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양왕 단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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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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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04 0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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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13 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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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령 (2)

DUMMY

“그대 덕분에 내가 오늘날 이 구차한 목숨을 이어나갈 수 있었소. 그대는 어찌 예까지 오신 게요,”


압록강 위로 드리워지는 달빛을 받아 창백하게 빛나는 홍위의 얼굴에는 반가운 기색이 역력했다. 그렇지 않아도 홍위는 영월에서 만났던 이 사람을 다시 만났으면 하고 생각했던 참이었다. 그에게 있어 무덤을 박차고 나아가게 했던 짤막한 글귀를 전해 주었던 이가 그였다.


“구차한 목숨이라······ 전하께서는 스스로를 과하게 낮추어 보십니다그려.”


“전하라니, 당치도 않네. 그 호칭은 이미 오래 전에 버렸음일세. 그리고 스스로를 낮추어 보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그 말에 호찬의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갈대밭 숲에 청량하게 메아리쳤다.


“보아하매 전하께서는 영월에서 뵈었던 이래 마음속에 번민을 아직도 떨치지 못하시었습니다. 백운 대사께서도 그리 내다보시었습니다만.”


“음.”


홍위는 마치 가슴 속을 꿰뚫린 듯한 느낌이었다. 그의 입에서 무거운 신음 소리가 새어나왔다. 호찬은 예리한 시선으로 홍위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과연, 잘 보시었소.”


“마음속 상처는 쉬이 사라지지 않지요. 특히나 전하 같은 분께서는 남들의 짐을 들어 주시려고 할지언정 자신의 짐을 남에게 지우는 일은 하지 못하십니다.”


호찬은 달을 올려다보았다.


“특히 소문에······ 전하께서는 야인들의 마음을 크게 얻으시고 있다고 하더이다. 마음 속의 번민을 온전히 떨쳐내시지 못하시었다면 전하께서 심중에 크게 고뇌하시는 일도 그리 이상하지는 아니하오리다.”


“어떻게 그것을······.”


홍위는 연거푸 가슴속을 찔러들어오는 느낌이었다.


“조선에서도 내가 이곳에 발을 붙이고 살고 있다는 사실이 널리 퍼진 일이오?”


호찬은 싱긋 웃었다.


“그것은 아니오이다. 허나, 옛말에 낭중지추 (囊中之錐)라 하였으되, 귀하신 분은 진흙 속에서도 광채를 발하는 법이올시다. 전하께서 소생의 진언을 들으시어 북방길에 오르셨사오니, 야인 땅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이가 있다는 말을 듣고 전하로 짐작하였습니다.”


오늘은 하루 동안에 비슷한 말을 서로 다른 이에게서 두 번씩이나 듣게 되는군, 홍위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내 어찌 그대를 속이겠소. 진실로 그대의 말이 옳소.”


호찬은 그런 홍위를 지그시 바라보면서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렇지만, 내 왕좌를 내주고 밀려난 몸, 무슨 면목으로 다시 우두머리 되기를 바라겠소? 이렇게 부덕한 나를 이리 크게 보아주니 내 낯이 오히려 뜨거울 뿐이오.”


“전하, 시운이라는 것이 있사옵니다. 모사는 인명이나 성사는 재천이라는 말이 있다지요. 전하께서 불행히 낙백하셨다지만 그것을 어찌 전하의 부덕함으로만 돌릴 수 있는 일이 아니올시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다시 일어날 마음을 먹고, 다시 일어나느냐······ 혹은 그렇지 아니한가입니다.”


홍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는 과거 나에게 취할 길을 일러준 적이 있었소. 그 때는 내가 미욱하고 눈 앞이 어두워 그 뜻을 미처 알지 못했지만, 이제 돌이켜 생각해보니 과연 놀랍기 그지없소. 그러니 내 이제 그대 앞에 무엇을 숨길 것이며, 무엇을 거리끼겠소.”


“과분한 말씀이시오이다.”


“그러니 내 이제 그대에게 묻겠소. 그대가 보기에, 나의 갈 길은 무엇인 것 같소?”


홍위의 질문에 호찬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내 다시 떴다. 어스름 속에서도 그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이 빛나고 있었다.


“전하께오서는 이미 어찌하실 것인지 스스로 답을 알고 계시오이다. 허나, 그럼에도 굳이 남에게 답을 구하고 있는 것은, 그 답이 미덥지 아니하다고 여기시는 것이오이다. 그렇게 된 것은 다름아닌 전하 스스로가 발목을 잡고 있는 때문이지요.”


홍위는 한동안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내 그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대는 과연 나의 속을 꿰뚫어보고 있소.”


“전하, 야인들을 이끌어 교화를 시키겠다는 뜻은 훌륭합니다. 하지만 야인들을 교화한다는 것이 다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은 전하 스스로도 알고 계셨을 것이 아니옵니까. 전하께서는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 앞에서 그들을 이끌어나가고 싶어하셨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전하께서는 그렇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계셨습니다.”


“그대의 말이 옳소. 진실로 그리하오.”


“전하. 전하께서 필요한 것은 앞길에 대한 답이 아니오이다. 그 답은 전하께서 이미 구하셨습니다. 전하께서 진실로 필요한 것은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오이다.”


“확신이라.”


잠시 흘러가는 물소리만이 미미하게 울려퍼지고 있었다. 멀리서 새 우는 소리가 들러왔다. 풀벌레 우는 소리가 찌륵찌륵 들려왔다.


“그들에게 내가 과연 마땅할지, 그리고 이미 한 번 나를 따르는 부인을 버리고 온 내가······.”


“전하.”


호찬이 힘주어 말했다.


“지금 이 순간, 남들에 대한 생각을 떨쳐내시오소서. 남들에 대한 생각에 얽매여, 그 생각 속으로 숨으려 하지 마십시오. 남들에 대한 책임감으로 움직인다, 그것은 물론 훌륭한 자세이오나, 작금 전하께는 오히려 독이 되고 있습니다. 청컨대, 전하 스스로는 진실로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그것을 인정하신 후에, 마음 속에 확고부동한 목표를 세우고 한 점 흔들림 없이 나아가시어야 합니다.”


홍위는 호찬을 바라보았다.


“전하. 전하의 뜻은 무엇이시옵니까? 남들에 좌우되지 아니하는, 전하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들려 주시오소서.”


문득 홍위의 생각은 먼 곳을 달리고 있었다. 야인 땅에서 일개 농부, 혹은 목동으로 전락해서 일생을 마친다. 그렇다, 분명히 그렇게 살 수도 있었다. 전호인이 말했고 송유빈이 말했으며 퉁주동도 그렇게 말했었다. 그렇지만 그는 굳이 야인들의 생활을 보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대어 주면서 그들을 이끌어나가고 싶어했다. 단순히 긍휼함을 느껴서였을까? 옛날, 그가 세자 시절이었을 때 아바마마로부터 무릇 왕 된 자는 일개 촌민의 생활에도 눈을 돌려서는 아니 된다는 말을 들었고, 왕이 된 후에도 그것을 잊지 않으려 노력했었다. 하지만 정말 그것 때문에서였을까? 홍위가 중얼거렸다.


“나는, 계유년 이후 왕 노릇에는 환멸을 느꼈었소. 적어도 그렇다고 생각했었소.”


호찬은 조용히 웃었다.


“골육상쟁은 누가 보더라도 넌더리가 나는 일이오이다.”


“그렇지만······ 어쩌면 나는 그 때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소. 내가 왕이 된 것은 오로지 내가 분에 맞지도 않게 왕가의 적장손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며, 왕위에 오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태어날 적부터 남들로부터 왕이 될 운명이라고 주입받았기 때문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거요.”


“그렇다면, 그게 아니었다는 말씀이시오이까.”


호찬은 어조를 살짝 바꾸어 물었다. 이야기의 주도권은 이제 홍위에게 넘어가 있었다. 호찬의 일은 이제 홍위가 속내를 털어내게 만들어나가는 것이었다. 홍위는 약간 주춤한 기색이었다.


“어느 정도는······ 아니,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소.”


홍위는 두 손을 들어 시선 높이로 치켜 들었다.


“나 역시 어린 시절에 태조대왕과 그 아드님 태종대왕이 창업하신 이야기를 들었었소. 그리고 그 때 분명히 생각했었소······. 나 역시 꼭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고. 단순히 왕위를 물려받아서 왕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그에 걸맞는 왕이 되고 싶었다고.”


문득 홍위의 얼굴에는 쓸쓸한 빛이 스치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런 경지에 오르기는커녕, 기껏 물려받은 왕위마저 지켜내지 못했소······. 그것이 한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던 거요······. 바로 그랬기에 나는 내 자신이 왕위에 걸맞지 못했던 자였기에 어쩔 수 없었다고 스스로를 속이기 시작했던 거요.”


“나는 내가 스스로 사람들을 끌어모아 우두머리에 오를 능력이 되는지 확신이 없었소.”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호찬의 말에 홍위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아직 모르겠소······ 그러나 물러나고 싶지만은 않다는 것도 사실이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내 안에서 사그라들었던 불꽃이 이따금 되살아나는 것을 느끼기도 했소. 그러나 그럴 때마다 물러선 것도 사실이었소. 부인하지는 않겠소.”


홍위의 주먹을 부르쥐어졌다.


“나 자신을 한 번 시험해보고 싶소. 이 야인 땅에서, 정당한 군주의 자리를 잃고 혈혈 단신으로 떨어졌던 내가, 이 구렁에서 올라가지 못하고 그저 일생을 마칠 것인지, 아니면 끝내 올라가서 우뚝 설 수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소.”


한순간 호찬은 홍위의 주변이 환해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구름을 벗어난 달빛이 그의 주위에 빛을 드리우듯이.


“이 내가, 태조대왕 전하와 태종대왕 전하처럼 우뚝 설 수 있는 남자인지 스스로를 확인해보고 싶단 말이오.”


“전하.”


호찬은 허리를 숙여 절했다.


“실로 훌륭하시오이다.”


한순간 자신의 말에 취해 있었던 홍위는 들어올렸던 두 손을 내렸다. 그와 동시에 달이 다시 구름 속으로 숨어 든 듯, 사위가 다시 어두워졌다.


“그래요, 나에게는 그러한 생각이 있었소.”


“지금도 분명히 가지고 계십니다.”


호찬은 힘을 주어 말했다.


“전하, 고난은 대장부를 꺾이게도 할 수 있으나, 반대로 담금질을 시키기도 합니다.”


“경은······ 나를 그렇게 보시는구려.”


홍위의 말에 호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 왕좌지재 (王座至材)는 숨기려 해도 결국은 그 모습을 드러내는 법이올시다.”


옛 고사성어를 살짝 비튼 언어유희였다.


“그리고 소생이 이곳에 이른 것은, 장차 전하께 닥쳐 올 시련을 미리 알려드리려 함이었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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