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자의시대 2 (126)
“아빠, 위험해.”
상태 이상은 방어와 저항력에 비례해 개인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었다. 상태 이상에 벗어난 유저들도 있었지만, 이들이 메르세비아의 혓바닥 그물을 피할 정도는 아니었다.
삐삐가 앞으로 튀어 나가며 변신했다. 삐삐의 기다랗고 날카로운 열 손가락이 메르세비아의 목을 움켜잡았다. 삐삐의 손가락은 모두 메르세비아의 목에 박혔고 날아오던 메르세비아가 멈춰버렸다. 둘의 힘 대결이 펼쳐졌는데 놀랍게도 삐삐가 메르세비아를 붙잡고 버텨내고 있었다.
메르세비아는 뱀처럼 옆으로 긴 형태의 거대 몬스터. 삐삐는 위로 길쭉한 인간형 몬스터라고 할 수 있었다. 둘의 크기 차이는 아주 컸지만, 지금처럼 삐삐가 메르세비아의 목을 붙잡을 수는 있었다.
목을 붙잡힌 메르세비아가 몸부림을 쳤지만, 삐삐가 양손에 힘을 주자 몸속으로 삐삐의 손가락이 더 깊숙이 파고 들어와 고통이 컸다. 메르세비아는 혓바닥으로 삐삐를 어쩌지 못하자 혓바닥을 거둬들임과 동시에 브레스를 뿜었다. 메르세비아와 삐삐의 거리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삐삐가 자신의 몸 주변으로 보호막을 쳤다. 원래 보호막은 삐삐의 기술중 하나였다.
메르세비아의 브레스가 삐삐의 보호막을 타고 옆으로 퍼져나갔다. 삐삐의 뒤쪽은 상태 이상에서 이제 막 풀려나고 있는 유저들이 몰려있었다. 삐삐가 방패가 되어 유저들을 막아주는 형국.
“회장님, 빨리 메르세이아를 각인하세요.”
개쫑이가 다급한 목소리로 최고야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어?”
“삐삐가 오래 못 버텨요. 삐삐가 죽기 전에 각인하세요.”
개쫑이의 이 말 한마디는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었다. 유저들이 죽는 거야 무슨 문제가 있겠느냐마는 삐삐가 죽는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삐삐가 아빠인 무쏘의뿔을 살리기 위해 나섰지만, 그 덕에 유저들 모두가 삐삐의 뒤에서 안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삐삐가 메르세비아에게 죽게 되면 유저들이야 죽는다 치더라도 무쏘의뿔에겐 엄청난 슬픔이 될 것이 뻔했다. 무쏘의뿔은 자신이 데리고 다니는 엔피씨들을 아주 많이 아꼈다. 자신이 지휘하는 엔피씨 병사들도 죽는 것을 싫어하는데, 하물며 딸처럼 따르는 삐삐라면···.
“나를 저쪽으로 올려줘.”
모두가 아무 말 없이 구경하고 있는데 최고야가 소리를 쳤다.
“꼭 성공해야 해.”
메르세비아에게 전력을 쏟아부었던 고렙의 마법사 유저들에 비해 그나마 힘이 많이 남아있는 루가 최고야를 들어 올려 삐삐의 옆으로 이동시켰다. 최고야가 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다들 이해했다.
최고야의 눈에 일그러진 삐삐의 표정이 들어왔다. 전력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최고야가 다시 메르세비아 나무 조각을 꺼내 들고 정신지배를 시도했다.
메르세비아의 브레스는 완전히 사기였다. 보통 브레스는 길든 짧든 멈추었다가 다시 뿜어야 했는데 메르세비아는 멈춤 없이 브레스를 계속 뿜었다. 그 바람에 삐삐의 보호막이 메르세비아의 보호막에 녹기 시작했다. 시간이 없음을 안 최고야가 더욱 집중해 메르세비아의 정신을 지배하려고 애썼다.
모두가 어쩌지 못하고 안타까워하며 바라보고 있는데 삐삐의 보호막이 바깥쪽으로부터 녹아내리며 보호 기능을 잃고 있었다. 원래 삐삐의 보호막은 대상을 완전히 감싸는 형태로 사용했는데 지금은 방패처럼 넓게 편 상태였다. 그 이유는 뒤쪽의 무쏘의뿔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삐삐의 보호막이 녹아내리며 대지에 두 발을 딛고 버티고 있던 삐삐의 두 다리도 함께 녹아 버렸다. 다리가 녹아 버리자 삐삐가 중심을 잃고 옆으로 쓰러졌다. 양손이 메르세비아를 붙잡고 있던 터라 메르세비아까지 같이 넘어졌다. 하지만 여전히 메르세비아는 브레스를 토해내고 있었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위기에서 포기하는 사람과 위기에서 더 빛을 내는 사람.
최고야는 후자에 속했다. 세계 최고의 기업 퓨쳐홀릭의 회장으로서 남들이 볼 때는 늘 승승장구 하는 것으로 보였겠지만 수많은 선택과 결단을 내려야만 했고 그 선택과 판단으로 죽고 사는 사람이 많았다. 지금 집 안에 자신을 죽이려고 한 대한민국 최고 실권자가 와 있다. 게임 속에선 수천 명이 최고야만 보고 있었다. 그들의 목숨이 최고야에 손에 달려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고 아버지처럼 따르는 무쏘의뿔이 아끼는 엔피씨들 역시 최고야의 손에 달려 있었다. 삐삐, 샤도임, 암살자 5인방, 고르키, 콩코노메······.
최고야가 더욱 집중했다. 삐삐의 보호막이 점점 줄어들며 녹아내리는 삐삐의 신체도 커져만 갔다. 삐삐는 자신의 몸이 녹아내리는 과정에서도 메르세비아의 목을 붙잡고 있는 손을 놓지 않았다.
두 발이 녹고, 두 무릎이 녹고, 골반이 녹고. 왼쪽으로 누워있는 삐삐의 오른쪽 어깨가 녹기 시작했다. 삐삐가 녹아내리면 뒤쪽의 모든 유저들도 브레스에 녹아 전멸하는 상황.
메르세비아의 몸에서 오색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전신이 비늘로 덮여 있는 메르세비아의 몸에서 비늘 사이로 빛이 나오며 밟게 빛났다. 그리고 빛이 줄어들면서 옅은 푸른색의 빛이 메르세비아의 전신을 감쌌다. 메르세비아의 머리 위로 조련사 최고야의 문장이 떠올랐다.
각인 성공.
메르세비아의 몸이 한순간이 흩어져 버렸다. 동시에 최고야의 왼손에 들려있던 메르세비아 나무 조각이 잠깐 빛을 내다 사라졌다. 메르세비아가 나무 조각에 성공적으로 갇힌 것이다.
대사제 나로담이 최고야에게 준 메르세비아 나무 조각은 메르세비아를 영원히 가두기 위한 장치였다. 그런데, 최고야는 메르세비아를 각인하고 나무 조각에 가두었다. 이것은 최고야가 원할 때 메르세비아를 나무 조각에서 꺼내 조련된 메르세비아를 맘대로 부릴 수 있다는 얘기였다.
메르세비아가 사라지고 오른팔과 하체가 녹아 없어진 삐삐만 옆으로 누운 채 남았다.
삐삐가 힘겹게 몸을 굴려 뒤쪽으로 돌았다. 삐삐의 두 눈은 눈물을 가득 담고 있었다.
“......아...........아....아빠............아빠.....................”
삐삐의 눈과 무쏘의뿔의 눈이 마주쳤다. 삐삐는 아빠를 보호했다는 것이 다행이라 생각했다.
무쏘의뿔이 삐삐에게 달려가 볼에 손을 대고 쓰다듬었다. 무쏘의뿔은 울고 있었지만, 뒤쪽의 유저들은 그것을 볼 수 없었다.
“삐삐야······.”
혼잣말 같은 작은 소리로 삐삐를 위로했다.
삐삐는 항상 무쏘의뿔을 아빠라고 불렀지만 무쏘의뿔은 삐삐를 딸이라 생각한 적이 없었다. 삐삐가 항상 위기에서 무쏘의뿔을 도와줬지만, 한편으론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삐삐의 목숨을 걸고 이용해 신을 죽이기도 했었다.
삐삐는 일방적으로 많은 것을 주었는데 자신은 해준 게 없다는 생각이 무쏘의뿔을 가슴 아프게 했다.
죽어가는 삐삐는 무쏘의뿔에게 회복할 수 없는 벌을 주었다. 삐삐는 그럴 마음이 없지만 무쏘의뿔은 삐삐에게 죄인이 되었다.
유저들이 삐삐에게 회복 스킬을 쏟아부었다. 유저들의 회복 스킬을 받은 삐삐의 몸이 빛났다. 하지만 삐삐의 죽음을 멈추지는 못했다. 점점 삐삐는 죽어갔다.
“어르신, 삐삐를 원래의 크기로 돌려 보세요.”
삐삐가 워낙 커서 유저들의 회복 스킬의 효과가 떨어졌다.
무쏘의뿔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삐삐에게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라고 마음속으로 전달하자 이내 삐삐가 엄지손가락 한마디만 한 크기로 돌아왔다.
“크흑······.”
원래 삐삐는 엄지손가락 크기였는데 절반이 녹아 한마디 크기로 줄어있는 것을 보자 무쏘의뿔이 울컥했다.
삐삐는 깊은 잠에 빠졌다. 죽지는 않았지만 이미 사라진 신체는 회복 불능. 게다가 의식도 없는 상태.
메르세비아를 최고야가 각인함으로써 처리했지만, 누구도 현 상황에 웃을 수 없었고 별 4개 반짜리 퀘스트를 완료한 것에 대해 즐거워할 수도 없었다.
다들 아무 말 없이 산에서 내려갔다. 원래는 베이스캠프로 가려고 했는데 메르세비아를 처리했기 때문에 사단도난 시로 가서 나로담을 만나야 했다.
유저들이 사단도난 시에 접어들었을 때 도시는 축제가 시작되었다. 메르세비아를 처리한 것을 버림받은 천족 주민들이 알고 모두 거리로 뛰어나와 소리를 지르고 춤을 추었다. 그들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갔지만 유저들은 서로 눈치를 보느라 내색할 수 없었다. 무쏘의뿔은 양손에 삐삐를 받쳐 들고 있었다. 행여나 주머니에 넣었다가 삐삐가 잘못되지 않을까 걱정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들은 우리의 은인입니다.”
광장 입구에 나와 있던 나로담이 유저들에게 말하자 모두에게 퀘스트 완료창이 떴다. 그제야 유저들이 함성을 지르며 기뻐했다. 8천 명의 추격대 유저들 중에 별 4개 이상의 퀘스트를 완료한 사람은 채 50명도 안 됐다. 그만큼 별 4개짜리 퀘스트를 받는 것도 어려운데, 그런 퀘스트를 완료한다는 것은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다. 그것을 해낸 것이다. 보상을 떠나 게임을 하는 유저들이라면 최고로 기쁜 순간인 것이다. 그리고 유저들에 따라 다르지만 엄청난 보상에 또 한 번 기뻐했다. 적게는 2렙에서 많게는 7렙업을 한꺼번에 했을뿐더러 보너스로 얻은 스킬 포인트와 스텟 포인트···. 각종 호칭.
그리고 안내창에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버림받은 천족의 은인’
=떼세로 산에 터를 잡은 버림받은 천족들은 흑용 메르세비아에게 나이든 어르신들을 제물로 바치며 수천 년간 연명해왔다. 그런 메르세비아를 잡아준 인간들에게 버림받은 천족들은 모두가 감사하고 고마워하고 있다.
=버림받은 천족들은 메르세비아를 잡아준 인간들에게 형제에 따르는 대우를 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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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림받은 천족의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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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저들은 이례적으로 버림받은 천족과 관련된 두 개의 호칭을 얻었다. 마계에서 유저들이 얻은 보상이 시민권을 받은 정도라면 천계의 버림받은 천족에 한정된 것이지만 그들과 가족이 된 것을 의미했다. 그것은 떼세로 산 주변의 사냥터에서 사냥하게 됐을 때 버림받은 천족의 지원을 신청해 받을 수 있는 수준이었고 유저들은 몰랐지만, 전쟁 시 도움을 요청하면 버림받은 천족들이 도와주러 참전할 정도의 수준이었다. 패자의시대 게임에서 가족의 호칭은 바로 목숨을 내줄 수 있는 상태로 최고 수준의 호칭 효과였다.
그리고 버림받은 천족 주민들이 유저들에 대한 존경의 뜻으로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온갖 종류의 물건들을 유저들에게 선물로 주었다. 이번 메르세비아 퀘스트는 강력한 유니크 아이템을 보상으로 받지는 못했지만 2개의 호칭과 작지만 많은 종류의 아이템을 받았다. 물론, 퀘스트를 하기 전에 받은 귀 덮개나 비늘 망토는 그 자체로 유니크 아이템으로 퀘스트 보상템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었기에 유저들 누구도 보상이 작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페어리의 부상이 심각하군요.”
사단도난 시의 축제가 시작되며 유저들을 위한 만찬에서 나로담이 무쏘의뿔에게 물었다.
무쏘의뿔은 메르세비아와의 싸움이 끝나고 한참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의식을 잃은 삐삐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있었다. 아마, 무쏘의뿔이 누구하고든 싸우게 된다면 한 손에 삐삐를 올려놓고 나머지 한 손으로만 싸웠을 것이다.
무쏘의뿔은 별말을 하지 않았다. 삐삐를 주머니에 넣으면 옷에 상처가 쓸려 삐삐가 아파할 것 같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이그드라실이 페어리를 치료할 수 있을 겁니다.”
나로담은 메르세비아를 가두는데 삐삐의 역할이 컸다는 것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내내 침울해 있던 무쏘의뿔이 다그치듯 말했다.
“페어리들은 원래 이그드라실 주변에 사는 종족입니다. 이그드라실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정도로 가깝고 이그드라실의 자식들이라고 불릴 정도입니다. 이그드라실에게 부탁한다면 치료해 줄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그드라실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내 부탁들 들어주겠습니까?”
나로담이 웃으며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파란색 작은 병이었는데 이것을 무쏘의뿔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것은 주신 카스톨의 신전에서 사용하는 향료의 하나입니다. 바로 이그드라실의 수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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