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자의시대 2 (116)
천족이 덮어쓰고 있던 담요를 벗었다.
“아아······.”
여기저기서 비명 같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머리가 주무른 찰흙처럼 찌그러져 있었고 눈은 똑바르지 않고 마치 흘러내린 피부에 올려져 있는 것 같았다. 코는 돼지코에 입은 흘러내린 피부에 반쯤 가려 있었다. 치아는 대부분이 빠져 남아 있는 게 몇 개 안 됐고 가느다란 팔에 손가락이 세 개는 아주 길고 두 개는 아주 짧았다. 갈비뼈가 드러나 보이는 몸통에 척추뼈가 올록볼록 튀어나와 있었다. 이 천족은 앉아 있었기 때문에 하체를 볼 수 없었지만, 정상은 아닐 거라는 확신을 다들 했다.
“우리도 신들이 만든 생명체요. 처음엔 다른 천족들처럼 같은 곳에 살았소. 그런데 우리의 외모가 더럽고 추악하다고 배척당하기 시작해 어느 날 갑자기 우리를 학살하기 시작했소. 우리는 살기 위해 도망쳤고 오라몬 산맥을 넘었소. 오라몬 산맥을 넘으며 우리는 신과 천족의 피해를 벗어났지만 수많은 거대 몬스터들을 피해 수백 년간 떠돌다가 이곳 떼세로 산에 와서 비로소 정착할 수 있었소. 풍요롭진 않지만 우리는 지금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소. 다만 추하게 생겼다는 이유로 학살당했던 지난날을 잊지 않고 있기에 신과 천족을 싫어할 수밖에 없는 것이오. 만약 당신들이 천족이었다면 우리는 목숨을 다해 당신들과 싸웠을 테지만 인간이기에 그나마 이 정도라도 해주는 것이오.”
나로담의 이야기를 들으니 다들 숙연해졌다.
추하게 생긴 건 맞지만 그렇다고 학살했던 것은 너무 심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들이 버림받은 천족이었던 것이고 자신들을 환대하지 않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들이 모피 담요를 뒤집어쓰고 있는 것은 자신들의 추한 외모를 외부인에게 숨기기 위한 것으로 한편으로 손님들에게 불쾌함을 주지 않기 위한 것이기도 했고 다른 한편으론 외모로 인한 불필요한 오해와 싸움을 피하려고 한 것이다.
“숙식을 제공해주신 것에 감사하오. 당신들에게 절대 피해가 안 가게 하겠소.”
토르가 나로담에게 고개를 숙였다. 나로담이 담요를 다시 뒤집어쓰고 일어서 강당을 나갔다.
“뭐···. 그렇다 치고. 앞으로 메르세비아를 어떻게 처리할지 연구 좀 하죠.”
2500명의 유저들이 모닥불을 중심으로 둘러앉았다. 메르세비아와 한번 싸워봤으니 그를 바탕으로 공략 방법을 찾기 위한 토론이 벌어졌다. 그리고 날이 새자마자 다시 사도 연합 유저들이 길을 나섰다. 사도 연합 유저들 역시 사단도난 시의 주민들에게 피해가 안 가게 새벽에 길을 나선 것이다. 될 수 있으면 자신들도 그들의 눈에 띄지 않게 하려는 배려였다. 어쨌든 자신들은 신의 사도. 저들로서는 원수들과 한패였으니······.
44. 버림받은 천족2.
“와아아아······.”
“와아······.”
사도 연합과 싸움에서 대승을 거둔 추격대의 유저들이 모두 함성을 질렀다. 협곡을 따라 메아리쳤기 때문에 함성을 더 크게 들렸다. 모두 주변의 유저들과 얼싸안고 춤을 추기도 했다.
추격대의 대부분의 유저들은 ‘대양의바람’길드 연합과 ‘정의 연합’과의 전쟁에서 정의 연합에 속해 있던 유저들로 이들은 거대 길드 연합인 대양의바람 길드에게 연전연패했던 기억이 있었다.
거대 길드 최고의 최강의 유저들인 대양의바람 길드 연합. 그에 비해 중소길드와 무길드 유저들의 연합인 정의 연합. 천계의 협곡에서 본의 아니게 그때와 거의 같은 구도로 맞붙은 것인데 사실상 처음으로 유저들간의 싸움에서 이기게 되자 감정이 북받쳐 울음을 터트리는 유저도 많았다.
잠깐 서로 기쁨을 나누고 감정을 추스르는 것을 두고 있다가 헤임달이 간부들 챗창에 말했다.
“포로들이 많은데 어떻게 할까요?”
“저들을 쫓다가 함정에 빠지지 않았습니까? 이번에는 그냥 데리고 다니죠.”
“그래요. 대략 500여 명쯤 되는데 이들을 구속하는 것으로 토를 패거리들의 전력은 약화하는 것이죠.”
“그런데 토르 애들의 위치는 어떻게 파악하죠?”
이것이 문제였다. 사도 연합 유저들이 죽어서 부활한 곳이 어딘지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당장 이 협곡의 지리도 몰랐고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하는지 아무도 몰랐다.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우리 쪽 탐험가분들의 도움을 받으면 토르 패거리들이 가는 곳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저들이 별 다섯 개짜리 퀘스트 하러 가는 것이니 결코 티가 안 날 수 없어요.”
“그렇게 합시다.”
다들 동의하자 ‘나이스’가 나섰다.
“그럼 제가 실력을 발휘할 때가 온 건가요?”
게임내 최고의 모험가인 나이스가 어깨를 으쓱하며 나왔다. 전투력이 부족해 항상 민폐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제대로 실력을 보일 때가 온 것이다. 모험가라고 해서 사도 연합의 부활지를 알아내거나 하는 스킬은 없었다. 다만 이들이 있는 협곡의 지도를 만들어 벗어남으로써 사도 연합의 추격을 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정도. 협곡을 벗어난 이후에도 사냥을 안 하고 추격만 집중한다고 하면 결국 찾아낼 수밖에 없다. 사도 연합에 마스터 탐험가가 있어서 그들도 싸우지 않고 도망친다면 모를까. 탐험가를 비롯한 추격술에 능한 직업군들이 동원되면 쫓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샤도임이 고르키를 쫓았듯이···.
나이스가 지도를 만들기 위해 애를 쓰는 사이 추격대 유저들은 자리를 잡고 쉬었다. 그리고 고르키와 콩코노메가 합류했다.
무쏘의뿔을 비롯한 모두 두 흑마법사가 거대 바위 몬스터인 순프라를 반쯤 죽여 놓고 왔다는 것은 모르고 있었다.
“고생했다.”
무쏘의뿔은 고르키와 콩코노메가 거대 몬스터를 막아낸 것을 흡족해했다. 과연 이 둘이 거대 몬스터의 발을 잡아 둘 수 있을까 걱정도 했는데 충분히 그 역할을 다한 것이다.
반나절이 지나서 나이스에 의해 협곡의 일부 지도가 완성되었다. 지도를 바탕으로 추격대가 길을 나섰고 사방으로 정찰대가 퍼져나갔다. 그리고 3일이 지나 추격대는 협곡 지대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협곡의 지도를 완전히 만든 건 아니지만 혹시 나중에라도 이곳에 사냥하러 온다면 큰 도움이 될 재산이었다.
추격대가 협곡을 빠져나왔을 때 이들을 당혹하게 만든 건 추위였다. 이들 역시 추위에 대한 대비가 전혀 없었던 탓이다.
“주변에 잡몹들 있으면 잡으면서 가겠습니다.”
보통 추운 곳에 사는 몹들은 추위를 이기기 위해 두툼한 털이 나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 경우 몹을 잡으면 털가죽을 떨어뜨렸고 이것을 주워 대충 걸치기만 하더라도 어느 정도 추위는 이길 수 있었다. 재봉 숙련도가 높은 유저가 있다면 옷을 만들겠지만 그런 비전투 직업의 유저가 전쟁에 참여했을 리가 없으니 그냥 털가죽을 걸치는 것이 고작이었다.
사도 연합이 퀘스트를 진행하기 위해 빠르게 목적지로 향한 것에 비해 추격대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추위를 면하고자 보이는 잡몹들을 다 때려잡으며 나아갔다. 가다가 보스몹이 보이면 피했고 잡몹들은 잡으며 그렇게 일주일여를 헤맨 끝에 거대한 산 밑에 당도하게 됐는데 정찰대로부터 연락이 왔다.
“꽤 큰 도시를 발견했는데요? 어떻게 할까요?”
천계의 도시는 천족이 사는 곳이니 마계의 편에선 유저들로서는 적들의 도시였다.
“아마, 토르 패거리들이 그 도시에 머물렀다가 떠났겠지. 신경 써서 단서를 찾아봐.”
별 다섯 퀘스트를 도시에서 해결하는 경우는 없었다. 최고 난도의 퀘스트라면 분명 큰 전투를 벌이거나 보스몹을 잡아야 하는 게 상식이었다.
추격대는 도시를 크게 돌아서 이동했다. 천족들과의 마찰은 최대한 피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들이 오래 가지 않아 사도 연합의 위치를 찾아낼 수 있었다.
추격대가 도시를 크게 돌아서 피해갔는데 산 위쪽의 한쪽 하늘이 검게 변하며 이상 현상이 벌어지는 것을 멀리서도 볼 수가 있었다. 그쪽으로 정찰대가 몰려갔고 이들이 기다리던 답이 돌아왔다.
“토르 패거리들이 하늘을 나는 거대 뱀과 싸우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 진행됐지?”
“시작된 지 얼마 안 된 것 같아요.”
“빨리 그쪽으로 가야겠습니다.”
추격대가 빠르게 산을 올랐다. 정찰대의 말대로 하늘을 나는 거대 뱀을 잡는 것이 퀘스트라면 막아야 했다. 추격대가 사도 연합을 뒤쫓으며 애를 먹은 것 중의 하나가 협곡을 벗어난 이후 전혀 싸우지 않고 이동한 것 때문이었다. 몹과 싸우게 되면 흔적이 남는데 사도 연합은 전혀 싸우지 않았고 그런 사도 연합을 뒤쫓는데 시간을 많이 소비한 추격대였다. 그런데 이곳에서 보스몹과 싸우고 있다는 건 반드시 퀘스트와 관련되어 있다고 봐야 했다.
쌓인 눈이 장애가 되지 않을 만큼 빠르게 산을 오른 추격대가 완만한 지대에 들어섰을 때. 지금까지 왔던 눈 덮인 산과 전혀 다른 모습에 다들 놀랐다. 마계에서도 보기 힘든 그런 광경이었다.
검은 구름 사이로 붉은 불길이 치솟고 대지는 눈이 모두 녹은 것인지 원래 없는 것인지 크고 작은 바위 천지였다. 유저들이 생각하는 천계의 모습과 너무 달랐다. 천둥소리와 함께 생전 처음 들어보는 괴수의 울음소리가 메아리쳤고 저 멀리 유저들이 싸우며 스킬을 난사하는 모습이 보였다.
모두가 걸음을 멈추고 망설였다. 본능적으로 몸이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어떻게 할까요?”
“일단 내가 가서 염탐을 해보도록 하지.”
무쏘의뿔도 이 상황을 보고 조심스러워했다. 무쏘의뿔도 위험한 상황이라 판단해 혼자 은신한 채 사도 연합과 괴수가 싸우는 곳으로 향했다. 하늘을 나는 뱀 괴수의 브레스가 사도 연합을 휩쓸고 있는데 사도 연합이 애를 쓰긴 하지만 결과는 정해져 보였다.
무쏘의뿔은 사도 연합이 아니라 하늘을 나는 뱀 괴수에 집중했다. 얼마 전 천계와 싸울 때 정령계에서 소환한 용 두 마리보다 크기는 약간 작았지만, 외적으로 훨씬 단단하고 세 보였다. 실제로 브레스를 연속으로 쏘아대는 것은 큰 충격이었다. 무쏘의뿔은 저 괴수를 자신이 잡는다는 것을 가정하며 방법을 생각했다. 사도 연합이 버티면 버틸수록 무쏘의뿔은 하늘을 나는 뱀 괴수의 패턴과 특징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토르는 날이 새자 사도 연합을 이끌고 다시 산을 올랐다. 오늘로 벌써 5번째. 하루에 한 번 5일째 메르세비아 공략 중이다. 게임에서 보스 한 놈 잡는데 며칠 걸리는 것은 흔한 일은 아니지만, 더러 있는 경우였다. 다만 사도 연합의 유저들은 모두 고렙에 속해 있었고 고렙이 된 이후로 이렇게 오래도록 보스를 잡는 일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피로가 쌓였지만 오랜만에 제대로 된 보스 레이드에 다들 신이 났다.
“이제 곧 나타날 테니 자리를 잡으세요.”
신기하게도 사도 연합이 경사가 완만한 이곳에 오기만 하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메르세비아가 나타났다. 드래곤의 경우 보통 자신만의 활동 지역이 있기는 했는데 침입자가 레어로 들어오지 않는 한 거의 제재를 하거나 하지 않았다. 어쩌다가 모르고 레어로 들어오는 유저들의 경우도 레어를 지키는 가디언들이 처리했기 때문에 실제로 드래곤이 직접 나서는 경우는 매우 드문 편이었다. 그리고 마계나 천계의 사냥터에서 많이 보이는 필드 보스몹 같은 경우 따로 활동 지역이 매우 좁은 편으로 그쪽으로만 가지 않으면 유저들이 피해 볼 일이 없었다. 그렇다고 필드의 거대 몬스터들이 드래곤처럼 레어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메르세비아는 드래곤처럼 지능이나 지성이 높지 않은, 필드 보스몹인 거대 몬스터에 가까웠는데 활동 지역이 대단히 넓은 편이었다. 특정 지역에 들어서기만 하면 멀리서부터 달려오니 말이다.
사도 연합의 유저들이 100명씩 공격대를 이뤄 25개의 공격대가 넓게 퍼져나갔다. 뭉쳐 있어 봐야 메르세비아의 브레스에 몰살당하니 소수 공격대로 여러 개 나눈 것이다. 지난 메르세비아 와의 싸움에서 나름 터득한 방법을 실행하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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