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자의시대 2 (148)
“오랜만이군.”
“몸이 좋아 보이지 않는걸?”
이리오스가 우도벨의 말에 대답 대신 손짓으로 앉을 곳을 가리켰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하지 않은 햇볕이 그대로 내리쬐는 곳에 나무 그루터기 같은 것이 몇 개 있었다.
우도벨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가 어떻게 하기라도 할까 봐?”
“너니까 경계하는 거야.”
우도벨이 억지 미소를 지으며 이리오스를 바라봤다. 이리오스는 마치 병든 것처럼 기운이 없어 보였다.
“용건이 뭐지?”
“네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려고 왔지.”
“후훗.”
어처구니없다는 듯 이리오스가 비웃는 듯한 웃음을 흘렸다.
“내가 저지른 가장 큰 실수가 뭔지 아나?”
우도벨이 대답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이리오스는 애초에 우도벨이 대답하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우도벨의 대답을 기다리기 전에 이리오스가 말했다.
“첫 번째로 내가 데리디아를 가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 것이야. 두 번째로는 너희와 손잡은 것이고. 세 번째는 인간들을 적으로 만든 것이야.”
“후후후후······. 겁먹었군.”
“겁? 그럴 수도 있겠군. 넌 좋겠어. 무식해서 용감하니···.”
우도벨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가셨다.
둘 사이에 깊은 침묵이 흘렀다. 노려보는 듯한 우도벨과 다르게 이리오스는 거울과 같은 눈빛이어서 심중을 읽을 수 없었다.
먼저 입을 뗀 것은 우도벨이었다.
“어쨌든 넌 우리와 같은 배를 탔어. 이곳에 내가 온 이유는 이제 너도 우리와 함께 움직여야 할 때가 됐기 때문이야.”
“거절한다면?”
“네가 한 일을 모두 알게 될 것이고, 우리가 먹을 욕까지 네가 먹게 되겠지.”
우도벨은 이리오스가 적극적으로 협조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이곳에 온 이유도 이리오스의 약점을 잡아 일종의 협박하기 위해서였다. 좋게 말해선 들어줄 이리오스가 아니었다.
이리오스는 천계의 신 중에서도 조금 독특한 존재였다.
다른 신들과 거의 어울리지 않았고 천족들의 대해서도 무관심했다. 그의 신전이 지상에 있는 이유가 바로 그런 점 때문인데 보통 신들은 자신들이 창조주의 자식으로 생각해 누구보다 더 높고 고귀한 존재라고 자부했다. 그래서 신들은 공중섬에 살았고 순수한 천사들을 주변에 두었다. 그런데 이리오스는 지상에 신전을 두고 정원을 가꿨다. 이리오스의 정원, 숲은 오직 허락된 자들만 들어올 수 있는 미궁이었다.
“마치 내가 큰 죄를 지은 것처럼 말하는군.”
“그렇게 생각하나? 이그드라실 연결 다리를 놓은 게 너지. 드래곤들과 왕래하는 것도, 혼자 데리디아를 잡으러 갔고. 또, 엘프들을 대량생산해 반란을 계획하고 있지 않나?”
우도벨의 말에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던 이리오스의 얼굴에 어둠이 드리워졌다.
신들과 천족들은 이리오스가 마계와 천계 사이에 연결 다리를 놓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일 자체만으로 이리오스는 비난을 들었다. 자신의 정원에 늘 틀어박혀 있어서 이리오스의 귀에 들리지 않을 뿐. 하지만 세상이 자신을 어떻게 보리란 것을 짐작은 하는 이리오스였다. 그리고 천계의 존재들이 다른 차원의 존재들과 왕래를 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금지된 일이었다. 특히 다른 차원의 존재가 천계로 넘어오는 것은 중죄에 해당해 거의 예외 없이 벌을 받았다. 그래서 종종 천계로 멋모르고 넘어온 드래곤들이 신들에 의해 쫓겨났기에 드래곤 사회에서 천계로 넘어가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마계의 경우도 드래곤의 방문이 금지돼 있는데 마계의 경우는 드래곤과 마계가 애초에 적대적인 관계로 설정돼 있어 서로 마주치면 싸우는 게 정상이었고 천계와 드래곤들은 적대적인 관계가 아님에도 천계가 드래곤을 포함한 다른 차원의 존재들에 대해 거부했다.
그런데 이리오스는 드래곤들과 친해서 서로 왕래가 잦았다. 그의 정원이 큰 이유가 드래곤들의 왕래를 가려주는 하나의 요소가 되기도 했다.
“우도벨, 입을 조심해.”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네가 데리디아에 집착하고 독자적으로 엘프를 생산하는데 이유를 생각하지 않을 리 없잖아?”
“나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거 아냐?”
“데리디아가 열쇠였었지.”
이리오스가 데리디아를 원하는 이유가 데리디아의 생명력으로 엘프들을 양산하려고 했던 거였다.
데리디아의 생명의 씨앗을 통해 생산한 원형 엘프들은 뛰어난 마법 능력을 타고나게 되는데 그 능력이 정예 천사병들을 뛰어넘었다. 원형 엘프들을 양산할 수 있다면 우도벨의 말처럼 반란을 통해 천계를 손에 쥐는 게 불가능하지 않았다.
“날 열 받게 하려는 게 목적이라면 넌 그 목적을 이루었어.”
“워 워···. 잠시 내 말 좀 들어봐.”
화가 난 이리오스에 감응하듯 방 안의 모든 식물이 빠르게 증식하고 있었다. 우도벨과 이리오스의 거리가 만든 공간 외의 주변으로는 식물들의 줄기들이 얽히고설키며 벽을 만들었다.
우도벨이 몇 차례 싸워본 무쏘의뿔의 식물 증식 스킬과 이리오스의 스킬은 차원이 달랐다.
말 한마디만 잘못하면 식물들이 일시에 달려들 것 같은 기세.
“전쟁은 진행 중이야. 너의 도움이 필요해.”
이리오스는 화난 얼굴로 대꾸를 하지 않았다.
“지난번은 너와 우리가 힘을 합치지 못했지. 하지만 네가 우리와 함께해준다면 상대가 밧소뎀이라고 해도 이기지 못해. 어쨌든 우리가 이기면 데리디아는 네 것이야. 우리는 데리디아의 이용법을 몰라.”
“너희가 데리디아의 이용법을 모르는 것은 데리디아 자체를 모르기 때문이야.”
“우리는 데리디아에게 관심이 없어. 데리디아를 갖는 게 쉽지 않다는 것도 알아. 하지만 이번엔 너를 도와 데리디아를 잡는데 최우선으로 할 생각이야.”
우도벨은 이리오스가 데리디아와 싸워 진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 이리오스는 그 싸움의 부상 후유증으로 몸 상태가 정상은 아니었다.
“너의 속셈을 모를 줄 알아?”
“후후후, 필요 없는 걸 얻으려고 하는 것보다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널 이용하는 게 우리는 더나.”
“솔직하군.”
“난 원래 전쟁을 좋아하지만 내 일행들이 장기전을 좋아하지 않더군. 네가 한 번만 도와주면 이번엔 끝낼 수 있을 것 같은데.”
“무슨 근거로?”
“우리가 잃은 것이 많듯 저들도 잃은 것이 많지. 넌 우리가 잃은 것을 보충하기 충분해.”
이리오스는 고민을 했다. 고민하는 사이 벽처럼 둘러쳐져 있던 줄기와 넝쿨의 벽이 제자리를 찾아갔다.
“내가 정상이면 모를까. 그리고 마계는 내가 힘쓰기 어려운 곳이야.”
이리오스는 지난 데리디아와의 싸움에서 육신을 버리고 영혼만 도망쳤었다. 지금은 회복 중으로 최상의 몸 상태가 아니었다.
“그래서 이번엔 네가 싸우기 좋은 곳에서 싸울 생각이야.”
이리오스가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표정으로 우도벨을 쳐다보았다.
“마계의 외곽지역엔 숲이 존재하지. 데리디아가 있는 곳 외에도 말이야. 그곳엔 밧소뎀의 영향권 밖에 있는 마왕들이 지배하는 곳인데 그곳의 성들을 함락해 우리의 거점으로 삼을 생각이야. 마계의 성들은 기본적으로 강하고 튼튼해서 농성하기 좋지.”
“장기전으로 끌고 갈 생각인가? 장기전은 싫다고 하지 않았나?”
“그건 상대가 어떻게 나오냐에 달렸지. 그리고 전쟁이 시작된 이상 생각대로 끝나진 않아. 우리가 모두 한배를 탄 거야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까지 아무도 내릴 수 없어.”
이리오스는 우도벨의 음흉함에 썩은 미소를 보냈다.
천계의 신들은 전쟁을 좋아하는 신과 싫어하는 신, 중립적인 신들이 있었다. 몇 차례의 전쟁을 하며 천계가 어려워지자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해 모두 힘을 합쳤는데 생각밖에 전쟁이 길어졌다. 전쟁을 싫어하는 신과 중립의 신들이 참전한 순간 이들은 우도벨의 페이스에 말린 것이고 이제는 빠져나갈 수 없었다. 우도벨을 재촉하고 다그쳤지만, 전쟁이 어렵게 흘러가니 끌려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샌님들의 분노가 느껴지는군.”
“나도 전쟁의 장기전은 원하지 않아. 빨리 끝내기 위해 너의 도움이 필요한 것은 진심이야.”
“이번엔 누가 참전하지?”
이리오스의 숲에서 나온 우도벨의 얼굴엔 미소가 그려 있었다.
“가자.”
우도벨의 등 뒤에서 빛나는 날개가 펼쳐지며 하늘을 날아오르자 뒤이어 정예 천사병들과 페가수스 기사단이 날아올랐다. 또다시 전쟁의 시간이 가까워진 것이다.
“탁 탁 틱 틱···.”
타오르는 모닥불 속에서 장작이 튀고 있었다. 모닥불 주위로 5명의 유저들이 아무 말 없이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까만 하늘에 보석 같은 별들이 셀 수 없이 빛났다. 시원한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며 유저들의 몸을 휘감은 뒤 흘러갔다. 마치 지친 몸과 마음을 어루만지는 것 같았다. 평화롭고 고요한 밤이었다.
“모두 한가하시네요?”
넋 놓고 모닥불을 바라보고 있던 유저들은 옆으로 사람이 와도 모르고 있었다.
“이제 왔나?”
“쉬지 않고 달려왔습니다.”
모닥불 주변에 앉아 있던 유저들이 모두 일어나 방문객을 맞았다.
“바로 시작하실 건가요? 아니면 날이 밝으면 시작할 건가요?”
“바로 시작하지. 깔끔하게 클리어하고 아침에 쉬는 게 좋지 않겠어?”
“그럴까요?”
중갑으로 무장한 이 남자는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한밤중에 숲을 헤치며 왔던 관계로 몸에 배어 있는 피곤함을 숨길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남자에게 지시하는 여성 유저는 단호했다.
“나도공주님 먼 길을 오셨을 텐데 좀 쉬었다 하죠?”
“우리 ‘버그’가 왔으니 금방 끝낼 수 있습니다. 이왕 쉴 거면 도시에서 쉬는 게 좋잖아요?”
다른 유저들이 ‘나도공주’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묻어가는 처지에서 이것저것 따지는 게 염치없는 짓이라고 다들 생각했다.
“그럼 시작합시다.”
나도공주는 유저들을 다그침과 동시에 밤에 따스함을 주었던 모닥불을 발로 껐다. 게임에서 모닥불은 유저들의 떨어진 여러 가지 상태를 회복시키는 기능이 있었다. 모닥불의 종류에 따라 회복 속도와 회복 양이 달랐는데 나도공주가 불을 끄는 모닥불은 모닥불 중에서 최상급에 속하는 비싼 아이템이었다. 돈이 많거나 고렙 유저가 아니면 사용하기 어려운···.
나도공주가 불 꺼진 모닥불 판을 가방에 챙기며 앞장섰다. 밤하늘을 밝히는 워낙 많은 별과 밝은 달로 인해 밤 숲길을 가는데 크게 지장은 없었다. 이들은 얼마 안 가 큰 나무들 사이로 가시덤불 앞에 섰다.
“버그야, 너만 믿는다.”
“걱정하지 마세요.”
버그는 이 말과 함께 가시덤불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뒤이어 5명의 유저들이 뒤를 따랐다.
버그는 가시덤불 안으로 들어온 지 몇 걸음 걷지 않아 갑자기 바닥이 쑥 꺼짐을 느꼈다. 그리고 주변의 시야가 바뀌면서 새로운 메시지가 창에 떠올랐다.
-당신은 ‘하임’의 감옥에 들어오셨습니다. 하임들은 뒷문의 존재를 알게 되었으며 감옥을 벗어나기 위해 이곳으로 몰려올 것입니다. 뒷문을 닫고 감옥을 벗어나든지 하임들과 싸우십시오. 하임들의 감옥 안쪽에는 보석을 좋아하는 하임들이 숨겨 놓은 보물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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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그는 메시지창에 떠오른 정보를 꼼꼼히 살폈다. 나도공주의 부탁으로 급하게 달려온 탓에 이곳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다. 게임을 잘하는 법은 정보의 수집과 이해였다. 신규 지역이나, 던전, 몹과 마주쳤을 때 자동으로 떠오르는 시스템 메시지만 잘 파악해도 게임은 수월해지는 법.
버그가 한동안 제자리에 서서 메시지를 읽는 동안 팟원들은 그 뒤에서 조용히 기다려주었다.
- 작가의말
죄송합니다.
제가 글을 쓰는 속도가 연재량을 따라가지 못하네요.
그렇다고 며칠에 한편씩 올리기는 그렇고···.
일단 몇 달간 비축분을 모았다가 재연재를 할까 생각입니다.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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