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자의시대 2 (131)
48. 데리디아.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독 포자 안개를 뚫자 선명한 모습의 데리디아가 보였다. 데리디아 주변으로 아무것도 없는 공터가 있었다. 이곳에 무쏘의뿔이 서자 하나의 영상이 자동으로 떠올랐다.
거대한 산을 뒤덮은 나무. 산에 나무들이 있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닌데 이 거대한 산에 나무가 있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었다. 무쏘의뿔이 아는 이 거대한 산은 크고 작은 바위들과 자갈과 거친 입자의 흙으로 이뤄진 산이었기 때문이다.
아디베흐 산.
형형색색의 특이한 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이런 군락들이 모여 숲을 이루며 아디베흐 산의 옷처럼 입혀져 있었다. 원숭이를 닮은 동물들이 나무 사이를 뛰어다니고 열매를 따 먹었으며 온갖 크고 작은 동물들이 숲에 의지해 생활했다. 온갖 종류의 새들도, 소마 대륙에서는 볼 수 없는 사람 머리 크기의 곤충들도 많았다. 평화로워 보이는 숲. 그리고 숲의 한가운데 흰 점처럼 자리 잡은 나무 군락.
아디베흐 산의 나무들이 절대 작지 않은데 월등히 키가 큰 나무들이었다.
‘내가 아는 데리디아가 맞아?’
아디베흐 산의 데리디아는 엄청난 크기였다. 마치 우루두루 지역의 생명의 숲의 뼈대를 이루는 것 같은 거대 나무의 크기 같았다. 그런 크기의 흰색 나무가 수십 그루. 데리디아의 특징상 이 나무들이 모두 같은 뿌리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아디베흐산의 데리디아는 아주 작은 빛의 가루들을 뿜어냈다. 봄철 꽃가루처럼 데리디아가 뿜어대는 빛의 가루들은 아디베흐 산을 지나는 바람을 따라 멀리멀리 퍼져나갔다. 그리고 일부는 하늘 높이 올라갔다. 바람에 따라 춤을 추듯 띠처럼 퍼지는 빛의 가루는 멀리서도 눈에 띄는 장관이었다. 나무 가득한 숲의 아디베흐 산만 본다면 절대로 마계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일부 하늘로 퍼져 나간 빛의 가루들.
무쏘의뿔이 보는 영상에 데리디아가 뿜어낸 빛의 가루들이 하늘 높이 올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왜 이런 영상이 보이는지 몰랐는데 마치 빛의 가루들이 여행이라도 떠나는 듯 바람을 따라 기류를 따라 날아오른 빛의 가루들이 갑자기 구름으로 들어가는 듯하더니 빛 가루 하나하나가 날개를 펴고 날아올랐다.
‘으흠···.’
무쏘의뿔도 아는 익숙한 곳.
이그드라실 앞의 넓은 들꽃초원. 데리디아가 뿜어낸 빛의 가루들이 하늘로 올라가 이그드라실이 있는 곳의 들꽃초원의 꽃에서 몸을 일으켜 세우며 날개를 펴고 날아올랐다.
‘페어리’들이 이그드라실 주변을 떼를 지어 날아올랐다.
생명수 데리디아.
마계의 모든 존재에게 생명력을 주는 존재로 알려져 있었다. 마치 무한대의 에너지원 같은. 그런데 데리디아는 마계에만 생명력을 주는 존재는 아니었다. 데리디아는 모든 차원의 생명의 원천이었다.
이그드라실이 모든 차원의 지식의 창고 같은 존재라면 데리디아는 모든 차원의 생명의 원천.
천계까지 올라간 데리디아의 빛의 가루들이 모두 페어리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천계 곳곳으로 빛의 가루들은 퍼져나갔고 때론 숲에, 들판에, 강물에 내려앉았다. 이 빛 가루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환경에 녹아 들어갔다.
그런데, 벌 한 마리가 날아와 나뭇잎에 내려앉은 빛 가루를 입에 물고 날아갔다. 빛 가루를 입에 문 벌은 날고 날아서 어떤 나무 속으로 들어갔다. 굉장히 오래된 고목인 이 나무는 둘레가 수십 미터가 될 정도로 컸다. 그런데 둘레와 비교하면 높이는 아주 낮아서 인간 성인이 뛰어오르면 제일 낮은 가지를 잡을 수 있을 정도. 이 고목은 곳곳에 틈이 많았는데 빛 가루를 입에 문 벌은 그중 한 곳으로 들어갔고 여기저기서 벌들이 빛 가루를 한 개씩 입에 물고 몰려와서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나와 어디론가 날아갔다. 마치 빛 가루를 수거해 고목 안에 모아 두는 것처럼 보였다.
고목은 나이가 많아서 그런가 잎이 풍성하진 않았는데 가지마다 의외로 아주 많은 열매를 맺고 있었다. 열매는 작은 것부터 큰 것까지 다양했다. 동시에 같이 열린 열매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열매 중 제일 큰, 잘 익은 열매들을 천족들이 몰려와서 땄다. 이는 천계니까 천족이라고 생각한 것이지 옷과 모자로 감춰져 있어 천족인지 천사인지 알 수는 없었다. 이들이 고목에서 딴 열매를 수레에 담아 이동했다. 열매는 큰 여행용 가방 정도의 크기였기 때문에 수레에 몇 개 실리지 않았다.
이들이 간 곳은 숲속의 한 신전이었다. 마치 숲의 한 부분 같은 이 신전은 숲과 너무나 잘 어울리는 모습으로 일반적인 신전들이 갖는 모습과 아주 달랐다. 돌과 나무를 이용해 지은 신전. 수레에서 열매를 내려 한곳에 놓았는데 이를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이 신전의 주인···. 이리오스.
신전의 천장 일부가 형형색색의 스테인드글라스로 되어 있었는데 그곳을 통해 햇빛이 신전 내부로 들어와 바닥에 놓인 고목의 열매들을 비췄다. 햇빛 때문인지 열매가 다 익어서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열매가 꿈틀대더니 벌어졌다. 고목에 달려 있을 때는 열매 같더니 바닥에 놓여 있는 모습을 보니 알 같았다.
“엘프?”
무쏘의뿔은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완전한 성인의 엘프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세상을 처음 보는 엘프의 모습. 하나둘씩 열매들에서 엘프들이 나왔다.
이리오스가 이 모습을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무쏘의뿔은 이 영상을 데리디아가 보여주는 이유를 생각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추론 끝에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데리디아가 아디베흐 산에서 왕성한 활동을 할 때. 데리디아의 생명력의 씨앗으로 이리오스는 엘프를 만든 것이다. 그런데 천계와 마계가 전쟁하게 되자 과거의 대마왕 키개람이 데리디아를 천계에 빼앗기지 않기 위해 우루두루 지역으로 옮겨 심었고 데리디아는 몸체를 축소한 체 은둔한 것이다.
이리오스는 아디베흐 산에서 데리디아가 사라지자 더는 생명의 씨앗을 구할 수 없었고 이는 엘프의 생산을 할 수 없게 된 것을 의미했다. 이리오스는 엘프들을 생산하기 위해 데리디아가 필요했던 것이고 고목에서 열린 엘프들은 엘프의 원형이었다. 지금의 소마 대륙에 사는 엘프들은 천계에서 내려온 엘프 원형들의 후손이고 엘프의 원형만이 오직 고목에서 열렸다.
소마 대륙 엘프의 숲. 엘프들의 여왕은 바로 고목에 맺힌 엘프 열매에서 나온 원형 엘프인데 고목에 열린 엘프 열매가 데리디아가 사라지며 더는 생명력을 얻지 못하자 성장하지 못했고. 그래서, 엘프 여왕이 익지 않은 열매에서 나왔기 때문에 어린 상태로서 천계에서 교육을 받다가 인간계, 소마 대륙의 엘프의 숲으로 보내졌던 것이다. 그 외에 엘프 여왕들은 천계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다른 엘프들과 달리 마법 능력이 뛰어났던 것이기도 했다.
데리디아가 보여준 동영상은 이 뒷부분까지 나오지는 않았다. 이리오스가 생명의 씨앗으로 엘프들을 생산하는 모습에서 끝났고 이 영상을 통해 무쏘의뿔은 이리오스가 데리디아를 천계로 데리고 가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아빠, 데리디아가 이리오스를 물리쳐 달라고 부탁하고 있어.”
“하지만, 나 혼자 무리인 것 같아···.”
새삼 엔피씨가 없는 혼자인 무쏘의뿔은 자신이 혼자서 신인 이리오스의 상대가 안 됨을 인정했다. 특히 자신의 장기라고 할 수 있는 식물의친구 스킬이 이리오스한테는 안 통할 게 뻔했다. 그 스킬이 원래 이리오스의 스킬인 만큼 숙련도가 낮다면 더욱더···.
“아빠한테 의지가 있느냐를 묻는 거야. 힘을 합치자고 하네.”
삐삐의 말투가 그전보다 더 어른스러웠다. 외모는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무쏘의뿔은 그냥 그런가보다 싶었다.
“알았다고 전해. 내가 도울 수 있는 최선을 다해보지.”
“그럼, 이리오스가 이곳에 올 때까지 기다리래.”
“생명의 숲이 쑥대밭이 될 텐데?”
말을 하고 나서야 자신의 질문이 바보 같다는 생각을 했다. 식물의 친구 스킬을 사용하면 숲을 복구하는 게 일도 아니었다. 게다가 데리디아 역시 나무였으니 뭔가 숲을 복원하는 스킬이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리오스 였다.
나무로 변신한 이리오스는 생명의 숲을 자신의 분신 숲으로 잠식해 들어가며 확장하고 있었다. 데리디아가 있는 곳과는 거리가 멀어 이곳까지 오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릴 것으로 예상하였다.
무쏘의뿔은 이리오스 있는 곳으로 가서 상황을 주시했다.
“어르신, 지금 어디 계십니까?”
헤임달로부터 귓속말이 왔다.
“진작 말해야 했는데···. 지금 생명의 숲에 와 있네.”
“마계에 계십니까?”
“이그드라실이 삐삐를 치료해줬어. 그리고 데리디아가 위험에 처해있다고 도와주라고 해서 왔는데 이곳에 이리오스가 데리디아를 잡으러 왔군. 지금 이리오스와 대치 중이야.”
“난감하군요.”
“좀 그렇게 됐지.”
“혹시 밧소뎀 한테서 무슨 연락 없으셨습니까?”
“대마왕이 왜?”
“우도벨이 토르 패거리들과 함께 연결 다리를 넘었습니다. 그런데 일부가 아무래도 쥴레도르 쪽으로 간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백색 거성 밖에 있는 저희 길드원들이 보고 저장한 건데 제가 영상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무쏘의뿔은 헤임달과 대화 도중에 헤임달이 보내준 영상 파일을 재생시켰다. 이그드라실 연결 다리를 타고 내려오다가 마계의 하늘에서 날아올라 한쪽으로 날아가는 무리가 보였다.
“양동작전인가?”
“그런 것 같습니다.”
“지금 자네들은 어디까지 왔나?”
“소식을 듣고 최대한 빨리 연결 다리 입구 쪽으로 달려가는 중입니다.”
“얼마나 걸릴 것 같은가?”
“3일 정도 예상합니다만. 문제는 백색 거성을 저희가 뚫을 수가 있을지. 그리고 백색 거성에서 쥴레도르까지의 시간이······.”
백색 거성을 천계 쪽에서 다시 차지한다면 추격대는 연결 다리를 내려오며 천계 세력과 맞붙어야만 했다. 죽으면 부활 때까지 일정 시간 접속을 못 하고 용케 살았다고 해도 쥴레도르 까지는 머나먼 거리다.
무쏘의뿔은 데리디아에게 이리오스를 물리치겠다고 약속을 한 상태였다. 약속을 깨고 쥴레도르로 간다고 해도 콩코노메나 고르키가 없어 이동 마법진을 사용하지 않고서는 몇 날 며칠을 뛰어야 할 판이고 그 안에 우도벨의 세력이 쥴레도르에 도착해 승부가 나고도 남는 시간이었다.
무쏘의뿔에게 이리오스를 빨리 잡아야 하는 이유가 생겼다. 천계와 전쟁을 치르며 마계의 병력도 많이 소모되었다. 상급 마왕들이 모두 모여 있지 않는다면 밧소뎀 혼자서 작정하고 덤비는 우도벨 세력과 싸워 이기기 힘들다고 보았다.
“삐삐야, 데리디아한테 말 좀 전해줘. 이리오스와 빨리 결판을 내야 한다고.”
무쏘의뿔은 삐삐가 데리디아한테 날아가 말을 전할 줄 알았는데 삐삐는 곧바로 대답했다.
“데리디아가 1시간만 시간을 달래.”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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