형이 흐트러졌고 그때를 같이해 노인은 다시 한번 테러범들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김태호 회장은 누구보다 더 노인과 가까이 있었다. 따라서 노인이 하늘로 솟구쳤을 때 크게 당황했다. 노인은 자신의 우상이었으며 존경했고 아버지처럼 모시던 분이었는데 그 노인의 움직임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김태호 회장은 경호원들의 인의 장막 속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총성과 부서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을 때 자신보다 노인을 더 걱정했다. 그리고 총성이 멎었을 때 김태호 회장은 이대로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너희들 비켜라.”
김태호 회장은 사람 앞에 나서길 싫어하고 천성적으로 소리를 지르거나 화를 잘 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순간만큼은 목소리를 높였다.
강화 인간으로 변한 경호원들이 비켜서자 김태호 회장은 앞으로 걸어 나왔다.
김태호 회장은 경호원들의 등에 가려 안전방에 설치된 모니터 화면을 볼 수 없었지만, 경호원들은 모두 보고 있었다. 이들은 김태호 회장과 같이 온 노인이 아머슈트는 물론 30명의 무장병력까지 해치우는 것을 다 보고 있었던 것이다. 상황이 끝났기에 김태호 회장이 나올 수 있도록 비켜선 것이기도 했다.
김태호 회장은 경호원들을 헤치고 나오며 모니터에 비친 노인의 모습을 보았다. 가슴속 깊이 무언가 올라오며 울컥했다. 천천히 걸어 김태호 회장은 안전방을 나섰다. 옆에는 강화 인간으로 변한 박신우 경호팀장이 방패를 들고 김태호 회장을 보호하며 걸음 속도를 맞췄다.
도란의 정원은 불빛이 꺼져 있었다. 비상등과 멀리 창으로 들어오는 달빛과 도시의 밤빛으로 그럭저럭 사물을 볼 수 있었다. 노인은 숨을 고르는 듯 서 있었는데 이쪽을 보고 있었다. 김태호 회장이 노인에게 다가갈수록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노인의 인조 피부는 모두 벗겨져 있었다. 당연히 옷도 모두 사라져 버린 상태였다. 전신에 피를 뒤집어쓰고 있어서 마치 피부가 붉은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나 김태호 회장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노인의 피부는 노인의 피부 속 기계 몸은 붉은색이 없음을······.
노인은 적들과 싸우면서 수많은 총탄을 맞았던 것이다.
김태호 회장은 자신의 겉옷을 벗어 노인에게 걸쳐주었다. 그때 도란 내부로 강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헬리콥터 소리를 비롯한 각종 기계음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남양주에 있던 퓨쳐홀릭의 보안 팀원들이 이제야 몰려온 것이었다.
도란의 깨진 창문 쪽에서 김태호 회장의 전용 비공정이 머리를 들이밀었다. 기체의 삼 분의 일이 건물 안쪽으로 들어왔다. 김태호 회장은 말없이 노인을 감싸 안은 체 비공정에 올라탔다. 김태호 회장을 옆에서 지켜주었던 경호실장을 비롯한 경호팀 고참들은 비공정에 올라타는 김태호의 눈에서 피눈물이 흐르는 것을 보았다. 오랫동안 김태호 회장을 모셨지만, 그가 우는 모습은 노인이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와 오늘. 단 두 번이었고 그때마다 김태호 회장은 피눈물을 흘렸다. 경호원들은 오늘 처음으로 김태호 회장이 무섭다고 느껴졌다.
비공정은 경호원들까지 뒤로한 체 김태호 회장과 노인 단 두 사람만 타고 있었다.
김태호 회장은 계속 울먹이고 있었다. 이를 보던 노인이 입을 열었다.
“자네 집에 빈방이 많다고 했던가? 앞으로 내가 신세 좀 져야겠네.”
노인은 일이 이 지경으로 된 이상 모르긴 몰라도 김태호를 지켜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노인은 자신의 사이보그 몸이 군사용이란 것을 알았고 몇 차례 사이보그 병사들을 훈련하면서 상상 이상의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김태호를 죽이기 위해 테러범들이 몰려온 순간 노인은 당연히 몸이 반응했고 자신도 아머슈트를 상대로 수십 명의 무장 테러범들을 상대로 이렇게 잘 싸울 줄 몰랐다.
그리고 확신했다. 게임 속 무쏘의뿔 캐릭터를 움직이듯 현실의 사이보그 몸 역시 생각하는 대로 자유자재로 움직인다는 것을.
김태호는 뜻하지 않은 노인의 말에 울음을 멈출 수 있었다.
“저 정말입니까?”
“효선이가 섭섭해하긴 하겠군.”
김태호는 혼자 사는 노인에게 자신의 집에서 같이 살기를 예전부터 권유한 바 있었다. 노인은 지금껏 거절했는데 지금 승낙을 한 것이다.
김태호는 슬픔 속에서 기쁨의 싹이 터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김태호가 느끼는 기쁨의 싹과는 별개로 오늘 벌어진 일에 대한 분노는 거대하게 온몸을 잠식해갔다.
‘절대로 가만 안 둔다···.’
42. 엘리야.
사도 연합의 유저들의 속속 접속했다. 죽은 순서대로, 접속한 순서대로 유저들은 새로운 환경이 눈에 들어오자 모두 한숨을 내쉬었다. 다 잡은 우돌타를 놓친 것도 화가 날 일이었지만 무엇보다 마계 추격대 놈들에게 뒤치기 당했다는 것에 대한 분노가 가시질 않았다.
사실 소마 대륙에서도 유저들이 보스몹 잡을 때를 기다렸다가 뒤치기하고 몹을 빼앗는 경우는 흔한 일이었다. 사도 연합에 속해 있는 유저들은 대부분 그런 일을 한두 번 이상 했었다. 다만,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로 했던 짓거리고 이곳 천계에서 자기들이 당한 게 분하고 화가 난 것이다.
“토르님, 우리 쪽 인원 일부가 추격대 놈들에게 붙잡혀 있다고 하네요.”
토르는 퀘스트 창을 열어 가야 하는 길을 살폈다. 퀘스트를 직접 받은 토르는 퀘스트 목적지에 대한 길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자세한 정보는 아니었지만,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는 가르쳐 주고 있었기 때문에 이점 하나만으로도 퀘스트를 수행하는 데 있어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몰랐다. 생전 처음 오는 곳을 헤매고 다녀야 하는 것처럼 난처한 일이 없을 것이다.
패자의시대 게임의 퀘스트는 퀘스트를 주는 자와 받는 자 사이의 친밀도에 따라 퀘스트의 정보와 설명에 있어 큰 차이가 났다. 이번 토르가 받은 우도벨의 퀘스트는 목적지를 알려주는 친절함까지 있는 것인데 이는 토르와 우도벨이 친하진 않지만 우도벨의 간절한 바람이 퀘스트의 친절도에 영향을 미친 경우였다. 예전에 헤임달 팟원들이 ‘성물’퀘스트를 하기 위해 소마 대륙의 북쪽을 헤맬 때는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듯 개고생하며 한 것에 비하면 이번 사도 연합이 수행하는 퀘스트는 난이도와 비교하면 완전 꿀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일단 저희는 목적지를 향해 출발하겠습니다. 붙잡혀 있는 분들은 추격대 애들이 다 풀어 줬다고 하네요. 그분들과는 따로 길 안내를 해서 중간에 만나도록 하겠습니다.”
“토르님, 일부러 포로들을 풀어줘서 본진인 우리와 만나도록 한 거 아닙니까?”
“그렇겠지요. 하지만 포로된 분들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저희가 좀 더 신중하게 일을 처리하도록 해야겠지요. 그리고 저희도 정찰대를 운영하겠습니다. 발 빠른 분들로 해서 본진에 앞서 길 안내를 하고 쓸데없이 사냥하는 일은 하지 않겠습니다. 퀘스트 완료를 최우선으로 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들 토르의 말에 수긍했다. 자신들은 추격대가 인원이 더 많지만 맞싸우면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게임 초기부터 탑랭커로 이름 날린 유명 유저들로 구성된 사도 연합이다. 이들의 측면에서 보면 마계 추격대는 일부만 빼고 듣보잡 유저들이었고. 장비나 렙이 같다고 해도 게임의 경험은 같을 수 없었다. 하지만 싸움이라는 게 보이지 않는 부분의 영향이 많이 작용했다. 변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서 다들 조심할 생각을 한 것이다. 사도 연합의 목적은 사냥이 아니라 퀘스트 완료가 우선이니까.
“그럼 라면왕님이 정찰대 파장을 맡아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라면왕’은 사도 연합의 최고 궁수유저였다. 라면왕은 신규 지역 정찰에 필요한 유저들로 12명씩 두 개 조를 짠 뒤 바로 출발했다. 뒤이어 사도 연합의 본진이 퀘스트 지역을 향해 출발했다.
무쏘의뿔이 접속했을 때는 이미 추격대의 모든 유저들이 접속한 상태였다. 다른 유저들에 비해 한 시간 가까이 접속이 늦었던 이유는 김태호가 노인을 북극과 가까운 시베리아의 북동쪽에 있는 별장에 데려다준 탓이었다. 김태호는 자신이 암살당할 뻔 하자 대한민국의 정부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고 퓨쳐홀릭의 중요 연구소와 사이보그 훈련소가 있는 시베리아로 거처를 옮겨 버렸다. 이곳은 김태호의 사유지로 통일되기 전 대한민국의 남한 크기였다. 일체 외부인의 접근이 금지된 곳으로 퓨쳐홀릭의 비밀 연구소가 곳곳에 있었고 무엇보다 사이보그 연구와 실험, 훈련시설이 있었다. 만약, 또다시 테러범들이 쳐들어온다면 힘으로 눌러 버릴 수 있는 시설이 갖춰진 곳이다.
“늦어서 미안하네.”
무쏘의뿔이 사과를 했지만,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최고야는 볼 일이 있다고 접속을 안 했는데 최고야의 접속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토르쪽 애들이 출발했다고 합니다.”
헤임달이 보고를 하며 포로들 쪽을 눈짓했다.
“저들을 풀어주게.”
“사도 연합 본진과 합치겠습니까?”
“버리기엔 너무 아깝지 않겠나?”
추격대 간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포로들은 우돌타와 싸울 때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있던 유저들이었다. 그만큼 강한 유저들이란 얘기였다. 특히 엘리야는 힐러 사랑 길드의 길마였고 패자의시대 최고의 힐러였다.
헤임달이 포로들이 있는 쪽으로 갔다.
“이제부터 여러분들은 자유입니다.”
“우릴 풀어주고 본진과 합류하는 걸 보려고?”
“당연하지요. 저희는 사도 연합과 싸워야 하잖습니까?”
“우리보고 배신자가 되라고?”
“토르도 예상할걸요. 한번 물어보시죠?”
그때 엘리야가 나섰다. 포로 중 사도 연합 간부는 엘리야 혼자였다.
“감사합니다. 저희는 본진과 합류하기 위해 곧 출발해야 할 것 같습니다.”
헤임달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피해 주자 사도 연합 포로들이 길을 나섰다.
엘리야는 포로들, 자신 세력원들을 파티로 구성해 이끌었다. 일반적으로 중요한 일이 있을 때 길드 창을 단속했다. 간부들끼리 사용하는 채널이 있었고 파티원들 공격대원들이 사용하는 채널이 따로 있었다. 인원이 많다 보면 알게 모르게 길드 내 정보가 새 나갔기 때문에 길드창 단속은 상식이었다.
“우리는 본진과 곧 합칠 거예요. 그리고 저들과 한번 맞붙을 겁니다.”
“우리가 미끼가 되는 거군요?”
“맞아요.”
엘리야는 파티원들에 상황설명을 하며 빠르게 이동했다.
일반적으로 사냥터의 안전지역은 많지 않았다. 사냥하다 죽었을 때 재수 없으면 꽤 먼 곳에 부활해서 원래 사냥터로 뛰어가다 날 새는 경우가 허다했다. 사도 연합이 우돌타에게 죽은 곳과 부활한 안전지역이 아주 멀었는데 이들에게는 결과적으로 유리한 요소가 되었다.
그동안 추격대와 사도 연합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거리가 유지 됐는데 지금은 그것이 깨진 것이다.
엘리야 팟이 출발하고 얼마 뒤 추격대의 정찰대가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추격대 본진이 그 뒤를 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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