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자의시대 2 (142)
노인은 현실이 현실 같지 않았다. 젊은 친구들이 노는 모습을 멀찍이 떨어져 구경하다가 도중에 밖으로 나왔다. 이미 자신의 육체가 기계로 바뀌어 보통 사람처럼 잠을 안 자도 됐고, 음식을 섭취하지 않아도 됐다. 금전적으로 부족하지도 않았고 의식주 무엇 하나도 부족한 게 없었다. 원래 과소비하지 않는 노인인 데다 최고야의 시베리아 별장에 살게 되면서 더욱더 부족한 게 없는 상황.
뉴스에선 범죄 조직들이 설쳐대고 사이비 종교가 득세하며, 귀신이나 요괴들이 출몰한다고 인터넷에선 난리가 나고 있었다. 그 외에도 사람들이 마약과 가상현실에 빠져 큰 사회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데다 동성 간 결혼으로 인해 출산율 하락, 인간과 닮은 로봇 인형에 집착해 남녀가 연애하지 않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각국 정부는 떨어지는 출산율을 막기 위해 고심하는 가운데 일부 국가가 건강한 정자와 난자를 확보해 시험관에서 수정시킨 뒤 인큐베이터에서 성장시켜 출생하는 법률을 통과시켜 국제적으로 도덕적, 윤리적 논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세상이 행복하고 안전한 세상은 아니었다.
“나는 이만 집에 갔으면 하네.”
노인이 김태호에게 조용히 말했다. 최고야 역시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한쪽 구석에서 구경만 하는 처지였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싫으신가요?”
김태호는 노인이 시베리아 별장에서 게임만 접속하거나 아니면 인근 연구소와 훈련소만 오가는 것이 마음에 걸렸었다. 그래서 이런 자리도 마련한 것이다. 노인이 현실에서 보통 사람들과 만나고 어울리기를 바랐지만, 노인은 이미 그런 단계를 벗어나 있었다. 노인은 현실도 비현실 같았고 게임도 비현실이라고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몸이 인간을 초월한 기계가 되면서 어떤 면에서 노인의 현실은 비현실적으로 된 것이다. 노인은 시베리아의 김태호 별장에서 사이보그 군인들의 훈련 교관을 하고 있었다. 짧으면 일주일에 한 번, 길면 2주에 한 번 사이보그 병사들과 싸우는 것으로 훈련을 시켰다. 노인이 현실에서 만나는 사람들 역시 비현실적인 사람들이었다.
유저들이 노느라 정신없을 때 김태호와 노인은 비공정을 타고 알프스에서 시베리아로 돌아갔다.
무쏘의뿔이 접속한 곳은 노술도아의 궁전이었다.
유저들 모두 노술도아로 온 상태에서 접속종료를 하고 알프스 현모를 한 것이다. 쥴레도르는 복구공사가 한창 중이었는데 결국 시간이 지나면 완전히 복구될 것이다. 그리고 밧소뎀은 지금 쟌코비아에 머물고 있었는데 쥴레도르가 복구되면 다시 돌아갈 터였다. 마계 3대 도시는 대마왕과 연결돼 대표되고 있었다. 쥴레도르의 밧소뎀. 이는 밧소뎀이 죽을 때까지 변치 않을 명칭이었다. 쟌코비아에 밧소뎀이 있다고 해서 쟌코비아의 밧소뎀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노술도아에 무쏘의뿔이 머문다고 해서 무쏘의뿔이 노술도아의 무쏘의뿔이 되지는 않는다. 무쏘의뿔은 대마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무쏘의뿔은 노술도아의 지배자로서 최우선으로 노술도아의 출생률을 높이기 위해 조처를 했다. 도시의 주인은 도시의 발전을 위해 해야 하는 일들이 있는데 유저들의 경우 대부분 엔피씨 대리인을 두고 도시 운영을 맡겼다. 도시 발전을 위한 운영이 너무 복잡해서 유저들이 직접 하기엔 어려운 점이 많았다. 그래서 엔피씨 대리인에게 대부분 일을 맡기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에서 자신이 직접 지시하곤 했는데 무쏘의뿔은 출생률 증가를 우선순위에 넣은 것이다. 지난 전쟁으로 인해 소모된 병력을 복구하기 위해 출생률을 높인 것으로 이것은 밧소뎀도 지금 최우선으로 시행한 일이기도 했다.
전쟁으로 인한 일반 주민의 복구는 몇 달 안에 거의 회복될 것이다. 하지만, 정예 병사들, 하급 이상의 마왕들. 그리고 거대 몬스터들은 복구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무쏘의뿔은 평화로운 도심을 한동안 내려다보다 집무실 한쪽 구석에서 여러 종류의 씨앗을 증식시키며 숙련도를 올렸다. 언제고 다시 천계와 전쟁을 할 테고 노력한 만큼 스킬의 숙련도는 결과를 낼 터였다.
그리고 모든 걸 잊고 숙련도를 올리는데 집중할 때였다. 조용히 다가온 콩코노메가 무쏘의뿔에게 말을 걸었다.
“대장군님,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늘 함께하던 콩코노메가 무쏘의뿔에게 먼저 말을 한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더군다나 부탁이라니···.
속으로 매우 놀란 무쏘의뿔이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뭐지?”
“이번에 쟌코비아에 가시게 되면 저의 주인님이신 밧소뎀 폐하께 저의 심장을 달라고 하십시오.”
콩코노메의 뚱딴지같은 소리에 무쏘의뿔의 사고가 멈춰버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콩코노메는 밧소뎀이 주인으로 있는 리치였다. 즉 콩코노메의 심장은 대마왕 밧소뎀이 가지고 있는데 그 심장을 무쏘의뿔이 달라고 해서 자신의 주인이 무쏘의뿔이 되어 달라는 얘기였다. 이건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최고의 흑마법사인 리치를. 리치의 주인이 자신의 리치를 다른 자에게 소유권을 넘겨 준다는 것은 어떤 게임에서도 일어난 적이 없는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패자의시대 게임에서 흑마법사를 리치로 만들어가질 수 있는 존재는 상급 마왕 이상이어야 했다. 리치는 주인에게 절대복종했기 때문에 리치를 가진 마왕의 경우 리치는 하나의 주요 전력이기도 했다.
따라서 자신의 리치를 다른 사람에게 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대장군님의 공적이라면 저의 주인님인 대마왕 밧소뎀 폐하께서 거부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건 그렇겠지만 왜지?’
무쏘의뿔은 하나의 의문이 떠올랐다. 콩코노메는 밧소뎀이 자신에게 영구임대 준 것과 같았다. 주인은 밧소뎀 이었지만 늘 데리고 다니며 부려 먹는 것은 자신이었기 때문에 밧소뎀이 주인이라고 해서 큰 의미가 없었다.
무쏘의뿔이 엔피시인 콩코노메가 주인을 바꾸자고 하는 데는 뭔가 이유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일은 상상도 해본 적이 없어서 망설였다. 그때 고르키가 한마디 했다.
“주인님, 콩코노메의 부탁이 결코 주인님에게 해 되는 일은 아닐 것입니다. 약속하십시오.”
고르키는 무쏘의뿔을 섬기게 되면서 항상 옆에 있었다. 샤도임이나 암살자 5인방이 아무 말 없이 주변에 머무는 것에 비해 고르키는 조언도 하는 수준의 존재였다는 것을 무쏘의뿔은 이번에 처음 알았다.
“그렇게 하지.”
일단 대답은 했지만 무쏘의뿔은 두 가지 측면에서 매우 놀랐다.
엔피씨인 콩코노메가 자신에게 부탁할 수 있다는 것. 이건 엔피씨가 퀘스트를 주는 것과 다른 차원이었다.
엔피씨가 주인을 스스로 바꾸겠다는 것인데···.
두 번째는 엔피씨인 고르키가 주인인 자신에게 조언할 수도 있다는 것. 보통 유저가 엔피씨에게 물어보면 대답을 하지만. 스스로 조언을 해주는 경우는 없었다.
엔피씨들끼리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이 이상할 일은 아니지만 유저와 엔피씨의 관계에서 이런 경우는 그간 십 년 넘게 패자의시대 게임을 하며 무쏘의뿔이 처음 겪는 것이라 속으로 무척 의외라고 생각했다.
한편으로 왜 콩코노메가 주인을 바꾸려고 하는지 무척 궁금하기도 했다.
유저들이 모두 알프스에서 집으로 돌아가 접속하기 시작했다. 알프스가 유명한 관광지였지만 보통 사람들이 쉽게 갈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들로서는 더욱 가기 어려운 위치, 거리였다. 평생 한 번 가면 다행일 정도로 비용이 많이 드는 관광지에서 짧지만 즐겁게 지낸 유저들이 더 놀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게임에 접속해 수다를 떨었다.
유저들은 신들이 한동안 공격하지 않을 것을 예상하고 그동안 사냥터에서 광렙할 생각으로 새로운 공격대 구성과 사냥 계획을 짜는 동안 무쏘의뿔은 밧소뎀을 만나기 위해 나섰다.
“잘 다녀오십시오.”
“별일이야 있겠는가? 자네들이 고생이지···.”
무쏘의뿔은 유저들의 사냥을 고생한다고 생각했다. 원래 이번 전투는 마계에서 큰 전과를 냈다. 하지만 왕도인 쥴레도르가 쑥대밭이 되고 대마왕 밧소뎀이 쟌코비아로 사실상 도망친 꼴이 됐기 때문에 놀라운 전과에 비해 승전연을 열지는 않았다. 다만, 대장군으로 이번 전쟁을 지휘했던 무쏘의뿔은 쟌코비아에서 밧소뎀을 만나야 했다. 무쏘의뿔은 원래 데리고 다니는 엔피시들과 항상 데리고 다녀야 하는 이삐팟원들만 데리고 쟌코비아에 가기 위해 마계의 대도시에만 설치된 시티포탈 입구에 섰다.
시티포탈의 빛이 시야를 잠시 가렸다가 사라졌을 때 무쏘의뿔 일행의 눈에는 낯선 풍경의 도시를 마주했다.
마계의 3대 도시는 크기나 규모가 비슷했지만, 건물 양식과 분위기가 아주 달랐다. 그 지역 주민들의 모습도 마치 인간들의 피부색이 다르듯 피부색과 체형이 달랐는데 그동안 유저들이 머무는 노술도아나 그래도 한두 번씩은 가 본. 익숙해진 쥴레도르와 달리 완전히 생소한 쟌코비아에 무쏘의뿔 일행 중 유일한 인간들인 이삐팟원들이 놀라워했다.
“이곳은 마계 같지가 않은걸?”
쟌코비아는 다른 두 도시와 달리 분위기가 밝고 화사했다. 그 이유는 다른 도시들과 달리 날씨가 좋은 탓으로 보였다. 마계의 도시에선 보기 드물게 맑고 푸른 하늘이다. 무쏘의뿔 일행들은 쟌코비아의 시티포탈을 통해 왔기 때문에 몰랐지만 쟌코비아는 높은 성벽 밖으로 사방 짙은 안개에 휩싸여 있었다. 보통 마계의 도시들이 절벽 위나, 용암 위 같은 접근성이 떨어지는 곳이었는데 이곳 쟌코비아는 평지에 세워진 도시였다. 물론 성벽 밖의 안개는 적들은 막아내는 효과가 있었지만, 지상으로 접근하지 않는다면 그 위험을 알 수 없었다.
시티포탈을 나온 무쏘의뿔 일행들은 곧바로 이동마법진을 통해 왕궁으로 이동했다. 대장군인 무쏘의뿔이 걸어서 왕궁으로 갈 일은 없었다. 사방 밝은 빛이 걷히자 방 안을 가득 메운 병사들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대장군 무쏘의뿔을 맞았다. 이들은 모두 쟌코비아 왕궁을 지키는 정예 병사들과 대마왕 밧소뎀의 근위대원 들로 일부 흑마법사들도 포함돼 있었다.
이런 광경은 이삐에게 무척 낯설었고 무쏘의뿔이란 존재가 새삼 높게 보였다.
마족 병사들에 둘러싸여 화려하고 넓은 복도를 지나자 대마왕의 집무실로 보이는 큰 문 앞에 도착했다. 노술도아의 무쏘의뿔 집무실과 비슷한 크기였지만 문 앞을 지키는 병력은 크게 차이가 났다.
문 앞을 지키는 병사들의 경례를 받으며 문 안으로 들어선 건 무쏘의뿔 혼자였다. 이번 만남은 전쟁을 지휘한 대장군의 전쟁 결과를 보고하기 위한 자리였다. 원래대로라면 상급 마왕들도 참석해야 했는데 마계쪽도 워낙 피해가 크다 보니 밧소뎀이 무쏘의뿔과의 면담만 승인한 것이다.
집무실 안에는 대마왕의 시중을 드는 몇 명의 마족들만 있었다. 사실상 개인 면담과 다른 바 없었다.
밧소뎀은 자신의 왕좌에 앉아 있었는데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음을 무쏘의뿔이 느꼈다.
‘훨씬 강해진 느낌이군.’
원래 밧소뎀의 키가 컸다. 그리고 지금은 높은 곳에 앉아 있어 자연스럽게 무쏘의뿔을 내려다보는 위치였다.
“어서오시오. 대장군의 공은 천지를 뒤덮고도 남음이오.”
무쏘의뿔이 한쪽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송구할 따름입니다.”
무쏘의뿔은 자신을 바라보는 밧소뎀의 얼굴에 미소가 머물러 있음을 보았지만 뭔가 다른 거리감이 느껴졌다.
“내 비록 쥴레도르를 잃었지만 쟌코비아가 몹시 맘에 드오. 대장군은 마음 상해 하지 마시오.”
“............”
밧소뎀이 무쏘의뿔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무쏘의뿔은 잠시 혼돈에 빠졌다.
‘이곳이 정말 가상현실일까?’
인간이 엔피씨를 모시고 엔피씨가 인간을 위로한다. 그런데 너무나 현실 같다.
무쏘의뿔은 이곳에 오는 동안 내내. 게임에 접속한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우도벨 일당의 급습에 마계의 수도가 폐허가 되었고 대마왕 밧소뎀이 죽을 뻔했다. 자신이 어떤 부분에서 잘못했는지 곱씹고 되새기며 답 없는 반성을 하고 있었다. 그런 무쏘의뿔을 위로하듯 밧소뎀이 건넨 말에 할 말을 잃었다.
“...죄..송...하옵니다···.”
“그대는 우리의 영웅이며 나의 영웅이오. 쥴레도르에서 대장군이 한 말을 난 기대하오.”
밧소뎀의 말에 무쏘의뿔이 정신이 돌아왔다. 쥴레도르에서 밧소뎀을 빼내기 위해 무쏘의뿔이 밧소뎀에게 한 말이 있었다. 당시 밧소뎀과 무쏘의뿔 둘이서 우도벨이 이끄는 병력과 싸워야 하는 상황에서 유저인 자신은 죽어도 부활하지만 엔피시인 밧소뎀을 살리기 위해 도망치라는 말을 좋게 포장해 말했는데 밧소뎀은 그것을 진심으로 믿고 있는 것이다.
“최선을 다해 준비할 것입니다. 두 번 다시 우리의 땅에 발을 디딜 일은 없을 것이옵니다.”
“아니오. 다음번엔 내 직접 싸울 것이오. 하루빨리 놈들이 오기를 바라마지 않소.”
밧소뎀의 말에는 기대와 희망이 가득 차 있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던 무쏘의뿔의 안내창에 새로운 메시지들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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