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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점  공모전참가작 체포된 삼신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드라마

제니아.
작품등록일 :
2019.05.01 23:59
최근연재일 :
2019.11.18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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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11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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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쪽

3. 두 번째 죽음 (2) : 철벽의 여인 – 4

DUMMY

3. 두 번째 죽음 (2) : 철벽의 여인 – 4



클라우디아는 멈칫하고 명명인을 이윽히 건너다보았다.


‘약혼녀? 그건 결혼을 약속한 사람을 말하는 건데? 근데 그렇게 임자 있는 남자들이 예전에 뭐 어쨌다고?’


명명인은 클라우디아의 눈이 약간 커지며 눈빛 또한 날카로워진 것을 알고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는 명단 쪽으로 눈을 내리깔며 계속 나직하게 말했다.


“그··· 자기 남자들을 아가씨한테 뺏길까봐, 그 약혼녀들이.”


“여기서 깽.판. 이라도 더 놓을까봐요?”


클라우디아는 중간에서 명명인의 말을 확 자르며, 시니컬하게 반문해보았다. 상대의 성량에 맞게 나직하게 음성을 한껏 낮춘 것은 물론이었다. 명명인은 그녀의 말을 듣고, 말문이 막힌 채 한숨만 푹 내쉬었다.


“진짜 또 그랬다간, 그건 언제 누가 봐도 그 사람들이 이상한 거죠.”


클라우디아는 말하던 끝에, 명명인에게서 초대 손님 명단을 낚아챘다. 그리고는 거기에 적힌 기록을 쓱 훑어보았다.


‘그 사람은 뭐 끄트머리에 추가해 줬었고, 확실하게 왔다고 표시되어 있군.’


클라우디아는 붉은 머리 남자를 떠올리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 외에는, 나머지 12명의 구혼자들 이름도 빼꼭하게 적혀 있었다. 실상, 붉은 머리 남자 이외의 12명의 구혼자들을 알아냈던 것도, 그녀가 다시 살아난 소식을 접한 뒤에 도착한 형식적인 편지들과 본체의 영혼이 남긴 유품들 덕분이었다.


‘이름들을 보면, 스페인 쪽에 연이 닿은 사람은 꽤 있는데. 프랑스 쪽과 연관되어 보이는 사람은 딱히 안 보이는군.’


하지만, 직접 보지 않는 이상은 섣불리 단정 지을 수 없었다.


‘진짜 이 아가씨였으면, 나머지 구혼자 12명은 이미 직접 봤을 텐데. 얼굴이야 이제 보면 되지만, 나이는 다들 어찌 되는지 알 수가 없어. 처음 혼담 들어왔을 때 다 아는 줄로 알 텐데 완전 난감하군.’


클라우디아는 거기까지 생각을 정리한 뒤, 명명인이 별도로 표기한 부분을 살펴보았다. 초대되지 않았음에도 방문한 손님들 명단은, 따로 써놓고 밑줄을 쳐놓은 상태였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은 총 6명이었다. 독보적으로 튀는 이름이 세 명 정도 눈에 들어왔다.


‘근데, 이 중 셋은 프랑스 쪽에 연이 있나? 나··· 하고는 어떻게 되는 사이였지? 아니면 지금 초대한 사람들하고 몇 다리 건너서 뭐가 있길래, 소문 듣고 한 번 찔러 보러 온 건가?’


언뜻 보기에 3명의 남자들 이름에서는, 제노비아였을 때의 그녀가 알던 백작의 작위와 가문과의 연결점이 딱히 없어 보였다. 그러나, 백작이 세상을 떠난 뒤에 무슨 일이 있었을지는 조금이나마 들어볼 수 있을 듯했다.


‘일단, 부딪쳐 보는 수밖에는 없겠군.’


클라우디아는 명단을 다시 명명인에게 돌려주며 물었다.


“여기 따로 표시한 분들은, 직접 보고 안내해 드렸습니까?”


“예, 아가씨.”


명명인은 잔뜩 긴장한 태도로 대답했다. 클라우디아는 그의 대답을 듣고 어느 정도 결론을 내렸다.


‘최소한 이 가문과 알던 사이고, 이 집에서 오래도록 일한 사람들한테도 아주 초면은 아니라는 거군.’


클라우디아는 연회장 입구 쪽을 힐끔 건너다보았다가, 다시 명명인을 향해 말했다.


“혹시 누가 더 오거든, 철저하게 검문하고 들여보내거나요.”


“검··· 문··· 이라고 하셨습니까, 아가씨?”


“만약에 여기 손님들 찾는 여자분들이라도 온다면.”


“예.”


“통로 열어놓고 옆방에 안내하거나.”


“안내···라고요?”


“말이 안 통한다 싶으면, 바로··· 보내버리세요.”


클라우디아는 잠깐 망설이다가, 말을 최대한 골라서 덧붙였다.


‘정말 이 손님들과 뭔가 있는 여자들이 불안해서 들이닥칠 일이라도 있다면, 그런 여자들한테는 사실 너무 심하게 대하고 싶지는 않아.’


백작을 찾는 제노비아의 영혼으로서, 그런 여자들의 심정은 일부 이해가 되었다.


‘그런 여자들은 날 그 자체로 미워하는 게 아니라, 자기들한테 충분한 믿음을 주지 못한 애인이나 남편감을 미워하는 것일 테니까.’


확실히 제노비아였을 때에 목격했던 일부 귀족 부인들의 행각을 떠올리면, 명명인이 간접적으로 언급한 부분과도 어느 정도 겹쳐지는 구석이 있었다. 부인들은, 남편인 귀족들이 다른 여자에게 접근하고 관계하는 것에 대해, 직접적으로 남편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그 대신, 남편이 혼외정사를 한 상대 여자를 응징하거나, 혹은 여자에게서 태어난 혼외자를 교묘하게 흔들어놓기도 했다.


‘그 때 그 아줌마가··· 딸애를 찾으러 갔다가, 그 아비되는 남자 부인이 시킨 사람들한테 맞아죽은 것도, 사실은 그래서였겠지.’


귀족들 쪽에서 정략 결혼에 쓰려는 도구로 딸을 가로챈 것이라면, 그 딸의 생모를 다독이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을 터였다. 그러나, 곧장 사람의 목숨 자체를 끊어버린다는 것은, 여러 모로 차원이 다른 극단적 반응이었다.


‘남편을 탓하는 아내라는 이름은, 여러 모로 비난받기 딱 좋은 일이라는 거. 그리고 아내가 사람을 죽이게 내버려 두는 남편 또한 제대로 된 사람은 아니라는 거.’


사랑하는 사람에게, 혹은 사랑과는 관계가 없더라도 서로가 필요했기에 평생을 함께 하는 상대에게 배신당했다면, 분노하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울 듯했다. 정말 화내야 할 사람에게는, 이미지 관리 때문에 대놓고 행동하지 못했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유일하게 허락된 권리인 신분의 힘으로, 신분 낮은 상대 여자들에게 보복을 가하며 모든 분노를 쏟아냈을 것이다.


‘그리고 남아있는, 한껏 꾸며진 좋은 모습만, 남편과 주변 사람들한테 내보이며 살아가겠지. 백 년이고, 천 년이고.’


클라우디아는 거기까지 생각했다가, 잠시 쓰게 입맛을 다셨다. 생전의 백작이 결혼을 했었는지, 혹은 주변 여자들과의 관계가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군에서도 상관이며 귀족 사회에서도 한참 상급자였을 베릭 공작이 오기 전까지, 백작은 바르셀로나에서 오래도록 자리를 묵묵히 지키며 싸웠었다.


제노비아였던 그녀가 작전에 동원되어서 길잡이 임무를 수행한 날이면, 백작은 모두 잠든 후에 부관이었던 금발 지휘관과 함께 그녀의 막사에 들어왔었다. 그녀가 지쳐서 잠들었을 때, 혹은 악몽을 꾸며 흐느끼고 있을 때, 백작의 큼직하고 단단한 손은 언제나 그녀의 뺨과 정수리를 어루만졌었다. 그녀가 뒤척이면 손을 떼고, 그는 말없이 나갔었다.


그러나, 날이 밝으면, 백작은 아무 일 없었다는 것처럼 중급 지휘관들 사이에서 공식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그런 와중에도, 다른 군사들이 제노비아였던 그녀에게 위협적인 언사를 돌려서 걸거나, 혹은 뒤에서 다른 수작을 부리려 할 때면, 백작은 어김없이 그들에게 제동을 걸었다.


‘모두가 잠들고 조용할 때마다, 당신이 비로소 숨통을 틔우고 나를 아껴주었다는 걸. 사실 다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당신은 아직 내가 그것까지 알길 바라진 않았지요. 군의 기강이란, 그런 것이었으니까.’


남자들이 차고 넘치는 곳이 여자 하나만 들어가면 조금씩 흔들리다가 무너진다는 이야기는, 돌이켜 보면 너무도 많았었다. 집시들 중에는, 떠도는 세상 이야기들을 모아 노래를 만들거나, 거리에서 이야기를 풀고 푼돈을 받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 집시들이 전하는 이야기의 종류들 중 반 이상은, 한 여자에게 모든 것을 건 사람들이 차례로 파멸해가는 내용이었다.


‘그런 이야기에··· 백작님, 당신과 내 인생을 절대 추가하고 싶진 않았어요.’


설령, 다른 이들이 파멸한다 해도, 백작과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상관없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백작과 자신의 마지막이 좋게 끝난다면, 두 번 다시 태어나지 못한다 해도 좋을 듯했다. 클라우디아는 입구에서 꼿꼿한 자세를 취하고 매무새를 마지막으로 가다듬은 뒤, 한 발 앞으로 디뎌서 연회장의 문지방을 넘었다.


명명인이 클라우디아의 등장을 커다랗게 알렸다. 그러자, 안에서 원탁 몇 개를 각각 둘러싸고 앉은 남자들이 일제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붉은 머리 남자는 네 개의 원탁 중에서, 오른쪽 구석에 있는 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클라우디아는 드레스 자락을 두 손으로 각각 잡고, 무릎을 약간 굽히며 약식으로 방문자들 모두에게 예를 표했다. 간단한 인사를 마친 뒤, 그녀는 원탁마다 앉은 남자들의 앞을 재빨리 확인해보았다. 참석자들의 이름표가 각각 놓여 있었다. 그녀와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랑탱(Lentin)’


클라우디아는, 초대받지 않고 별도로 기록된 손님들 중에서, 가장 젊어 보이는 사람 쪽을 확인했다. 그리고는 그의 이름을 속으로 읽어냈다. 그 사람은 30대 초반 정도로 보였고, 뼈대가 도드라지는 손에 큼직한 반지 하나를 끼고 있었다. 반지의 몸 부분은 묵직한 금이었고, 그 한가운데에 박힌 연둣빛 계란형 보석이 시선을 확 잡아끌었다. 손톱보다 좀더 클 듯했다.


붉은 머리 남자는, 클라우디아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곁눈질로 확인하다가 싸늘하게 굳어졌다. 그러나, 자신이 앉은 원탁 주변의 남자들을 의식하고는, 입을 달싹이다가 꾹 다물어버렸다. 클라우디아는 그런 남자의 반응을 흘끔 보고는, 속으로 가소로움을 금치 못했다.


‘험하고 더러운 생각은 오지게 많으면서, 유약한 자식.’


붉은 머리 남자를 둘러싼 이들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는, 아직 가늠할 수 없었다. 그 개인 자체만으로는 봤을 때는 얌전한 사람인 듯했지만, 그의 배경 때문에 사람들이 과잉 충성하는 의미로 뒤에서 무슨 짓을 했을 게 분명해 보였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수페리스타의 인척인 그 사람을 그런 식으로 자기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치워버린 게 바로 저 인간일 테니까.’


클라우디아는 붉은 머리 남자에게 고개를 약간 끄덕여주며, 속으로는 그렇게 되뇌었다. 속마음이야 어떻든 간에, 상대를 인지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 따위는 그녀에게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오늘 모임은 어떻게들 알고 오셨죠?”


음악 이야기가 한참 오가다가 잠잠해진 뒤에, 클라우디아는 랑탱을 포함한 세 명의 남자들 쪽을 향해 물음을 던졌다. 그러자 랑탱이라는 30대 남자가 대답했다.


“아름다운 아가씨가 주름잡는 모임이라니, 솔직히 조금은 궁금했습니다.”


클라우디아는 랑탱이 하는 말을 듣고 옷 속의 팔에서 전율이 돋는 것을 느꼈다. 분명 이탈리아 언어로 말하고 있기는 했지만, 묘하게 오르내리는 억양과 스치는 발음에서 부드러운 비음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본체의 영혼이 남긴 유품들을 보며 공부했을 무렵, 이탈리아에서 자수성가한 집안의 딸이 프랑스 왕실로 출가한 일이 있다는 기록도 어렴풋하게 본 적 있었다.


‘프랑스 사람인 건 알았지만, 여긴 무슨 일로 온 거지?’


프랑스인이 이탈리아 언어를 어느 정도 한다는 것이,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자국 언어에 대한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기에, 아주 가까운 사람들과는 자국 언어로 밀담을 나누며 소외시키기도 예사라는 평이, 생전 본체가 남긴 기록에도 있었다.


‘이 아가씨가 프랑스 사람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안 좋은 기억이 있었나···? 하긴, 백작님도 부관님하고 둘이 있을 때는 그쪽 언어로 얘기하긴 했지만. 그게 꼭 그 나라만의 특성이라고 볼 건 아닌 거 같은데. 자기가 편한 말로 하는 건 어느 나라건 다들 그러지 않나?’


자신이 진짜 클라우디아가 아니라는 의심을 받지 않으려면, 그녀로서는 어느 정도 본체의 생전 입장도 적당히 섞어서 행동해야 할 듯했다.


“정말 그것뿐이신가요?”


클라우디아는 손에 든 와인잔을 한 번 빙그르르 돌리며 물었다. 순간, 랑탱의 뺨 근육이 바르르 떨리다가 살짝 경직되었다.


“저보다 좀더 세련되고 높으신 부인들께서, 사교 모임 주도하는 건 더 많이 보셨을 텐데요.”


“허나, 그 모임에서 무엇을 하는가도 중요합니다.”


랑탱은 긴장된 기색으로 촉각을 곤두세우고 듣다가, 약간 딱딱하고 초보적인 문법의 이탈리아 언어로 그렇게 응수했다.


“음악, 문학. 그리고 사회와 국가가 돌아가는 이야기의 중심을 잡는 곳은, 결코 흔하지 않습니다.”


클라우디아는 랑탱이 하는 말을 들으며, 새삼 본체의 영혼이 생전에 어떤 사람이었을지 실감했다. 처음 육체와 합쳐지고 나서 깨어났을 때, 시중드는 사람들은 오로지 향료를 넣은 따뜻한 물로 정성껏 몸을 닦아주었을 뿐, 그 외에는 어떤 것도 추가하지 않았었다.


그리고, 드레스와 각종 장신구, 화장도구들을 보았을 때는 여느 귀족 여자들에게서 보던 것과 많이 달랐다. 무엇보다도, 본체가 쓰는 화장도구 중에는 그 흔한 백분(白粉)이 아예 없었다. 그런 것을 쓰지 않고도, 말끔히 씻어낸 본체의 얼굴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기는 했다.


‘자신감 때문이었을까? 귀족들이든, 그냥 그런 사람들이든, 가꾸는 일에 대해서라면 한 번쯤은 관심 있어 하긴 했는데. 아니면, 뭔가를 더 알고 혼자만 다른 방법을 썼던 걸까? 그리고 그걸 누구와도 나누지 않았던 것일까?’


새삼, 클라우디아의 본체가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포기했는지 뼈저리게 느껴졌다.


“제가 당신에게 직접 말을 걸 수 있을 때까지 오래 기다렸고, 이제는 그 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클라우디아.”


클라우디아는 잔을 약간 힘주어 잡았다가, 하프시코드 옆 의자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암호가 적혀 있지 않은 다른 악보 하나를 악보대에 얹었다. 반주 없이, 멜로디만 오른손으로 한 음 한 음 짚었다.


“신-이-여, 왕-을 부-디 보-우-하-소-서.”


랑탱은 클라우디아가 하프시코드 건반으로 치는 멜로디 부분을 유심히 듣다가, 멜로디에 맞춘 가사 음절을 하나하나 포착하고 내뱉었다. 클라우디아는 연주를 멈추고 물었다.


“이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원래 알려진 이유와는 조금 다르겠지만, 사람들이 좋다면 그걸로 된··· 그런 노래겠지요.”


“원래 알려진 이유라.”


클라우디아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참석한 남자들과 한 곡 한 곡 골라가며 감상을 주고받았다가, 마침내 랑탱의 순서가 돌아오게 되었을 때, 그녀는 다분히 의도적으로 악보를 골랐었다. 그리고, 그녀가 꺼낸 카드에 랑탱은 즉각적으로 반응한 듯했다. 그녀는 살짝 감응하는 듯한 말을 섞어서 던졌다.


“그건 좀 알고 계실 거라곤 생각했지만, 겉으로 들어서는 상상이 잘 안 갔을 텐데요.”


“무엇이든 겉만 봐선 알기 어렵습니다.”


랑탱은 뭔가 더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대신에 다른 말을 꺼냈다.


“괜찮으시다면, 끝까지 연주해주시겠습니까? 자세한 말은 끝나고 하고 싶습니다.”


“좋아요.”


클라우디아는 흔쾌히 대답하고, 이번에는 두 손을 모두 하프시코드 건반 위에 얹었다. 그리고는 반주까지 함께 연주했다. 곡이 끝나자, 붉은 머리 남자를 포함한 방문객들은 모두 박수를 보냈다. 박수 소리가 큰 반면, 그 치는 동작과 남자들의 눈빛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그녀는, 다음 악보를 골라서 올리고, 나머지 두 남자들과 몇 마디 주고받은 뒤, 서둘러 모임을 끝냈다.



“바티칸에서 당신을 처음 보고는 한시도 잊을 수 없었습니다.”


랑탱은 두 손을 깍지끼어 잡고, 다소 떨리는 어조로 말을 꺼냈다. 클라우디아는, 바티칸이라는 말을 듣고, 수페리스타의 조카인 연인을 만나러 왔을 본체의 일을 떠올렸다. 아마도, 피렌체 대성당에서 은밀한 신호를 확인한 뒤, 연인을 만나러 갔을 어느 날인 듯했다.


“그래서, 당신을 상대했던 주교와, 군인들에게 물어봤었습니다.”


“뭔가 수확이 있었나요?”


“아니오.”


랑탱은 쓴웃음을 짓고 대답했다가, 계속 말했다.


“이름하고 어느 나라 분인 것까지는 알았지만, 자주 오는 분도 아니고, 언제 또 볼지 모른다는 것만 알았습니다.”


“그랬군요. 그리고, 제가 바티칸에··· 가던 때라면, 꽤 오래된 일이었겠군요.”


클라우디아는, 본체의 감정을 추측해보며, 약간 쓸쓸한 어조로 응수했다. 랑탱은 찻잔을 들고 그 안의 레몬티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는 눈을 들어 클라우디아를 보며 말했다.


“당신은 기억 못하겠지만, 한 번은 당신을 시중드는 사람 편으로 여기 피렌체 말로 번역한 편지를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그랬나요?”


“역시.”


랑탱은 쓸쓸하게 한 마디만 했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는 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상관없습니다. 그 때 건너건너 들은 얘기 덕분에, 지금은 당신과 같은 말을 배웠고, 이렇게 하게 됐으니까요.”


“제가 그 때 뭐라고 했는데요?”


클라우디아는 슬쩍 떠보았다. 본체가 남긴 기록에서, 프랑스인들이 자국 언어 중심주의가 강하다는 말이 나왔던 이유는 어느 정도 짐작이 되었다. 그리고, 랑탱의 대답도 그 기록과 크게 빗나가지는 않았다.


“사람 마음이 가는 것은 자유지만, 같은 말로 다가갈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아니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 특히 그런 주의가 심하다면 말입니다.”


“그럼··· 오로지 저하고 소통하려고, 처음 배우셨단 얘긴가요?”


“어느 정도는 그렇습니다.”


“그래서, 겉만 봐선 알기 어렵다고 하셨고요?”


“꼭 그런 뜻만은 아닙니다.”


랑탱은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어보였다.


“당신이 제 차례가 되었을 때 고른 곡은, 저희··· 태양왕, 루이 14세께서 생전에 어려운 시술을 받을 때 온 백성이 회복을 기원하며 부른 노래였다고 알고 있습니다. 언제 무슨 이유로 유명해졌던 간에, 누군가의 무사함을 기원하는 뜻과 아름다움이 분명히 전해졌기 때문에, 전혀 다른 나라의 사람인 당신도 알고 있다 생각했습니다.”


클라우디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굳이 그 곡을 고른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자신이 백작과 함께였던 시대에 재위하고 있었던 프랑스 국왕이 바로 루이 14세였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의 일들을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그녀로서는 절실하게 필요했다. 자신이 무엇을 물어도 거부감 없이 대답해 줄 수 있을 사람이라면, 더욱 좋은 일이었다.


그녀는 랑탱의 얼굴을 주시해보았다. 흑갈색 머리에 옅푸른 눈동자를 지닌 그의 이목구비는, 제법 반듯한 편이었다. 그러나, 그에게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괜찮은 사람이지만, 백작님은 아니야.’


나이를 감안해 볼 때, 아마도 그는 한 번 정도는 결혼한 적이 있을 듯했다. 한편으로는, 겨우 단기간 동안 즐길 사람을 물색하는 것치고, 그가 클라우디아를 찾아오기 위해 쏟았을 정성은 그리 가볍게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뭐가 되었든, 친해 두어도 나쁘지는 않겠군.’


클라우디아는 속으로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 태양왕 전하께서 서거하신 뒤의 일은, 혹시 아시나요?”


“글쎄요. 스페인에 손자뻘되는 분을 왕으로 세우고 나서는 그 다음해에 서거하셨다고 배우긴 했습니다.”


랑탱은, 이어서 자신이 바티칸에 가게 되었던 이유를 밝혔다. 그의 윗대가 왕실의 피를 일부 받기는 했지만, 정통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궁정 사회에서는 다소 멀어져 있었다. 아니, 애써 거리를 두려고 했다는 편이 더 정확하다고 그는 강조했다.


“···그리고, 제가 나고 자란 프랑스가 이 유럽, 아니 이 세상의 중심만은 아니라는 걸 더욱 실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떤 점에서요?”


“잉글랜드가, 얼마 전에 항복했습니다.”


클라우디아는 잠시 얼어붙었다. 랑탱이 하는 말들 중에서, 처음으로 자신이 본체의 기록과 교차검증 해볼 수 없는 말이 나온 듯했기 때문이었다.


“당신이 어떤 일로 너무나 괴로워했고, 또··· 얼마 전까지는 병중이었기에 모르실 겁니다만.”


랑탱은 클라우디아의 안색을 살피며, 정중한 투로 설명을 계속했다.


“프랑스 왕실은, 그 식민지의 동맹이 되어 잉글랜드를 이겼습니다만, 아무 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고요.”


클라우디아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가, 랑탱의 눈빛을 주시했다.


“잉글랜드가 프랑스의 오랜 적이라는 건 다 아시겠지만, 그런 식으로 국고를 다 쏟아 부어선··· 안 되었으니까요.”


“그건 그렇겠죠.”


클라우디아는, 자신이 알고 있는 루이 14세의 말로를 다시금 떠올렸다.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군에서 백작이 길을 터주려고 고군분투 했었던 전쟁은, 루이 14세가 자신의 손자뻘인 펠리페 5세를 스페인 국왕으로 세우려고 일으킨 전쟁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절반의 승리로 끝났다고 했다.


자신의 뜻대로 펠리페 5세의 국왕 자리를 온 유럽에 인정받기는 했지만, 루이 14세 자신은 전쟁이 끝난 지 그 다음해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국가의 영향력을 스페인으로 확장할 틈조차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프랑스는 한낱 국왕의 개인감정이 국가적 감정으로 간주되어, 시대가 바뀌어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일까? 아니, 이건 단순히 한 나라만의 문제는 아니겠지만, 만일 내가 백작님을 그곳에서 만나게 된다면.’


언젠가 그 날이 온다면, 대등한 입장에서 함께 문제를 헤쳐나갈 수 있을까. 클라우디아는 수년 동안 달라진 프랑스의 역사를 대략적으로 전해 들으며,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그 때, 랑탱이 말했다.


“저에게 더 이상 미련은 없습니다. 클라우디아.”


“네?”


“제 마음의 중심은, 바로 당신이 있는 곳이었으니까요.”


클라우디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들고 있던 자신의 잔을 내려놓았다. 잔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 그 때, 응접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작가의말

* 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 다음에는 3. 두 번째 죽음 (3) : 화형 챕터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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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11. 거래는 성사되었다 (1) : 피로 물든 밤 19.08.06 88 0 31쪽
40 10. 무대 위의 밤 (2) : 당신을 찾아서 - 4 19.08.05 93 0 27쪽
39 10. 무대 위의 밤 (2) : 당신을 찾아서 - 3 19.08.05 99 0 26쪽
38 10. 무대 위의 밤 (2) : 당신을 찾아서 - 2 19.07.30 81 0 19쪽
37 10. 무대 위의 밤 (2) : 당신을 찾아서 - 1 19.07.30 100 0 16쪽
36 9. 무대 위의 밤 (1) : 내가 기억하는 세상 (下) 19.07.18 99 0 22쪽
35 9. 무대 위의 밤 (1) : 내가 기억하는 세상 (上) 19.07.18 113 0 19쪽
34 8. 살아있는 이유 (2) : 세 번째 죽음 (下) 19.07.13 94 0 21쪽
33 8. 살아있는 이유 (2) : 세 번째 죽음 (上) 19.07.13 105 0 21쪽
32 7. 살아있는 이유 (1) : 어둠 속의 목소리 (下) 19.07.10 97 0 12쪽
31 7. 살아있는 이유 (1) : 어둠 속의 목소리 (上) 19.07.10 95 0 17쪽
30 6. 당신이 어떤 이름이라 해도 (2) : 델핀느의 이야기 (下) 19.07.09 99 0 19쪽
29 6. 당신이 어떤 이름이라 해도 (2) : 델핀느의 이야기 (上) 19.07.09 88 0 16쪽
28 6. 당신이 어떤 이름이라 해도 (1) : 앙투안의 이야기 (下) 19.07.06 94 0 14쪽
27 6. 당신이 어떤 이름이라 해도 (1) : 앙투안의 이야기 (上) 19.07.06 84 0 15쪽
26 5. 6월의 열기 (2) 19.07.02 89 0 18쪽
25 5. 6월의 열기 (1) 19.06.27 99 0 21쪽
24 4. 천 년 전과 천 년 후 (2) : 부정한 죽음 (下) 19.06.22 108 0 21쪽
23 4. 천 년 전과 천 년 후 (2) : 부정한 죽음 (上) 19.06.22 96 0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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