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순화군
10. 순화군.
할아버지 결혼식에서 아버지와 순화군의 갈등에 나도 피해를 좀 봤다.
어마마마의 걱정이 태산이 된 것이다.
“세손은 순화군 숙부의 취미에 관심을 갖지 말아야 할 것이오.”
“예~ 엄마, 아니 어마마마.”
이 즈음부터 엄마라고 부르지 못하게 하고 어마마마, 아버지도 아바마마, 할아버지는 할바마마가 되었다.
굳이 뭐하라고 그리 길게 부른담?
아무튼 어마마마는 내가 순화군에게 관심을 갖는 줄 아셨는지 주변단속에 크게 신경을 쓰셨다.
“절대로, 저얼~때로 순화군 숙부의 취미에는 관심갖지 말거라! 알겠느냐~!”
귀에 못이 박힐 것 같다는 얘기가 뭔지 알 것 같았다.
몇 번을 반복해서 다짐을 받는 것인지 모르겠다.
기실 그 이야기 자체에서 약간의 위험도 느껴졌다.
[아랫 것들 부수는 재미.....]
도대체 무슨 소린지...... 하고 싶은 건 아니지만 정확히 그 자가 무슨 짓거리를 하는 지는 알고 싶었다.
날이 좀 지나고 어마마마도 조용해지고 왕의 혼인에 궐내 분위기도 좀 부드러워진 때에 소주방에서 나오는 깨끔이를 만났다.
“깨끔 누이야~”
“어머머...... 세손마마~ 남자가 주방에 기웃거리시면 꼬추 떨어지세요.~ 그리고 누이는 그냥 깨끔이라고 부르시지.....”
“그래도 나보다 나이가 얼마나 많은데..... 누나가 맞지.....”
“헤헤...... 들어가세요. 세손마마”
“깨끔누이는 지금 바쁜가?”
“?”
깨끔이가 매우 의문스러운 눈으로 날 쳐다본다.
“왜에에~ 요?”
귀여운 척, 하기 싫은 척 말을 길게 뺀다. 이럴 때는 단도직입!
“순화군이란 분은 어떤 분이야?”
“!”
얼굴이 순식간에 구겨진다.
똥밟는 소리들었다는 느낌으로......
“왜..... 왜....... 왜....... 그런걸 물으세요?”
“어마마마랑 아바마마가 순화군 숙부에 대해 말만 하면 좀 이상하게 구셔서....... 도대체 뭐하는 분인가해서.......”
“.......하아~”
깨끔이가 한숨을 나지막히 쉬더니 나를 빤히 내려다 본다. 그러다 무릎을 꿇고 눈높이를 나랑 맞추더니 내게 애기손가락을 내민다.
“절~때로 제가 말씀드린 거라고 말하심 안돼요~?”
애기손가락 탁, 감고 철썩같이 말했다.
“절대 말 안해!”
깨끔이가 한탄처럼 말한 내용을 듣는데 듣는 것도 고역이었다.
“그분은요~. 솔직히 광인이에요. 광증이 이만저만이 아니에요. 지금은 나가서 사시는 데 왜란때 왜적에게 붙잡히신 뒤로 완전히 머리가 도셨데요.”
“머리가 돌았어도 혼자 집에서 돌았으면 딱한 일이지, 할바마마나 아바마마가 저리 대하시는 건 뭔가 이상해. 좀........”
“거리를 돌아다니며 양민을 몽둥이로 때려 죽여요.....”
“엥?”
굉장한 소리가 고저없이 툭 튀어나와 좀 당황했다.
“거리를 다니며 양민을 몽둥이로 쳐서 죽이고, 열 네 사람쯤 된대요. 그리고 상민의 딸을 끌어다가 자기 집 헛간에서 발가벗겨 채찍으로 때려서 초죽음을 만들어 돌려주고, 말리는 고을 원님을 거꾸로 곤장을 치고 조정에서는 왕자님이니 함부로 말은 못했는데 주상전하나 세자전하는 걱정이 많으셨대요.”
“그럼, 법대로 처리는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살인, 납치, 폭행이면 거기에 맞게?”
“한 번 체포당하신 적이 있어요. 무슨 군수를 때렸다나~? 조정에서도 더는 못 참겠다고.....”
“근데?”
깨끔이가 내 코를 살짝 가리키더니 난감한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이었다.
“세손마마가 태어나셨잖아요~. 그 해 12월에~ 헤헤헤~”
“나? 내가 뭐?”
“마마의 탄신에 대사면령이 내려졌을때 주상전하께서 대충 특별사면에 끼워 넣으신 거죠.”
“엥~? 그런 비윤리적 살인을.....?”
“그 분 어머니가요........ 돌아가신 순빈마마 시라는데...... 저도 뵌 적은 없어요. 근데 주상전하의 사랑이 각별하셨대요.....”
“......”
“거기다 지금 대군마마들로 보면 막내시잖아요. 솔직히 주상전하께서 아픈 손가락이라 손을 못 대시는 거죠.”
“자기 자식 귀하면 백성자식이 귀한 줄도 알아야지!”
“또 부모 맘이라는 게 그런 가요~”
“다른 양민 상민 부모 맘은 다른가?”
“.......”
언성이 높아지자 깨끔이가 눈길을 피하며 입을 다물었다.
하긴 더 따지기도 뭐했다.
깨끔이한테 따져서 뭐해?
“세손마마, 저한테 이런 얘기들었다고 말하시면 안돼요~. 저 죽어요.”
“알았어. 너 안 죽게 모른척할게.”
“헤헤......”
“후우~”
사람을 열 넷이나 몽둥이로 때려죽여? 여자를 납치해서 발가벗겨 채찍?
‘새디스트구만~’
지금의 사람들에게는 상상하기 힘든 광인이겠지만 미래에서 온 내겐 대충 어떤 인간인지, 속까지는 아니더라도 테두리가 보였다.
‘그러고보니 왜 생각이 안 나지? 공부한 적이 없나?’
가만히 생각하다보니 그런 새디스트 변태라면 내가 중학교때 공부하던 내용에 나올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성적, 성벽같은 것은 없는 것으로 묻는 게 그 나이의 교육이니까......
‘역사를 있는 그대로 가르쳐야지....... 하여튼.......’
앞으로 600여년 뒤의 교육정책을 한탄하며 난 내 방으로 들어갔다.
그 후로 여덞살까지 3년정도 나는 별다른 일도 없이 정말 별일 없이 살았다.
일어나 공부하고 먹고 자는.....
일단 몸도 제법 많이 아팠다.
어려서 그런지 찬바람 조금 쐬면 머리 아프고 반찬이 좋아하는 게 나와서 두세 숟갈 더 먹으면 영락없이 배 아프고 난 내가 시원찮은 몸을 타고 난 게 아닌가 싶었다.
“세손마마께서는 반드시 거치셔야 할 잔병들을 참 가볍게 잘 넘기셨습니다. 타고 나시길 강골로 나신 듯합니다.”
어의라는 사람이 와 이렇게 내 건강을 칭찬했다.
그 말을 듣고 나도 생각을 달리 할 수 있었다.
지금 이 시대는 항생제나 진통해열제가 있는 시대가 아니다.
생각해 보니까 내가 병을 치료하는 방법이 지나치게 현대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병원가서 진료 받고, 주사 맞고, 약국에서 약 사 먹고, 집에서 푹 자면 되는 그런...... 간단한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대충 약이라는 쓴 풀 국물로 이만큼만 아프고 넘어갈 수 있는 지금의 나는 제법 센 놈인 것이다.
일종의 나에 대한 믿음이랄까?
그런 것이 생기자 플라시보 효과일까?
열심히 먹고 열심히 자고 열심히 공부하는 게 아주 쉬었다.
공부도 결국 한 과목, 그것도 암기과목 한 과목밖에 없는 공부, 다각적인 과목들의 연달아 나오던 전생의 현대공부에 비해 상당히 쉬웠다.
한자를 읽고 외우고 정답으로 정해진 철학적 해석을 외우며 현대식 해석을 내 안에 하나하나 간직해 나갔다.
그렇게 여덞살이 되는 해를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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