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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점  공모전참가작 체포된 삼신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드라마

제니아.
작품등록일 :
2019.05.01 23:59
최근연재일 :
2019.11.12 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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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22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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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쪽

4. 천 년 전과 천 년 후 (2) : 부정한 죽음 (下)

DUMMY

4. 천 년 전과 천 년 후 (2) : 부정한 죽음 (下)



“오늘도··· 받지 않겠다고 하십니까?”


아란은 왕비의 처소 입구를 지키는 궁녀에게 물었다. 궁녀는 떨떠름한 기색으로 아란의 시선을 슬금슬금 피했다. 그리고는 고개만 빠르게 끄덕였다.


“그렇다면, 이것만이라도 전해드리세요.”


아란은 들고 있던 꾸러미를 궁녀에게 내밀었다. 궁녀는 조심스럽게 받아들고 물었다.


“이게 무엇이라 전해드리오리까?”


“아기씨를 지켜드릴 물건이라 하면 아실 겁니다.”


“알겠습니다.”


궁녀는 공손히 대답하고 처소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서는 궁녀와 왕비가 몇 마디 나직하게 속삭이는 소리가 드문드문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 외에는 어떠한 기척도 들려오지 않았다.


‘설마, 전혀 열어보지도 않으시는 건가?’


만일 보자기를 풀고 그 안에 있는 함을 열었다면, 하다못해 딸깍이는 소리라도 났어야 했다. 그리고 함 속에 있는 물건을 확인했다면, 각종 옥돌들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왕비 전하의 심중을 도통 모르겠구나.’


아란은 한동안 문설주만 지켜보다가, 하릴없이 돌아서서 밖으로 나왔다. 약속한 대로 국왕과의 합궁일을 정해주었던 그 날 이후, 한 달 동안은 왕비를 전혀 볼 수 없었다. 그 대신, 왕비의 처소에 승려가 찾아왔다는 풍문만 돌았었다.


‘왕비 전하께서 공주를 볼 것이라 했다던, 그 대사였지.’


국왕은 평소대로 아란을 찾아 국운을 묻기도 했고, 정사 돌아가는 방향에 대해 무운을 빌어달라 청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왕비는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란은 그들의 행보를 가만히 지켜보다가, 자신이 제시했던 합궁일들 중 날짜 하나를 짚어서 국왕에게 넌지시 물음을 던지기도 했었다.


“외람되오나, 그 날을 기억하시나이까?”


국왕은 멈칫했다가 대답했었다.


“알고는 있소.”


국왕은 말하던 끝에, 쓴웃음과 약간의 신음소리를 냈다. 세상을 떠난 형의 왕위를 물려받았기에, 그는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나이가 지긋한 왕이었다. 이미 그의 선선대에서부터 장자 계승 및 적통 계승의 의미는 퇴색되고 있었다. 그의 눈빛에는 초조함과 해탈한 듯한 허무감이 묘하게 공존하고 있었다.


‘이제라도 적자를 간절히 원하십니까? 아니면 모든 걸 내려놓으시는 겝니까?’


인간이 자식을 원하는 마음은, 충분히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소망을 가진 자가 평범한 남편이 아니기에, 그의 선택 또한 평범할 수가 없었다. 급기야는 자식을 품을 수 없었던 첫 아내를 내치는 지경까지 이르렀었다. 그만큼 자식의 존재가 절실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지쳐가고 있는 듯했다.


“송구하옵니다.”


아란은 조심스럽게 사죄의 말을 올렸었다.


“아니오.”


국왕은 군데군데 주름진 얼굴에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었다. 그리고는 화제를 돌려 몇 가지 축원을 의뢰했었다. 아란은 그 때의 일을 떠올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원하는 마음이 클수록, 이를 감추고 싶은 마음도 클 것이다. 어떠한 욕망이든 결국 다 같은 인간의 것이나, 고귀한 자리에 있다고 믿는 인간일수록··· 그 욕망 또한 고귀하게 장식하고 싶은 것이겠지.’


적절한 모양새. 국왕과 왕비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결국 그랬다. 그러나 아란으로서는 여전히 의문이 한 가지 남아있었다. 왕비의 주기와 각종 오행을 따라 합궁일을 1년 치로 한꺼번에 제시해주었기에, 그 중 한 번은 반드시 적중할 터였다. 그런데, 두 달 뒤에 왕비의 회임 소식이 알려진 뒤부터, 왕비는 계속 아란을 보려 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 나의 눈을 계속 가리고 있어.’


한동안, 아란은 어렵사리 회임한 왕비가 조용히 안정을 취하고 싶은 것이라고 생각해 보기도 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왕궁 내에 있는 불당 주변에 금줄을 쳐놓고, 대사와 왕비가 자주 그 곳에서 기도를 한다는 풍문 또한 심상치 않았다. 생각다 못해, 한 번은 신당에서 왕비의 사주를 매개체로 삼아 그녀의 동향을 일부 들여다 본 적도 있었다.


‘할 수는 있어도, 감히 꿈도 꿔보지 못한 일이지만.’


묘하게도, 먹구름과 같은 결계가 왕비의 주변을 맴돌고 있는 기이한 광경만 흐릿하게 보일 뿐이었다. 확실히 시간이 지날수록, 왕비의 배는 날로 불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봉긋해진 배 또한 가짜로 부풀린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더욱 기이한 광경은 따로 있었다. 불당 앞에 몸을 누인 왕비는, 목탁을 들고 기도하는 누군가를 보며 공허한 눈빛을 띠고 있었다. 누워있는 왕비의 허리와 배 주변에서는 태중 아기가 타고난 기운이 신력으로 형상화되어 나타났었다.


주변에는 복숭아 꽃잎과 무지갯빛이 감돌았다. 기도와 목탁 소리가 들릴 때마다, 꽃잎이 불에 덴 것처럼 사그라지며 가끔씩 멍 같은 색깔을 띠기도 했다. 그럴 때면 뭔가를 거북한 것을 느끼는 듯, 왕비는 자신의 배를 짚어보고 달래듯 쓰다듬었다. 아란은 더 자세히 들여다보려고 신력을 최대한 기울여보았다. 그러나, 먹구름과 같은 결계가 더욱 짙어지며 장면은 사라졌었다.


약방에 은밀히 알아보기도 했지만, 왕비에게 탈이 났다는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았었다.


“대사.”


아란은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읊조렸다.


“일전엔 천도를 거스를 수 없다 하셨다면서, 대체 궁중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겁니까?”


그 죄를 도대체 어찌 받으시려고. 아란은 그 다음 말을 삼켰다. 그 고매하기로 이름났던 승려의 도력은, 일개 신녀였던 아란과는 비교할 수 없이 깊었다. 한편으로는, 하늘의 기운을 읽는다는 근본 또한 아란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승려의 힘이 발현된다면, 아란의 힘이 상대적으로 밀릴 수밖에 없기도 했다.


‘대사, 전 당신께 대적할 생각 같은 건 없습니다. 허나 무엇 때문에 가리시는 겁니까? 분명 부정한 죄악을 몸소 지으신 징조는 없사오나, 대체 무엇을 위해 힘을 보태는 것입니까?’


아란은 제단 앞에서 두 손을 모으고 마음을 다잡으려 했다. 10년 만에 왕실의 후사가 처음으로 생기는 경사를 맞이한 지금, 왕실에 귀속된 신녀로서 도리를 다해 치성을 드리려 했다.


‘공주 아기씨께서 부디··· 무탈하게 나시기만을 바랄 뿐.’


문득, 제단 곳곳에 밝혔던 촛불이 하나 둘 꺼져버렸다. 아란은 그 실바람 같은 공기의 스침에 놀라서 눈을 떴다. 정화수는 그대로 있었으나, 다섯 개의 초가 동시에 꺼진 채로 까만 심지에서 회색 연기만 실오라기처럼 허공에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란은 제단 옆에 세워둔 점화 막대를 집어 들었다. 다시 불을 붙여야 했다. 한편으로는, 신당 주변을 면밀히 살펴볼 요량도 있었다. 그녀는 문을 열고 나가려 했다. 그러나, 문은 어쩐 일인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럴 수가!’


생각다 못해, 그녀는 점화 막대의 뾰족한 끝으로 장지문의 종이 부분을 뚫었다. 그러자, 구멍 난 부분에서 검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다가 사라졌다. 접착이라도 한 것처럼 딱 붙어 있던 문이 그제야 원래대로 돌아와 덜컥거렸다. 문을 열어젖히자, 반쯤 탄 노란 종이가 문지방 너머에 나뒹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누가 감히!”


아란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것은 신당에서 하는 기원이 밖으로 전달되지 않도록 막는 흑막의 주술이 포함된 부적이었다. 문제는, 왕실에 귀속된 곳까지 누군가 침입해서 불순한 것을 넣었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다들 어디에 - ”


아란은 주변을 살피다가 아무도 없는 것을 알고 할 말을 잃었다. 후사를 잉태한 왕비가 그러한 위치를 이용하여 궁 전체를 장악했고, 모종의 이유로 신당까지 통제하라고 명을 내린 게 분명했다.


‘대체 무슨 연유입니까, 왕비 전하?’


권력자가 되겠다는 욕망 따위는 전혀 없었다. 따라서, 왕권을 뛰어넘을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었다. 그저, 필요할 때는 도울 뿐, 그 외에는 멀리서 지켜보기만 하려 했었다. 상대에게 가장 좋은 길을 제시하고, 보조적인 수단을 만들어주는 것, 그것만이 소임이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진정으로 뭘 원하십니까? 이 신국을 통치하길 바라십니까? 섭정의 이름으로? 아니면 여왕의 이름으로?’


왕비의 욕망은, 아란이 예상했던 것을 훨씬 뛰어넘고 있는 듯했다. 나이 든 남편을 보는 젊은 아내의 관점은, 여느 아내들보다는 더 빨리 남편의 죽음을 내다보기 마련이었다. 만일 지금의 국왕이 서거하고 난다면, 차기 국왕이 될 만한 젊은 귀족이 이미 있기는 했다. 그것은, 젊디 젊은 왕비에게 있어서 국모의 자리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저 처음에 기원하신 대로, 왕자 아기씨를 원하실 뿐이었다면··· 할 수만 있다면, 제 목숨을 끊어서라도 이루어드리고 싶었습니다. 이 나라를, 이 왕실을 튼튼히 하기 위해서라면, 이미 나라에 바쳐진 이 몸이 뭔들 못 하겠나이까? 허나, 제가 여인이기에 그런 후생도 기약하고 기원할 수 없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옵니다.’


아란은 손에 쥔 점화 막대를 쓸쓸하게 보다가, 하릴없이 신당 안으로 다시 들어왔다. 불가사의한 힘이, 그녀의 기원을 방해하고 있었다. 왕비의 몸 안에 있을 ‘공주 아기씨’ 에 대한 기원을 마음속에서조차 올리지도 못할 정도였다. 국왕이 의뢰한 기원과, 그 외 서라벌 백성들이 간간이 요청하는 치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변이 없었다.


왕비는 회임한 이후로, 아란의 문안을 한 번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만삭이 될 때까지도 줄곧 그러했다. 아란은 매번 태중의 아기가 편안하도록 지켜줄 신물을 골라서 보냈지만, 왕비가 그것을 쓴다는 소식은 한 번도 들을 수 없었다.


‘나는··· 그저 느껴지는 대로, 최대한 맞춰서 보냈을 뿐.’



“요컨대, 신녀였던 삼신님을 전혀 개입시키지 않으려 했다는 거군요.”


혼구슬은 시니컬하게 말했다. 설화는 침통한 기색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삼신님이 살았던 시대에는 약방이 어찌 돌아갔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이승에 있었을 때는 태중의 여자아이를 남자아이로 바꾸는 비방도 꽤 돌았다고 들었습니다. 근데 그게 약인지 기도인지는 모르겠고, 따지고 보면 그렇게 효과가 있던 것도 아닙니다.”


“그건 내가 생각해도 진짜 황당했으니까.”


설화는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한 번 생긴 몸은 돌이킬 수 없고, 그 몸이 어찌 자라는지는 전적으로 혼에 달려 있는 문제였거늘. 천 년 전 내가 인간으로 살았을 때는 전혀 몰랐던 일이니라.”


“그래서 인간 노릇을 때려치우신 겁니까?”


“확실히··· 내가 왜 죽어야 했는지 알고 나서는, 이승에 환멸감도 꽤 있었다만.”


설화는 천여 년 전의 마지막 기억을 떠올리며, 먼 곳을 착잡하게 응시했다.



왕비는 결국 신당을 한 번도 찾지 않은 채, 열 달을 꽉 채워 해산했다. 아란은 시녀와 함께 왕비의 처소 주변으로 가보았다. 해산을 도운 궁녀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궁녀들은 처소 주변에 여러 가지 장식을 부지런히 달았다.


‘왕자 아기씨인가?’


아들이라는 증표들이 시시각각으로 달리고 있었다. 아란은 씁쓸한 기색을 띠며 속으로 되뇌었다.


‘정말로 하늘이 뜻을 온전히 바꾸셨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겠지만. 이제사 내게서 금제 아닌 금제가 풀렸으나.’


아란은 궁녀들이 처소에 들어가지 못하고 몇몇 측근들에게 간접적으로 물품을 전달하는 광경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천기는 결국 변하지 않았어. 어찌하시려는 걸까?’


나이 든 국왕은, 기쁨에 겨워 양 뺨과 희끗한 수염을 온통 눈물로 물들였다. 그로서는 누구보다도 간절히 바랐지만 긴 시간 끝에 체념했다가, 뜻밖에 후계자를 얻은 것이었다. 따라서, 그 기쁨은 더할 나위 없이 클 수밖에 없을 터였다.


긴 시간 동안 은밀하게 축원했던 승려 또한, 모두의 앞에서 대대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며 입궁했다. 아란은 축하의 의미로 쌓여 있던 연단 오른편 구석에서 승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승려는 오로지 앞만 똑바로 보며 나아갔다가, 국왕과 왕비를 마주하고 합장했다. 순간, 왕비가 굳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란이 왕비의 모습을 본 것은, 그게 완전히 마지막이 되었다. 왕자 탄생을 축하하고 나서 7년이 흐르는 동안, 궁중에서는 다시 괴이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보모 궁녀들이 사라졌어.”


“우물에서 머리카락이 나왔어.”


“뒷문으로 들것이 나갔는데 뭔지 몰라.”


“태자 저하께선 무사하신 걸까?”


아란은 신당에 배치된 시녀들에게서 풍문을 듣고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어린 왕자에게 젖을 먹이고 각종 수발을 들려면, 유모와 보모 궁녀들이 상당수 필요했을 터였다. 그런데, 최소한 2년 남짓한 동안 젖을 떼었을 어린 왕자를 시중드는 보모 궁녀들이 여럿 사라졌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었다.


“어찌되어가는 일인지, 은밀히 알아보았느냐?”


“누구도 입을 열지 말라 했다 들었을 뿐, 아무도 아는 자 없나이다.”


“어전에서는 모르시고?”


“예.”


아란은 시녀들의 대답을 듣고 더욱 불길한 예감을 받았다. 왕실의 유일한 적통 후계자로 공인된 태자는, 이미 걸음마를 떼고도 남았을 터였다. 그런데, 왕비궁은 물론이고 20여년 만에 새 주인을 맞이한 태자궁 어디에서도, 어린 태자의 모습을 본 이가 아무도 없었다고 했다.


태자의 탄생을 기원했던 승려는, 축하연 이후로 다시는 궁에 들지 않았다. 오로지, 왕비만이 극소수의 측근만 드나들게 하고 태자를 숨겨 기르고 있을 뿐이었다. 국왕은 후사를 본 뒤에 안심하고 국정을 보았으나, 최근 들어 자주 몸져눕기 일쑤였다. 아란은 국왕의 회복을 빌고, 왕실의 괴소문이 사라지길 바라며 치성을 드려보았다.


그러나, 신당에 한 번 드리운 먹구름은 좀처럼 걷히지 않았다. 더 이상 아란에게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안 되겠다.”


치성을 드린 지 한 달째 되는 날, 아란은 얼마 전에 애기신녀로 정해둔 소녀를 떠올렸다. 안 그래도 사흘 후면 정식으로 신당에 들일 아이였건만, 불현듯 이르게 떠오르는 연유를 도통 알 수 없었다.


“게 누구 없느냐?”


아란은 밖을 향해 외쳤다. 그러자 밖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예, 신녀님.”


곧이어 시녀가 들어왔다. 아란은 시녀를 향해 말했다.


“지금 당장 채비를 하라.”


“무슨 채비 말씀이시옵니까?”


“도희를.”


아란은 자신도 모르게 소녀의 이름부터 입에 올렸다. 그러다가 이내 정정했다.


“대아찬 댁에 사람을 보내라.”


“네?”


“한시가 급하다. 사람을 보내서, 그 아이를 바로 데려오라.”


“지금 바로 말이옵니까?”


“그래.”


“알겠습니다.”


시녀는 머리를 조아리고 복종의 예를 표한 뒤,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힌 뒤, 아란은 제단을 향해 다시 돌아섰다.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올렸다.


‘어찌 하여, 제 눈을 이리도 가리시나이까?’


아란은 어둠 속에서 계속 의문을 품었다. 신이 깃들고, 정식으로 대물림을 받아 신당에 든 지도 어언 12년이 지나고 있었다. 선대 국왕이었던 효성왕이 세상을 떠나기 3년 전에 애기신녀가 되고 나서부터, 왕실의 온갖 고통을 들여다보았었다.


가장 처음에 보았던 것은, 아들이 없었던 선대 국왕이 후사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하는 문제였었다. 아란을 애기신녀로 들였던 전대 신녀는, 효성왕의 친동생을 다음 국왕으로 세우라는 신탁을 전했었다.


“그리하겠소.”


뜻밖에도 효성왕은, 그러한 주청을 순순히 받아들였었다. 어쩌면, 그가 왕위를 계승한 과정 때문인 듯도 했었다. 그의 아비이자 선대왕인 성덕왕 또한 친형의 왕위를 물려받은 전례가 있었다. 그리고, 효성왕 스스로도 이복형이자 선대의 장자가 왕실 족보에서 사라졌기에 차자 계승을 한 국왕이었다.


‘그 때의 태자께서는 첫 번째 왕비 소생이셨다가, 모후께서 폐위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족보에서 사라졌다고 했다. 그리고 둘째 왕비의 소생이신 두 왕자 분들이 차례로 왕이 되셨다지.’


전대 신녀는 그 일련의 과정을 다 아는 듯했지만, 아란에게는 구체적으로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아란이 느끼기에도, 왕비와 왕자가 동시에 지워졌을 정도의 일이면 상당한 피비린내가 숨어있었을 법했다. 그렇게 남자로만 왕위를 근근이 이어오던 세월에, 이제는 또 다른 먹구름이 밀려오는 듯했다.


아란은 적막 속에서 마차 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듣다가, 눈을 떴다. 그리고 제단을 바라보았다. 다시 정화수를 떠올 때가 되었다. 그녀는 성수를 뜨기 위해 머리통만한 물동이 하나를 직접 챙겨들고 신당을 나왔다. 별궁 후원 쪽 우물에 새벽달이 비칠 때쯤, 그 우물을 새로운 성수로 쓸 생각이었다.


‘그믐이다.’


어두운 밤하늘에는, 별도 잘 보이지 않았다. 왼쪽으로 가느다란 눈썹을 뉘어놓은 듯 기울게 뜬 그믐달만이, 먹구름 사이에서 알른알른하고 있었다. 구름이 서서히 걷힐수록, 그믐달은 눈썹보다는 이방인 남자들이 쓸 법한 휜 칼날처럼 선득선득한 허연빛을 내뿜었다. 아란은 칼날 같은 달빛을 간신히 쫓아, 우물 앞에 당도했다.


둥글게 둘러싼 돌담처럼 쌓아올린 우물턱은, 아란의 겨드랑이 바로 밑까지 오는 높이였다. 아란은 두레박을 우물 속에 넣어보았다. 한참을 기다리자, 가느다란 그믐달이 우물 표면에 완전히 반사되어 드리워졌다. 그녀는 그 순간에 맞추어 두레박에 우물을 담고 끌어올렸다. 그리고, 두레박의 물을 물동이로 옮겨 담았다.


물동이를 들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동안, 문득 은은한 향기를 맡았다. 아란은 멈칫했다가 향기가 나는 쪽으로 한 발 한 발 다가가 보았다. 가까이 갈수록, 그 오묘한 향기는 더욱 짙어졌다. 과일향과 비릿한 젖내가 뒤섞여 있었다. 분명 순수한 과일에서만 나는 향이 아니었다.


‘어리디 어린 살··· 아니, 이건 육체적인 향이 아니다.’


아란은 잃어버린 줄만 알았던 신기가 온몸에서 단번에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7여 년 전, 왕비의 동향을 살피려고 신력을 펼쳤을 때 느꼈던 미미한 기운에서 맡았던 향이었다. 왕비의 뼈와 살로 만들어진 실체가 내뿜는 향일 수밖에 없는, 복숭아의 향기였다. 그믐달의 빛이, 그 날 따라 더욱 칼날처럼 빛났다.


빛을 흠뻑 받고, 그림자 하나가 궁녀들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우물가 근처 정원에서는, 정수리 양 옆에 작고 둥근 올림머리를 하나씩 얹은 어린 아이가 꽃무늬 비단 옷을 입고 아장아장 걸어 나왔다. 아란은 복숭아의 향기가 그 아이에게서 난다는 것을 바로 알아차리고 숨을 삼켰다.


아이는 누가 보아도 고귀한 신분임에 분명했다. 달빛을 올려다보는 어글어글한 눈빛과, 잔디밭의 꽃을 내려다보는 천진난만한 몸짓은 한없이 자유분방했다. 그러한 몸가짐은 결코 궁녀일 수가 없었다. 아란은 아이를 좀더 자세히 보기 위해, 별궁 기둥 쪽에 몸을 바싹 붙여서 숨기고 엿보았다.


문득, 물동이와 뭔가 부딪치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아마도 창대나 검집이 스치고 지나간 듯했다. 그러나, 우연히 부딪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쉿.”


“흡.”


“신 - ”


그리고, 무언가 묵직한 것이 빈터에 털썩 떨어졌다. 아란 스스로도 뒤에서 억세고 굵은 팔이 목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커다랗고 굳은살 가득한 손이 아란의 입을 틀어막았다.


“바로 처리하면 어떡해?”


“할 수 없어.”


“봐선 안 될 - ”


그 외에도 여러 목소리가 계속 들려왔지만, 정확한 소리는 더 이상 식별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난 죽었었다.”


설화는 말하던 끝에 눈을 질끈 감았다. 죽음에 대한 기억은,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나 다음에 어찌 되었는지는, 한참 뒤에 저승에서 업경을 보고 알았지.”


혼구슬은 한동안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있었다. 설화는 눈을 뜨고, 그 때처럼 어두워진 밤 하늘을 보며 탄식조로 말했다.


“전례에 따라 적통을 중시하여 여아를 세울 수도 있고, 자식이 없으면 형제를 세울 수도 있었던 것을. 굳이 여아가 아닌 남아이기를 고집하여, 이 얼마나 엄청난 사달을 낸 것이었겠느냐?”


설화는 말을 마치고 혼구슬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혼구슬은 그제야 말을 꺼냈다.


“본디 거짓을 감추려면 또 다른 거짓을 만드는 것 같습니다. 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요.”


작가의말

 * 다음에는 5. 6월의 열기 챕터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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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12. 거래는 성사되었다 (2) : 사라진 혼구슬 19.08.06 88 0 39쪽
41 11. 거래는 성사되었다 (1) : 피로 물든 밤 19.08.06 87 0 31쪽
40 10. 무대 위의 밤 (2) : 당신을 찾아서 - 4 19.08.05 92 0 27쪽
39 10. 무대 위의 밤 (2) : 당신을 찾아서 - 3 19.08.05 98 0 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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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7. 살아있는 이유 (1) : 어둠 속의 목소리 (下) 19.07.10 96 0 12쪽
31 7. 살아있는 이유 (1) : 어둠 속의 목소리 (上) 19.07.10 93 0 17쪽
30 6. 당신이 어떤 이름이라 해도 (2) : 델핀느의 이야기 (下) 19.07.09 95 0 19쪽
29 6. 당신이 어떤 이름이라 해도 (2) : 델핀느의 이야기 (上) 19.07.09 88 0 16쪽
28 6. 당신이 어떤 이름이라 해도 (1) : 앙투안의 이야기 (下) 19.07.06 94 0 14쪽
27 6. 당신이 어떤 이름이라 해도 (1) : 앙투안의 이야기 (上) 19.07.06 84 0 15쪽
26 5. 6월의 열기 (2) 19.07.02 89 0 18쪽
25 5. 6월의 열기 (1) 19.06.27 99 0 21쪽
» 4. 천 년 전과 천 년 후 (2) : 부정한 죽음 (下) 19.06.22 107 0 21쪽
23 4. 천 년 전과 천 년 후 (2) : 부정한 죽음 (上) 19.06.22 96 0 15쪽
22 4. 천 년 전과 천 년 후 (1) : 신녀 아란 (下) 19.06.18 134 0 13쪽
21 4. 천 년 전과 천 년 후 (1) : 신녀 아란 (上) 19.06.18 92 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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