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자의시대 2 (136)
우도벨이 자신의 검에 스킬을 사용했다. 칼날을 오색 빛이 휘감았는데 마치 거대한 빛에 의해 불타는 것 같았다. 이 빛기둥 같은 칼을 들어 올리자 칼을 감싸고 있던 불타는 듯한 빛이 한 방향으로 쏘아졌다. 모두 밧소뎀을 공격할 줄 알았는데 우도벨의 검 끝은 하늘을 향해 있었고 하늘에서 동해의별 페가수스 기사단을 비롯한 천사병들과 싸우고 있던 본 드래곤의 가슴을 꿰뚫고 하늘 끝까지 빛줄기가 뻗어 올라가 사라져 버렸다.
“꾸에에에에 꾸우우우······.”
본드래곤이 하늘에서 비틀거렸다. 날개를 펄럭였지만 제대로 중심을 잡지 못했다.
치명상을 입은 본드래곤이 있는 힘을 다해 추락하지 않기 위해 버텼지만, 이 기회를 적들은 놓치지 않았다.
“공격.”
플루마의 외침에 주변을 날며 공격하던 동해의별 기사단원들이 일시에 본드래곤을 항해 돌격 스킬을 사용했다. 말을 탄 기사들의 대표적인 스킬중 하나가 ‘돌격 스킬’이었다. 말과 하나가 되어 전방으로 빠르게 달려가며 몸으로 부딪히는 스킬인데 포위됐을 때 길을 뚫거나, 다수의 상대 진형을 무너뜨리거나, 보스몹을 상대로 힘으로 밀어붙일 때 주로 사용되는 스킬이었다.
300백의 기사 유저들이 기사가 탈 수 있는 최고의 말인 페가수스를 타고 기사 직업의 대표적인 돌격 스킬로 본드래곤을 들이받자 마지 짓누르듯 쥴레도르를 지키던 본드래곤이 바닥으로 처박혔다.
“쿠우우우우우우우웅······.”
패대기쳐지듯 도심 한복판에 떨어진 본드래곤으로 인해 지진이 난 것처럼 큰 진동과 함께 건물이 파괴되고 마족 주민들이 깔려 죽었다.
먼지가 안개처럼 도심을 휩쓸고 지나갔다. 이내 먼지가 가시며 눈을 부라리며 웃고 있는 밧소뎀의 머리 위쪽으로 동해의별 페가수스 기사단과 천사병들이 구름처럼 떠 있었고 밧소뎀을 중심으로 3명의 신과 2700명의 사도 연합 유저들이 포위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을 쥴레도르의 주민들, 마족 병사들이 에워싼 상태. 최소 수십만의 마족 병사들이 마치 지시를 기다리듯 거친 숨을 내쉬며 신과 유저들을 노려보았다.
“재밌군, 재밌어. 이게 얼마만의 싸움인가······.”
밧소뎀은 현 상황의 유불리를 떠나 맘껏 싸울 수 있는 지금의 이 상황에 몹시 만족해했다. 밧소뎀이 대마왕이 되고 전장에서 몇 차례 싸운 적이 있기는 했는데 대부분 유리한 상황에서 막타를 날린 게 고작이었다. 싸움이라고 하기보다 다 된 밥에 숟가락질만 한 것인데 지금은 제대로 싸워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 상황이 밧소뎀을 즐겁게 했다.
일반 마족 병사들은 아무리 수가 많아도 마왕급. 즉 신들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상당수의 유저들도 있었다. 밧소뎀은 자신을 돕는 인간 유저들을 통해 그 힘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을 인간들이 돕듯이 이곳에 있는 인간들은 자신을 적으로 두고 있었다.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이제 느끼게 된 것이다. 대마왕은 항상 싸움의 마지막에 나섰다. 그 전에 싸움이 끝나면 대마왕이 나설 일 자체가 없는 것이고. 그런데 부하 마왕들이 하나도 없어서 지금 이 싸움은 대마왕인 밧소뎀이 직접 처음부터 끝까지 싸워야 하는 판이다. 밧소뎀은 즐거웠고 흥분이 되었다. 최선을 다해야 함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밧소뎀의 몸이 단단해졌다. 무적 스킬과 상관없이 밧소뎀의 피부가 단단해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자신이 싸움할 준비가 됐음을 알리는 것과 같았다. 밧소뎀은 적들의 공격을 기다리지 않았다. 침묵의 대치시간 동안 몸을 단단하게 만든 밧소뎀이 곧바로 땅을 박차고 하늘로 뛰어올랐다.
신들은 거대한 밧소뎀에게 선공을 날릴 자신이 없었다. 사도 연합 유저들은 신들이 가만히 있으니 자신들도 가만히 있었다. 그런데 밧소뎀이 먼저 선공을 한 것이다.
밧소뎀이 하늘로 뛰어오르자 하늘을 메우고 있던 동해의별 페가수스 기사단과 천사병들이 빠르게 자리를 피했다. 일단 피한 후 공격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밧소뎀은 하늘의 적들을 공격할 마음이 처음부터 없었다. 그 몸집이 솟아올랐다가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지며 대지에 충격을 주었다.
“쿠웅.”
발을 한번 구른 것만으로 수백 미터가 초토화가 되었는데 하늘로 뛰어올라 바닥에 찧으니 그야말로······.
적들은 물론 아군인 마족 병사들까지 떼죽음을 당하며 그 피가 먼지와 섞여 모두의 시야를 가렸다. 3명의 신들도 이번 공격으로 바닥에 넘어졌다가 정신을 차리고 각자 밧소뎀을 향해 공격했다.
시야를 가린 피 먼지 속에서 요란한 병장기 소리가 울려 퍼졌다.
토르는 자신의 회색 창을 보며 어처구니없음에 그저 멍하니 누워있었다.
밧소뎀이 한번 뛰어올랐다가 바닥에 떨어졌을 뿐인데···. 자신이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줄 정말 몰랐다. 하지만 토르가 회색 창을 보고 있는 시간이 길지는 않았다. 곧바로 사도 연합에 소속돼 있는 사제 유저들이 부활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토르가 부활을 수락하자 자신과 마찬가지로 죽었던 많은 수의 사도 연합 유저들이 부활해서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도시를 뒤덮고 있는 피 먼지 속에서는 여전히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토르는 죽은 유저들을 모두 부활시키는 데 주력했다. 사제가 아니라도 부활 주문서로 죽은 유저들을 부활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일단 죽은 유저들을 모두 부활시킨 뒤 뒤쪽으로 빠졌다. 그리고 그곳에서 쥴레도르의 주민들. 마족 병사들과 맞붙었다.
밧소뎀의 공격은 많은 수의 사도 연합 유저들의 목숨을 빼앗았지만 유저들은 모두 부활한 반면 주변을 에워싸고 있던 수많은 마족 주민들은 상당수가 몰살당하고 말았다. 이들의 피가 먼지와 섞여 도시를 뒤덮을 정도였으니까···. 밧소뎀의 이 공격은 사실 인간 유저들을 죽이기 위한 공격이었다. 대부분의 유저들이 죽었기 때문에 성공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모두를 죽이지 못했기에 살아남은 몇몇 유저들에 의해 죽은 유저들이 부활하며 결과적으로 실패한 공격이 되었다.
토르는 부활하자마자 주변의 살아남은 도시의 마족 주민들을 친 것이다. 이들은 밧소뎀의 공격에 아직 멘붕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수십만의 주민 중 최소 삼 분의 일은 죽고 말았다. 토르가 이끄는 사도 연합은 도시의 외곽을 돌며 주민들을 학살했다. 안쪽은 피 먼지 속에서 신들과 밧소뎀이 싸우고 있었기 때문인데.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피 먼지가 가라앉고 있었다.
무기를 든 세 명의 신과 달리 밧소뎀은 맨손이었다. 다만, 밧소뎀의 꼬리가 한사람 몫을 하고 있었다. 원래 밧소뎀의 꼬리는 제멋대로 움직였는데 이번 싸움에선 살아 있는 채찍처럼 밧소뎀과는 달리 따로 움직이며 공격과 방어를 겸하고 있었다.
밧소뎀은 세 명의 신을 상대로 아주 여유롭게 싸웠다. 마치 장난치듯 밀고 당기며 신들이 스킬을 사용하지 못하게 막았다.
“모두 밧소뎀을 친다.”
토르가 쥴레도르 주민들에 대한 학살극을 멈추고 밧소뎀을 목표로 삼았다. 피 먼지가 가라앉으며 시야가 확보 된 데다 혹시라도 세 명의 신 중 한 명이라도 죽게 되면 균형이 깨지는 것을 우려했다. 밧소뎀을 죽일 기회가 많지 않았다. 무쏘의뿔 패거리들이 천계에 머무는 동안 밧소뎀을 죽여야지, 안 그러면 또 이런 기회가 없다는 것을 잘 아는 토르였기에 이번에 결판을 내기 위해 밧소뎀 사냥에 합세한 것이다.
사도 연합의 사제들이 일제히 신들에게 회복 스킬을 쏟아부었다. 그리고 탱커 유저들이 밧소뎀에게 속박 스킬을 걸었다. 수십 명이 일제히 각종 속박 스킬을 걸었는데 밧소뎀과의 렙차, 높은 저항도 때문에 모두 다 무효가 되었다. 하지만 이번 시도로 인해 밧소뎀의 시선을 끄는 데는 성공했다. 밧소뎀이 사도 연합 유저들에게 신경을 쓰는 만큼 신들에게 기회가 주어졌다. 세 명의 신들이 모두 근접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사도 연합 유저들은 원거리 공격을 할 수 있는 유저들도 상당수라 멀리서 화살과 마법이 밧소뎀에서 퍼부어졌다. 그리고 동해의별 페가수스 기사단들이 날아오르며 밧소뎀의 뒤를 공격했다.
“인간들이군.”
밧소뎀의 이 말은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인간은 불사신이었다. 밧소뎀에게 인간이란 자신의 오른팔이라 할 수 있는 무쏘의뿔. 그리고 그가 이끄는 인간 세력. 이들 외에 인간들은 먼지 수준으로 보았다. 그런데 지금 달려드는 놈들은 밧소뎀이 무시하지 못한 정도의 능력을 갖췄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밧소뎀이 인간들 쪽으로 몸을 돌린 사이 젠라츠가 날개를 펴고 뛰어오르며 밧소뎀의 오른쪽 옆구리부터 겨드랑이까지 길게 베었다. 밧소뎀의 피부가 갈라지며 피가 맺혔지만 거기까지였다. 밧소뎀이 세 명의 무기를 든 신들과 싸우면서 버틸 수 있는 이유는 강력한 신체 때문이었다. 칼에 살이 베여도 깊게 상처가 나지 않았고 그나마도 금세 아물었다. 거의 불사신의 육체 같았다.
밧소뎀의 손이 사도 연합 유저들 쪽으로 향하자 수십 명의 유저들이 건물 잔해들과 함께 떠올랐다.
밧소뎀은 염력을 사용하는 대마왕이었다. 밧소뎀이 주먹을 쥐자 떠오른 사도 연합 유저들이 모두 압사했다. 사도 연합 유저들이 밧소뎀의 스킬을 보고 다들 술렁였다.
자고로 패자의시대 게임에서 대인전 최강의 직업은 ‘염력가’로 알려져 있었다. 궁수가 세다고 하지만 같은 조건이라면 궁수가 염력가를 이길 수 없었다. 워낙 염력가가 고렙이 되는 게 힘들어서 그렇지 마스터를 달성할 수 있다면 렙발, 장비발을 무시할 수 있는 게 염력가라는 게 중론이었다. 염력가를 다들 최고로 치는 이유는 다른 마법사들과 달리 주문을 외우는 과정이 없기 때문이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 스킬이 사용됐기 때문에 스킬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 시전 시간이 필요한 직업군은 염력가를 이길 수 없는 것이다.
밧소뎀이 싸우는 것을 처음 본 유저들이 모두 놀랐고 신들 역시 과거에 싸웠던 밧소뎀이 아니란 것에 대해 매우 놀랐다. 밧소뎀은 밀고 당기며 세 명의 신이 스킬을 사용할 틈을 주지 않았다. 이들 간에는 치열한 공방만 있었는데 이대로 간다면 신들이 지쳐서 나가떨어질 것처럼 보였다. 휘스리힘이 없다는 게 우도벨이나 젠라츠, 탈로스에겐 큰 마이너스 요소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도 연합 유저들이 본격적으로 밧소뎀과의 싸움에 끼어들자 신들에게 기회가 생겼다. 사도 연합은 땅 위에서 그리고 하늘에서도 공격했기에 밧소뎀은 두 군데를 더 신경 써야 했다. 사도 연합의 데미지가 밧소뎀의 입장에선 크지 않았지만, 신경은 쓰였고 그때마다 밧소뎀의 몸에 신들의 칼자국이 늘어만 갔다. 신들처럼 전신을 감싸는 갑옷을 입지 않는 마왕이라 육체 자체의 방어력이 높은데 다굴엔 장사가 없는 법. 누적되는 데미지에 밧소뎀이 난처해져 버리고 말았다.
신들도 큰 스킬을 사용할 수 없듯이 밧소뎀도 큰 스킬을 사용하지 못하면서 장기전 양상으로 흘러가자 밧소뎀은 고민했다.
‘신들을 먼저 죽여야겠군.’
부활로 자꾸 살아나는 데미지가 약한 인간들에게 신경 쓰느니 이들의 공격은 그냥 맞아 주되 신을 한 놈이라도 죽여 균형을 깨야겠다는 생각을 한 밧소뎀이 젠라츠의 칼을 왼손으로 잡아버렸다. 오른손과 꼬리로 우도벨과 탈로스를 상대하며 왼손에 힘을 주자 젠라츠가 꼼짝을 못했다. 밧소뎀의 손바닥에서 흐르는 피가 젠라츠의 칼을 타고 흘러내리며 젠라츠를 물들여갔다.
“젠 칼을 놔.”
우도벨의 외침에도 젠라츠는 칼을 놓을 수가 없었다. 전사가 전투 중에 칼을 손에서 놓는다는 것은 죽고 살고를 떠나 치욕스러운 일. 젠라츠가 힘을 썼지만, 원래부터 마왕들이 신들보다 힘이 더 센 데다 신장과 체력의 차이가 크다 보니 젠라츠가 밧소뎀 쪽으로 끌려갔다.
“우웅”
밧소뎀을 중심으로 무형의 기운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주변의 모든 적을 뒤로 날려버렸다. 신들은 물론 하늘에서 공격을 퍼붓던 천사병들이나 동해의별 페가수스 기사단까지 날려버렸는데 다들 정신을 찾았을 때 경악했다.
밧소뎀이 발가벗겨진 젠라츠를 겁탈하고 있었다. 밧소뎀의 피에 물든 젠라츠의 갑옷이 모두 부서져 있었고 칼과 방패는 바닥에 떨궈진 상태로 마치 젠라츠는 약물에 취한 듯 초점을 잃은 눈동자로 현 상황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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