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자의시대 2 (111)
“브루스님, 이쪽 길이 맞는 건가요?”
“어···. 그렇지 않을까요?”
“풋.”
“우리 잠시 쉬면서 지도를 다시 확인해 보죠.”
허름한 로브를 입은 여섯 명의 유저들이 햇빛이 들어오는 자리에 돗자리를 깔았다. 마치 소풍이라도 나온 것처럼 이들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음식들을 꺼내 돗자리 가운데에 한 상 차렸다. 보리빵, 찐빵, 식빵, 주먹밥···. 등등 종류는 많았지만 모두 초급 유저들이 먹는 음식이었다. 게임 내 음식은 회복과 관련이 있었다. 맛도 현실의 음식과 비슷했는데 초급 유저들이 먹는 음식들은 값이 쌌고 싼 만큼 별 맛은 없었다. 같은 빵이라도 맛이 좋은 빵은 값이 비쌌다. 이들은 모두 15렙을 갓 넘은 초보 유저들로 좋은 음식을 먹을 만큼 돈이 많지 않았다.
“이쪽 길이 맞아요. 지도를 한번 보세요.”
브루스가 돗자리 가운데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지도를 펼쳐 보였다.
“지도를 보면 맞는 것 같은데요.”
“그럼 왜 큰 호두 마을이 안 나오죠?”
“음······. 일단 이 근처를 모두 뒤져보면 나오지 않을까요? 지도가 정확하지는 않아도 얼추 그 근방을 가리키겠죠.”
“자, 그럼 이쪽으로 가 봅시다.”
여섯 명의 유저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웃고 떠들며 산을 올랐다.
‘미즈나’시는 패자의시대 초보유저들이 캐릭터를 처음에 만들어 시작하는 대표적인 도시 중의 하나였다. 유저들은 이 도시에서 10렙이 될 때까지 각종 초보 퀘스트를했고 10렙이 넘으면 도시 밖의 퀘스트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15렙이 됐을 때 직업을 가질 수 있는 직업 퀘스트를 함으로써 비로소 초보 딱지를 뗄 수 있었다. 15렙은 직업 퀘스트를 할 수 있는 최소 렙으로 보통 20렙쯤 됐을 때 직업을 가졌다.
브루스는 ‘치유와 회복의 신 휘스리힘’의 사제가 되기 위해 직업 퀘스트를 수행하는 유저였다. 미즈나 시의 휘스리힘 사원에서 퀘스트를 받고 2차 퀘스트까지 완료했을 때 이어지는 3차 퀘스트로 미즈나 시의 인근 ‘하란’ 산에 있는 큰 호두 마을에 가서 봉사하는 것으로 3차 퀘스트가 완료되었다. 휘스리힘을 모시는 사제가 되는 직업 퀘스트는 총 5단계로 2차까지는 도시 안에서 할 수 있었지만 3차 퀘스트부터는 도시 밖으로 나가야 했다. 그래서 초보 유저들은 주로 3차 퀘스트부터는 파티로 움직였다. 아무래도 도시 밖의 퀘스트는 초보 유저들한테 위험한 요소가 많았기 때문이다.
브루스는 휘스리힘의 사제 퀘스트를 하기 위해 6인 팟을 구성해 지금 큰 호두 마을이 있는 하란 산을 헤매고 있었다. 하란 산은 총 7개의 산으로 이뤄져 있었고 그 산을 모두 합쳐 하란 산이라 불렀다. 즉 재수 없으면 하란 산 안에 있다고 하는 큰 호두 마을을 찾기 위해서 7개의 산을 모두 뒤져야 할 수도 있었다.
“아오오오오오오···.”
해가 지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하란 산을 헤매고 있었지만, 맹수를 볼 수 없었다. 그런데 해가 지려고 하자 늑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인근에 늑대가 있나 본데요?”
“그런 거 같네요.”
“우리···. 괜찮을까요?”
“6명인데 늑대 한 마리 못 잡겠습니까?”
브루스가 지팡이를 들어 보였다. 이들은 하란 산을 오르면서 모두 지팡이를 하나씩 구해서 들고 있었다. 아무래도 산을 오를 때 지팡이가 있으면 편했다. 그리고 브루스가 로브를 슬쩍 제쳐 허리에 차고 있는 단검을 살짝 보여주었다.
“오오······.”
다른 일행들이 모두 감탄하며 안도했다. 브루스를 파티장으로 6인 파티인 이 팟은 5명이 여자 유저였고 브루스 혼자 남자였다.
아직 직업이 정해지지 않은 저렙의 유저들. 15렙 이하의 유저들 중 몽둥이가 아닌 진짜 무기. 단검이라도 갖고 있다는 것은 굉장한 자랑거리였다. 도시에서 간단한 퀘스트를 해서는 돈을 모으기 힘들었고 돈이 없어서 좋은 음식이나 좋은 장비를 가질 수 없었다. 그런데 진짜 단검을 갖고 있다는 것은 누군가 실력 있는 조력자가 있거나 게임 초반부터 현질을 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오늘 밤은 큰 호두 마을에서 잠을 자도록 하죠.”
브루스의 바램이었고 다들 믿었다. 그런데 산속에서 해는 빨리 졌고 해가 지자마자 늑대의 울음소리는 더 크게 더 많이 들려왔다.
“오오오오오오······.”
“아오오오오오오오오오······.”
“저기 브루스님. 늑대가 한두 마리가 아닌데요?”
“............”
브루스는 말이 없었다. 길을 모른 체 산속을 헤매는 중이다. 별과 달은 밝고 횃불을 들고 있었지만, 밤은 어두웠다. 브루스를 선두로 뒤쪽으로 5명의 일행이 몸을 바짝 붙이고 따랐다.
얼마나 갔을까. 사방에 도깨비불 같은 것들이 브루스 파티원들을 에워싸고 있었다.
“크르르르르···.”
“크그그그르르르르···.”
늑대 떼에 포위되고 만 것이다. 굳이 말을 안 해도 모두 상황파악을 할 수 있었다.
“모두 마음 단단히 먹으십시오. 정 안되면 차라리 죽어서 안전지역에서 부활하는 거죠. 하하하하.”
브루스가 웃자고 한 말이었지만 일행들 모두가 브루스를 째려봤다. 이 많은 늑대를 상대로 무사하긴 힘들어 보였다. 게임을 하다가 이런저런 이유로 죽는 건 흔한 일이다. 특히 저렙일 때는 원래 잘 죽기 마련이다. 그런데 브루스 파티원들의 경우 처음으로 도시 밖으로 나온 거라 아직 패자의시대를 하면서 죽어본 적이 없었다.
“컹 컹···.”
20여 마리의 늑대 중 한 놈이 달려들었다. 도시 인근의 산에 있는 늑대라서 그런지 그렇게 크진 않았는데 늑대 중에서도 렙이 높은 놈들은 황소만 하기도 했다.
우두머리인듯한 한 놈이 달려들자 주변의 다른 놈들도 달려들었다. 남자인 브루스는 짧은 단검보다는 지팡이를 무기 삼아 휘둘렀고 여자인 다른 파티원들은 지팡이를 창처럼 앞으로 내밀어 늑대들이 달려드는 것을 막았다. 그런데 이 방식은 늑대가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지 늑대는 잡는 방식은 아니었다. 시간이 흐르고 더 많은 늑대가 공격했다. 인간들을 얕잡아 본 것이다.
“아 미치겠네···.”
다들 본능적으로 방어했다. 도저히 이 난국을 벗어날 기미가 안 보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힘이 빠졌고 브루스 말처럼 그냥 늑대한테 죽은 뒤 부활해 다시 시작할까를 다들 고민했다.
“깽.”
“캐깽···.”
“아니, 쪼렙들이 하란 산에는 무슨 일이야?”
브루스 파티원들을 에워싼 늑대들 바깥쪽으로 한 무리의 유저들이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늑대들이 빠르게 정리되었다. 일부 늑대들이 그들을 향해 달려들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순식간에 도망쳐 버렸다.
늑대 한 마리도 잡지 못한 브루스 파티원들로서는 완전 백마를 탄 기사를 만난 것처럼 기뻐하며 환호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댁들은 무슨 생각으로 하란산에 온 거요?”
“저희는 퀘스트 하러 왔는데요?”
“무기도 없이?”
“무기가 필요한 퀘스트인줄은 몰랐거든요. 하하하하.”
브루스의 말에 모두가 크게 웃었다.
“여러분 덕에 살 수 있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브루스가 대표로 한 말이지만 나머지 5명도 똑같은 마음이었다.
“보아하니 하란 산에서 사냥할 렙은 아닌 거로 보이는데요?”
“저희는 하란 산에 있는 큰 호두 마을 퀘스트 하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큰 호두 마을? 하란 산에 그런 마을도 있었나? 여러분들은 본 적 있으신가요?”
이 말을 한 유저는 몸을 돌려 자신이 파티원들에게 물었다. 어둠 속이라 조금 떨어져 있어도 잘 안 보였지만 이들이 가까이 다가오자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내가 일주일째 하란 산에서 사냥을 했지만 큰 호두 마을은 본 적이 없는데요.”
총 6명. 패자의시대의 기본 파티인 6인 팟이었다. 모두 방어구는 허접해 보여도 무기를 다 들고 있었다. 전형적인 사냥 팟이었다.
“저희가 받은 퀘스트는 하란 산의 큰 호두 마을로 가서 퀘스트 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요?”
“아마, 하란 산 동쪽 입구 쪽의 어느 마을 아닐까 싶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말을 한 유저에게 쏠렸다. 검을 든 중년의 모습을 한 유저였다.
패자의시대는 캐릭을 만들 때 성별을 임의로 변경할 수 없었다. 여자는 여자 캐릭으로, 남자는 남자 캐릭을 만들어야 했다. 외모도 실제 본인의 모습을 기본으로 약간의 수정은 가능했지만,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바꿀 수 없었다. 다만, 바꿀 수 있는 최대치로 모든 부분에서 수정한다면 원래의 모습과 많이 바뀌기는 했다. 이 사람처럼 중년의 모습을 하고 있다면 실제로 나이가 많을 가능성이 컸다.
중년의 남자가 말을 계속했다.
“하란 산 동쪽이 경사가 완만하고 늑대 같은 맹수들이 거의 없어요. 엔피씨들이 밭농사 지으며 정착해 사는 마을이 두세 개 있는 것 같았습니다.”
“하란 산 동쪽이면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쪽은 몹이 없었어요.”
미즈나 시에서 나와 하란 산에 닿게 되는 곳은 남쪽이었다. 브루스 파티가 하란 산에 도착한 곳은 남쪽. 그들이 북쪽과 서쪽을 헤매다가 이들과 만난 것이었다.
“아셨죠? 여러분들은 길을 잘못 든 겁니다. 그럼 우리는 다른 사냥터로 이동합시다. 시간이 없어요.”
양손 검을 든 덩치 큰 이 유저는 ‘룰루짱’라는 이름의 유저로 하란 산 사냥 팟의 파티장이었다.
“저 분들은 어떻게 하죠?”
중년의 남자가 룰루짱에게 묻자 룰루짱이 인상을 쓰며 대답했다.
“무쏘님, 그 렙에 남 걱정할 여유가 있으신가요?”
“......”
“자, 자 해뜨기 전에 늑대 500마리를 잡아야 보너스 경치를 먹는 거 아시죠? 빨리 가죠.”
룰루짱의 파티원들은 빨리 사냥하러 갈 생각밖에 없었다.
브루스 파티원들은 룰루짱 파티원들이 대화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해뜨기 전에 저분들은 다 죽을 텐데요?”
“초보 때는 원래 죽고 그러는 겁니다. 게임에선 많이 죽을수록 강해지는 거예요.”
“산 밑에까지 데려다주면서 늑대를 잡고 서두르면 늑대 퀘스트를 완료할 수 있을 거 같은데요?”
“이 양반이 허접해서 도움도 안 되는 거 파티에 끼워 줬더니만 주제 파악도 못 하네.”
룰루짱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무쏘’라고 불린 중년의 남자는 룰루짱의 큰 소리에 움찔하며 뭔가 할 말이 많은 것 같았으나 말은 못 하고 우물쭈물했다. 다만, 표정이 좋지 않아 기분이 나쁘다는 건 누구나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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