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양왕 단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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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데나]
작품등록일 :
2019.05.04 0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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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20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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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27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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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모가들 (2)

DUMMY

짐을 허리가 휘어지도록 진 말들 옆에서 야인 몰이꾼들이 터벅터벅 걸었다. 주변에 인적은 어느덧 뜸해졌는데 서쪽 지평선 너머로 해가 저물기 시작했다. 우두머리가 텁석부리를 돌아보며 말했다.


“오늘은 여기서 쉬어 간다. 머물 만한 곳을 찾아보게.”


우두머리의 말을 들은 텁석부리가 말을 몰아 멀어져갔다. 하늘을 보건데 비를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여서 다행이었다. 마실 물 정도만 가까이 있고 들짐승들이나 재물을 노릴 도적을 피할 수 있으면 다행이었다. 최형욱은 야인 상인들의 움직임을 말없이 노려보고 있었다. 옆에 서 있던 복동은 연신 투덜거렸다.


“제에기 이젠 풍찬노숙을 할 형편이네.”


“조용히, 입 다물고 있게······.”

그 말에 복동은 입을 꾹 다물었다. 석양빛을 받은 최형욱의 표정은 섬뜩하기 이를 데 없었으며 그는 이를 뿌득뿌득 갈고 있었다. 소름이 쫙 끼친 복동이 어물거렸다.


“미안하우, 난, 그저 이자들을 한정없이 따라 가야 한다는 생각에 그만······.”


“그럴 일 없을 게야.”


엉뚱한 소리에 복동은 최형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자가 무슨 말을 하는 거람. 그렇지만 그의 표정을 보건데 굳이 물어볼 일은 아니다 싶었다. 형욱은 말없이 말을 몰아갔다. 한동안 기다리고 있으려니 앞서 갔던 텁석부리가 말을 몰고 되돌아왔다. 얼마 되지 않아 일동에게는 야영 장소로 움직인다는 명령이 내렸다. 하루 동안 발바닥이 시큰해질 정도로 걸었기에 몰이꾼들은 그 말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최형욱과 엄복동이도 그 뒤를 따라갔다.


나름대로 야영에는 이골이 난 텁석부리는 제법 장소를 그럴듯하게 골랐다. 벌레도 별로 없이 쾌적한 곳이었고, 무엇보다 주변에 그들에게 눈독 들일 만한 자들이 쉽사리 접근하기도 어려워 보였다. 최형욱은 그것을 눈여겨 보았다. 그들 일행을 제외하고는 주위에 쓸데 없는 잡인은 아무도 없었다. 적당한 곳에 띄엄띄엄 앉은 야인들은 이내 준비한 건량을 씹고 마유주를 돌려 마시면서 나직한 목소리로 잡담들을 나누기 시작했다. 최형욱은 벌떡 일어났다.


“자네는 예 있게. 가만 있으란 말야. 알겠어?”


“에? 아니······.”


엄복동이 어물거리는데 최형욱이 싸늘한 눈초리로 잘라 말했다.


“만포진에서 이미 말했던 것으로 아는데······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게.”


그 서슬에 엄복동은 입을 다물었다. 내심으로는 불만이 있긴 했다. 빌어먹을 내가 그래도 함길도 관아에서 관가밥을 먹은 사람인데······. 하지만 최형욱의 눈빛 앞에서는 오금이 저렸다. 겨우 엄복동이 대답했다.


“알겠소.”


엄복동의 말을 흘리며 최형욱은 물미장 지팡이를 짚고서 어둠 속으로 스러져갔다. 한편, 우두머리는 쥐 상호와 텁석부리와 함께 화톳불가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텁석부리가 주위를 둘러보며 투덜거렸다.


“여기는 인적이 없어도 너무 없습니다.”


“왜, 자네가 고른 야영지 아닌가.”


취기가 얼근하게 오른 우두머리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 말을 자신에 대한 핀잔으로 받아들인 텁석부리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그런 게 아니고······ 길 자체가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다는 말씀이오이다.”


“그렇겠지. 이번에 우리가 간 곳은 다른 놈들이 잘 안 다녔던 곳이란말야······ 내 일전에 보아두었지.”


“그래도 너무 아무도 없는 곳이 아닙니까? 이런 곳에서는 누가 도움을 줄 수도 없고······.”


텁석부리는 그렇게 말하다가 돌연 입을 다물고 눈살을 찌푸렸다. 우두머리와 쥐 상호 사내가 의아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방금 못들으셨습니까?”


“무슨 소리를······.”


텁석부리는 대답 없이 왼손에는 횃불을 거머쥐고는 벌떡 일어났다. 오른손으로는 가죽 혁대에 찬 칼자루를 움켜쥐고 있었다. 놀란 우두머리가 더듬거렸다.


“자네, 도대체······.”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바람 가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텁석부리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횃불을 떨어뜨린 그의 두 손이 목에 박힌 비수 쪽으로 올라갔으나 텁석부리는 이내 숨이 막혀왔다. 울컥울컥 밀려오는 핏덩이에 숨이 막힌 그는 컥컥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대로 고꾸라졌다. 술을 마시고 있던 나머지 두 사람은 갑작스러운 동료의 죽음에 놀라 뒤로 엉덩걸음을 했다. 쥐 상호 사내가 말을 더듬었다.


“이, 이, 이, 이게 무슨······.”


“꼼짝 말어.”


최형욱이 써늘하게 말하는 것과 동시에 창포검을 그대로 우두머리의 목에 들이댔다. 그의 목에서 핏방울이 가늘게 맺혔다. 간이 떨어질 것처럼 놀란 우두머리의 두 눈이 툭 불거졌다.


“네, 네, 네놈이······.”


“그 입도 다물고.”


창포검 끄트머리가 목젖을 그대로 꿰뚫을 기세로 다가들자 우두머리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최형욱이 씩 웃었다. 그의 고개가 옆쪽으로 홱 돌아갔다.


“네놈도 마찬가지야.”


쥐 상호 사내는 얼굴이 시퍼래져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최형욱의 다른 손에 방금 텁석부리를 쓰러뜨린 것과 같은 비도가 쥐여져 있음을 본 것이다. 우두머리 쪽을 돌아본 최형욱이 얼음장 같은 눈길을 그에게 던졌다.


“여기서 너를 도와 주러 올 녀석은 이제 없다.”


그 말에 우두머리는 등골의 터럭이 쭈뼛 서는 듯했다.


“그리고 네놈이 조선말을 익히 한다는 것도 알고 있고. 그런가?”


우두머리는 그저 고개만 끄덕거렸다. 목젖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운 쇠붙이의 느낌이 쌔했다. 최형욱은 다시금 씩 웃더니 우두머리의 목젖을 겨눈 창포검을 약간 뒤로 뺐다.


“지금부터 내 질문에 답해라. 그렇지 않으면 이것이야. 알겠나?”


“알······ 알겠다.”


“네놈들 짐에는 쇠붙이가 있지. 그러하냐?”


“쇠, 쇠붙이라고······?”


우두머리가 말을 더듬는 것과 동시에 창포검이 슬쩍 그의 목젖을 압박해왔다. 소스라치게 놀란 우두머리가 컥 하는 소리를 냈다. 최형욱이 차갑게 말했다.


“거짓말해도 소용 없다.”


최형욱은 우두머리 일행을 덮치기 전에 옹기종기 모여 술을 마시던 다른 몰이꾼들을 모조리 처치하고 짐말들이 싣고 있던 짐을 확인했었던 것이다.


“아, 알았어······. 그래, 알고 싶은 게 뭐냐.”


“그 쇠붙이를 누구에게 받았느냐?”


여전히 얼어붙어 있는 쥐 상호 쪽을 날카롭게 쏘아본 형욱이 간단하게 말했다.


“받, 받은 게 아니다······ 값을 치르고······.”


“이런, 그런 것을 물어본 게 아니야.”


“그, 그것을 누설하면······.”

최형욱은 씩 웃었다. 겁에 질린 우두머리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는 잘 알았다. 야인들에게 쇠붙이를 넘기려 하는 자를 엄단하는 것은 명이나 조선이나 마찬가지였고, 쇠를 고아내는 자들도 모를 턱이 없었다. 당연히 쇠를 유통하면서 그것을 유통하는 자들을 을러댔을 것이 뻔하다.


“그 자들에게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 그거겠군. 그거라면 걱정할 것 없다. 하지만 여기서 그것을 말하지 않는다면······.”


최형욱은 굳이 말을 보태는 대신 목젖을 찌른 칼날에 힘을 주었다. 날카로운 통증에 얼굴이 백짓장처럼 새하얘진 우두머리가 황급히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알겠다, 알겠어!”


“대장! 그것을 말한다면······.”


쥐 상호의 말에 최형욱은 돌아보지도 않고 오른손에 쥐었던 비도를 날렸다. 어깻죽지에 비도를 맞은 쥐 상호가 에구구, 소리를 내면서 뒹굴었다. 허리춤에서 다른 비도 한 자루를 더 꺼낸 최형욱이 차갑게 말했다.


“군소리는 하지 말아라······. 이 자가 입을 아니 연다면 이 자를 죽이고, 그 다음은 네놈이다.”


“아니야! 아니야! 저 자는 쇠를 어디서 구했는지 몰라! 그러니 살려줘!”


우두머리가 겁에 질려 외쳤다. 두툼한 목살을 푸들대면서 그가 몇 마디 떠듬떠듬 횡설수설했다. 칼을 겨눈 최형욱이 눈살을 찌푸리며 몇 번이고 되물어야 할 정도였다. 마침내 우두머리가 무어라 지껄이는지 알아들은 최형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틀림없겠지?”


“트, 틀림없다.”


우두머리가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이, 이렇게 말했으니, 나는 영락없이 장사꾼으로서는 고만두어야 한다.”


그 사이 어느 정도 진정된 우두머리가 그렇게 뇌까렸다. 옆에 있던 쥐 상호 사내는 아직도 신음소리와 함께 욕지거리를 내뱉고 있었다. 그 말에 최형욱은 씩 웃었다.


“그것은 걱정 말라고 말했잖나.”


우두머리가 대답하기도 전에 최형욱의 창포검이 그의 목줄기를 꿰뚫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최형욱을 올려다보던 우두머리가 천천히 고개를 앞으로 꺾는 것과 동시에 최형욱의 다른 손이 번개처럼 움직였고, 그와 동시에 쥐 상호 사내 역시 꺽, 하는 소리와 함께 조용해졌다. 잠시 최형욱은 그 자세 그대로 있으면서 주위 동정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얼마쯤 지났을까,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알아차린 최형욱이 몸을 일으켰다. 주변에는 나뒹굴고 있는 시체들과 이 소동에는 관심 없다는 듯 풀을 뜯고 있는 짐말들이 있을 뿐이었다.


최형욱이 시킨 대로 멍하니 기다리고 있던 엄복동은 그가 다시 나타나자 소스라쳤다. 뭐라고 투덜거리려던 복동이었지만 최형욱이의 기세에 눌려 입을 다물었다.


“자네 일당이 모자라다고 했지······. 내 특별 수당을 주지.”


최형욱의 말에 엄복동은 두 귀를 의심했다. 뜬금없이 특별 수당이라니?


“특별 수당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우?”


“가서 짐말들을 거둬가지고 오게.”


고개를 갸웃거리던 엄복동은 최형욱의 재촉에 후닥닥 달려나갔다. 그 사이 최형욱은 골똘이 생각에 잠겼다. 장손돌, 장손돌이라······. 그 때 멀리서 돼지 멱 따는 비명소리가 들렸다. 엄복동이의 목소리였다. 최형욱이 눈 하나 까딱하지 않는데 얼굴이 시퍼래진 복동이 허둥지둥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이, 이게 무슨 일이오!”


복동의 절규에 형욱은 돌아보지도 않고 내뱉었다.


“뭐라니. 시체 처음 봤나.”


너무나도 태연한 말에 오히려 복동이 할 말을 잊을 지경이었다.


“당신 사람 열두 명을 쳐죽였지 않소!”


“야인 놈들일 뿐이야. 왜, 불만 있는가?”

엄복동은 최형욱의 말에 다시 한 번 소름이 쭉 끼쳤다. 어둠 속이었지만 최형욱의 눈에 어린 살기가 뚜렷하게 보이는 듯했다. 잠시 후 엄복동의 어깨가 축 늘어뜨려졌다.


“아니우······ 하지만.”


“잔말 말게. 싫으면 저것들 다 내버리고 가든가.”


복동은 잠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이내 뒤돌아서 시체들과 짐말들이 있는 쪽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다시 혼자 남겨진 최형욱은 생각에 잠겼다. 그가 이곳에 온 이유는 야인 대장장이들을 찾아내기 위해 온 것이 아니었다. 수양과 한명회의 밀명을 받고 노산군을 찾아내기 위해 온 그가 굳이 엄복동과 한패가 되어 이곳까지 온 이유는 육감 때문이었다. 야인들이 갑자기 철을 구해다 쓴 것과 만포진 근처에서 사라졌다는 노산군 사이에 무언가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하는 육감. 최형욱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조선인 상단이 갑자기 나타났단 말이지······ 필시 무슨 연관이 있을 게다. 틀림없다.’


확실한 증거는 없었지만 최형욱의 직감이었다. 살인해본 경험이 여러 번 있는 그는 방금 전 우두머리가 거짓을 고한 것이 아님을 눈빛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형욱은 벌떡 일어났다.


“일단 손돌이란 자를 탐문부터 해 보아야겠군.”


노산군에 대한 확증이 없는 이상 상부에 보고하기는 때가 일렀다. 말발굽 소리가 들린다 싶자 최형욱은 뒤를 돌아봤다. 엄복동이 무표정한 얼굴로 선두에 선 말을 끌고 오고 있었다. 그가 억양 없이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데리고 왔소. 시신들은······.”


“신경쓰지 말게. 어서 뜨도록 하자고.”


엄복동은 시신들을 묻어라도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하려다 말았다.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무고한 사람들을 하나도 아니고 열둘이나 무리 죽음을 서슴지 않고 해버리는 이 사내가 무서웠다. 그는 뒤늦게서야 도절제사 영감에게 뭐라고 한 소리를 듣건 간에 그냥 돌아가버릴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죄책이야 받겠고, 어쩌면 능멸죄로 정배살이를 갈지도 몰랐을 일이었지만, 이런 흉악한 자하고 야인 무법지대를 배회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나았을 것이다.


‘제에기······ 물정 모르는 한양 놈인 줄 알았는데 오히려 내가 코를 꿰인 셈이네그려.’


하지만 어쩌랴, 이제는 엎질러진 물이었고 그로서는 최대한 최형욱이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고 어떻게든 다녀야만 했다. 짐말들이 터벅터벅 어둠 속을 걸어갔다.




한편 그보다 멀리 떨어진 곳, 이만주의 부락은 막 순행길을 마치고 돌아온 부락의 주인을 맞이하고 있었다. 막 여행에서 돌아온 이만주는 피곤한 걸음걸이로 자신을 위해 마련된, 부드러운 곰가죽이 깔린 의자에 앉았다. 끊임없이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 누르팅팅하게 주름진 이 노인의 첫 인상은 전혀 위험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넓은 가슴은 한 때 이 머리털이 하얗게 센 노인도 괄괄한 전사였을 때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고, 그의 깊은 두 눈 속에는 광포하고 음험한 폭력이 엿보였다. 요컨대 그는 늙었음에도 불구하고 건주위를 통틀어 가장 위험하고 잔혹해질 수 있는 남자였다.


‘해가 갈수록 이 노릇도 못해 먹을 일이군.’


이만주는 그렇게 투덜거렸다. 자신의 수하에 든 건주위 부족장들을 일일이 순시하는 것은 권위를 세우기 위해 필요한 일이었지만, 해가 갈수록 정말로 피곤한 일이었다.


왕년에는 자신의 밑에 든 자들을 하나하나 돌아보느라 하루종일 말을 달려도 피곤한 적이 없었다. 때로는 몸소 칼을 들어 건방진 놈들을 몸소 썰어대기도 했던 것이다. 한때 세상 그 무서울 것이 없던 혈기방장한 사내도 이길 수 없는 유일한 적이 바로 늙음이었다. 뼈마디가 쑤신 그는 조선인 시녀를 불러 나이들어 굳어버린 관절을 풀도록 덥힌 물을 가져오라 일렀다. 호위를 맡고 있는 비리해림돈이 옆에 시립해 있는데,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왔다.


박박 밀어버린 앞머리, 두 가닥으로 땋아내린 길고 윤기어린 머리칼에, 검은 털로 뒤덮인 근육질의 덩치 큰 전사 하나가 당당하고 거침없는 걸음걸이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에게서는 찬바람이 몰아치는 북방 대초원에서도 거친 양털로 짠 윗도리 하나만을 걸치고 몇 시간이고 지치지 않고 말을 타고 돌아다닐 수 있는, 흡사 야수 같은 전사의 기상이 넘쳤다. 이 자는 바로 이만주의 장남이자 몇 년 전 명나라에서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케 하도록 건주위 도독동지의 직함을 받은 이고납합 (李古納哈)이었다. 그는 아버지 앞에 다가서 절을 했다.


“막 돌아왔습니다, 아버님.”


이고납합은 막 명나라 요동도사가 거하고 있는 요령성 (遼寧城)으로 몸소 찾아가 토산물을 진상하고 돌아온 뒤였다. 이만주가 털가죽 윗도리를 벗어 비리해림돈에게 넘겨주며 대답했다.


“수고했다. 요령에서는 별다른 동정이 없더냐.”


비록 명나라에서 건주위 도독이라는 직함을 받고 명목상 명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봉신이 된 셈이지만 노회한 이만주에게는 명에 심복할 뜻은 전혀 없었다. 그에게 있어 명나라의 벼슬은 단지 자신의 권위를 드높이고 세력을 키울 수단이기만 할 뿐이었다. 이만주의 질문에 이고납합은 거침없이 대답했다.


“별것이 없습니다. 요동도사 하림이란 자는 거들먹거리기나 하고 있고······ 명나라 졸개들은 우리가 오자 주눅이 든 듯합니다.”


아들의 말에 이만주는 조용히 웃었다.


“명나라 돼지들은 늘 그렇지······ 놈들은 우리들 말 타는 초원의 전사를 늘 두려워했지. 그나마 그놈들의 선조는 달랐지만, 단지 그것뿐이지.”


비리해림돈이 거슬리는 소리로 웃었다. 이만주는 그가 어렸을 적과 팔팔한 청년 시절 각각 명 황제였던 홍무제와 영락제 시절을 떠올렸다. 명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했던 그 때라면 혹시 모를 일이었지만, 토목의 변 이후 명나라는 북방 기마 민족들의 기상에 은근히 눌려 있었고 아직까지 수세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명을 깔보지 않았다.


“하지만 아들아, 그 놈들을 업수히 여겨서는 아니 된다. 놈들은 수가 많으니.”


이고납합은 움츠러드는 기색이 없었다.


“겁쟁이들은 진짜 무사 앞에서는 주눅들게 마련이죠. 농민에게 갑옷을 입혀 놓고 창을 들린 수준의 어중이떠중이들은 싸움터에 나가면 바람같이 달아날 겁니다.”


“네 나이 이미 먹을 만큼 먹었지만 아직도 혈기왕성하구나. 상대를 과소평가하는 것은 무사의 바람직한 자질은 아니다, 아들아.”


“절 놀리시는 겁니까?”


이고납합의 말에 이만주의 눈이 가늘어졌다. 비리해림돈은 표정 변화가 없었다.


“감히 누구에게 그따위 말버릇이냐?”


그 말에 이고납합이 수그러들었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저는 다만······.”


이만주는 맏아들의 말허리를 자르고 들었다.


“되었다. 요동도사로부터 이 외에 별 말은 없었느냐?”


“있긴 있었습니다.”


그 말에 이만주는 턱을 쓰다듬었다.


“말해 보거라.”


“철 이야기였습니다. 놈들, 우리에게 철을 공급하는 자가 따로 있는지 의심하더군요.”


이고납합의 말에 이만주와 비리해림돈이 눈길을 마주쳤다. 이만주는 차갑게 말했다.


“뭐라고 했느냐?”


“금시초문이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이고납합의 말에 이만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다, 아들아.”


이고납합이 다소 머뭇거렸다. 이만주가 의아한 듯 아들을 돌아보았다.


“왜 그러느냐?”


“전 단지······ 그 철이 분명 귀중한 자원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부씨네를 그냥 살려 두었어야 하는지는 의문이 있습니다.”


이만주의 물음에 이고납합이 불만기가 가득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실상 이고납합은 부씨네 부락을 고깝게 보고 있었는데, 이유인즉 몇 해 전 부월영을 첩으로 들이도록 요구한 것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물론 부월영은 보기좋게 퇴짜를 놓았고, 이고납합은 그 뒤로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


“건주위 도독동지로서 제 권위를 무시하는 놈들을 그대로 두어야 합니까?”


그 말에 이만주는 나지막하게 웃었다.


“아들아, 건주위 도독동지는 물론 너겠지. 하지만 이 애비가 있음을 잊어서는 아니된다. 명나라 것들이 뭐라고 하건 간에, 도독은 나다. 알겠느냐?”


그 말에 이고납합의 얼굴이 굳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단지 분노를 속으로 삭일 뿐이었다. 점차 노쇠해가는 이만주였지만 아직 그 자신이 아버지에 대항하기에는 여러 모로 모자랐다. 언젠가는, 어쩌면 꽤 빠른 시일 내에 이고납합 자신이 아버지의 자리를 온전히 가져올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아버지.”


“물러가거라. 먼 길 말을 달렸으니 필시 피로할 터.”


이고납합은 예를 갖추고 물러나갔다. 저벅거리는 발소리가 멀어져가고, 비리해림돈만 남게 되자 이만주가 조용히 말했다.


“내 아들은 성정이 급하고 경솔한 면은 있다. 이 자리를 물려받으려면 아직 좀 더 경험을 쌓아야 하겠지. 하지만 한 가지만은 옳게 보았다.”


“그것이 무엇이옵니까?”


비리해림돈의 말에 이만주는 차갑게 웃더니 몸을 일으켜 한 발짝 내디뎠다.


“내가 부씨 부락을 살려 둔 값을 너무 싸게 불렀었다는 생각이 드는군. 한 달에 무쇠 이만 근이 좀 더 되던가. 물론 쇠라는 것은······ 분명 귀물이지! 누구라도 탐을 낼 만큼! 그것을 넘치도록 가지고 있는 자들도, 우리가 그것을 손에 쥐는 것을 경계할 만큼 말이다.”


이만주는 잠시 신경질적으로 서성거렸다.


“오죽하면 명이나, 심지어 조선까지 그 쇠붙이에 대해서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지 않았겠나.”


비리해림돈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당하십니다. 그래서 그 버러지들을 살려 둔 것이 아닙니까? 무쇠를 바치는 조건으로 말입니다.”


“물론 그랬지. 하지만, 경전에도 이런 말이 있다고 그랬거늘······. 사람 나고 재물이 났지, 재물이 나고 사람이 난 것이 아니라고 했던가. 실로 옳은 말이지 않나?”


비리해림돈이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 버러지들을 살려 두는 대가치곤······ 대인께서는 너무 후하셨습니다. 그런데 요동도사나 조선 왕의 요청을 마냥 무시할 수만도 없을 겁니다.”


비리해림돈의 말에 이만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야. 우리 힘이 아직은 그만 못 하지. 내 아들놈의 말마따나 농사꾼들이 일대 일로 우리 전사들을 이길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크게 보면 명이나 조선에게 섣불리 대항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러하시다면······.”


이만주의 표정은 무표정했다.


“이 참에 부씨 부락을 한 번 제물로 잡아야지. 그리고 그 대장간 시설을 싸그리 거둬들이도록 해라. 그 이장경이라고 했나? 그 자만 잡아들이면 되지 않겠나.”


“지당하십니다.”


“안 그래도 내 마음이 영 찜찜했어. 쇠란 것이 참 긴요하게 쓰이긴 하지만, 그것 때문에 내 자존심을 건드린 놈들을 계속 살려 둔다는 것이 마땅찮았거든! 그뿐이 아니야. 듣기로는 놈들이 다른 부락에도 쇠를 팔고 있다고 하더군······ 건방진 노릇이 아닌가?”


말을 맺은 이만주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다가 돌연 양미간을 좁히더니 팔걸이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무언가 좋은 생각이 다시 떠오른 모양이다.


“아니다······. 우리가 직접 움직일 것도 없지. 놈들이 직접 확인하게 두는 편이 좋겠군. 그들에게 부씨 부락이 철을 만들어내고 있다더라고 전해 두면 그들도 알아서 움직일 것이야. 놈들은 부씨 부락을 소탕할 것이고, 그것으로 문제거리가 없어졌다고 생각하겠지······. 물론 건주위에서 쇠붙이를 만들어낼 수 있는 자는 우리만이 남을 것이다.”


비리해림돈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 편이 더 나을지도 몰랐다. 잠시 고개를 주억거린 비리해림돈이 다시 물었다.


“요동도사에게 언질을 주어 둘까요?”


이만주는 고개를 저었다.


“그놈들은 너무 멀리 있다. 그리고 와라부에 당한 이후 깊숙이 들어오기를 꺼리는 판이지. 조선놈들 힘을 빌리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이만주는 의자에 몸을 깊숙이 기대 앉았다. 어느새 시녀 하나가 따뜻하게 덥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물그릇을 받쳐 들고 들어오고 있었다.

라스트 모히컨.jpg


작가의말

p.s. 뜬금없지만, 소설을 쓸 때 머릿속에서 구상한 캐릭터들의 이미지 첫 번째.


이홍위 - <라스트 모히컨>의 주인공 호크아이 (다니엘 데이 루이스 분).

영화 중에서 북미 산맥을 넘나들며 달리는 이미지로 묘사할까 했다.

물론 작중에 묘사된 모습이 과연 그만 했을까 싶기는 하다. 생각은 높은데 실제 묘사를 통해 전달된 이미지가 어떨는지 모르겠다. 음음.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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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양왕 단종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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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공지 +4 19.08.05 1,539 0 -
51 함정 (1) +3 19.08.20 1,212 19 10쪽
50 최형욱 (2) +1 19.08.14 605 19 14쪽
49 최형욱 +5 19.08.13 654 16 16쪽
48 손 하나에 두 가지 모두를 쥐랴 (2) +2 19.08.08 735 19 15쪽
47 손 하나에 두 가지 모두를 쥐랴 +5 19.08.07 720 19 16쪽
46 한가령 (2) +9 19.08.06 689 16 14쪽
45 한가령 +5 19.08.06 683 17 13쪽
44 이고납합 (2) +5 19.08.05 665 17 14쪽
43 이고납합 +9 19.08.02 699 16 15쪽
42 다가오는 위난 (4) +6 19.07.31 749 16 13쪽
41 다가오는 위난 (3) +4 19.07.30 711 18 17쪽
40 다가오는 위난 (2) +3 19.07.28 726 19 17쪽
39 다가오는 위난 +9 19.07.27 789 27 10쪽
38 전령 (2) +4 19.06.13 930 30 10쪽
37 전령 +2 19.06.11 867 26 15쪽
36 몰려오는 먹구름 (5) +3 19.06.05 912 26 17쪽
35 몰려오는 먹구름 (4) +12 19.06.03 863 23 16쪽
34 몰려오는 먹구름 (3) +6 19.06.02 868 29 15쪽
33 몰려오는 먹구름 (2) +4 19.06.01 876 26 22쪽
32 몰려오는 먹구름 (1) +14 19.05.28 982 29 19쪽
» 음모가들 (2) +6 19.05.27 836 24 23쪽
30 음모가들 (1) +7 19.05.26 1,016 28 13쪽
29 변화구 (2) +5 19.05.23 909 32 13쪽
28 변화구 (1) +8 19.05.22 945 31 11쪽
27 건주위 도독 이만주 (2) +14 19.05.21 945 27 12쪽
26 건주위 도독 이만주 (1) +2 19.05.20 956 31 20쪽
25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3) +9 19.05.19 1,080 28 12쪽
24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2) +6 19.05.17 937 26 21쪽
23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1) +11 19.05.16 1,005 29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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