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자의시대 2 (130)
이리오스.
대자연의 신이라 불리는 이리오스는 주로 숲과 관련이 있었다. 엘프를 창조한 어머니 신이기도 한 이리오스는 무슨 이유인지 생명의 숲을 침공했고 데리디아가 생명의 숲의 의식을 가진 식물들을 동원해 이리오스를 막고 있는 상황. 이리오스는 다른 신들과 달리 그 어떤 천사장도 단 한병의 천사병도 동원하지 않은 체 혼자 생명의 숲에 와서 싸우고 있었다.
생명의 숲의 식물들이 총공세를 펼쳤지만 이리오스의 압도적인 무력에 속수무책. 어떤 면에서 이리오스와 생명의 숲은 상극이었다. 생명의 숲의 식물들은 한 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 움직이지 못했다. 그에 비해 이리오스는 천천히 걸으면서 스킬을 썼는데 땅속에서 솟구쳐 오르는 뿌리들로 인해 숲의 땅바닥이 뒤집혔고 이리오스의 생각대로 사방으로 뻗어 나간 식물들은 생명의 숲을 이루고 있는 식물들을 압도했다. 이리오스는 무쏘의뿔이 사용하는 ‘식물의친구’ 스킬의 원조였다. 숙련도가 낮은 무쏘의뿔에 비해 이리오스의 스킬은 만숙을 넘어 극한에 달한 상태. 생명의 숲의 식물들이 고정된 크기와 고정된 자리에서 싸운다면 이리오스가 부리는 식물들은 크기부터 거의 제한이 없는 데다 마치 강물이 흐르듯 이리오스가 가는 길을 따라 스킬이 펼쳐지다 보니 거대 해일에 집어 삼켜지는 해변 도시 같았다.
‘음······.’
무쏘의뿔은 감히 나설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리오스가 생명의 숲을 완전히 지배했다.
“삐삐야 데리디아한테 불을 사용해도 되는지 물어봐.”
“응 아빠.”
무쏘의뿔은 삐삐가 데리디아한테 가서 대답을 듣고 올 줄 알았는데 삐삐는 곧바로 대답했다.
“데리디아가 이리오스를 막을 수만 있다면 뭐든지 다 하래.”
무쏘의뿔은 속으로 놀랐다. 무쏘의뿔이 숲에서 화염 속성의 스킬을 사용한다면 숲은 불탈 것이고 그것은 생명이 숲에 있는 수많은 의식을 가진 식물들이 죽는 것을 의미했다. 데리디아는 자기편을 죽이더라도 이리오스를 막아달라는 것이었고 데리디아의 결단에 무쏘의뿔이 놀란 것이다. 무쏘의뿔도 대군을 부리지만 자신의 병사들을 희생시키는데 무척 엄했기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군···.’
무쏘의뿔은 이리오스를 처음 보지만 자신이 엘프의 수호자이자 엘프의 스승이다 보니 이리오스가 다른 천계의 신들에 비해 낯설지 않았고 적대적인 마음이 없었다. 데리다아는 특별히 가깝다고 할 수 없는 사이고. 이그드라실의 부탁을 받아 이곳에 왔지만 이그드라실하고도 무쏘의뿔은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데리디아를 위해 이리오스와 싸우게 돼서 별로 기분이 안 났다. 완전히 등 떠밀려 싸우는 기분이 들었다.
무쏘의뿔은 생명의 숲의 식물들이 이리오스를 상대로 어느 정도 피를 빼놓으면 그때 가서 나서려고 했는데 도무지 생명의 숲의 식물들이 힘을 쓰지 못하자 직접 나섰다. 무쏘의뿔이 채찍을 오른손에 쥐고 가볍게 흔들자 바닥을 타고 채찍이 수십 미터 길이로 길어지며 뱀처럼 앞으로 나아갔다. 이 채찍은 항상 불길이 타고 있었는데 메제크에게서 ‘화염의 용자’ 호칭을 얻은 뒤로 화염 친화력이 대폭 올라가 무쏘의뿔이 불과 관련된 스킬을 사용할 때 위력이 배가 되었다.
“따닥.”
채찍이 길어질 대로 길어지자 무쏘의뿔이 본격적으로 채찍을 휘둘러 바닥을 쳤다. 수십 미터 길이의 채찍이 살아 있는 뱀처럼 꿈틀거리며 바닥을 차고 튀어 올랐다. 채찍은 주변의 식물들을 모두 불태우며 위쪽으로 튀어 올라 이리오스 쪽으로 날아갔다. 이리오스 주변에 있던 지름 2m가 넘는 뿌리들이 뻗어 오르며 채찍을 막았고 채찍은 상하좌우를 넘나들며 사방의 모든 것을 불태웠다. 이리오스는 눈 깜짝할 새에 무쏘의뿔이 마법 채찍으로 일으킨 불에 갇힌 꼴이 되었다. 주변이 온통 불바다가 되자 무쏘의뿔은 용암 병사들을 소환했다. 그 전에 무쏘의뿔이 용암 병사들을 소환했을 때에 비해 환경이 그다지 좋지 않아서 용암 병사들의 능력치가 떨어지긴 했지만, 불붙은 숲의 불길이 점점 거세지자 무시하지 못할 수준은 되었다. 용암 병사들이 이리오스를 향해 사방에서 달려들었고 이리오스가 부리는 식물들이 용암 병사들을 막았다. 불길과 연기가 가득해 눈으로 사물을 분간할 수 없는 상황.
무쏘의뿔이 은신을 한 채 불길 속으로 숨어 들어갔다. 무쏘의뿔은 완전한 화염의 면역을 하고 있어 불 속에 몸을 숨기고 기회를 엿봤다. 엔피씨 동료들이 있다면 공격 방식 달라지겠지만 혼자서 이리오스를 상대하려고 하다 보니 신중하고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무쏘의뿔의 직업은 암살자. 오랜만에 암살자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용암 병사들은 이름 그대로 용암으로 몸체가 이뤄져 있어서 물리 공격에 면역이 되었다. 약 백여 명의 용암 병사. 불의 기운이 강한 곳에선 소환되는 수도 늘어나고 공격력도 향상하지만 지금 이곳은 무쏘의뿔이 마법 채찍으로 숲을 불태운 것이라 불의 기운이 강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화산이 폭발하고 용암이 흐르는 곳이라면 용암 병사들은 그야말로 극상의 공격력을 보였으리라···.
용암 병사들이 미친 듯이 이리오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몸이 터지고 팔다리가 잘려나갔지만 금세 회복되어 이리오스가 펼친 뿌리들을 태우며 방어막을 뚫고 들어갔다. 이리오스는 생명의 숲에 이런 놈들이 있으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해 몹시 당황했다. 신성수인 데리디아는 숲이 불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할 텐데 용암 병사들을 소환하고 숲을 불태우리라곤 생각할 수 없었다.
“누구냐?”
이리오스가 데리디아를 도와주는 누군가를 향해 외쳤다. 데리디아가 숲을 불태우리라곤 상상할 수 없었다.
무쏘의뿔은 기다렸다. 불길이 더 거세지고 있었다. 무쏘의뿔이 일으킨 불은 일반 불이 아니라서 물로 끌 수 없었다. 용암 병사들을 상대로 불에 타는 식물들로 막아 낼 수 없자 이리오스는 비를 내리게 했다. 급격히 하늘에 구름이 뭉치며 비구름을 형성했다. 이리오스가 비를 내리게 한 것은 불을 끄기 위한 게 아니라 숲의 바닥. 흙을 젖게 하기 위해서였다. 흙과 불에 탄 나무들의 재가 젖으며 뭉쳤다. 이리오스는 바람을 일으켜 젖은 흙과 재로 용암 병사들을 덮었다. 젖은 흙이 용암 병사들의 열기에 구워지며 단단해졌고 그럴수록 더욱더 용암 병사들을 가두었다.
무쏘의뿔은 더 기다렸다가는 용암 병사들의 소환시간이 만료될 것을 우려해 이리오스의 뒤통수에 강렬한 일격을 적중시켰다.
“펑.”
이리오스가 충격에 휘청거렸다. 그 짧은 순간 이리오스의 스킬이 취소되었고 용암 병사들이 다시 이리오스에게 달려들었다. 무쏘의뿔은 한 번의 공격을 성공시키고 가까이에 있는 용암 병사 뒤에 숨었다. 백여 명의 용암 병사들의 공격력은 모두 똑같았는데 그중 중 한 놈이 또다시 강한 공격을 했다. 무쏘의뿔은 용암 병사들 사이를 옮겨 다니며 이리오스를 공격했다. 화염과 연기가 무쏘의뿔을 효과적으로 숨겨주었다. 하지만 이런 식의 공격으로 이리오스를 죽일 수는 없었다. 용암 병사들의 소환시간이 끝나면···.
아직 신과 일대일로 붙어 무쏘의뿔이 이길 정도는 아니었다. 용암 병사들의 소환이 끝나자 무쏘의뿔도 뒤로 빠져 숲으로 숨었다. 이리오스는 제자리에 서서 상황을 주시했다. 주변의 나무들이 다 타서 이리오스는 재가 된 숲 한가운데 서 있는 꼴이 되었다.
데리디아에게 조력자가 있다는 것을 안 이리오스는 전처럼 생명의 숲을 휩쓸며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자신이 입은 피해가 크지 않듯이 상대도 딱히 자신의 공격에 피해를 보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묘한 둘 간의 대치 상황.
‘역시, 쉽지 않아···.’
이리오스는 우도벨에게 협력하는 조건으로 ‘데리디아’를 원했고 우도벨이 승낙했었다. 그런데 이리오스는 우도벨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마계와 천계 사이에 이그드라실 연결 다리를 놓기 위해 마계로 넘어갔을 때부터 연결 다리를 설치할 곳을 찾는 것과 함께 데리디아의 위치도 찾았다.
그리고 이리오스는 ‘식물과의 교감’스킬로 결국 데리디아를 찾아냈고 우도벨이 밧소뎀을 잡기 위해 마계로 넘어갔을 때 이리오스는 데리디아를 찾아갔던 것이다. 우도벨이 밧소뎀을 잡기 위해 마계를 뒤집어 놓을 때 이리오스에겐 데리디아를 잡을 기회가 되는 것이다.
이리오스가 스킬을 사용하자 몸이 변했다. 이미 수십 미터 크기의 이리오스 였는데 그보다 더 큰 나무의 모습으로 변했다. 이리오스가 천천히 걷는 과정에서 뿌리가 생명의 숲 땅속을 파고 들어갔다. 사방으로 이리오스의 뿌리가 퍼져나갔고 곳곳에 이리오스의 뿌리에서 새로운 나무가 자라났다.
생명의 숲 안에 이리오스가 마치 자신의 분신을 심듯 숲을 만들어갔다.
무쏘의뿔은 한눈에 봐도 심상치 않은 모습임을 깨달았다. 하지만 점점 뒤로 후퇴할 뿐 나서지 않았다. 어느덧 엔피씨들과의 사냥에 익숙해져 버린 무쏘의뿔이었다. 항상 혼자 게임을 해 왔었는데 암살자 5인방이나 샤도임, 콩코노메가 없다고 무쏘의뿔은 함부로 나서지 못했다.
‘내가 쉬운 길에 익숙해져 있었군.’
소중함을 느끼자 더 귀해지는 엔피씨들이었다.
몸을 사리는 무쏘의뿔과 달리 생명의 숲의 나무들과 식물들은 아주 절실했다. 죽느냐 사느냐의 상황.
목숨을 다해 이리오스와 싸웠다. 하지만, 역부족···. 이리오스의 분신의 숲이 커지는 것과 비례해 생명의 숲의 나무들과 식물들이 목숨을 잃었고 생명의 숲은 작아져 갔다. 이리오스와 생명의 숲 식물들 싸움의 가장 큰 문제는 화력의 차이였다. 생명의 숲 식물들의 수가 훨씬 많았지만 이리오스를 위협할 정도의 공격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반면 이리오스는 생명의 숲 식물들을 한 번에 휩쓸었다.
생명의 숲 식물들의 가장 큰 문제는 발이 고정돼 있다는 점. 수적으로만 따지면 감히 이리오스가 혼자 와서 깽판 칠 수준이 아니었는데 식물의 특징상 모두 뿌리가 고정돼 있다 보니 수는 많아도 결국 싸우는 것들은 한정돼 있었고 그 싸우는 식물들은 이리오스를 압도하지 못했던 것.
게다가 시간이 지나자 이리오스의 분신 숲이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나무에 무슨 혹이 생기나 싶었는데 점점 커지더니 껍질을 찢고 무언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팔과 다리의 길이가 같은 화난 엘프의 얼굴을 한 생명체였다. 이들은 두 발로 걷지 않고 팔과 함께 네발로 걸었다. 팔도 다리처럼 바닥을 걷는데 사용한 것인데 조각 같은 엘프의 얼굴에 화난 표정을 하고 있어 거부감이 드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팔, 다리는 물론 몸통까지 무척 마른 체형이었다.
“케 케켁······.”
“깩 켁켁···.”
이들은 말을 할 줄 몰랐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리오스의 명령을 잘 따른다는 점. 이리오스의 분신 나무에서 열린 네발 엘프들은 바닥에 내려오고 잠시 적응을 하는 듯하더니 숲으로 뛰어들어갔다.
생명의 숲 식물들의 공격을 빠른 몸놀림으로 피하며 안쪽으로 내달렸다.
수십 마리, 수백 마리, 수천 마리······. 수가 점점 늘어났다.
무쏘의뿔이 이 네발 엘프들을 쫓았다.
‘내 예상이 맞는다면···.’
네발 엘프들은 생명의 숲 안쪽의 데리디아에게로 진격했다.
이리오스는 나무로 변한 뒤 앞으로 나아가는 속도가 빠르지 못했다. 생명의 숲을 자신의 분신 나무들로 잠식하는데 집중하는 한편, 열매인 네발 엘프들로 하여금 안쪽 데리디아에게 보낸 것이다.
데리디아는 생명의 숲 중에 버섯들이 군락을 이루는 곳 안쪽에 있었다. 버섯들이 마치 경호원처럼 데리디아를 둘러싸고 있었는데 네발 엘프들이 덮쳐 오자 모든 버섯이 포자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데리디아 주변의 버섯들은 작은 것은 작았지만 큰 것은 일반 나무만큼 컸다. 이 나무처럼 큰 버섯들에서 특히 많은 포자가 쏟아져 나왔는데 마치 안개처럼 쏟아져 나와 금세 주변을 뒤덮었다.
네발 엘프들이 아랑곳하지 않고 포자 안개 속으로 뛰어드는 순간···.
“까아아아아아······.”
“꺄아아······.”
네발 엘프들의 비명이 생명이 숲에 메아리쳤다.
무쏘의뿔이 데리디아를 돕기 위해 빨리 달려왔는데 버섯들의 포자 안개. 독 포자 안개에 네발 엘프들이 중독되어 죽는 것을 보자 한편으로 안심했다. 무쏘의뿔은 독과 관련해 최고의 전문가였고 완전한 면역을 이룬 상태라 버섯의 포자 독 안개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다행이군.’
포자 독 안개가 데리디아를 보호하고 있음에도 네발 엘프들은 계속해서 쏟아져 들어왔다. 이리오스가 분신의 숲을 넓혀 감에 따라 열매로 열리는 네발 엘프들의 수도 늘어났고 이들은 하나같이 데리디아를 향해 달려들었다. 지금까지는 독 포자 안개에 전멸하고 있었지만 앞으로 알 수 없었다. 이리오스가 느리지만, 점점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
“아빠, 데리디아가 좀 오래.”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무쏘의뿔에게 삐삐가 데리디아와의 연결자가 되어 주었다.
무쏘의뿔이 독 포자 안개를 가르며 데리디아 쪽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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