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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점  공모전참가작 체포된 삼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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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아.
작품등록일 :
2019.05.01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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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23 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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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거래는 성사되었다 (2) : 사라진 혼구슬

DUMMY

12. 거래는 성사되었다 (2) : 사라진 혼구슬



“오빠 언제 시간 돼?”


“응? 오늘은 퇴근하면 별일 없을 거야.”


“혹시, 오늘 그쪽으로 물건 하나 가져가도 되겠어?”


연주는 슬며시 핵심 단어들을 빼고 애매한 대명사를 집어넣어 돌려 말해 보았다. 그러자, 전화 너머에서는 몇 초간 짤막한 침묵이 흘렀다.


“뭘 가져오려고?”


이윽고 우현이 물었다. 연주는 전화 너머의 기척을 유심히 들어보다가 말했다.


“보면 알 거야.”


“싱겁기는. 단톡방에 따로 올린 건 봤지?”


“어.”


“혹시 그거 때문이라면 조심해서 가져와.”


“알았어.”


연주는 말을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는 돌연 독수리처럼 날카로운 눈빛을 띠었다.


“서둘러야겠어요.”


연주는 그 말만 하고 바로 하숙집을 나왔다. 그리고는 부모가 사는 본가에 가서 학교 졸업 앨범들을 모아놓은 책장을 찾았다. 다행히, 채연 중학교 시절의 졸업앨범은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었다. 그녀는 앨범을 가지고 극단으로 돌아왔다. 그 때, 단원들이 하나 둘 들어왔다. 그들은 연주를 발견하고 일제히 달려왔다.


“어, 감독님!”


“아라가 진범인 거 알아내는 장면 있잖아. 그거 그 때 앨범으로 하자고 했던가?”


“네!”


“이 정도 크기면 충분하겠지?”


연주는 빌로드 재질의 앨범 표지와 속지의 사진 배치도를 펼쳐서 보여주었다. 소품을 담당한 단원이 앨범 곳곳을 살펴보다가 말했다.


“예. 표지 규격은 이 정도로 따오고요, 앨범 속지 들어가는 두께는 조금 얇게 만들어볼게요.”


“알았어. 다 하고 나서 연출님께 컨펌 받아.”


소품 담당은 연주의 말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자를 대어 각각의 길이를 재고 메모했다. 연주는 소품 담당이 크기를 다 본 뜬 것을 확인하고는, 앨범을 다시 회수했다. 단원들이 저마다 작업하러 흩어지자, 그녀는 녹음실로 들어가서 앨범을 넘겨보았다.


95년에 졸업했을 무렵에는, 2학년 때 6반이었던 것과는 달리 각각 다른 반에 배치되었었다. 연주 자신은 3학년 4반에, 인진과 선민은 7반에, 나머지 패거리들은 8반, 12반 등 뒷반에 분산 배치된 바 있었다. 따라서, 7반 사진을 확인해야 했다. 연주는 오랜만에 앨범을 펼치고, 1반부터 졸업생들의 얼굴 사진들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1반부터 6반까지는 기억에 남는 얼굴들과 이름들이 일치했다. 7반에서도 인진과 선민의 이름, 얼굴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연주는 씁쓸한 기색으로 보다가, 뒷반의 사진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그러다가, 8반에서도 끝 번호에 배치되어 있던 학생들의 졸업사진을 보고 멈칫했다.


‘이럴 리가 없는데.’


8반에는 지원과 윤정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윤정의 사진 하단에는 그녀의 이름이 아니라, 윤인진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진짜 윤인진의 모습과 이름은 7반에 있었지만, 동명이인이 학교에 있었다는 자료를 이미 날조를 해 놓은 듯했다.


연주는 녹음실 앞 보조의자에 앉아있던 백작에게 다가와서, 앨범을 보여주었다. 백작은 기억을 더듬어, 놀이터에서 집단 폭행을 가했던 여학생들을 하나하나 짚어냈다. 그리고는 의아한 투로 말했다.


“그 주동자는 여기 7반에 있었고, 거기 합세했던 것 하나도 8반에 있던 거 같네. 그나저나 둘이 이름 같다는 얘긴 전혀 못 들어본 거 같은데? 항상 말하던 애는, 여기 7반 아니었어?”


연주는 녹음실 방음 상태를 확인하고 나서, 휴대 전화와 이어폰을 연결했다. 그리고는 그 이어폰을 귀에 꽂은 뒤에 대답했다.


“새삼스런 얘기지만, 돈이 좋긴 좋은가 봐요.”


“돈이라니?”


“윤인진 그거 그 동네에서 20년을 주름잡은 집안 딸이었다잖아요. 본인은 10년 넘게 얼굴 도장 찍었고, 주변에서 완전 떠받들었다고 하고요. 뭘로 공범 하나를 집안 통째로 매수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속임수까지 미리 협조를 구해서 깔아놓을 정도면 참.”


“나로선 그저 이해가 안 가는 얘기군. 그쪽에서, 왜 그랬다고 생각해?”


“이 정도로 빵빵한 집안은, 나중에 끼리끼리 결혼할 때도 호구조사 완전 세게 하거든요. 물론 결혼시키는 것 자체가 목적이니 상대 집안을 꼭 잡아야겠다 싶으면 범죄까지도 무슨 수를 써서든지 공식적으로는 덮어주기도 하죠. 겉으로는 덮어준다 해도, 나중에 약점이 될 수 있기는 하니까··· 아예 호구조사에 혼선을 주어 피해가려고 포석을 깔아놓은 거 같아요.”


“그럼 정황상, 사촌 오빠 되시는 분 약혼 상대가 그 여자 맞을 수도 있다는 거야?”


“삼촌 댁이 정말 잘 살긴 해요. 근데 그런 거 안 따져도 오빠는 여러 모로 괜찮은 사람이니까요. 누구든 사귀면 놓치고 싶진 않겠죠.”


연주는 거기까지 말하고, 말을 끝내겠다는 듯 이어폰을 빼냈다. 그것은, 녹음실 창문 밖에서 보기에, 핸즈프리로 통화를 막 끝낸 듯한 동작이었다. 그녀는 앨범을 가지고 나왔다. 그리고는 단원들에게 작별 인사를 마친 뒤, 극단 밖으로 나왔다. 백작은 연주를 따라나섰다.


연주는 우현이 일하는 회사 건물 앞에 도착했다. 우현은 퇴근하려고 로비에 나왔다가, 연주를 향해 곧장 달려왔다.


“가져왔어?”


“어.”


연주는 바로 대답했다. 우현은 긴장된 기색을 띠었다가 말했다.


“가자.”


우현은 건물 상가 지하에 있는 카페로 그녀를 안내했다. 그리고는, 가장 깊숙한 룸에 자리를 잡고 말했다.


“중요한 계약을 할 때 자주 오는 자리야. 그러니까, 이제 안심하고 말해.”


연주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바로 옆에서 나란히 반투명한 모습으로 앉아있던 백작은, 탁자 밑으로 손을 뻗어, 그녀의 한 손을 짚어주었다. 그녀는 손등에 희미하게나마 서늘한 느낌을 받았다.


‘알았어요. 힘 낼 게요.’


연주는 그렇게 다짐하고, 가방에서 앨범을 꺼내서 탁자에 놓았다. 그리고는 우현의 앞으로 살짝 밀어주었다.


“이거, 나 중학교 졸업앨범이야.”


우현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 또한, 94년도의 집단 폭행 사건을 기억하고 있었다.


“오빠하고 결혼한다는 사람 이름 보고, 혹시나 해서 가져와 봤어. 오빠는 얼굴 보면 여기 졸업생인지 아닌지, 바로 알 수 있을 테니까.”


“알았어. 바로 본다.”


우현은 앨범을 곧바로 펼쳤다. 그리고는 1반 졸업생들부터 꼼꼼하게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의 시선은 7반 졸업생들 페이지에서 멎었다. 그러나, 그는 7반에 있는 윤인진의 얼굴을 유심히 확인한 뒤, 계속해서 8반 졸업생들 페이지를 넘겨보았다. 그리고는, 8반에서 ‘윤인진’ 이라는 이름이 붙은 다른 사진을 발견하고는 눈을 날카롭게 빛냈다.


“혹시 그 때 주동했던 애가, 얘야?”


우현은 8반에 있는 졸업생의 사진을 가리키며 물었다. 연주는 당혹스러운 시선으로 우현을 보며,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때, 널 괴롭힌 것들 증거를 내가 정리해 주긴 했지만, 애들 얼굴을 직접 보지는 못해서.”


“오빠는 외부인이었으니까.”


“연주야.”


우현은 찻잔 손잡이를 잠시 잡았다 놓으며 말을 이었다.


“실은 지금 인진 씨하고 처음 사귀게 됐을 때 들은 얘기가 있었어.”


“무슨?”


“2학년 때 그 일 있는 건 봤는데, 이름이 같은 주동자가 너무 무서워서 말을 못했었다고 해.”


연주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띠었다. 그리고는 작게 ‘허!’ 하는 소리만 냈다. 3학년 8반 졸업생으로 기록된 ‘윤인진’ 은 실제로는 주동자 못지않게 가담했었던 홍윤정이었다.


‘도대체 무슨 조건을 내걸었길래, 평생 기록에 남을 이런 앨범에도 위조를 동의했던 걸까? 그리고 이걸 지금 어떻게 말해야 되나?’


우현은 연주의 반응을 살피다가 말했다.


“그리고, 네가 내 사촌인 것도 다 알아.”


“뭐?”


“사귄 지 좀 됐을 때, 인진 씨가 내 폰에서 네 사진을 봤거든. 그러다가 중학교 때 얘기 잠깐 나왔고, 잘 있냐고 물어보더라. 사실 인진 씨 소개받았을 때 이름 처음 듣고는 쎄했는데, 얘기 들어보면 볼수록- ”


“오빠.”


연주는 탁자 밑에 둔 한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가 폈다.


“이거 앨범, 잘못 나온 거야. 자세한 건 오빠 거래처에 따로 의뢰해서 알아봐. 내가 말하는 것보다는 더 믿음이 갈 거야.”


“그래? 그렇다면 알아볼게.”


“누구한테도 말하지 말고 해줘, 꼭.”


연주는 우현의 두 손을 꽉 잡고, 간절하게 부탁했다. 우현은 힘있게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두 사람은 카페를 나와서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다음날 오후에, 우현 쪽에서 전화를 먼저 걸어왔다.


“알아냈다.”


우현의 목소리는 다소 갈라져 있었다.


“그 당시 너네 중학교 앨범을 의뢰받은 곳은, 지금까지도 계속 운영하고 있어. 근데 그 때는 이사회 이름으로 특별 계약을 하고, 2중으로 제작을 했다고 하더라.”


“특별 계약?”


“10권은 따로 제작했고, 그 외에 공식 배포용으로는 네가 보여준 앨범을 만들었다고 해.”


“10권을 어디다 보냈는지는 모르고?”


“그것까지는 모르는 거 같아. 담당자가 그동안 세 번은 바뀌었는데, 예전 판매기록을 조회해서 나온 게 그 정도였다고 하니까. 그 사이에 뭔가 정리했다면, 여기서 더 알아낼 수 있는 건 없을 거야.”


“아니야.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알아낸 거, 확실히 정리했지?”


“당연하지. 그리고 조만간 단톡방에 소식 전한다.”


우현은 결의에 찬 어조로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며칠 뒤, 우현은 단체 채팅방에 소식을 올렸다.


[개인 사정으로 결혼을 잠시 미루게 되었습니다. 10월 결혼은 일단 없던 것으로 하고 잠정적으로 보류합니다.]



설화는 굳은 기색으로 혼구슬을 내려다보았다. 누군가는 사랑하는 이를 위해 자신의 남은 인생을 전부 걸었었다. 그리고, 어떤 누군가는 자신의 어줍잖은 위치를 이용해 주변 사람들이 스스로를 속이고 살도록 위협했던 듯했다.


혼구슬은, ‘강연주’로 살아가는 동안, 그런 극단적인 집단 틈에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었다. 그리고 15세의 어린 나이였을 때도, 사람들이 자신을 백안시하며 형식적으로 대하는 것 또한 개의치 않았다.


‘그건 전부 그 사내와 오라비, 그리고 유일하게 참되었던 선생 하나가 있어주었기 때문이겠지. 허나, 인생 전부를 이 아이에게 거는 게 아닌 이상··· 좋은 사람 몇몇만 가지고는 해결될 수 없었을 게야.’


설화는, 하얀 김이 서려 젖어드는 혼구슬의 표면을 부드럽게 닦아주었다. 혼구슬 안에서는 장면이 서서히 사그라지다가 투명하게 사라졌다.


“그래서, 네 사촌 오라비는 사실을 확인했던 게냐?”


설화는 혼구슬이 잠시 기운을 거두고 무념무상의 상태에 빠진 것을 확인한 뒤, 물음을 던졌다. 직접 장면을 보여주느라 기운을 쓰는 것보다는, 소리를 내는 것이 혼구슬에게는 더욱 편할 듯했기 때문이었다.


“일단, 앨범에서 본인이 아는 여자가 졸업생인 것도 바로 알았지만, 같은 이름이 또 있으니, 처음엔 그쪽을 주동자라고 믿고 싶어 했던 거 같았습니다.”


혼구슬은 다소 시니컬하게 대답했다. 그리고는 다른 말을 이어나갔다.


“근데 이중으로 앨범 제작을 한 것부터가 심상치 않았던 거죠. 결국 오빠는 소량 제작한 다른 앨범이, 동명이인으로 세상을 속이려 매수한 홍윤정 가족들한테 전달된 것까지 확인했습니다.”


“그 잘못된 이름이 붙은 아이의 진짜 이름이, 그 패거리였던 홍윤정이었느냐?”


“그렇습니다.”


혼구슬은 그렇게 대답하고 계속 말했다.


“전 그 윤인진이 오빠의 약혼녀인지 확인하려고 했는데, 오빠는 거기서 더 나아가 그 당시의 과학 선생님까지 찾아나섰습니다.”


“그 선생은 왜?”


“제 3학년 담임이셨으니, 앨범 일을 알고 계시니 않나 했다고 했습니다. 아무튼, 선생님 소식은 제가 수소문해서 알려줬는데, 오빠는 그 선생님을 만나고 와서 결혼을 무기한 보류하겠다고 집안에 알렸습니다.”


설화는 가만히 듣다가, 문득 소름이 우수수 돋는 것을 느꼈다. 불과 15세의 나이에도, 작은 관심 하나를 빼앗겼다는 질투심에 집단 폭력을 치밀하게 실행한 사람이 바로 윤인진이었다. 아마도 그 표적이 혼구슬 ‘강연주’ 가 아니었다면, 폭력 사실을 은폐할 시간 또한 충분히 벌고 지금보다 더 승승장구했을 듯도 했다.


‘그러나 이 아이도 생전에 그리 만만하지 않았지.’


증거물을 은폐할 틈도 없이, 곧바로 맞대응한 사람은 아마도 ‘강연주’ 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 법했다. 그런데, 또 다시 결혼 문제를 앞두고 마주치게 된다면 어떻게 나왔을까.


“갑자기 결혼을 미룬다면 여자가 그냥 있지는 않았겠구나. 그 여잔··· 네가 생각한 사람이 맞았느냐?”


순간, 혼구슬은 놀이터에 처음 왔을 때처럼 서서히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설화는 아차 싶었지만, 이미 한 발 늦었다. 혼구슬 안에서는 정제되지 않은 기억의 장면들이 두서없이 나타났다. 시간도, 공간도, 그리고 사람들의 소리도 제대로 잡히지 않는 혼란 그 자체였다.


핏빛 배경 속에서, 연주와 백작의 모습이 나타났다. 백작은 살아있는 자가 아니기에, 반투명한 모습으로 연주의 옆에 앉아있었다. 곧이어, 20대 후반의 한 여자가 들어와서 연주의 맞은편에 자리 잡았다. 여자의 얼굴에는, 94년도에 집단 폭행을 주도했던 인진의 모습이 남아있었다.


“남자 뒤에 숨어서 사람 뒤통수치는 건 여전하네? 그 땐 선생에, 지금은 오빠 뒤에서 이러면 뭐가 달라지니?”


인진은 연주를 향해 비꼬았다. 연주는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인진을 정면으로 쏘아보기만 했다.


“내가 아니라고 했잖아? 그리고 이미 없던 일로 했어. 뭐가 문젠데?”


“하! 네 머리에서만 없던 일이겠지.”


“너만 지난 일에 갇혀 사는 거야. 이 찌질하고 못난 년아.”


“내가 너한테 딱히 뭐라고 했던가? 그 때도 가만히 있는 나한테 지분거렸다가 제풀에 화가 나서 날뛴 건 바로 너와 네 시녀들이었을 텐데?”


인진은 앞에 놓인 물잔을 집어 들었다. 순간, 백작은 탁자 밑에 둔 손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차하면 허리에 찬 검을 뽑아들 기세로 경계 태세를 취했다. 하지만, 인진은 잔에 든 물을 단숨에 마셔버렸다.


“다 지난 일이야. 이렇게 다시 보는 것도 인연이고, 네가 걸고 넘어지지만 않았다면 이대로 가족이 되는 거잖아? 가족끼리 지난 일로 뭐라 하면 되겠어, 안 되겠어?”


“그거야 식장 들어가기 전엔 모르는 일 아닌가?”


“아 쫌! 야, 솔직히 애였을 때 뭘 알았겠어? 어른들은 사사건건 비교질 해대지, 줬다가 뺏는 게 얼마나 잔인한 일인데. 애들일 땐 좀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니야? 다 가진 네가 좀 봐주면 안 돼?”


“내가 뭘 다 가졌다는 거지? 그리고, 샘난다고 애들이 다 그러나?”


연주는 자신 앞에 놓인 물잔을 잡은 채 말을 이었다.


“거기다 이번 일은 내가 널 찾아가서 해대도 시원치 않을 판인데. 도대체 네가 무슨 염치로 날 찾아와서 이래?”


“연주야.”


인진은 느닷없이 연주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겹치려 했다. 연주는 물잔을 잡은 손을 얼른 뒤로 뺐다.


“나 우현 오빠 진짜 사랑해. 제발 오빠한테 그거 나 아니라고, 동명이인이라고 한 번만 말해줘. 좋게 좀 넘어가자, 응?”


한껏 애원하는 듯했지만, 인진의 두 눈에는 위협하는 빛이 감돌고 있었다. 설화는 붉은 핏빛 속에서 시퍼렇게 빛나는 눈을 들여다 보며, 새삼 알록달록한 뱀 같다고 느꼈다. 전신은 아름답지만 독기가 가득한 눈동자가 커다랗게 남아있는 모습은 심히 이질적이었다.


“이미 이 일은 내 손 떠났어. 할 말 다 했으면 난 이만.”


연주는 싸늘하게 말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는 탁자를 지나 입구로 빠르게 걸어나갔다. 그러나, 두 사람은 거리에서 다시 맞닥뜨리게 되었다. 연주가 극단으로 가는 길에, 인진이 차를 타고 집요하게 따라와 낚아챘다.


두 여자는 한강대교 중간에서 내렸다. 아니, 조수석에서 벨트로 묶여있던 연주가 안간힘을 다해 빠져 나온 것이었다. 허공에서 백작이 반투명한 모습으로 뜬 채 그들을 따라왔다. 그 사이, 연주와 인진은 난간 바로 옆의 인도에서 맞붙었다.


“처음부터 너만 나타나면 내 인생이 꼬였어! 절대로 이렇게 가게 못 둬!”


인진은 연주를 난간으로 바짝 밀어붙였다. 백작은 허공에서 인도 위로 뛰어내려 착지했다가, 그들의 모습을 보고 눈이 완전히 뒤집혀버렸다. 그는 곧장 달려들어서 인진에게 손을 대려다가, 안 되는 것을 알고는 연주의 몸 속으로 뛰어들었다.


연주의 몸을 빌린 백작은, 낯선 영혼에 감응하려고 덜덜 떨리는 두 팔에 힘을 바짝 준 뒤, 순식간에 인진의 상반신을 엎어 치다시피 했다. 인진은 예상치 못한 우악스러운 힘에 몸이 홱 돌아가서는, 난간에 허리가 걸쳐진 채 뒤로 꺾이기 일보직전의 상태가 되었다. 백작은 그렇게 인진을 제압했다가, 그녀의 목을 조르려 했다.


그러나, 연주의 몸 안에 있던 본래의 영혼이 반응했다. 연주는 인진을 옆으로 세게 밀치고는, 인도를 줄달음질쳐서 벗어나려 했다. 난간에 부딪치며 차도 앞까지 뒹굴었던 인진은, 길목에 세워놓았던 차에서 신문지 뭉치를 꺼내들어 그 안의 식칼을 확인했다.


인진은 차에 타서 연주의 바로 옆 차선으로 내달렸다. 가는 동안 휴대 전화로 어딘가에 메시지를 여러 번 보냈다. 그리고, 보낸 메시지에서 그 내용들을 모조리 지웠다. 이내 따라잡아 몇 미터 정도 앞선 뒤, 다리 초입에서 차를 세웠다. 버스 정류장에서 지하철 출입구 쪽으로 막 꺾어지려던 연주는, 인진을 발견하고 아연실색했다.


그 때, 연주의 주변에 있던 가로등과 신호등이 하나 둘씩 꺼지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일정한 간격별로 설치되어 있던 과속 방지 카메라의 전원도 몇 개 꺼지고 말았다. 두 여자는 치열하게 몸싸움을 하던 끝에, 갓길에서도 후미진 수풀까지 들어갔다. 인진이 휘두른 식칼은 연주의 배와 옆구리에 여러 번 꽂혔다.


인진은 차를 운전해서 연주의 몸 위로 몇 번 오갔다. 그리고 차의 부품과 연주의 상처가 들어맞게 몇 가지 손질을 했다. 그 이후, 혼구슬에서는 더 이상 아무 장면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것이 혼구슬 ‘강연주’ 로서의 마지막 기억인 듯했다.


“대답해 주십시오.”


혼구슬은 핏빛 광택을 내뿜으며 처절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이제, 전 어디로 가게 되어있었습니까? 다음 생에서는 백작님과 같은 존재로 볼 수는 있는 겁니까? 그분은 저 때문에 이승 질서를 여러 번 해친 죄로 잡혀가서, 못 보게 됐습니다!”


“얘야!”


“그리고 여긴 처음부터 낯설지 않았습니다. 아니, 이 나라가 너무도 싫었습니다!”


혼구슬의 표면에 김이 서리다가 이슬이 군데군데 맺혔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사람이 땀과 눈물로 범벅되는 모습만 같았다. 설화는 버럭 외쳤다.


“그만! 그만해라!”


혼구슬의 불그스레한 빛이 다소 누그러졌다. 설화는 이를 보다가 말했다.


“네가 여기서 할 일이 남았기에 그리 정해진 것을, 어찌할 수가 없다!”


“이 나라가 저한테 뭘 바란단 말씀입니까? 또 참으라고요? 아님 잊으라고요?”


“그걸 누가 알겠느냐? 왜 시작도 해보지 않고 단정짓는 게냐?”


“삼신님!”


혼구슬은 울분이 가득한 어조로 외쳤다. 그리고는 섬뜩하게 깔린 어조로 계속 말했다.


“뭐든, 바뀌려면 다 같이 바뀌어야 합니다.”


설화는 혼구슬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오른손으로 살짝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조가비 받침대와 혼구슬 사이에 끼인 인끈에 손가락을 슬쩍 갖다 대었다. 그곳에는 혼구슬을 보내야 할 곳과, 그곳에서의 예정된 삶이 큰 줄기로 간단하게 안배되어 있었다.


구슬 안에서는 기묘한 장면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30대의 젊은 남자가 요람 위에 있는 갓난아기를 내려다보며, 부드럽게 웃어주고 있었다. 설화는 그 남자가, 혼구슬의 가장 최근 인생인 연주의 삶에서 유일하게 그녀 편에 섰던 인간인 우현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래, 이 남자였어.’


가족으로서, 오라비로서 연주를 진심으로 아꼈고, 결혼이라는 중요한 순간을 앞두고도 어느 한 곳에 치우침이 없었던 공평한 남자. 그가 혼구슬의 새로운 아비가 된다면 좋은 것인가. 우현은 애정이 듬뿍 담긴 손짓으로 갓 태어난 딸의 볼을 톡톡 두드려 주다가, 지레 움찔하기도 했다. 만지면 날아갈까, 불면 꺼질까.


어린 딸이 아무렇지도 않게 방긋방긋 배냇짓을 하며 웃는 것을 확인한 뒤, 우현은 두 손으로 아기의 옆구리를 살살 잡고 번쩍 안아 올렸다.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환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번졌다.


문득, 시간이 빠르게 지났다. 어느덧 20대 초반으로 성장한 흑발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자의 모습은 네 번째 인생을 살았던 연주라기보다는, 18세기를 살았던 클라우디아와 제노비아를 섞어놓은 제 3의 인물에 가까웠다. 그러면서도, 우현의 외모를 다소 이어받은 듯, 작고도 오똑한 코가 얼굴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흑발 여자는 도서관에서 중세 역사 자료와 언어학 자료를 찾다가, 한 스터디카페로 갔다. 카페에서는 흑갈색 머리에 옅푸른 눈동자를 한 20대 후반의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순간, 설화는 구슬 속 장면에 나타난 그 남자의 얼굴이 낯설지 않다는 것을 알고 흠칫했다.


‘아비만 전생에서 이어진 연이 아니라, 다른 인연도 있었나?’


20대 후반의 그 남자는 대한민국 사람이 아닌 듯했다. 그리고, 그 테이블에 조금씩 모여드는 사람들은, 흑발 여자와 같은 대한민국 학생들이었다. 분위기를 보아서는, 외국어 관련된 외부 모임인 듯했다. 20대 후반의 남자는, 흑발 여자가 나타나자 바로 반색했다.


‘설마, 그 두 번째 중도의 인생에서 잠깐 보았다는 남자?’


남자는 바로, 피렌체에서 클라우디아를 사모했다고 했던, 프랑스 귀족 랑탱의 현신이었다. 그는 자신이 실제로 대면하고 소통했었던 영혼인 제노비아의 영혼을 따라, 300여년 만에 대한민국 땅에 온 듯했다.


‘그 때, 이 남자는 육체의 본 주인이었던 여아를 흠모했다고 했지만.’


설화는 장면에 나타난 남자의 과거를 슬쩍 읽어보았다. 1783년에 랑탱은 클라우디아의 화형을 지켜본 뒤, 그녀의 유해 일부를 가지고 자신의 영지로 쓸쓸하게 돌아갔었다. 그리고 누이가 주선한 다른 여자와 정략 결혼을 했었지만, 슬하에 자식 없이 병으로 요절했었다.


그 이후, 랑탱은 베네치아에 환생했었고, 이탈리아 통일 운동을 끝까지 지켜보았었다. 그의 다음 인생이 이탈리아에서 이어졌던 것은, 피렌체의 귀족이었던 클라우디아를 향한 마음 때문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었었다. 그는 여느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전생을 기억하지는 못했다. 매사에 정직한 성품은 전생과 크게 다르지 않게 한결 같았다.


1861년에 토리노에서 의회가 소집되자 그는 대의원으로서 참석했고,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를 국왕으로 공인하는 안건에 찬성표를 던졌다. 사랑했던 여인의 나라에 다시 태어났었고, 그 나라가 하나로 통합되도록 길을 닦았지만, 정작 여인과 관련된 삶에서는 지극히 고독했던 영혼이었다.


‘기묘하군.’


클라우디아의 본체였을 여인의 흔적은, 이탈리아에서 줄곧 살았을 그의 인생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아마도, 클라우디아의 본체가 랑탱의 존재 자체에 별 의미를 두지 않은 채 먼저 죽음을 맞이해서인 듯했다. 1900년대 이후에는 그의 흔적이 아예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비로소 2000년대 이후에서야 동양에서 외국인 강사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 아이가 찾는 사내는 다음에 있을까?’


설화는 혼구슬을 잠시 안타깝게 바라보았다가, 다시 인끈을 자극해 투시를 계속해보았다. 혼구슬은 잠시 의식을 잃은 듯 조용히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는 다음 장면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랑탱의 환생인 20대 후반의 남자는, 혼구슬의 다섯 번째 환생으로 예정된 흑발 여자를 학생이자 이성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한 일은, 2000년대 초반의 대한민국에서도 그렇게 드문 일은 아니었다. 학교나 학원마다 외국어 강좌가 있었기에, 각 나라에서 원어민 강사들을 초빙하는 일은 오히려 흔했다.


‘이 아이가 중도의 인생에서 그 피렌체 아가씨의 몸을 잠깐 썼을 때는, 이 남자 지식하고 인품에 어느 정도 호감이 있기는 했었지. 물론 이 아이는 그저 지나가는 사람한테 길 물어본 정도로 생각했을 거고, 잠깐의 좋은 감정이라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겠지만.’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았던 사제지간이었던 그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 혼구슬이 애타게 찾았던 백작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설화는 두 사람이 남자의 본국인 나라로 출국하기 위해 공항에 나서는 모습까지 보다가, 투시를 그만두었다.


‘일반적인 인간들이 보기에는 이것도 그리 나쁜 인생은 아닐 것 같지만, 이건 그런 인간들 인생이 아니라··· 이 아이의 인생이 아닌가?’


두 사람만으로 알아갔다면, 분명 랑탱과 제노비아의 영혼도 나쁜 관계는 아니었을 듯했다. 두 사람을 마음으로 연결시킨 것은 세상을 알아가는 안목과 학문이었다. 그런 그들의 기억은, 300년이 지난 끝에, 남녀가 모두 자유롭게 교육받을 수 있는 시대에서 다시 만날 인연으로 완성될 예정이었던 듯했다.


‘그러나, 이대로라면··· 이 아이가 지금까지 몇백 년을 살아온 이유, 그리고 그 의미는 영원히 사라지겠지.’


설화는 투시를 마치고 다시 인끈에서 손을 떼어, 혼구슬의 의식을 회복시켰다. 혼구슬 또한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준 설화를 신뢰한 듯, 그녀의 손길에 굳이 거부반응을 보이지는 않은 듯했다.


“하나만 묻자.”


설화는 생각 끝에 화제를 돌렸다.


“너, 다시 태어나면 어떻게 살고 싶으냐?”


“다시 태어나면요?”


혼구슬의 어조가 어딘지 모르게 솔깃한 느낌을 띠었다. 설화는 애써 웃으려고 하며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러나, 혼구슬에게 그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 의식하고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래.”


혼구슬 표면에는 무지개가 서린 투명한 광택이 한동안 감돌았다. 그것은 최대한 희망적인 감정을 끌어올리는 조짐이었다. 설화는 붉어진 자신의 눈시울로 손을 가져갔다.


“결코 남에게 단 한 번도 속아 넘어가거나 당하는 일이 없고, 단 한 번에 내가 원하는 사람과 인연을 맺을 수 있는 사람.”


아마도, 백작을 그렇게 만나고 싶었으리라. 설화는 착 가라앉은 어조로 물었다.


“그리고?”


“언제나 노력한 만큼 보답을 받는 사람.”


혼구슬은 그 말 끝에, 극단 [나선계단]에서의 일을 잠시 언급했다.


“네가 여기서 태어난다면.”


“네?”


“하나 좋은 점이 있을 것 같다.”


“그게 무엇입니까?”


“내가 아까 했던 말, 기억하느냐?”


“어떤 말씀이요?”


“지금껏 살면서 못 받았던 부모 사랑, 이번에 만날 아비에게 다 받을 거라는 거 말이다.”


“그래서요?”


“이번에 네 아비가 될 사람은, 너도 잘 아는 사람이다.”


“누굴 말씀하십니까?”


“이쯤 말했으면, 넌 알 거 같은데.”


혼구슬의 표면에서 유백색 광택이 감돌았다.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하는 듯, 무지갯빛 아지랑이가 소용돌이처럼 맴돌기도 했다. 이윽고 그 아지랑이의 움직임은 멈추었다.


“그럼, 제 어머니가 될 사람이 누군지도 봐주시겠습니까?”


혼구슬의 목소리에서, 문득 냉철하게 탐색하는 듯한 어조가 나타났다. 설화는 잠시 생각했다가 대답했다.


“그거야 뭐 어려울 게 있겠느냐? 내가 어떻게 하는지는 너도 잘 알지 않느냐?”


“감사합니다.”


혼구슬은 딱딱한 어조로 대답했다. 설화는 일말의 불안을 감지했지만, 이내 떨쳐버리려 했다. 혼구슬이 ‘강연주’ 로서 생을 마감한 지는 이미 3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우현이 생전의 연주를 진심으로 아꼈다면, 그의 아내이자 혼구슬의 어미가 될 사람은 보다 신중하게 선택했을 듯했다.


‘솔직히 그런 악연은··· 나도 이어주고 싶지 않다.’


그 사이에 뭔가 달라져 있기를. 설화는 속으로 그렇게 기원하며,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혼구슬에 각인되어 있는 대로, 10층에 있는 우현의 집에 도착했다. 우현의 안방 침실에서는 남녀의 그림자가 뒤엉켜 있었다.


침대 머리맡 양쪽에서 무드등이 은은하게 침실을 밝힌 가운데, 우현은 한 여자의 위에서 부드럽게 오르내리며 자신의 것을 그녀에게 밀어넣고 있었다. 설화는 침대 오른쪽 옆까지 바짝 다가가 보았다. 우현의 밑에서 그를 받아들이는 여자의 얼굴부터 확인해야 했다. 그러나, 그 확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누굽니까?”


혼구슬이 물었다. 하지만 설화는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에 다른 말을 꺼냈다.


“얘야, 윤회가 어떤 것인지 아느냐?”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 그년이군요!”


혼구슬에서는 순식간에 붉은 오라가 감돌았다.


“사내가 여인을 원하는 마음은, 때로는 잘잘못하고 별개일 수 있지 않느냐?”


“아니요, 이건 시비를 끝까지 가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지나도 특별한 걸 발견할 수 없거나 증명을 못한다면, 더는 파고들지 못하고 기존 결정을 따라가기 때문이겠지요!”


설화는 우현의 모습을 유심히 보았다. 분명 그와 아내인 여자의 교합은 처음이 아닌 듯했다. 하지만 우현의 마음 한 자락에는, 이미 죽은 연주의 존재와, 풀리지 않은 의문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아내에게 자신을 밀어넣고는 있었지만, 별다른 애무는 없다시피 했다.


“네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다만, 니 오라비의 최종 선택은 그 여자였다. 이렇게 된 바에, 다른 방법으로 업보를 푸는 건 어떻겠느냐?”


“설마, 절더러 저 사악한 년 몸에 들어가라는 겁니까?”


“너 살던 시대에서, 전생에 무슨 원수가 졌길래. 라고 하는 말은 들어봤겠지?”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만, 그런 방법은 제 쪽에서 사양합니다! 그럼 저 다음 인생에서 저는 세상 최악으로 어머니에게 불효한 딸이 될 거고, 저년은 패악부리는 딸에게도 무조건 헌신하는 불쌍한 어머니로 포장되겠죠! 저한테 한 짓을 죄목으로 콕 집어 마땅한 벌을 받는 게 아니라! 저승에서는 여태까지 이런 식으로 인간들 사이의 문제를 땜빵했습니까?”


혼구슬은 거의 절규하다시피 했다. 설화는 혼구슬의 절규를 들으며, 처음으로 자신에게 죽음을 내렸던 왕비와 병사들의 말로를 떠올려보았다. 왕비는 태자의 앞길에 이의를 제기할 만한 존재들을 모두 걸러낸 뒤, 나이 든 왕이 승하하자마자 어린 태자를 즉위시켰었다. 그리고 섭정 태후로서 신라에서 몇 년 동안 군림했었다.


섭정 태후가 통치하는 동안, 젊은 국왕은 세상을 등진 채 궁에서 세월을 무상하게 보냈다. 젊은 국왕이 아무 것도 모르고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나라에는 지진과 장마가 끊이지 않았다. 태자 시절의 의혹은 계속 꼬리표처럼 따라다녔고, 세간에서는 하늘의 섭리를 어기고 음양을 억지로 뒤바꾼 끝에, 노여움을 사서 나라에 재해가 끊이지 않는다는 괴담이 돌았다.


그러나, 그 와중에 무고하게 희생된 이들은, 그 시대를 살았던 민간인들뿐이었다고 했다. 섭정 태후로서는 평생의 숙원이던 왕비이자 태후로서 왕실 최고의 여성으로 살았기에, 여한은 없었을 것이었다. 그녀는 아들의 죽음을 알지 못한 채 저승으로 갔다고 했다.


‘왕비 전하를 그리 몰아간 신료들은, 당파를 바꿔가며 여전히 살아있었다고 했다.’


만약, 이대로 혼구슬을 우현과 인진 사이의 딸로 환생시킨다면 어떨 것인가. 우현과 혼구슬의 관계는 좋을지 몰라도, 인진의 죄악은 어설프게 묻힐 지도 모를 일이었다. 오히려, 환생한 혼구슬에게는 기존의 억울한 희생이 무시되고 새로운 오명이 덧씌워질 수도 있을 듯했다.


‘벌 받아야 할 것들을, 왜 저승에서는 형벌의 도구로 쓰며 수명을 연장시키는가?’


처음으로 회의가 들었다. 돌이켜보면, 저승을 처음 세우고 영원 속에서 통치하는 대별왕조차도, 자신의 자리를 노렸던 소별왕을 크게 벌하지 않았다고 했다. 소별왕이 그토록 원하는 저승을 얻지 못하고, 이승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벌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관대한 저승왕이라는 명성을 얻었을지언정, 이승은 언제나 풍파로 가득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느냐? 나 또한 내 일을 하게 된 것일 뿐.”


설화는 침통한 어조로 응수했다. 그러자, 혼구슬의 붉은 오라가 점차 옅어졌다. 이윽고 영롱한 유백색 광택을 회복했다. 무언가 마음을 정리하고 결심을 굳힌 듯했다.


“그렇겠지요. 그럼 이대로 보내주십시오.”


“보내라니?”


“당신은 당신이 할 일을 그대로 하게 될 뿐, 그 다음은 당신 책임이 아닙니다.”


“어쩔 작정이냐?”


“저 여자가 걸고 있는 최고의 가치를 손에 넣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리고 그걸 더 단단히 하려고 마지막 손을 쓰게 될 순간, 내 손으로 저 여자를 완전히 무너뜨릴 겁니다. 바로··· 내 목숨만으로요.”


“뭐라고?”


“삼신이신 당신께선, 저 여자가 달이 차면 해산을 시키겠지요. 허나, 전혀 그러실 필요 없다는 말입니다.”


“어째서?”


“애초에 당신과 여러 삼신들께서 태중의 아이들 모두를 다 지켜줄 수도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삼신이 모르는 사이에 사장되는 생명도 세상엔 많습니다. 그러니,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나도 모른 척 하시란 말입니다.”


설화는 우현과 인진의 교합을 지켜보며, 고민에 빠졌다. 혼구슬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결정할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이미 인진의 몸에서는 정자와 난자가 수정이 끝나서, 태아의 몸이 제육화 되고 있었다. 혼구슬을 들여보내지 않는다면, 더는 진행되지 않고 끝날 것이었다.


결국, 설화는 조가비 받침대에서 혼구슬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인진의 몸을 향해 띄워 보냈다. 혼구슬은 모체에 감응하여, 모체인 인진의 두 다리 사이로 향했다.


“살아갈 이유가 없는 생명을 멋대로 뿌리는 것도 횡포요, 살고자 하는 자를 억지로 거두어가는 것도 횡포입니다. 부디 기억해 주십시오.”



2013년 9월 17일.


인진은 거실에서 통화를 마치고 수화기를 막 내려놓았다. 그러는 그녀의 얼굴에는 짜증스러운 빛이 역력했다.


‘씨팔. 잊을 만하면 그 얘기야. 거기다가 이번에 가면 또 뭐라고 하려고?’


어느덧 ‘그 일’ 이 있은 지도 4년이 지나고 있었다. 그 일이 일어났을 무렵에는, 인진이 그 자리에 있었다는 이유로 경찰서에도 몇 번 드나들었었다. 그리고 더 이상의 경찰 진술을 하지 않게 되고도 1년이 지난 뒤에야, 우현의 집안에서는 인진에 대한 의구심을 더는 표면적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같이 사는 우현의 눈빛은 달랐다. 우현이 1994년도 그 당시에 직접 관여하기도 했던 사건이기에, 그는 결혼을 하고도 냉정을 여전히 잃지 않은 듯했다. 인진은 이를 악물고 다짐했다.


‘빨리 애라도 낳아서 이 집에 말뚝을 박아야지 원.’


얼마 전부터, 있어야 할 것이 몇 달간 끊어졌었다. 그러나, 그 기간 중 우현과의 잠자리는 매우 뜸했다. 잠자리가 아니더라도, 인진은 주기가 불규칙한 몸이었다.


‘이거 빨리 가서 문제부터 해결해야겠다.’


인진은 산부인과로 향했다. 우현의 회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종합병원에 있는 곳이었다. 산부인과 의사는 인진을 진찰했다가 바로 진단을 내렸다.


“임신 12주 되셨습니다.”


“그럼··· 치료가 필요없는 건가요?”


“현재로선 그렇습니다. 주수를 채워서 출산을 한 연후에 다시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소식을 들은 우현의 표정은 미묘했다. 아직 인진에 대한 판단을 완전히 내리지는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혈육이 생긴 것이 싫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대로 가도 좋을 지에 대한 확신은 덜했다.


혼구슬은 인진의 몸 속에서 촉각을 곤두세웠다. 가끔씩 밖에서 우현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면,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을 느끼곤 했다. 그리고 몸 안에 있는 자신을 핑계로 인진이 이리저리 내뺄 때는, 탯줄을 당기고 심하게 걷어차며 그녀를 사정없이 괴롭혔다. 그리고, 그렇게 꼬박 자궁 속에서 5개월을 채웠다.


인진은 어느덧 안정기에 접어들어 봉긋해진 배를 쓰다듬었다. 이제는 우현을 자신의 것으로 완전히 해두었고, 누구도 갈라놓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에 가득한 손짓이었다. 문득, 그녀의 생각은, 뺑소니 사고로 죽은 것으로 간주된 연주의 존재에 미쳤다. 그녀는 우현이 출근하러 나간 이후, 오랜만에 장롱을 열어 비밀 장소를 뒤졌다.


장롱 바닥마다 이중 판을 덧댄 은신처에는, 그동안의 은밀한 물건들이 감춰져 있었다. 얼결에 자신의 폭력 사실을 증언했던 공범 홍윤정에게 받았던 각서, 그리고 가공의 동명이인을 만들려고 앨범 이중 조작을 하는데 따른 제작소와의 특별 계약서들, 자신의 범행 상황이 녹음되어 있던 죽은 연주의 휴대폰, 그리고 연주를 죽이는 일에 썼던 식칼 등이 그런 것들이었다. 이제는 완전히 치워버려도 좋을 듯했다.


혼구슬은 자궁 속에서 꿈틀대는 탯줄을 통해, 인진의 감정과 내면의 소리를 빠짐없이 받아들였다. 이제는 인진이 움직이는 소리만으로도, 무엇을 열고 무엇을 꺼냈는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출근한지 이제 5분.’


우현이 나간 시간은 대강 그 정도 지나 있었다. 다시 돌아올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었다. 자궁 밖에서는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인진이 모든 증거물들을 다 꺼내놓은 듯했다. 혼구슬은 있는 힘껏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모체가 뒤틀리며 엎어지는 진동을 느낄 수 있었다.


핏방울에 실려서 몸 밖으로 나왔다. 혼백이 흩어지는 느낌과 함께, 마지막으로 인진의 모습이 혼구슬의 시야에 들어왔다. 인진은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그리고 주변 물건들은 한껏 늘어놓은 채였다.


‘안녕.’


인간의 일은, 인간의 법에 맡길 수 있게, 모든 준비를 끝냈다는 상념이 밀려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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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11. 거래는 성사되었다 (1) : 피로 물든 밤 19.08.06 89 0 31쪽
40 10. 무대 위의 밤 (2) : 당신을 찾아서 - 4 19.08.05 93 0 27쪽
39 10. 무대 위의 밤 (2) : 당신을 찾아서 - 3 19.08.05 99 0 26쪽
38 10. 무대 위의 밤 (2) : 당신을 찾아서 - 2 19.07.30 82 0 19쪽
37 10. 무대 위의 밤 (2) : 당신을 찾아서 - 1 19.07.30 102 0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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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8. 살아있는 이유 (2) : 세 번째 죽음 (上) 19.07.13 105 0 21쪽
32 7. 살아있는 이유 (1) : 어둠 속의 목소리 (下) 19.07.10 97 0 12쪽
31 7. 살아있는 이유 (1) : 어둠 속의 목소리 (上) 19.07.10 95 0 17쪽
30 6. 당신이 어떤 이름이라 해도 (2) : 델핀느의 이야기 (下) 19.07.09 99 0 19쪽
29 6. 당신이 어떤 이름이라 해도 (2) : 델핀느의 이야기 (上) 19.07.09 88 0 16쪽
28 6. 당신이 어떤 이름이라 해도 (1) : 앙투안의 이야기 (下) 19.07.06 94 0 14쪽
27 6. 당신이 어떤 이름이라 해도 (1) : 앙투안의 이야기 (上) 19.07.06 84 0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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