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자의시대 2 (140)
“나로담 대사제님은 건강하신가?”
“저희가 봤을 때는 나이를 알 수 없을 만큼 아주 정정하셨습니다.”
헤임달의 말에 다스린 장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죽기 전에 속죄할 수 있게 되어 기쁘군.”
다스린 장로는 투구를 벗어 손에 쥐고 디야우스를 보며 말했다. 다스린 장로는 머리를 반쯤 가리는 투구였기 때문에 흰색의 긴 수염과 주름진 얼굴이 드러나 누가 봐도 나이든 노인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이는 전문 전투병이 아니었던 탓으로 천족 병사 중 정예들은 두 눈을 제외한 전신을 두른 갑옷을 입고 있었다.
“.............”
디야우스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고 있는데 다스린 장로가 말을 이었다.
“오래전 우리는 우리의 형제들에게 씻을 수 없는 큰 죄를 지었지······.”
다스린 장로는 과거를 회상하며 이야기를 풀어내었다.
수천 년 전.
다스린 장로는 성년이 됐을 때 카스톨 신전의 수습 사제로 들어갔다. 일정 기간 수습 기간을 마치면 정식 사제가 될 수 있었는데 당시의 천계는 삼주신의 신전만 있던 시절이었다.
사제가 된다는 것은 삼주신인 카스톨, 가리온, 리온델의 신전 중 한 곳에 들어가야만 했다.
그리고 어떤 신전이든 수습 사제들을 가르치는 신전이 중앙 신전으로 불리는 가장 큰 신전이었다. 그곳엔 최고 등급의 사제인 대사제가 있었는데 다스린이 사제 수습을 위해 들어간 카스톨의 신전엔 나로담이 대사제로 있었다. 당시엔 지금과 달리 천족이 나뉘지 않은 시절로 나로담 같은 천족들을 버림받은 천족이라 부르지 않았었다. 다스린은 하늘 같은 대사제인 나로담의 가르침을 받으며 사제로서 수양을 쌓았고 나로담은 천족들 사이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그러던 언젠가부터 천족들의 창조주인 신들이 흉측한 모습의 천족들을 버림받은 천족이라 부르며 이들에 대해 차별과 학대를 했고 이는 일반 천족들까지 이어져 천족들이 두부류로 나뉘게 되었다. 다만, 삼주신의 신전에 소속된 사제들의 경우 아버지 신의 종들이라 버림받은 천족이라고 해도 신들은 감히 그들을 건드릴 수 없었는데 이는 수많은 버림받은 천족들의 버팀목이 되었다.
이런 관계가 한동안 지속하여 오다 신들이 자신의 신전을 세우고 천족들이 신들을 섬기게 되면서 상대적으로 삼주신을 믿는 천족들이 줄어들고 나중에는 버림받은 천족들만 삼주신을 믿고 일반 천족들은 신들을 믿는 식으로 나뉘고 말았다. 천족들은 눈에 보이는 신과 달리 모습을 보이지 않는 삼주신을 믿지 않게 된 것인데 천족들이 신들을 따르게 되면서 힘을 얻게 된 신들은 자신들의 실패 물인 버림받은 천족들을 모두 제거하기로 마음먹고 자신을 믿고 따르는 천족들에게 명령해 버림받은 천족들을 모두 죽이도록 한다.
그것이 바로 ‘대학살의 날’로 불리는 사건으로 천족들은 자신이 믿는 신에게 자신의 신앙심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앞다퉈 학살에 참여하며 버림받은 천족들을 죽이고 만다. 이때 당시 버림받은 천족들은 박해를 피해 주로 삼주신의 신전 주변에 모여 살았는데 이들이 대학살의 대상이 되면서 당연히 삼주신의 신전으로 피해 들어갔고 삼주신의 신전이 대학살의 장이 되고 만다.
카스톨 중앙 신전의 나로담은 신전 안으로 들어온 버림받은 천족들을 살리기 위해 이들을 이끌고 탈출하게 되어 떼세로 산에 정착하기까지 고난의 여정을 겪게 된 것이고 다스린은 카스톨 신전의 사제로서 신전에서 벌어진 그 모든 학살의 참극을 보게 된 것이다. 대학살의 날에 있었던 학살극엔 버림받은 천족이 사제라고 해서 봐주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다스린은 자신의 동료이자, 선배, 후배, 선생, 스승님이 학살당하는 것을 보았고 일부 천족 사제들이 숨어 있는 버림받은 천족 사제들을 밀고해 죽게 만드는 일까지도 경험했다.
이날 이후 사실상 천계의 삼주신을 모시는 신전들은 모두 문을 닫게 되었고 카스톨의 사제였던 다스린은 사제직을 어쩔 수 없이 그만두게 된다.
이날 이때의 일들은 천족들에게 있어서 지금까지도 지워진 역사로 철저히 숨겨져 왔기에 젊은 천족들은 그런 일이 있었던 것 자체를 모르게 되었지만 나이든 천족들은 모두가 가슴속 상처로 평생 말 못 할 고통으로 괴로움을 겪고 있었다.
다스린 장로의 말에 전장에 있는 모든 천족들이 큰 충격에 휩싸였다.
장로회 의장이자 천족의 교육을 담당하는 대학장 디야우스 마저 몰랐던 사실을 이야기 들으며 충격에 빠졌다.
“어찌 그러한 일이······.”
평생 정의와 공정함과 평등과 평화와 사랑과 아름다움과 행복을 가르쳐왔던 디야우스. 또한, 그런 것들을 배워왔던 천족들······. 이들 모두가 집단 정신적 공황에 빠져버렸다.
다스린 장로는 마계 추격대 유저들이 버림받은 천족들한테서 은인과 형제 호칭을 받은 것을 보며 자신들이 지은 죄와 달리 버림받은 천족들에게 큰 도움을 준 이들에게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의장, 나는 이들과 싸울 수 없네.”
다스린 장로가 투구를 벗었을 때 이미 싸울 의사가 없음을 나타낸 것과 같았다. 지금은 공식적으로 안 싸우겠다고 말하자 여기저기서 투구를 벗고 칼을 내려놓는 천족들이 생겨났다. 나이든 천족들은 두말없이, 망설임 없이 싸움을 포기했고 젊은 천족들까지도 다스린 장로의 이야기를 듣고 싸움을 포기하기 시작했다.
디야우스는 신들과의 약속이 깨지는 것에 걱정이 되었다.
‘신들이 결코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천족을 총지휘하는 디야우스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지금은 우리가 이곳에서 싸울 때가 아니라 우리 역사의 과오에 대한 조사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다스린 장로님의 말씀이 거짓이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장로 회의 의장의 권한으로 과거 진상 조사 위원회를 구성하겠습니다. 이로 인해 신들과 대척하게 되더라도 우리가 우리의 동족을 학대하고 학살한 진실을 밝히고 사과하고 반성하는 계기로 삼겠습니다.”
디야우스가 투구를 벗어 왼쪽 옆구리에 꼈다. 그리고 무쏘의뿔을 보며 말했다.
“여러분들은 돌아가셔도 됩니다. 혹시 다음에 또 만나더라도 여러분들이 이곳에서 죄를 짓지 않는 한 우리와 싸우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사실상의 종전 선언과 같았다. 마계 유저들이 천족들과는 제대로 된 전쟁을 치른 적은 없었다.
신들을 따르는 일부 천족들이 전쟁에 참여해서 싸우기는 했지만, 이들은 천족의 극히 일부라고 할 수 있었다. 천족 120 장로들이 공식 승인해서 천족들이 모두 참여한 전쟁은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싸우지 않고 전쟁이 끝난 셈이다.
유저들은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구별이 안 되었다. 다들 어떻게든 싸울 것으로 생각했는데 한편으론 너무 싱겁게, 다행히도 싸우지 않고 돌아갈 수 있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천족들이 길을 터주어 유저들이 이그드라실 연결 다리로 가게 해주었다. 천족들은 그야말로 초상집 분위기였다.
무쏘의뿔은 적으로 만났지만, 엘프 여왕 은나우스의 남편을 가깝게 생각했다. 오늘 이렇게 헤어지는 게 좀 아쉬웠다. 이공간에 갇혀 영원히 만날 수 없는 은나우스 였지만 그녀에게 받은 게 많은 무쏘의뿔은 뭔가 디야우스에게 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분위기가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유저들은 천계에서 보낸 긴 시간 동안 지쳐 있었고 천족들은 하나같이 침울했다.
‘나중에 좋은 일로 만날 날이 오겠지···.’
무쏘의뿔이 아쉬움을 뒤로 하고 앞으로 갔다.
“잠깐 부탁이 하나 있소.”
다스린 장로가 떠나는 유저들을 향해 말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음······. 어쨌든 우리는 당신들을 상대로 한 달은 막아내라는 명령을 받았소. 전투하지 않고 그 약속을 우리는 깬 것이오. 저곳을 통해 내려가거든 아래쪽에 있는 우리의 동료들과 싸우지 않았으면 하오.”
이그드라실 연결 다리 아래쪽은 백색 거성이 있었다. 지금 백색 거성은 휘스리힘을 비롯한 신과 상당수의 천족들이 정화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인간 유저들이 내려가게 된다면 전투가 벌어질 게 뻔했다. 더군다나 백색 거성 주변으로 마족 병사들과 마왕들이 포위하고 있었으니 어찌 보면 백색 거성에 있는 천계쪽 세력은 협공을 당하는 형국이라 할 수 있었다.
다스린 장로는 마지막까지 자기편의 안전을 생각했다.
헤임달을 비롯한 마계 추격대의 지휘부가 뭐라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을 때 무쏘의뿔이 나서 다스린 장로의 말에 대답했다.
“장로님의 말씀을 존중해 싸우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무쏘의뿔의 말에 다스린 장로가 허리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어르신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무쏘의뿔의 말과 달리 파티창으로 헤임달이 걱정해 물었다. 마계 추격대 지휘부가 다스린 장로의 부탁에 확답하지 못한 이유는 마계로 가는 길은 오직 한길인데 그 길 끝에 백색 거성이 있었고 백색 거성엔 적군인 신과 천족 병사들이 있었던 탓이었다. 그들이 절대로 순순히 백색 거성을 지나 빠져나가게 하지 않을 테고. 자연스럽게 성벽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마족 병사들이 아군을 도우려고 합세해 대규모 전투가 벌어질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무쏘의뿔은 천계에서 유저들이 죽는 것은 부활지 때문에 문제가 되지만 마계에서 죽는 건 부활지에 대한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그냥 다 죽어도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데리고 다니는 엔피씨들은 마계에 들어서는 순간 우루,두루에 실어 탈출시키면 되는 것이고. 유저들은 죽어도 부활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유저들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다. 아무리 죽어도 부활한다고 하지만 죽기 싫어하는 게 사람의 마음이었다.
무쏘의뿔이 이에 대답하기 전에 개쫑이가 먼저 말을 했다.
개쫑이는 지휘부에 속해 있었지만, 평소 회의 때 자신의 의사를 표하는 적이 없었다.
“그건, 마계 하늘로 들어서는 순간 최고야님이 메르세비아를 소환해 우리 모두 메르세비아를 타고 백색 거성을 벗어나면 간단히 해결되는 문제입니다.”
개쫑이는 무쏘의뿔의 성격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게임 최고 개발자이자 최고 책임자로서 무쏘의뿔이 게임하는 것을 항상 모니터링 했기 때문에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행동할지 잘 알고 있었다. 무쏘의뿔은 어떻게 보면 너무나 단순한 사람이었다.
개쫑이는 무쏘의뿔이 모든 유저들이 죽어도 상관없다는 생각을 읽었고 그것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중간에 나선 것이다.
“그게 가능할까요?”
“메르세비아의 크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저희 8천 명이 모두 올라타도 충분하고도 남을 겁니다.”
“그럼 그러면 되겠네요.”
“최고야님에게는 제가 말해놓겠습니다.”
유저들이 이그드라실 연결 다리 입구에 들어섰다. 혹시 뒤치기 당하면 어떨까 하는 걱정 아닌 걱정도 했지만, 안전지역인 이곳에 도착하고 나니 다들 마음이 놓였다. 이제는 집으로 갈 수 있다는 안도와 함께 꿀 같은 휴식을 생각했다. 이번 전쟁은 사실상 끝났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마계 추격대가 사도 연합의 퀘스트를 성공적으로 방해했고 천계의 밧소뎀 암살은 실패했다.
천계에서 재정비해 다시 쳐들어오겠지만 그때까지는 마계에서 사냥하고 놀면 되는 것이다.
유저들이 왔던 그때와 반대로 이그드라실 연결 다리를 내려갔다. 안갯속을 한참 걷다가 시야가 걷혔을 때 제일 앞쪽에 있던 최고야가 메르세비아를 소환했다. 최고야가 메르세비아를 소환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무 조각이 빛을 내자 하늘 공간에 무언가 서서히 형태를 드러냈다. 메르세비아와 싸워본 유저들은 한 번에 그것이 메르세비아임을 알아봤다. 금속처럼 광택 나는 비늘을 가진 검은색의 거대한 흑용. 평소와 다르게 최고야에게 조련된 상태라 전신에 푸른색 옅은 빛에 둘러싸여 있었고 눈빛이 좀 순해 보였다.
“자 다들 빨리 타세요. 시간이 없습니다.”
소환된 메르세비아는 이그드라실 연결 다리를 몸으로 감았다. 길게 늘어선 유저들이 빠르게 메르세비아의 등에 올라탔다. 메르세비아의 등은 뱀처럼 미끈해 붙잡을 무언가가 없었지만 메르세비아가 크게 요동치지 않는 한 떨어지지 않을 만큼 몸통이 굵었다.
최고야는 얼굴에 떠나지 않는 미소를 지으며 쉴 새 없이 정신력 회복 물약을 들이켰다.
“최고야 아저씨 술주정뱅이 같아.”
루의 비아냥에 아랑곳하지 않고 최고야는 다른 유저들과 달리 메르세비아의 머리 쪽에 올라탔다. 최고야는 루의 말처럼 정말로 쉴 새 없이 회복약 병을 들이켰고 개쫑이는 옆에서 끊임없이 물약을 건네줘야만 했다.
정상적으로는 절대로 최고야가 메르세비아를 길들여 소환할 수 없었다. 조련사의 그랜드마스터라고 해도 힘든 게 메르세비아의 조련이었는데 버림받은 천족의 도움과 메르세비아를 가두는 나무 조각의 힘으로 불가능한 게 가능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최고야와 메르세비아 간의 능력치 차이가 너무 컸기에 최고야는 쉴 새 없이 물약을 마셔가며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최장 20분.
모든 유저들이 메르세비아에 올라타자 최고야가 이그드라실 연결 다리를 휘감고 있던 몸을 풀고 하늘을 날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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