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

독점  공모전참가작 체포된 삼신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드라마

제니아.
작품등록일 :
2019.05.01 23:59
최근연재일 :
2019.11.12 04:28
연재수 :
47 회
조회수 :
4,858
추천수 :
2
글자수 :
408,372

작성
19.08.05 19:07
조회
96
추천
0
글자
26쪽

10. 무대 위의 밤 (2) : 당신을 찾아서 - 3

DUMMY

10. 무대 위의 밤 (2) : 당신을 찾아서 - 3



연주는 혼란스러운 듯 얼떨떨한 기색으로 멍하니 있다가, 아랫입술에 앞니를 살짝 걸쳤다. 세게 깨무는 것은 아니고, 그저 말소리가 나오려는 것만 잠시 막아두는 것이었다.


‘꿈으로 찾아오겠다고 하니, 역시 귀신은 귀신인 건가.’


꿈에서 하는 말이라면, 생시에서 어떤 말이 새나가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저 남자는 군인.’


연주는 백작의 반투명한 모습을 바라보았다. 중갑주에 망토까지 갖춰 입은 모습을 보면, 생전에는 어느 정도 직급이 상당했던 사람일 듯했다.


‘혹시 직접 맞서 싸우는 것보단, 작전을 더 잘 짜는 사람이었을까?’


그녀가 정신없는 사이에 잃어버릴 뻔한 소지품들을 즉석에서 하나하나 구현하고 장소를 찾도록 유도하던 그의 솜씨는, 확실히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그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너무도 명백했지만, 무서운 생각보다는 그와 더 소통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더욱 들었다.


‘어떻게 말해봐야 할까.’


백작은 검은 머리이기는 했지만, 연주의 눈으로 보기에는 외국인 티가 역력했다. 그렇기에, 연주는 그녀가 유일하게 구사할 수 있는 외국어인 영어로 메모를 건네 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생전에 영어권 국가 사람은 아니었던 듯했다.


‘모르겠다. 근데 내가 잠들 수는 있을까?’


연주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 침대의 이불을 반쯤 걷어 내렸다. 그 안에 들어가서 잠을 청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백작은 그녀의 행동을 한 발 떨어져서 지켜보았다.


‘당신이 잠들 수 있을까.’


어느 누구라도 엄청난 일을 겪고 나면, 잠이 잘 오지 않는 경우도 꽤 있었다. 심지어 몸이 지쳤어도, 격한 감정이 몸의 피로도를 훨씬 넘어서는 일도 흔했다. 그 때, 누군가 문을 두어 번 두드렸다. 백작은 흠칫해서 문 쪽을 바라보았다. 연주는 침대 위에 앉아서 한쪽 다리를 막 이불 속으로 넣으려다가 멈칫했다.


“네?”


연주는 다리를 도로 내려서 침대 위에 앉은 자세를 고치고, 외마디 소리로 대답했다. 밖에서 우현의 어머니가 말했다.


“아직 안 잤니? 과일 줄까?”


“아니요··· 괜찮아요.”


“그래? 그럼 쉬어라.”


우현의 어머니는 말을 마치고 자리를 떠났다. 연주는 그제야 다시 침대 위로 올라가서 눕고, 이불을 가슴까지 끌어올렸다. 그리고는 모로 누운 자세를 취하며, 이불자락을 한 손으로 움켜쥐었다. 백작은 문가와 침대 발치 사이의 벽에 놓인 장롱 앞에 버티고 섰다가, 연주를 건너다보았다. 그리고는 두 다리를 비비적거리며 군화로 바닥을 몇 번 짓이기다가, 곧 그만두었다.


연주는 눈을 감고 가만히 있다가, 슬며시 눈을 떠보았다. 그러다가는 침대 옆 협탁을 손가락으로 두어 번 두드렸다. 그러자, 소리 때문에 백작이 그 쪽을 쳐다보았다. 연주는 백작과 시선이 마주치자, 한 손으로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백작은 조금 놀란 표정을 띠었다가 침대 앞까지 쓱 다가왔다. 하지만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연주는 자신의 허리 쪽을 가리키며, 엉덩이를 움직여 약간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는 그 앞에 빈 공간을 손짓으로 훅훅 내려보였다. 앉아달라는 손짓이었다. 백작은 다소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연주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한 손으로 턱을 잡고 잠깐 고민한 듯했다가, 결국 걸터앉았다.


‘분명, 날 처음 보는 것일 텐데.’


백작의 검푸른 눈동자에는 혼란과 안타까움이 뒤섞인 빛이 감돌았다. 그로서는 그녀의 인생 대부분의 기억을 공유했었기에, 그녀가 처음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낯선 땅에서 천편일률적으로 검은 머리에 살구색 피부를 지닌 사람들과 처음 살아가는 그녀에게는, 그가 처음이었을 것이었다.


‘그런데 처음 보는 사람일 나한테 이렇게까지 자기를 내맡길 만큼.’


어쩌면, 인진과 그 패거리들에게 당하기 이전부터 철저하게 고독한 영혼이었을까. 그녀가 기댈 곳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은, 근 300년 전에 처음 제노비아로 보았을 때부터 실감했었다.


‘그 때 하고는 다르게 낳아준 부모하고 처음으로··· 계속 살고, 이렇게 받아주는 친지도 있으면서.’


백작은 연주가 스르르 눈을 감는 것을 보고, 그녀의 얼굴 위로 가만히 손을 올렸다. 그녀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함부로 손대고 싶지 않았다. 앙투안으로서 죽음을 맞이한 이후에 다음 생애를 기다리는 동안, 그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소식을 접했었다.


“그 사람은 원하는 곳으로 갔습니까?”


지옥에서의 형벌이 끝난 뒤, 그는 곧바로 법정에 다시 소환되었었다. 그리고 곧바로 델핀느였던 그녀의 행방을 물었었다.


“그게 뭐가 중요하느냐?”


“중요합니다, 저한테는.”


“어째서?”


“제가 그 사람을 사랑합니다.”


판관들은 모두 숨을 삼켰었다. 그는 계속 말했었다.


“어디서든, 그 사람만을 위해 살고, 평생 그 사람과 함께 하며··· 끝까지 지켜주고 싶습니다. 늘, 그랬던 것처럼.”


“늦었다.”


“네?”


“그 아이는 10년 전에 이미 내려 보냈느니라. 너하고는 인간으로서 인연이 없는 곳이야.”


“그렇··· 군요.”


그녀를 알았던 이후로 다시 만나지 못하고 건너 뛴 인생이, 돌이켜보면 아주 처음은 아니었었다. 그가 알지 못하는 공백이 있다는 것은 짐작했었지만, 생전에 앙투안과 델핀느로서 서로를 알게 되었을 때는 한 번도 묻지 않았었다. 그 때는 그런 것이 전혀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백작은 판관들의 대답에 대해 애써 담담하게 응수했었다.


“그럼, 그 아이가 지금 행복한지만 확인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제 다음 인생을 기다리는 동안만이라도.”


결국, 백작은 서기 1989년도부터, 대한민국 땅을 밟게 되었었다. 차사가 입회하는 가운데 강연주로 환생한 그녀의 위치를 처음 찾아갔을 때는, 만감이 교차했었다. 오랜만에 본다는 감회도 있었지만, 그녀에 대한 기약 없는 그리움 때문에 밀려올 슬픔도 예감했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고아였거나, 양녀로만 존재했던 그녀와는 달리, 한 가정에서 생물학적인 맏딸로 살아가는 연주의 모습은 매우 낯설었었다. 그러나, 모든 과거를 잊고 별개로 살아가는 것은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었다. 1994년 초에, 지금의 지역으로 이사하는 것을 보기 이전까지는.


‘아무 것도 필요 없다! 당신 말고는!’


백작은 회상에서 깨어났다. 그리고는 눈을 감은 채 미동도 하지 않는 연주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그녀의 의식이 어디로 향하게 될 지는 직접 찾아야 할 듯했다.


‘지금 시대에서 가장 행복했던 곳일 수도 있고.’


연주가 이 시대의 일상 속에서 가장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곳이 어디인지는, 섣불리 짐작할 수 없었다. 10세 이전에 부모와 그럭저럭 평온하게 살았을 곳이라면, 이사 오기 이전의 지역일 가능성도 있었다.


‘아니면, 그 끔찍한 곳일 수도 있고.’


인간의 꿈이란, 잠들기 직전에 가장 강하게 받은 기억이나 암시, 혹은 강렬하게 원하는 곳으로 연결되기 마련이었다. 그렇다면, 조금 전까지 인진과 그 패거리들에게 집단 폭행당했던 놀이터로 갈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서둘러야 될 텐데.’


백작은 연주의 육체가 완전히 잠에 빠진 것을 확인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왔던 길을 되짚어 채연 중학교 쪽으로 순간이동 해보았다. 그러나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21세기에서 보았던 것들을 차례로 떠올리며 찾아가 보았다. 연주의 집, 그녀가 처음 입학했던 국민학교와 중학교, 그리고 우현이 다니는 고등학교까지도.


‘당신이 원하는 곳이면··· 나는 어디든지 찾아갈 거야.’


문득, 기타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밤 11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백작은 주변을 둘러보고 흠칫했다. 사람들이 운영하는 상점이란 상점은 하나 둘씩 불이 꺼지고 있었다. 하물며, 거리에서 악기를 들고 다니는 사람 같은 것은 더더욱 없었다.


“젠!”


백작은 그제야 자신에게만 들리는 기타 소리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그가 마지막으로 기타 소리를 들었던 때는, 1832년도 6월 봉기 때였다. 생 메리 수도원에서 마지막 싸움을 앞두었을 때, 거리에서 구걸하던 악사 하나가 수도원 건물 외곽에서 홀로 연주했었다.


‘그 때의 그 소리다!’


백작은 주먹으로 눈물을 쓱 훔친 뒤, 파리로 향했다. 반허공에 살짝 뜬 채로 날아서, 수도원 둘레를 샅샅이 훑어보았다. 그러나 그곳 어디에도 연주의 유체는 보이지 않았다.


‘나를 알고 싶은··· 너의 마음. 그것이 지금 너의 꿈인 것이냐?’


그러나, 완전한 것은 아닌 듯했다. 인간의 육체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머무는 감각은 청각이었으며, 그렇게 귀로 받아들인 기억 또한 가장 오래 남는다고 했다. 연주의 의식 속에 남아있던 소리는, 200여 년 전에 죽기 직전 들었던 기타 소리였을까.


‘넌 그 날을 조금이라도 기억하느냐? 난 너에 대한 모든 걸 기억한다! 기억하고 싶다!’


백작은 텅 빈 수도원의 벌판에 내려서서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 땅에 진정한 평화가 오는 날, 이 소리를 직접 연주하고 싶었다고 했던 너를, 사랑한다. 예전에도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고, 앞으로도 사랑할 것이다!’


백작은 문득, 그녀와 함께 했던 인생들 속에서 가장 처음으로 기타 소리를 들었던 순간을 떠올려보았다. 그것은 바로 근 300년 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때였다. 제노비아였던 그녀는 자그마한 기타를 끼고 막사 뒤편에서 연습을 하거나, 악기 손질을 가끔 했었다. 이제 남은 곳은, 바로 그 전쟁터였던 바르셀로나밖에 없었다.


‘설마··· 설마··· ’


백작은 지중해 하늘을 지나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한 손으로 꾹 눌렀다. 그가 어째서 자신을 찾아왔는지 간절히 알고 싶어하는, 그녀의 마음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수백 년 동안 쌓인 기억의 파편들 중에서, 단 하나의 소리가 가물가물하다 막 깨어나려 하고 있었다. 시간도 공간도 자각하지 못한 듯한 기타 소리만이 반복되고 있었다.


그는 1713년에 주둔했던 전쟁터를 찾으려고 사방을 헤맸다. 밤이 깊어 새벽달이 서쪽으로 한참 기울었을 무렵에서야, 옛 전쟁터를 찾아낼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기억 일부가 그제야 만나서 합쳐진 듯, 바르셀로나 주변의 풍경이 바뀌었다. 21세기에 설치된 모든 것들이 사라졌다. 대신에, 부서지고 불탄 막사의 잔해들만 넓은 벌판에 널린 풍경이 펼쳐졌다.


연합군의 깃발 하나만 꺾인 곳이 있었다. 그리고, 그 바위턱에는 검은 머리카락의 소녀가 서 있었다. 그가 소녀를 발견한 순간, 6박자로 반복되던 기타 소리가 서서히 잦아들다가 완전히 멈췄다. 소녀는 바로 조금 전까지 함께 있었던 연주인 듯했다. 뒷모습에서 보이는 복장이 그랬다.


“많이 기다렸어?”


백작은 연주에게 말했다. 연주는 돌아서서 백작을 보았다. 백작은, 그녀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동양적인 특징이 일부 섞여있던 육체와는 달리, 그의 앞에 서 있는 그녀의 유체는 제노비아 그 자체였기 때문이었다. 연주는 그런 백작의 반응을 의아하게 보다가 말했다.


“아니요.”


“놀랐어?”


“처음에는, 조금요. 근데 당신이 여기 사람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런가 보다 했어요.”


“내가··· 그렇게 궁금했니?”


백작은 울컥 하려는 것을 꾹 눌러 참으며 물었다. 어째서 그녀가 이곳에 이르렀는지 알 것만 같았다. 연주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당연하죠. 절 도와주셨는데.”


백작은 쓸쓸한 미소만 지었다. 연주는 양 손의 검지로 사각형을 그려 보인 뒤에 말했다.


“사실 아까도 글로 써서 여쭤 본 게 뭐였냐 하면요. 당신은 누구고, 절 어떻게 도와주게 됐느냐는 말이었어요.”


백작은 알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묵묵히 끄덕여주었다.


‘아무래도, 이 나라의 글을 제대로 익혀놔야 하는 건가.’


연주의 인생에 직접 개입하지 않고 끝까지 지켜보겠다는 그의 결심은 이미 물거품이 된 지 오래였다. 5년 동안은 그녀가 평온하게 지내는 것을 확인했었으나, 더는 그럴 수 없게 되었다.


“그건 얘기하자면 길다.”


백작은 그렇게 허두를 내고, 어떤 대답부터 시작할지 잠시 생각했다. 연주의 무의식은,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이 참전했던 왕위 계승 전쟁과, 파리에서의 6월 봉기 일부에 미미하게 닿았던 듯했다.


“솔직히, 이렇게 험한 데서 보자고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백작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다소 멋쩍은 기색을 띠었다.


“그래도 나하고 소리 내서 얘기하다가, 나중에 혼나는 것보단 낫겠지?”


연주는 자지러지게 웃음을 터뜨렸다. 활짝 웃는 입매와 높은 웃음소리, 그리고 허리를 앞으로 숙였다가 뒤로 꺾기도 하는 움직임. 그 모든 것이 백작에게는 낯설면서도 기뻤다. 두 번의 인생을 이미 함께 했었지만, 그 세월 동안 그녀가 그토록 밝게 웃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귀신이 그런 것도 걱정해 주나요?”


연주는 한참 뒤에 웃음을 그치고, 눈가에 맺힌 눈물방울까지 닦아내며 말했다. 백작은 어안이 벙벙한 채로 보다가 말했다.


“귀신이라, 뭐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넌 나 말고도 많이 봤었냐?”


“직접 본 건 당신이 처음이에요. 근데 듣던 것하고는 많이 다르네요.”


“뭐가?”


“죽은 사람들이 이렇게 나타나는 건, 살아서 못 한 거 해결해달라고 징징대는 경우가 많다고 했거든요. 그밖에는, 조상신들이 나타나서 이런 저런 건 위험하니 얼른 피해가라고 애매한 신호만 주다가 가는 일도 있다고 하고요.”


“그게 다야?”


“아니요. 뭐··· 이승에 남겨둔 사람이 걱정되어서 저승에 못 가고 그 주변을 맴도는 일도 있다고 들었어요. 근데 어떤 이유든지 간에, 이승에 있는 사람은 웬만해선 귀신이 있는 걸 잘 못 느끼겠죠.”


백작은 슬픈 표정으로 연주를 건너다보았다. 만약 자신이 그녀의 주변에 몇 년 동안 맴돌고 있었다는 것을 알면, 그녀는 뭐라고 할 것인가. 지난 5년 동안의 연주는, 그의 존재 자체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었다.


‘너도 한때는 평범한 인간이었겠지.’


그러나, 그를 다시 한 번 자각하면서 그녀의 인생이 꼬이는 것은 아닐까. 문득 백작은 그런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그렇다고 해서 위험에 빠진 그녀를 마냥 지켜만 봐야 한다면, 그것은 더욱 견딜 수 없을 듯했다.


“그리고 귀신을 보는 사람들은, 그게 다 자기들 눈에만 보이는 거다 보니까.”


“응?”


“남들 눈에는 어디 벽에 대고 혼자 얘기하는 걸로 보이니, 정신 살짝 나간 걸로 오해받기 딱이거든요. 나중에서야 귀신을 봤다고 말해서 이해받는 경우도 아주 소수였고요. 그래서 당신이 정말 특이하게 보이기도 해요. 귀신들이란, 산 사람 입장 같은 거 생각 안 한다고 들었거든요.”


백작은 조용히 쓴웃음만 짓고 말았다. 정신에 이상이 있는 존재로 취급받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그 또한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그 때보다는 치료 방법이라든지 사람 취급하는 게 조금 완화되기는 했지만, 밖에서 사람들 시선 받는 분위기 같은 건 변하지 않았지.’


그리고, 그런 식의 부당한 시선이라면, 티끌만큼도 그녀에게 닿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 때 연주가 말을 꺼냈다.


“그런 걸 볼 때··· 당신은 날 오래 전부터 잘 알던 분이 아닐까 싶었어요.”


백작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설화는 아파트 후문 쪽 벤치에 앉은 채, 무릎에 얹은 함에 담긴 혼구슬을 내려다보았다. 네 번째 인생에서 백작과 마주친 인간혼 ‘연주’ 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도 연약해 보였다. 언뜻 보기에는, 같은 인간들에게 일방적으로 휘둘린 끝에, 자신이 사는 세상 밖으로 내몰린 어린 소녀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처음 생겨나서 저 사내와 만났던··· 바로 그 나이에.’


혼구슬의 첫 번째 인생이었던 제노비아와, 네 번째 인생이었던 연주는 모두 15세에 백작과 처음 만났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렇다면 그 사내는 지금 어디 있는 것이더냐?’


설화는 옅은 한숨을 내쉬고, 혼구슬의 표면 위로 손을 얹었다. 그리고는, 잠시 망설였다가 말을 꺼내보았다. 지금이라면 그녀의 말을 들을 수 있을 것인가.


“얘야.”


혼구슬 속에서 비치던 장면이 서서히 흐려졌다. 그리고는 잠시 사라져버렸다. 유백색 광택과 맑고 투명한 표면만 남았다. 그 안에서는 다소 목쉰 소리가 흘러나왔다.


“네.”


아마도, 기억을 되새기면서 수도 없이 흐느꼈던 듯했다. 혼구슬의 소리는, 마치 살아있었던 인간의 여자가 목놓아 운 끝에 가라앉은 듯한 음색을 띠고 있었다.


“어릴 때··· 많이 놀랐구나.”


설화는 검지에서 넷째 손가락까지 딱 붙이고, 그 손가락들로 혼구슬 표면을 쓰다듬었다.


“그 긴 시간 동안은, 그저 그 사내가 있어서 여태까지 버텼던 게냐?”


“그렇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혼구슬은 어느 정도 정돈된 듯한 저음으로 대답했다. 설화는 혼구슬의 감정이 차분하게 가라앉은 것을 느끼고, 다른 말을 꺼냈다.


“아무리 그래도, 그 때 넌 사람이고 그 사내는 혼이었을 텐데. 무섭진 않았느냐?”


“삼신님.”


혼구슬에 잠시 불그스레한 빛이 감돌았다. 그러나 그 빛은 이내 사그라졌다.


“제가 여러 번 인생 살면서 느낀 거지만,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건 악질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설화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혼구슬은 계속 말했다.


“그 때 백작님한테 처음 말하긴 했지만··· 거기서 전 딸 두 명 있는 집 첫째였습니다.”


“그런 것 같았다. 형제자매가 정확히 몇이었을진 몰라도, 넌 일단 맏이였을 것 같았으니까.”


“그런가요? 이제 와서 하는 얘기지만, 솔직히 그게 참 괴로웠습니다.”


“어째서?”


“남자건 여자건 간에 첫 아이가 되고 보면, 부모란 사람들이 이것저것 해보는 게 많더군요.”


설화는 고개를 묵묵히 주억거렸다. 애기삼신으로서 수습 과정을 밟을 당시에는, 갓 결혼한 부부의 몸에 아이를 점지하는 작업을 주로 참관한 기억이 생생했었다. 그리고, 모태에서 다 자란 아이들의 해산을 도우러 가게 될 때면, 각자의 아이를 기다리는 인간 부모들의 여러 가지 반응을 볼 수 있었다.


“그럼, 네 예전 부모는 뭘 했더냐?”


“음. 일단 먹고 사는 데는 부족하지 않게 해주신 건 인정합니다.”


“일단··· 이라. 말투가 어째 살짝 버릇없어지는구나? 뭐가 더 있었기에 그러느냐?”


“그 때는, 좋다, 나쁘다 를 딱 꼬집어서 말하긴 좀 애매했습니다만.”


혼구슬은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말을 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신들의 큰 자식이라면 마땅히 이래야 한다··· 는 식의 기준이 처음부터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회에서 보는 모범적인 맏딸, 혹은 맏아들은 이러하다, 저러한 점에서는 흠이 없었다··· 는 전례를 평균이라고 멋대로 정해 놓고, 그보다 못 미치면 주변에 숨기기에만 바빴다고나 할까요?”



백작은 자신의 무릎에 누운 연주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제노비아였을 때의 그녀와 함께 했던 1714년도의 마지막 밤. 그 날 밤에 기도했던 바르셀로나 격전지의 언덕에서, 그는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그 때와는 달리 육체가 아니기에, 바위의 차가움이나 밤이슬의 축축함, 혹은 이끼나 잔디의 스침도 없었다. 연주는 그의 왼쪽 무릎을 베고 누워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녀 또한 등과 머리에 아무 느낌을 받지 않고 있었다.


“난 항상 완벽해야만 했어요.”


이윽고 연주는 몸을 약간 돌리고, 백작의 허벅지를 감싼 갑주에 뺨을 대며 먹먹한 어조로 말했다.


“언제부터인가, 다 들렸었거든요.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무엇을?”


“지금 할머니가 엄마를 보통 질투하는 게 아니라는 거요. 생전에 할아버지가 할머니 기대에는 별로 안 찼는데, 엄마하고 아빠는 서로 좋아 죽거든요. 할아버지한테는 할머니 본인이 최우선이 아니었는데, 아빠는 엄마가 우선이었던 거죠.”


“그래서?”


“엄마가 아빠 사랑 많이 받고, 바로 자식··· 그러니까 제가 생기는 것도 싫었나 봐요. 엄마하고 아빠 목소리는 매일 들려서 알겠고, 좀 껄껄하고 거슬리는 늙은 목소리가 들렸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게 할머니였나 싶기도 해요.”


연주는 잠시 눈을 감았다. 백작은 그런 연주의 머리를 쓰다듬고, 손을 잡아주려고 했다. 그러다가는 표정을 싹 굳혔다. 연주의 기억 속에서 떠오른 장면이, 그녀의 머리 바로 위에서, 정확히는 백작의 가슴 높이에서 반투명한 영상으로 나타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상 속 검붉은 원 안에서 물이 물컹물컹 질척이고 있었다. 안에서 덩어리가 움직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검붉은 원은 찌그러지다가 굳어졌다. 마치 물 가득 찬 자주색 풍선이 냉동실에 막 들어가서 서리를 훅 맞기 직전인 듯했다.


“삐-익!”


오래된 초인종이 한 번 울렸다. 검붉은 원 안에서 끈적하게 물컹거리던 물의 움직임이 둔해졌다. 마치 식어가는 것만 같았다.


“엄마가 친구들 만나고 집에 왔는지 계속 벨을 눌렀어요. 이제 좀 살 것 같아서 오랜만에 나갔다 온 것 같았지요.”


백작은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리고는 슬픈 표정을 띤 채 손으로 연주의 뺨을 손가락으로 한 번 쓱 밀었다. 오래 전에 앙투안이었을 때나, 그리고 제노비아를 처음 만나기 이전의 기억이 떠올랐기에, 연주가 말하는 상황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수백 년 전, 사교계에서는 결혼을 통해 존재가 막 알려진 귀부인들이 얼마 안 되어 공식 석상에 나오지 못하고 쉬는 일이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요양을 몇 달간 했다가 다시 나오기도 했다. 그것은, 안정기에 접어들었다는 신호였다.


“근데, 아무리 벨을 눌러도 대답이 없었어요.”


초인종 소리가 열 번을 넘어갔다. 이번에는 철컹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검은 원 안의 물체가 오들오들 떨기 시작했다. 물체를 둘러싼 끈적한 액체도 그와 같이 떨렸다.


“추워서··· 너무 추워서 나까지도 오그라들었어요. 그런데 숨고 싶어도 더 숨을 수 없었고, 도망갈 곳이 없었어요.”


연주는 두 팔과 다리를 한껏 웅크렸다. 자궁 속에 든 태아가 온몸을 웅크리는 것만 같았다. 백작은 이를 악물고 내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기억 속에서는, 어느덧 차가 지나가는 엔진음이 간헐적으로 들려오기도 했다. 아마도 그 당시에 시간이 흐르고 흘러, 퇴근하는 차들이 몇 대 지나갔던 듯했다. 기어를 당기는 소리와 함께, 문득 조용해졌다.


“그리고, 아빠 목소리가 들렸어요. 그제야 문이 열렸죠. 근데 그 날 엄마는 아무 말도 안 했어요. 그 때 처음 알았죠. 엄마한테는··· 나를 지켜주는 것보다는, 착한 아내, 착한 며느리, 모두한테는 착한 사람이 되고, 집안 시끄러워지지 않는 게 더 중요했다는 것을.”


백작은 눈가로 손을 가져갔다. 그러나 이미 뺨을 타고 흐르던 눈물이 연주의 머리 위로 후두둑 떨어져버렸다. 소리없이 울음을 참는 그의 어깨가 한없이 떨렸다.


“내가 아무 이상 없이 태어나서 더 그랬던 거 같아요. 괜찮으니 정말 괜찮은 줄 알았겠죠. 너만 참으면, 너만 조용히 넘어가면 모두가 편해··· 다 그런 거야.”


이윽고, 연주의 기억 영상은, 책장이 가득한 방으로 넘어갔다. 지금보다 조금 더 어린 연주는, 청소년용으로 축약한 고전 소설들과 성경을 모티브로 한 아동전집들 사이에 파묻혀 있다시피 했다. 그리고 그 방에는 어린 우현이 불쑥 들어왔다. 우현의 모습을 본 순간, 백작의 눈이 잠시 날카롭게 빛났다.


“아까 들어온 집, 우리집 아닌 건 바로 알았죠?”


그 때, 연주가 물었다. 백작은 어리둥절해서 반문했다.


“우리집···?”


연주는 눈을 약간 크게 떴다가, 이내 이해했다는 듯 웃음 지으며 말했다.


“아아, 제 집이요. 제 부모하고 나머지 식구들이 있는 그런 집.”


연주는 그렇게 해명을 마친 뒤에 계속 말했다.


“거긴 제 삼촌, 그러니까 아빠 동생의 집이에요. 그리고 아까 제가 갔던 학교는 그분 아들인, 제 사촌 오빠가 다니는 학교인 거죠. 아무튼, 집에 있는 거보다는 오빠네 집에서 책 보는 게 더 좋았고··· 그렇게 뭘 하고 있으면 아무도 절 건드리지 않아서 더 좋았어요.”


백작은 그제야 그 영상 속에서 비친 남자아이가 어린 시절의 우현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는 겸연쩍은 듯 얼굴을 분홍빛으로 슬며시 물들였다.


“그래서 그 오빠가 제일 먼저 생각났어?”


백작은 연주의 손을 잡아서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연주는 배시시 웃었다.


“오빠하고 친한 건, 아무도 뭐라 안 하고요. 말도 그나마 통했거든요. 오빠도 절 있는 그대로, 그리고 진심으로 대하고, 걱정해 주는··· 유일한 사람이니까요.”


백작은 교실에서 보았던 우현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납득했다는 의미로 고개를 묵묵히 끄덕였다. 아직까지 공부할 시간이 남아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현은 위태로워 보이는 연주의 모습을 보자마자 곧바로 그녀를 데리고 학교에서 나온 듯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체포된 삼신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체포된 삼신] 완결 후기입니다. 19.09.02 62 0 -
공지 [체포된 삼신] 완결 일정 최종 공지입니다. 19.08.05 81 0 -
공지 [체포된 삼신] 연재 일정 관련 공지입니다. 19.07.17 78 0 -
47 외전 [아스트라이아] 1 - (2) 19.11.12 9 0 12쪽
46 외전 [아스트라이아] 1 - (1) 19.11.12 15 0 14쪽
45 외전 [아스트라이아] - 프롤로그 19.11.06 19 0 13쪽
44 에필로그 : 영원한 잠 19.08.07 68 1 25쪽
43 13. 체포된 삼신 [完] 19.08.07 83 0 48쪽
42 12. 거래는 성사되었다 (2) : 사라진 혼구슬 19.08.06 85 0 39쪽
41 11. 거래는 성사되었다 (1) : 피로 물든 밤 19.08.06 84 0 31쪽
40 10. 무대 위의 밤 (2) : 당신을 찾아서 - 4 19.08.05 90 0 27쪽
» 10. 무대 위의 밤 (2) : 당신을 찾아서 - 3 19.08.05 97 0 26쪽
38 10. 무대 위의 밤 (2) : 당신을 찾아서 - 2 19.07.30 79 0 19쪽
37 10. 무대 위의 밤 (2) : 당신을 찾아서 - 1 19.07.30 93 0 16쪽
36 9. 무대 위의 밤 (1) : 내가 기억하는 세상 (下) 19.07.18 96 0 22쪽
35 9. 무대 위의 밤 (1) : 내가 기억하는 세상 (上) 19.07.18 111 0 19쪽
34 8. 살아있는 이유 (2) : 세 번째 죽음 (下) 19.07.13 91 0 21쪽
33 8. 살아있는 이유 (2) : 세 번째 죽음 (上) 19.07.13 102 0 21쪽
32 7. 살아있는 이유 (1) : 어둠 속의 목소리 (下) 19.07.10 95 0 12쪽
31 7. 살아있는 이유 (1) : 어둠 속의 목소리 (上) 19.07.10 92 0 17쪽
30 6. 당신이 어떤 이름이라 해도 (2) : 델핀느의 이야기 (下) 19.07.09 92 0 19쪽
29 6. 당신이 어떤 이름이라 해도 (2) : 델핀느의 이야기 (上) 19.07.09 87 0 16쪽
28 6. 당신이 어떤 이름이라 해도 (1) : 앙투안의 이야기 (下) 19.07.06 93 0 14쪽
27 6. 당신이 어떤 이름이라 해도 (1) : 앙투안의 이야기 (上) 19.07.06 82 0 15쪽
26 5. 6월의 열기 (2) 19.07.02 88 0 18쪽
25 5. 6월의 열기 (1) 19.06.27 98 0 21쪽
24 4. 천 년 전과 천 년 후 (2) : 부정한 죽음 (下) 19.06.22 106 0 21쪽
23 4. 천 년 전과 천 년 후 (2) : 부정한 죽음 (上) 19.06.22 95 0 15쪽
22 4. 천 년 전과 천 년 후 (1) : 신녀 아란 (下) 19.06.18 133 0 13쪽
21 4. 천 년 전과 천 년 후 (1) : 신녀 아란 (上) 19.06.18 91 0 14쪽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제니아.' 작가를 후원합니다!

  • 보유 골드: 0 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