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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점  공모전참가작 체포된 삼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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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아.
작품등록일 :
2019.05.01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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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03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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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05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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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무대 위의 밤 (2) : 당신을 찾아서 - 4

DUMMY

10. 무대 위의 밤 (2) : 당신을 찾아서 - 4



“알고 싶은 거 물어보고, 물어보면 대답해 주고, 어디든 자랑할 만한 성적이 나오면··· 아무도 간섭하지 않았어요. 그냥 마음 가는 대로 장난칠 수 있는 사람은 오빠뿐이었어요.”


“혹시 이 나라에서.”


“네?”


연주는 어리둥절했다. 자신이 말하는 도중에 누군가가 끼어드는 것은 백작이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백작은 아차 싶어서 숨을 삼켰지만, 돌이킬 수 없었다. 결국 그는 하려던 말을 그대로 내뱉었다.


“친척끼리도 혼인할 수 있어?”


연주는 어안이 벙벙해서 백작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손으로 바닥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다시 백작 쪽으로 몸을 돌려 앉았다.


“어쩔 때는 성씨가 같아도 힘들고, 친척인 게 명백하면 더더욱 안 되긴 해요. 근데 그게 왜 궁금하죠?”


백작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연주는 어쩔 줄 모르는 백작의 반응을 유심히 보다가, 고개를 이리저리 꼬아보았다. 그리고는 다소 장난기 어린 미소를 띠며 말했다.


“제가 오빠하고 할까봐요?”


“그만하자, 내가 잘못했다.”


백작은 연주의 눈을 피하며 말했다. 연주는 짐짓 이상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백작에게 화난 기색은 없었다. 백작은 그런 그녀의 눈치를 살피다가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네?”


“어떻게··· 할 거니?”


백작은 다른 말을 꺼냈다. 연주는 앉은 자세를 약간 고치며 말했다.


“뭘요?”


“지금 이건··· 꿈이다. 너와 나한테는 같이 기억하는 현실이고, 다시 돌아가면 내일의 하루가 시작되겠지. 근데 널 생각해 주는 그 사촌 오빠하고 다른 사람들한테는··· 그저, 너 한 사람이 자고 일어나서 시작되는 하루일뿐이다.”


백작은 돌려 말하려고, 단어를 고르고 또 골랐다. 그러는 백작의 반투명한 이마에는 구슬땀에 군데군데 맺혔다. 연주는 입을 약간 벌리고 그런 백작의 기색을 멍하니 보았다. 분명 군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말을 저렇게 가려서 유려하게 쓰는 군인은 그가 처음이었다.


‘그냥 이런··· 사고가 났으니, 내일은 어떻게 감당할 거냐고 물어봐도 되는데.’


연주는 사고라고 생각하다가, 인진과 그 패거리들을 떠올리고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참을 수 없는 것은 따로 있었다.


“여기 오기 전에, 오빠하고 숙모 하는 얘기 혹시 들었어요?”


“어떤 거?”


“전화 온 거 있냐고 묻는데, 없다고 한 거요.”


백작은 그 말을 듣고, 눈을 아프도록 질끈 감았다. 연주는 그런 백작의 반응을 확인하고 말했다.


“제가 툭하면 오빠한테 가는 건 다 알아요. 그러니 자고 온다고 해도 뭐라 안 하죠.”


“근데 그 오빠라면 몰라도, 넌 원래 더 일찍 집에 들어가야 하지 않았어?”


“눈치 챘어요?”


백작은 대답하지 않았다. 고등학교부터 야간 자율 학습이 있다는 것은, 지난 5년 동안 연주의 주변을 보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국민학교를 거쳐 중학교에 들어간 연주라면, 아무리 늦어도 저녁 식사 전에는 하교했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맞아요. 청소나 주번까지 있어도 대여섯 시면 끝나고, 그 다음에 학원이든 뭐든 했겠죠. 아, 물론 학원 다니는 건 없어요. 집에 안 들어오면 오빠한테 갔겠구나··· 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네요. 아예 동네로 전학까지 왔으니까요.”


“지금, 너 자신을 속이는 거니?”


연주는 멈칫했다. 백작의 어조에 묘한 분노와 슬픔이 어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보세요. 당신이 어느 나라 사람이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여기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하거든요.”


백작은 잠시 실소했다가 표정을 거두었다. 그리고는 연주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엄마하고 아빠는, 주변 평판을 엄청 신경 썼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다 참고 양보해서 좋은 사람이 되는 걸로··· 그렇게 살아남았고, 그런 이미지를 만들었거든요. 그리고 그 사이에서 난 저 또한 착하고 좋은 사람이어야 하고, 문제가 생겨도 당신들 탓이 아니어야 했고, 밖에서 저절로 알아보고 요행히 해결해 줘야 하는··· 그런 생각이 있었어요.”


“부모의 성향을, 자식한테도 기대한다는 거였니?”


“네. 부모가 순종적이지만 자식이 좀 센 경우도 가끔은 있죠. 근데 그러면 그 자식이 이치를 따져서 뭔가를 하려 들 때, 부모의 선례를 이상하게 들면서 자식을 깎아내리는 사람들도 있더라고요.”


“어떻게?”


“너네 부모는 그렇게 야박하지 않았다. 가정 교육을 어떻게 받은 거냐. 그런 식의 말이 나오죠. 시대와 원칙도 변하고, 사람 성향은 혈연이 있건 없건 간에 다 다른데 말이에요.”


백작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제노비아였을 때의 그녀 또한, 15세의 소녀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말과 사고방식이 조숙했었다. 그런데 그 이후로 몇 세기가 지난 지금은, 먹고 살기에도 풍족하고, 교육까지 받을 수 있는 아가씨가 된 연주에게서도 같은 느낌이 나고 있었다.


‘그리고··· 세상을 더욱 버린 듯한 너.’


세상에서는, 많은 이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숙성한 사람이 가끔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모든 것을 관조적이고 냉소적으로 보며, 한 발짝 떨어져 있는 염세적인 사람은 흔치 않은 듯했다. 연주는 이미 태어나기 전부터 모든 사람에 대한 믿음 자체를 잃어버린 듯했다.


‘그리고 그런 절망을··· 그 계집애들이 더 부추겼어.’


백작은 망토 뒤로 감춘 오른손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한순간에 학교 전체의 관심이 전학생인 연주에게 쏠렸다는 이유만으로, 인진과 그녀를 추앙하던 10여명의 여학생들이 어떻게 나왔던가. 그는 연주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지난 몇 달 간 어떤 일이 있었는지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 한 얘긴, 바로 몇 년 전에 삼촌이 들었던 말이라고 해요. 삼촌은 그 날 이후 지금까지 친할머니, 친할아버지 포함해서 그 주변 어르신들 싹 다 안 보고 지내고··· 아빠는 삼촌 몫까지 아들 두 명 노릇을 해서 친가 외가 쪽에는 다 좋은 남자 소리 듣더라고요. 그리고, 엄마가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 끝까지 버티고요.”


연주는 거기까지 말했다가, 돌연 시니컬하게 내뱉었다.


“그러니, 좋은 사람들 사이에서 늦게 얻은 딸인 제가 어디 가서 맞고 다닌다거나, 누명 쓰고 그런 건 정말 좋은 이미지는 아니겠죠?”


“그런 말이 어디 있어!”


“근데, 진짜 그랬어요.”


연주는 검지와 중지를 붙이고는 입가로 가져가보였다.


“담배라고 있지요. 어른들은 해도 되지만, 애들한테는 금지됐거든요. 심지어 학교에서 했다간 규칙 위반으로 걸려서 벌 받고요. 이걸 제가 했다고 뒤집어씌우려고, 정기적인 단체 검사 때 담배갑을 책상 서랍에 넣어놨더라고요.”


“단체 검사?”


“선도부라고, 학교마다 단속하는 부서가 있거든요. 그 부서위원으로 뽑힌 학생들하고 선도 담당 선생님이 각 교실을 돌면서 일괄적으로 복장이랑 소지품 검사하는 날이 있어요.”


연주는 손을 내리고 설명했다. 백작은 물음을 던졌다.


“그래서?”


“그 때 제 복장 점검하고 소지품 검사 때 담배가 나오면 걸리는 거였죠. 근데 사실, 처음 한 번 걸렸을 때부터, 사실 저 가만 안 있었어요.”


“어떻게 했는데?”


연주는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가, 돌연 독기 어린 표정을 띠었다.


“처음엔 예상도 못한 일이고, 누가 일부러 그랬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죠. 다만 담배를 피우면 인간의 몸에 어떤 변화가 남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전 절대 아니라고, 담배를 자세히 봐달라고 했죠. 그래도 정 못 믿으시겠다면 병원 가서 폐와 손가락, 입 안 전부 정밀 검사받게 해달라고도 했고요.”


“그래서 다들 뭐라고 했어?”


“다행히 그 때 단속 나온 선생님은 말이 통했어요. 서랍에서 나온 담배가 이상하게 너무 지저분하고 오래된 것이라, 최근에 전학 온 제가 피우다가 숨긴 것이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었거든요. 지금은 1994년 5월인데, 그 때 나온 담배 제조일자는 2월인가? 3월인가 그랬고, 안에 쑤셔넣은 담배 두어 개도 그 담배 종류하고 일치하지 않았다고 해요.”


“신기하군.”


“그 때 단속한 선생님이, 담배 좀 하는 분이었어요. 그러니까 잘 알았죠. 그래서 누가 봐도 일부러 넣었겠다 싶으니, 누가 그랬는지 처음에는 알려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근데 애들은 아무도 선생님들 조사에 반응하지 않았어요. 이미··· 애들은 그것들 편이었던 거였죠.”


연주는, 말하던 끝에 간신히 인진의 패거리들을 언급했다. 실제로도 처음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뒤, 담배는 지속적으로 연주의 서랍이나 가방 곳곳에서 튀어나왔다. 육성회장인 어머니와, 이사인 아버지를 둔 인진의 위력, 그리고 그녀의 친인척들이 경찰서와 교통부를 장악하고 있는 현실. 그런 뒷배경을 건드리기 꺼려한 학생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그 녀석들한테는, 이제 한두 달 정도 본 저와, 몇십 년 알고 배경 빵빵한 인간이 어찌 비교가 됐을까요?”


연주는 여러 번 담배 사건이 일어났을 때, 어머니에게 말했던 일을 이어서 언급했다.


“제가 이렇게 힘들다는 걸 말해 본 것도··· 아마, 엄마 뱃속에 있을 때 이후로 처음이었을 거예요. 근데 엄마 반응이 더 황당했어요. <이 또한 지나가리라> 라니요.”


백작은 귀에 익은 의미의 구절을 알아듣고, 더욱 황당한 기색을 띠었다. 그는 처음 인생에서도, 두 번째 인생에서 앙투안이었을 때도,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었다. 라틴어로 된 성경만이 아니라, 모국어인 프랑스어와 독일어로 편찬된 것도 다 독파하고 있었다.


‘그것은 먼 옛날 솔로몬이 자기 아비에게 추천했던 격언이었지. 그 격언은 반지에 새겨졌고.’


앞뒤의 상황을 명시하지 않았거나 생략한 구절을, 사람들은 편리한 대로 악용하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 중 하나가 연주의 부모인 것만 같았다.


“가만히 있으면 위에서 진실을 알 것이다, 너는 네 할 일을 하라는데··· 그게 그렇지가 않다고 말해도 소용없었어요. 그리고, 지금까지 제가 집에 들어가지 않는 상황을, 그냥 오빠한테 가서 외박한 걸로만 합리화하려는 게 너무 빤히 보여서, 정말 끔찍해요.”


백작은 석상처럼 굳어진 채 묵묵히 있었다. 아무 기억도 없이 자신의 일상을 살아가는 연주였지만, 사리 분별을 정확히 따지고 하나하나 조목조목 짚어가며 말하는 제노비아의 영혼은 그대로인 것만 같았다. 다만, 주로 남자들에게 몰려서 당하던 과거와는 달리, 같은 여자들에게 당하는 일 자체가 처음이라 맥없이 두들겨 맞았던 것은 아닐까.


“위에서 진실을 알게 하려면, 그만큼 뭔가 눈에 뜨일 만한 걸 보여줘야 하는 법이지.”


“제 말이요! 근데 당신하고 얘기 끝나고 깨어나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될까요.”


연주는 이를 북북 갈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한 걸 가지고 뭘 그러냐, 우리 때는 더했다. 이건 너네 때 얘기고요. 그만한 거냐, 아니면 이만한 거냐, 심한 거냐··· 이런 건 당한 사람이 느끼는 거지 보는 것들이 결정하는 거 아니거든요! 근데 말이 들어 먹혀야 말이죠.”


백작은 연주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어느덧 총명한 빛이 완전히 돌아와 있는 듯했다. 그 어떤 부당한 일에도 절대 가만있지 않을 눈빛이었다.


“너, 여기선 이름이 뭐니?”


“여기서···요? 아, 하긴 당신이 절 오래전부터 알았다면, 그 때 제가 썼던 이름이 따로 있긴 했겠네요. 강연주에요. 근데 지금은 엄마 아빠 생각하면 토 나올 거 같으니까, 당신이 원래 아는 이름으로 불러주세요. 뭔지 궁금하네요.”


연주는 분명 소리 없이 웃느라 어깨를 떨면서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말하는 어조에는 꺽꺽대는 소리도 섞여 있었다. 냉소적이고 광기에 들뜬 몸짓이었다. 백작은 한동안 착잡한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말했다.


“젠.”


“좋아요. 그럼 당신은 뭐라고 부르죠? 오빠라고 하기엔 나이 많아 보였고, 그렇다고 아저씨라고 하면 너무 팍삭 늙은 거 같아서 좀 그랬거든요.”


“아까 두 번째로 썼던 건 어느 나라 말이었어? 최소한 내 나라 말은 아닌 거 같았는데.”


“영어, 그러니까 잉글랜드 말이요.”


“그렇군. 그럼 프랑스 말은 안 배우나?”


“글쎄요? 고등학교 올라가면 제 2외국어 선택하는 게 있는데, 그 중에 있다고는 해요. 당신 그렇게 묻는 거 보니, 프랑스 사람이었나요?”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왜 여기에 오게 됐는지는 궁금하지 않니?”


“지금은 좀 궁금해지네요.”


“너하고 난··· 처음에 여기서 만났었다.”


백작은 어렵사리 300년 전의 이야기를 꺼냈다.


“난 프랑스 사람이고, 여기서 벌어진 전투에 나갔다가··· 전사했었지.”


연주는 전사했다는 말에 잠시 움찔했다가, 다시 침착한 표정을 띠었다. 새삼 백작이 이미 죽은 사람이라는 것이 실감났다. 그러나, 그가 두렵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날 어떻게 부르고 싶은지 알고 싶다면, 그 때 그랬던 것처럼 백작님이라고 해도 좋다.”


연주는 백작의 모습을 다시 한 번 유심히 훑어보았다. 군인으로서 직급도 높아보였지만, 군의 휘장과는 미세하게 다른 표식이 있는 것이 새삼 눈에 띄었다.


“알았어요, 백작님.”


연주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백작은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의 폐허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한때 자신이 지휘관으로서 머물렀던 막사가 있는 쪽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연주는 말없이 그의 뒤를 따라갔다.


그는 연주가 따라오는 것을 확인한 뒤, 계속 걸어가서 다른 덤불 앞에 멈춰섰다. 그곳은, 그의 부관이었던 금발 지휘관과 제노비아였던 그녀가 임시로 머물렀던 막사가 설치되었던 곳이었다.


“예전에, 여기 아주 용감한 집시가 하나 있었다.”


“집시··· 라면 그 떠도는?”


“그래. 그러다가 여기까지 왔었지.”


백작은 제노비아였던 시절의 그녀를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 집시는 내 부대에 보호를 청했었다. 원래는 집시가 아니었는데, 어쩌다 그 무리에서 컸고··· 그 중 불순한 녀석 때문에 쫓기는 신세였다고 해.”


“집시가 아닌데 그랬다고요? 뭐, 유괴라도 당했었대요?”


“유괴까지는 아니었다.”


백작은 제노비아였던 그녀가 기타를 보고 울던 일을 떠올렸다. 그것을 선물하고 그녀를 보호했던 집시 대장은, 그 또한 좋게 기억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 양아버지가 된 사람 덕분에 잘 지냈다가 그렇게 됐다고 해.”


“그렇군요. 그럼··· 왜 쫓기게 된 거죠?”


“양아버지를 배신하고 죽게 만든 녀석이 있었다. 그리고 그 집시는 그 범인 녀석을 고발하려다가 쫓기게 된 거였다.”


백작은, 생전의 제노비아에게는 차마 말할 수 없었던 상황을 수백 년 만에 처음으로 생생하게 떠올렸다. 부관과 함께 길잡이를 자청하며 들어왔던 제노비아가, 처음부터 그의 눈에 밟혔었다. 그리고 부관이 내키지 않아 했는데도 스스로 나섰다는 그녀의 상황이 너무도 궁금했었다.


혹시라도 집시들 중의 일부가 그녀를 강제로 빼내러 오는 상황이 있을까 싶어, 막사 주변에 별동대를 배치했었다. 새로운 집시대장 루시페로와 남자 집시들 몇몇이, 예상했던 대로 사흘 만에 잠입했다가 붙잡혔었다.


‘너한테는 상처 주고 싶지 않았다.’


제노비아가 알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줄곧 벗어나려고 했다가 마침내 기회를 잡았을 만큼 당차 보였지만, 사람 자체에 그리 매몰차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눈앞에서 사람들을 고문하거나 다그치는 모습을 본다면, 인정에 끌려 괜한 죄책감을 느끼기라도 할까봐 걱정되었다.


결국, 백작은 그 당시 제노비아에게 주려는 빵을 정밀하게 도정한 하얀 밀로 구운 빵으로 바꾸면서, 수면초 가루를 섞어서 주라고 은밀하게 지시했었다. 그리고, 그녀를 강제로 빼내러 왔던 루시페로와 그 일당들을 포착할 때까지, 하얀 빵으로 제노비아를 계속 일찍 잠들게 했었다.


“집시가 싫다는데도 계속 강요했고, 양아버지 또한 양녀인 집시가 싫은 걸 강요하지 말라고 그 녀석을 엄히 다스렸었다. 그러자, 그 녀석은 집시들 처소 주변의 산적들한테 밀고해서··· 집시 대장인 그 양아버지를 죽게 만들었지.”


“그런 걸 어떻게 알았어요?”


“집시를 찾으러 몰래 숨어든 일당들을 잡아서 심문했었다.”


“집시는 그걸 알아요?”


“모르진 않았을 거다. 영리한 아이였으니까. 나중에는 알아차린 눈치였지만··· 날 원망하더라도 다 받아줄까 했다. 근데 생각을 들어볼 틈은 없었다.”


연주는 자신도 모르게 미어지는 듯한 가슴 한복판을 가만히 짚었다. 아마도, 백작이 그 집시의 생각을 들어볼 틈이 없었다고 한 것은, 둘 다 전투에서 죽었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단지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전 그 때··· 어떤 역할이었나요?”


“지금의 너라면, 그 때의 날 어떻게 생각하겠니?”


백작은 연주에게서 줄곧 등을 보이고 있다가, 고개를 살짝 그녀 쪽으로 돌리며 물었다.


“혹은, 지금 네가 당한 일을 다른 누가 당했었다면?”


“백작님, 당신도!”


연주는 두 주먹을 쥐고 버럭 외쳤다.


“과거에 봤던 특별한 일을 나한테 대입시키려는 건가요? 누구는 이랬다, 그러니 너도 이러는 게 최선이다! 아니면 이렇게 생각한다면 이래야 한다고?”


“그러는 너는, 내가 네 주변 어르신들처럼 특정한 틀에 널 옭아맨다고 생각하는 거냐!”


백작은 몸을 홱 돌리고, 연주를 정면으로 쏘아보며 맞받아쳤다. 그러나, 그러는 그의 검푸른 눈동자는 이내 젖어들고 있었다.


“사람 말을 끝까지 들어봐야 하는 건, 이 나라만 그런 거 아니다! 그건 나라하고 상관없어!”


“백작님!”


“그 때 그 용감한 집시는, 자신이 믿는 정의에 충실했고, 자신의 은인인 집시 대장이 갑자기 산적 습격을 받아 죽은 것도 방관하지 않았다. 옳고 그른 것을 명확히 알고, 주변 사람들까지 움직여 관청에 신고하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백작은 연주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고는 그녀 앞에서 앉은 자세를 취하며, 그녀의 두 팔을 꼭 붙잡았다.


“자신의 일이건, 남의 일이건··· 가슴이 시키는 대로, 옳다고 믿는 것을 그대로 해라. 너만이 할 수 있는 것으로 말이다.”


“백작님··· ”


“세상에 말이 통하지 않아서 괴로웠니? 통할 때까지 용기를 내서 계속해라. 지쳐서 도중에 포기하는 것만큼 안타까운 일도 없고, 아무것도 안 한 채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 내가 항상··· 네 옆에 있어주겠다.”


연주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백작의 젖어드는 눈을 내려다보았다. 낯설고 척박한 전쟁터에서 만난 반쪽인 양, 처음 보는 남자의 유령이었는데도 빠져들 것만 같았다. 그는 진심으로 그녀를 아끼고, 지금의 폭행 사건을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그저, 자신이 알지 못하는 기억 때문에 그런 것만은 아닌 듯했다.



“···그리고 제가 누구였는지 기억해내는 건,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혼구슬은 감회에 젖은 투로 말했다. 설화는 혼구슬의 표면을 한 번 쓱 문질렀다. 혼구슬이 내뿜는 감정에 복받쳐 차오르는 열기 때문에, 가끔 김이 서렸기 때문이었다.


“언제 알았느냐?”


“그 날 서로 꿈에서 빠져나오고, 다음날 오빠한테 상황을 털어놨습니다.”


“그래서?”


“오빠는 제가 가지고 있는 증거들을 보고, 어느 정도 효력이 있는 것들을 간추려 주었습니다. 전 그걸 토대로 교무실에 질문 거리를 들고 찾아갔다가, 절 처음 믿어주었던 선도부 선생님께 교재 사이에 쪽지를 끼워서 몰래 전했습니다. 제가 과학 교재를 가지고 갔었던 것도, 선도부 선생님 과목이었기 때문이었죠.”


“그래서, 그 선생이 뭘 해줬느냐?”


“전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하고, 쪽지에 부탁한 장소에서 오빠하고 같이 기다렸습니다. 선생님은 바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전 오빠가 보는 앞에서 모든 증거를 제출했습니다.”


설화는 혼구슬이 말하는 사촌 오빠 우현의 존재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이성적인 감정은 아니지만, 혼구슬에게 있어서 우현은 백작과는 별개로 좋은 사람으로 확실히 각인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지난 생에서만 끝날 성질의 것이 아닌 듯했다.


‘이건 아직 말해 주면 안 될 거 같지만.’


설화는 거기까지 속으로 정리한 뒤에 말했다.


“그 선생은 그걸 받아줬느냐?”


“물론입니다. 그리고 전 만일을 대비해서 오빠도 갖고 있다는 걸 명시했습니다. 다른 고등학교의 학생이자 사건 피해자의 친지가, 교육부에 고발할 여지가 있다는 것도 남겨둘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부분까지 생각하고 하나하나 하는 제 자신의 모습이 너무도 낯설지 않았고··· 그 패거리들을 한 번 처벌했다고 생각했을 때는, 모든 것이 기억났습니다.”


혼구슬은 유백색 광택을 내뿜었다. 제노비아였던 자신의 정체성을 모두 회복하여 전율을 느꼈던 감정 그 자체였다.


“네가··· 그 이후로도 몇 년을 더 살았던 걸 보면, 적어도 그 사건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됐었던 것 같구나.”


“글쎄요? 끝날 때까지는 끝이 아니었습니다.”


혼구슬은 돌연 싸늘하게 응수했다. 그리고는 그 이후의 일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2008년 4월. 극단 [나선계단] 연습실.


단원 한 명이 연주에게 대본을 건넸다. 연주는 받아서 몇 페이지 넘겨보다가 멈추었다.


“결국 이걸로 가기로 하셨대?”


“어.”


“젠장.”


“아니 이러다가 사고 나면 어쩌려고 참.”


“사고 걱정하는 사람이 연습실 오면 잠만 퍼자냐?”


단원은 짐짓 톡 쏘아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연습실 곳곳에 설치된 CCTV에서 가끔 야간에 잡히는 장면은, 녹음실 소파나 바닥에서 잠든 연주의 모습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었다. 연주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옆에서 반투명한 모습으로 지켜보던 백작의 얼굴이 빨갛게 되었다.


“자는 건 자는 거고, 그래도 볼 건 다 본다.”


연주는 지극히 평이한 투로 응수했다. 그러다가 대본에 표시된 부분들을 더 훑어보고는 굳어졌다.


“예산이 딸리는 건 알겠지만, 진짜 이대로 만들었다가는 큰일나겠어.”


“어쩌려고?”


“이런 거 전문으로 하는 시장 몇 개만 뚫으면 비용도 적고 간단한데, 왜 굳이 배우들을 갈아서 퀄리티 떨어지는 걸 자체 제작 시키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연습은 언제 하라고.”


연주는 미간을 찌푸리며 탄식조로 내뱉었다. 대본을 건넨 단원은 물론이고, 다른 단원들도 어느 정도 동감한다는 기색을 띠었다. 그러나, 차마 말로 내뱉지는 못하고 서로의 눈치만 슬쩍슬쩍 살피고 있었다.


“다 같이 만들고 하는 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안전하고 좋은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게 문제라고.”


“감독님은 그럼 뭔가 생각해 두신 게 있어요?”


“어.”


연주는 곧바로 대답했다. 그리고는 곧장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 펼쳐보였다. 휴대 전화를 이용해서 인터넷에 연결한 뒤, 자료 목록을 단원들에게 보여주었다.


“특히 소품팀, 이거 잘 봐. 대여 기간도 그렇고, 만드는 재료도 검증된 곳이니까.”


“비용도 더 싼데요?”


“그렇지?”


연주는 모두의 동의를 확인한 뒤, 다른 자료를 더 보여주었다.


“우린 지하 소극장에서 하는 거라, 다른 곳보다도 특히 환기하고 안전 문제 조심해야 해.”


단원들 중에서도 소품을 담당하는 팀원들이 긴장한 눈빛을 띠었다. 그들은 연주가 제시한 자료들을 접수하고, 제각각 휴대 전화를 꺼내서 더 탐색해 보기도 했다.


“더 좋은 게 있으면 알려주고, 연출님한테 다시 컨펌 받자고. 저기 나무하고 전등, 캐비닛 바꿔서 들여오는 건 내가 다시 말씀드려 볼게.”


“넵!”


회의는 끝났다. 연주는 단원들과 헤어져서 하숙집으로 돌아왔다. 혼자가 될 때면, 극단에 남아서 잠을 청하거나, 백작과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집이 아닌 곳에서 한뎃잠을 청하는 기간이 길어질 때는 은근히 피로를 느끼기도 했다. 그래서 일 주일에 한 번은 하숙집에 들어오는 편이었다.


‘개막이 2주 남았는데 인간들이 아직도 연습 부족으로 버벅일 정도면 이건 뭐.’


연주는 [나선계단]에서 준비하는 공연 <메모리즈>의 상황을 떠올리며 짜증스러운 기색을 띠었다. 의학 스릴러를 표방하는 대본으로, 총 6명의 인물들이 등장하게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6명의 배우들이 연습하는 시간보다, 무대 세팅과 제작에 기울이는 시간이 필요 이상으로 많은 실정이었다.


‘미친 거지, 이건.’


적어도 배우들 스케줄에 맞춰서 모두 모일 수 있고, 전체 장면을 해볼 시간을 벌려면, 무대부터 빨리 해결해야 할 듯했다. 연주는 세수를 마친 뒤 수건으로 얼굴을 북북 닦았다. 그 때, 세면대 위에 놓은 휴대 전화가 진동으로 울렸다.


확인해 보니, 단체 채팅방 메시지가 여러 개 와 있었다. 가장 최근의 것이 미리보기로 떠 있었고, 그 이전에는 4~5개 정도의 메시지가 겹겹이 있었다.


‘사진?’


미리보기에는 (사진) 이라고 글자만 간략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글자 이외에는, 해당 이미지가 축소판으로 로딩 되지 않았다. 전화 사용자인 연주가 아닌 다른 사람이 직접 보지 못하게, 연주 스스로가 그렇게 텍스트만 뜨도록 설정해 둔 것이었다. 연주는 액정 하단의 버튼을 눌러서, 화면 잠금을 풀었다.


액정의 화면이 열리고 곧바로 단체 채팅방의 창이 최대 크기로 떴다. 채팅창 제일 마지막 줄에는 청첩장 사진이 하나 올라와 있었다. 연주는 눈을 약간 크게 떴다. 지난 2년간, 그녀가 휴대 전화에서 만든 단체 채팅방은 총 4개였다. 전공하는 학과, 극단 [나선계단], 그리고 친가와 외가 채팅방이 그랬다.


청첩장이 도착한 채팅방은, 그 중에서도 친가 사람들이 모인 채팅방이었다.


‘누구지?’


연주는 어리둥절해서 사진 올린 사람의 이름을 확인했다. 아니, 그럴 필요도 없었다. 청첩장 이미지에 이미 작성자의 이름이 나타나 있었다.


[남서웨딩홀, 10월 19일 오후 2시.

신랑 : 강우현]


신랑은 그녀의 사촌 오빠인 우현이었다. 연주는 청첩장 이미지를 확인하고 피식 웃었다.


‘어우, 누가 이 썰렁한 인간을 데려간대?’


단체 채팅방에서는 결혼 소식을 알리고, 자세한 일정을 알려달라고 했던 말들이 몇 마디 오갔었다. 그리고 나서 청첩장 사진이 올라온 것이었다. 연주는 축하 메시지를 남기려고 휴대 전화의 자판을 누르려다가, 신부 이름을 확인하고 멈칫했다.


작가의말


 * 다음에는 11. 거래는 성사되었다 (1) : 피로 물든 밤 챕터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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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외전 [아스트라이아] 3 - (2) 19.11.23 29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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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외전 [아스트라이아] 1 - (2) 19.11.12 24 0 12쪽
46 외전 [아스트라이아] 1 - (1) 19.11.12 32 0 14쪽
45 외전 [아스트라이아] - 프롤로그 19.11.06 40 0 13쪽
44 에필로그 : 영원한 잠 19.08.07 84 1 25쪽
43 13. 체포된 삼신 [完] 19.08.07 100 0 48쪽
42 12. 거래는 성사되었다 (2) : 사라진 혼구슬 19.08.06 97 0 39쪽
41 11. 거래는 성사되었다 (1) : 피로 물든 밤 19.08.06 92 0 31쪽
» 10. 무대 위의 밤 (2) : 당신을 찾아서 - 4 19.08.05 101 0 27쪽
39 10. 무대 위의 밤 (2) : 당신을 찾아서 - 3 19.08.05 107 0 26쪽
38 10. 무대 위의 밤 (2) : 당신을 찾아서 - 2 19.07.30 87 0 19쪽
37 10. 무대 위의 밤 (2) : 당신을 찾아서 - 1 19.07.30 115 0 16쪽
36 9. 무대 위의 밤 (1) : 내가 기억하는 세상 (下) 19.07.18 103 0 22쪽
35 9. 무대 위의 밤 (1) : 내가 기억하는 세상 (上) 19.07.18 119 0 19쪽
34 8. 살아있는 이유 (2) : 세 번째 죽음 (下) 19.07.13 97 0 21쪽
33 8. 살아있는 이유 (2) : 세 번째 죽음 (上) 19.07.13 107 0 21쪽
32 7. 살아있는 이유 (1) : 어둠 속의 목소리 (下) 19.07.10 98 0 12쪽
31 7. 살아있는 이유 (1) : 어둠 속의 목소리 (上) 19.07.10 97 0 17쪽
30 6. 당신이 어떤 이름이라 해도 (2) : 델핀느의 이야기 (下) 19.07.09 106 0 19쪽
29 6. 당신이 어떤 이름이라 해도 (2) : 델핀느의 이야기 (上) 19.07.09 90 0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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