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상츠모사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피니키
작품등록일 :
2012.09.20 00:09
최근연재일 :
2023.09.29 06:00
연재수 :
295 회
조회수 :
60,031
추천수 :
1,923
글자수 :
2,498,372

작성
18.09.30 21:48
조회
207
추천
6
글자
24쪽

[판상츠모사][6장 “잊는 대신 잃은 것” - 9]

DUMMY

[판상츠모사][6장 “잊는 대신 잃은 것” - 9]




어째서 후작은 지금 이런 상황까지 와서도 시아가 진짜 공주가 아니라 자신이 내세운 가짜 공주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는 것일까. 시아에게서 갑작스럽게 같이 점심 식사를 하자는 연락이 왔을 때, 나는 뜬금없게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물론 후작이 이제 와서 그런 이야기를 해봤자 결국 자신은 반란군의 수뇌로 감옥에 갇혀있는 신세고, 실질적인 권력은 이미 시아가 다 틀어쥐고 있으니 그 이야기를 믿어줄 사람은 없겠지만... 마음에 걸리는 것은 후작이 시아를 둘이서 만날 때조차 마치 진짜 공주인 것처럼 대한다는 점이었다. 흡사 자기가 시아를 가짜 공주로 내세웠다는 것을 잊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거기에 더욱 마음에 걸리는 것은, 요즘 들어 나도 이 애가 사실은 평범한 여고생이라는 사실을 문득문득 잊어버리곤 한다는 것이었다. 그럴 만큼 공주로서의 시아 모습은 극히 자연스러웠다. 처음부터 당연히 공주였던 것처럼, 마치 진짜 공주인 것처럼.


“뭐?”


“같이 가자고.”


그러나 그런 내 생각은, 점심식사 도중 튀어나온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즉각 묻혀버렸다.


“그러니까 지금 뭐라고?”


“소형식에 같이 가자고 말했어.”


그렇게 말한 시아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뭐 바쁜 일이라도 있어?”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나는 일단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거 안 하는 거 아니었어?”


내 질문에 시아는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무슨 말이야?”


“후작이 소형을 거절했잖아?”


“그렇지.”


그러나 시아는 거기에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하지만 조건부로 승낙했었지.”


조건부?


“아... 누구 한 명 살려주는 대신?”


“응.”


어라, 그렇지 않아도 제대로 꺼내보지도 못한 후작의 부탁이 못내 마음에 걸려있던 참이었다. 당장 그 여자애부터가 살기를 거부하는데 내가 말해봤자 의미가 없을 게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말도 안 꺼내보는 건 양심이 찔린다고나 할까.


“어, 그럼... 누구를 살려주는 건데?”


그러나 그런 내 질문에, 시아는 접시로 가져가던 손을 멈추고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누구일 것 같아?”


윽, 이렇게 되물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나야 잘 모르지.”


그러나 그렇게 슬쩍 말을 돌려보았지만, 내게 박힌 시아의 시선은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하고 싶은 말을 알고 있지 않느냐고 묻는 듯한 시선이었다.

하아, 소화가 안 될 이야기만 골라서 하는 기분이군. 나는 한숨을 쉬고는 결국 중얼거렸다.


“...혹시 그 여자애?”


“흐응.”


고심하고 던진 질문이었음에도 돌아온 반응은 미묘했다.


“그 여자애를 살려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나?”


“사실 후작이 이야기했어. 그 여자애를 살려주면 소형을 수락하겠다고.”


윽, 그 사이에 이야기가 벌써 그렇게 흘러간 모양이군.


“아, 그래?”


“그러나 그때도 이야기했지만, 그 여자애는 살려줄 수가 없어. 하지만...”


“하지만?”


시아는 이젠 숫제 손을 식기에서 떼고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식사가 중요한 건 아니라는 듯한 모습이었다.


“네 의견을 듣고 결정하려고 해.”


“내 의견?”


“어때? 살려줘도 괜찮다고 생각해?”


“어...”


갑자기 내가 왜 이걸 결정하는 모양새가 된 거지?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듣고 나자, 자연스레 내 머릿속에는 나에게 절박하게 부탁하던 후작의 모습이 떠오르고 말았다.


“...내가 만약 괜찮을 것 같다고 하면 살려줄 거야?”


마법사를 살려뒀다가 전에 천 명 가까이 죽었다면서? 그러나 시아의 대답은 내 예상과는 조금 다른 것이었다.


“아니, 그렇다 해도 지금 당장은 살려줄 수가 없지.”


가장 핵심적인 질문에 시원스런 부정이 돌아오는 바람에 나는 꽤나 난감해졌다.


“뭐야, 그럼 왜 물어본 거야?”


내가 살짝 투덜거리는 기운을 담아 그렇게 되묻자, 시아는 포도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지나가듯 말했다.


“만약 네가 괜찮지 않다고 하면, 후작의 요청이 어쨌든 바로 죽일 생각이었어.”


히끅, 물을 마시다가 나는 사레가 들릴 뻔했다.


“죽인...다고요?”


“마법사니까.”


시아의 대답은 담담했다.


“하지만 당장은 그러지 않아도 되겠네. 일단 너는 괜찮다는 거지?”


눈동자를 어디에 둬야 되지? 나는 눈을 둘 곳이 없어 이리저리 눈을 굴렸지만 결국에는 시아의 시선과 마주치고 말았다. 겁을 먹은 개구리처럼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는데, 그런 내 끄덕임에 시아는 살짝 고개를 돌렸다.


“그럼... 살려줄 거야?”


“아직은 아냐.”


아직? 아직은 아니라고? 나는 이야기를 따라갈 수가 없어 잠시 머리를 굴렸다. 그러나 시아의 이야기는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별 일 없지?”


“응?”


“같이 가자고 했잖아.”


아, 그렇지. 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나는 표정을 살짝 찡그려 생각을 가다듬었다.


“아니, 그 여자아이를 살려줘야 후작도 소형을 받아들인다며?”


그러나 내가 그렇게 묻자, 시아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


“그런데 아직 살려줄 생각은 없다며?”


“그것도 그렇지.”


이야기할수록 알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럼 왜 가는데? 아, 설마 강제로라도 집행하려고?”


내 말에 시아는 별안간 내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도 잠시, 시아는 그럴 수도 있다는 듯이 시선을 돌렸다.


“소형은 강제로 집행할 수 있는 형벌이 아니야.”


“응?”


“다른 형벌이면 몰라도, 소형은 강제로 집행할 수 있는 형벌이 아니야.”


별다른 보충설명 없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듯이 시아는 똑같은 말을 한 번 더 중얼거렸다.


“아니... 그러니까 그게 무슨 말이야? 강제로 집행할 수 없다니?”


“말을 물가로 끌고 갈 수는 있어도, 물을 먹일 수는 없다는 말이 있지. 들어봤어?”


어... 들어본 것 같기도 한데. 근데 들어보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은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더욱 더 곤란해졌다. 다행히 시아는 그런 내 마음을 읽은 듯, 조곤조곤 설명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소형이란 사형수가 직접 자기 발로 경계를 넘어가는 형벌이지. 만약 그 죄수가 경계를 향해 걸어가지 않으려 한다면 형벌을 집행할 수가 없는 거야.”


어? 이야기가 그렇게 되나?


“그럼 강제로 끌고 가면 되잖... 아, 잠깐. 그러면 안 되나?”


“그래.”


시아는 내 사고를 가볍게 긍정했다.


“강제로 끌고 갈 경우, 자칫하다가는 그렇게 사형수를 끌고 가는 사람들조차 사라져버릴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는 못하지. 그리고...”


시아는 입으로 양상추를 가져갔다.


“긴 창으로 쿡쿡 찔러서 강제로 경계를 넘어가게끔 유도해도, 차라리 창날에 찔릴지언정 경계를 넘지 않으려고 버티다가 몸 전체가 너덜너덜해지기도 하지.”


윽, 갑자기 그 광경이 떠오르는 바람에 가뜩이나 없던 식욕이 마저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시아는 딱히 그런 이야기에 거부감이 없는 듯, 입에 넣은 양상추를 오물거리더니 별일 아니라는 듯이 말을 이었다.


“그러면 결국 그 죄수는 소형이 아니라, 과다출혈로 죽게 되어버려.”


담담하게 여기까지 설명한 시아는 나를 쳐다보았다.


“이쯤이면 이해했어? 소형은 바로 그런 형벌이야. 본인이 납득하지 않으면 집행할 수 없는 형벌. 강제로 집행하기는 어렵지.”


시아는 그렇게 설명을 마무리 지었다. 그러나 그런 설명을 듣고 있는 내 입장으로서는 정작 답을 얻은 의문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더욱 더 혼란스러워졌다.

그럼 뭐가 어떻게 된다는 거야? 강제로 집행을 할 수도 없는데 왜 가는 거지?


“그럼 어쩌려고?”


“뭘?”


“강제로 집행할 수는 없다면서? 그런데 그 여자애는 아직 살려줄 수 없다고 했고... 그럼 왜 가는 거야?”


내가 그렇게 되묻자, 시아는 다시금 잔을 들었다. 그리고 지나가듯 말했다.


“그건 내가 아니라, 그 여자애에게 달려있어.”


“뭐?”


“가보면 알게 될 거야.”


결국 자세한 설명은 미루겠다는 듯한 대답이었다. 당연히 물어야 할 게 많을 것 같아서 나는 입을 열었지만, 정확히 무엇을 물어야 할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입을 연 채 침묵했고, 그 침묵 사이에 시아는 계속 자신의 이야기를 채워 넣었다.


“점심식사 마치면 바로 출발할 거야. 괜찮지?”


“뭐? 바로 출발한다고?”


“그래.”


그렇게 중얼거린 시아는 윤기가 도는 보랏빛 눈동자로 나를 쳐다보았다.


“무슨 일 있어?”


아니, 난 할 일도 없을 것 같냐? 갑자기 이렇게 말하면...


“아니, 별다른 일정은 없는데...”


사실 왕궁에 얹혀사는 입장에서 할 일이랄 게 있나.


“그럼 됐네. 가는 걸로.”


“잠깐, 이렇게 아무 준비도 없이?”


시아는 다시금 보랏빛 눈동자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뭐 따로 준비할 거 있어?”


어... 생각해보니까 그러네. 아니, 공주와 같이 가는 거니까 따로 내가 뭘 준비를 안 해도 당연히 상관없겠지만... 그렇다손 쳐도 이거 너무 갑작스러운 거 아냐? 그러나 그러한 내 침묵에 시아가 할 이야기는 다 했다는 듯한 태도로 내게서 시선을 뗐으므로 나는 간신히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처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요즘 들어 더 이상해져가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천천히 양상추를 입으로 가져가고 있는 시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얘가 진짜 공주라면 그냥 원래 그런가 보다 이해하고 넘어갈 수도 있을 일이지만, 문제는 얘가 진짜 공주가 아니잖아? 그러나 내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갑작스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찰칵,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들어온 가닐영 대사관은 아직 남아있는 음식을 발견하는 순간 표정이 약간 흐트러졌다. 당황한 모양이었다.


“신경 쓰지 마. 다 먹었으니까. 준비는 끝났어?”


냅킨으로 입가를 살며시 닦아내며 시아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그제야 가닐영 대사관은 쭈뼛쭈뼛 대답했다.


“예. 출발하시면 되겠습니다만...”


“그래? 알았어.”


그리고 시아는 나를 쳐다보았다.


“슬슬 갈까?”


“어... 응.”


음식이야 남아있었지만 이미 식욕은 사라진지 오래였기에, 그리고 상황이 상황이었기에 나는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가는데 얼마나 걸리지?”


“가는 데만 이틀은 걸릴 것 같습니다.”


“그래?”


그렇게 반응한 시아는 잘 접은 냅킨을 식탁 위에 곱게 내려놓은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천천히 문을 향해 걸어가면서 내게 중얼거렸다.


“그럼 나갈까.”


진짜 아무 것도 안 챙겨도 되나. 뭔가 잊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면서 나는 어기적어기적 시아의 뒤를 따랐다.

딱히 구체적인 광경을 상상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밖으로 나와 보니 이동하는 인원은 의외로 많았다. 마차만 해도 예닐곱 대, 그 중 까만 천이 덮인 마차가 두 대, 말을 탄 군인만 열 명이 넘었고, 걸어가는 병사들은 줄잡아 백 명은 넘을 것 같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검은 천으로 덮여 있는 게 후작이 탈 마차겠지? 보기만 해도 음울해 보이는 것이 딱 그런 예감이 든다. 아, 그러면 잠깐. 그럼 왜 두 대지? 아닌가?


“잘 다녀오십시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크노르츠 백작이 가까이 다가와서 고개를 숙였다.


“다녀올게.”


시아가 마차에 혼자 탔고, 나 역시 따로 배정된 마차에 혼자 타게 되었다. 같이 타는 사람은 없었다. 이럴 거면 시아와 같이 타도 좋지 않을까 생각은 들었지만, 그건 내 생각이고 시아는 어떻게, 그리고 주위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몰랐으므로 나는 그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사실 혼자 가는 게 불편하지도 않았고 말이야.

그러고 보니 라미한테 여기 따라간다고 말을 못했네. 혼자라는 생각이 들자 그제야 라미 생각이 떠올랐다. 윽, 아까 뭔가 잊은 것 같다 싶더니, 그게 바로 이거였군. 순간 낭패감이 엄습해왔지만, 그러나 그 직후 나는 요즘 라미와 얼굴을 맞대는 경우가 어차피 거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약간 착잡한 심정이 되었다.

물론 책 자체를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요즘 도서관을 가는 이유는 책이 좋아서라기보다는 얼굴을 마주치기 싫다는 느낌이 강해 보이는데. 뭐, 라미가 굳이 그러는 데야 내가 억지로 보자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긴 하지만...

나는 라미와 함께 여행했던 순간들을 머리에 떠올려보았다. 그리고 잠시 뒤 한숨을 쉬었다.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뭐라 그래도 라미는 라미일 뿐이야. 돌아가면 뭐가 어찌 됐든, 그때는 일단 이야기를 좀 해봐야겠다.


“오늘은 여기서 쉬고 가겠습니다.”


생각 외에는 할 것도 없고 할 수 있는 것도 딱히 없었기에, 멍하니 바깥 경치를 바라보며 고개를 꾸벅거린 지 얼마나 지났을까. 동녘 하늘은 이미 어둑어둑하고, 서녘 하늘에만 간신히 붉은빛 실오라기 같은 황혼이 남아있을 때쯤 되어서야 간신히 마차가 멈췄다.


“후하...”


마차 밖으로 나오자마자 시원한 바람이 온몸을 휘감는다. 문을 열어놓아서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마차 안은 더웠던 모양이었다. 그리 세게 불어오는 바람도 아니었지만 마차 밖에서 맞는 바람은 마차 안의 그것보다 훨씬 시원했다.


“더우셨나 보군요.”


나는 가닐영 대사관이 오늘 하루 종일 바깥에 뜨거운 햇볕을 받아내며 걸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조금 미안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러고 보니 그나마 말도 못 타고 온 병사들도 많았지. 나는 어쩐지 불쌍한 기분이 들어 기진맥진한 표정을 짓고 있는 병사들을 동정의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식사가 준비되어있으니 씻고 푹 쉬시면 될 겁니다.”


점심쯤 출발해서 저녁이라. 하늘은 이미 주황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남쪽에 있는 도시라고 들었는데 어쩐지 저녁이 더 빨리 찾아온 느낌이군. 나는 고개를 돌려 오늘의 숙소가 될 저택을 쳐다보았다. 주위는 숲이었고, 딱히 민가가 있는 것도 아닌지라 꽤 고독해 보이는 건물이었다.


“들어가시죠.”


“네.”


그런 말과 함께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시아가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는 걸음으로 저택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음, 그나저나 여기도 꽤나 큰 건물이군. 귀족의 집인가? 아니면 행정기관 같은 건가?


“맛있게 드십시오.”


식사는 방으로 직접 날라져왔다. 딱히 시아나 가닐영 말고는 아는 사람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시아나 가닐영과 같이 식사를 할 분위기도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혼자서 그것들을 냠냠 먹어치웠다.

문제는 식사를 마치고 난 이후에도 아직 시간이 한참 남아있었다는 점이었다. 잠이라도 오면 좋겠지만, 마차 안에서 너무 많이 잔 탓에 잠도 오지 않아서 나는 한없이 무료해졌다. 책이라도 좀 달라고 해볼까. 내가 그런 생각을 하던 참에 똑똑하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끼익.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나는 내 방문을 열고 나타난 가닐영 대사관의 얼굴을 보고 약간 의외라는 느낌이 들었다. 무슨 일이지?


“쉬고 계신 중에 죄송합니다만...”


예의 바른 사람답게 가닐영 대사관은 일단 바른 태도로 말을 시작했다.


“괜찮습니다. 무슨 일이신데요?”


별로 탐탁찮은 일이지만 말하지 않을 수도 없다는 듯한 느낌으로, 그러니까 내키지 않는 듯한 느낌으로 가닐영 대사관은 말했다.


“후작이 잠깐 뵙고 싶어 합니다만.”


“누구를요?”


나는 반사적으로 그렇게 중얼거린 후에야 그게 내가 아니면 일부러 나를 찾아올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약간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저를요?”


“네.”


가닐영 대사관은 거기까지 말하고 뭔가 이유를 설명하려는 눈치였다. 나도 후작이 왜 날 보자는 건지 알 수가 없었기에 그런 설명을 기다렸지만 가닐영 대사관은 뭔가를 말할 듯 말듯 어물거리다가 결국엔 조심스레 입을 다물고 말았다.

뭔가 복잡한 일인가? 그런데 시아가 그 여자아이를 살려주기로 한 이상, 딱히 후작이 이제 내게 할 말은 없을 텐데. 그렇게 나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려보았지만, 아쉽게도 마땅한 대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네. 지금 가죠.”


그때까지도 어물거리고 있던 가닐영 대사관은 그런 내 반응에 즉각 태도를 바꿔 대답했다.


“네.”


그러고 보니 어디에 있을까. 밑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걸어가면서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여름이니까 그냥 마차 안에 있으려나. 아니면 그래도 후작이었으니 방에 가둬 놓았을라나.


“여깁니다.”


그리고 그런 내 생각은 무참하게 밟히고 말았다. 생각해보니 죄인인데 당연히 감옥에 가둬놓겠지... 찰캉, 가벼운 쇳소리와 함께 열린 문으로 가닐영 대사관이 먼저 들어섰기에 나는 그 뒤를 따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모시고 왔습니다.”


가닐영 대사관이 후작을 대하는 태도는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후작님이라고 부르던 것을 후작이라고 부르게 된 것 말고는 사실상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 같달까.


“고맙네.”


후작이 가닐영 대사관을 대하는 태도 역시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그렇게 가닐영 대사관에게 말을 건넨 후작은 나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쉴 시간일 텐데 미안하군.”


“괜찮습니다.”


나는 약간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뭐, 그렇다고 퉁명스러운 정도는 아니었지만.


“미안한데 잠깐만 나가주겠나.”


후작이 그렇게 말한 순간 가닐영 대사관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저, 죄송합니다만...”


“알고 있네. 하지만 난 철창 안에 갇혀있고 별다른 일은 하지 않을 걸세. 단지 둘이서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뿐이야.”


가닐영 대사관이 뭐라 말을 꺼내기 전에 그렇게 중얼거리는 것으로 가닐영 대사관의 말문을 막아버린 후작은 잠시 뜸을 두고 말을 이었다.


“내 명예를 걸고 보증하지. 아무 일도 없을 걸세.”


그런 후작의 말에 가닐영 대사관은 뭔가를 잠깐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그 생각은 그리 길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가닐영 대사관은 날 힐끔 쳐다보는 눈치더니 살짝 몸을 돌렸다.


“밖에 있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냥 올라가셔도 됩니다. 끝나면 알아서 가죠.”


나로서는 꽤나 발 빠른 대응이었다. 그런 내 말에 가닐영 대사관은 잠깐 고민하긴 했지만 내 제안이 꽤 효율적인 것이라는 사실은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끼익. 가닐영 대사관이 간단한 목례와 함께 문을 닫고 나간 후에 나는 후작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미안하군. 이런 시간에 불러내서.”


마침 심심했다고 말할 수도 없었기에 나는 고개를 흔들어 그 말을 부정했다.


“절 보자고 하신 이유는요?”


“음.”


내 질문에 후작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밝지 않은 등불에 비친 그 그림자가 더욱 암울해 보인다. 그 암울한 느낌이 후작의 지금 상황과 어울린다는 느낌이 얼핏 들었다.

자신이 세운 가짜 공주에게 거꾸로 숙청당한 심정은 과연 어떤 느낌일까.


“별다른 건 아니다.”


후작은 그런 평범한 말로 입을 열었지만...


“저번에도 얼핏 들었지만... 자네가 아니었다면 리체는 이미 죽었을 것이라고 들었다.”


“네?”


리체? 리체가 누구냐는 질문이 목구멍에서 튀어나오기 직전에 나는 간신히 그 이름이 완전히 낯선 이름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후작은 아마 내가 그 이름을 알고 있다고 생각한 모양인데... 나는 그 여자아이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 마법사 여자애 말하는 거 맞지? 그러나 그 사실을 떠올렸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후작의 이야기를 쉽사리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네가 리체를 구해준 것이나 다름없다고 들었다. 맞나.”


“제가요?”


어... 좀은 당황스러운 이야기였다. 이야기만 들으면 내가 무슨 적극적으로 구명 운동이라도 한 것 같은 느낌인데, 내가 그렇게까지 행동한 건 아니었는데.


“아닌가. 나는 그렇게 전해 들었다만.”


“누구한테 전해 들었는데요?”


“가닐영.”


윽... 생각해보니 그 자리에 가닐영이 있었지.


“그게... 제가 구했다고 말할 정도는 아닌데요.”


그러나 내가 그렇게 솔직하게 말했더니, 후작은 묘한 눈빛을 한 채 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자네가 아니었으면 죽었겠지. 그렇지 않은가.”


또 윽... 이야기가 그렇게 되나? 그런데 또 그렇게 생각하자니, 그게 틀린 말은 아니긴 했다. 내가 말리지 않았다면 블라도스 씨가 진작에 리체를... 으음, 자세히는 생각하지 말자.

그러나 자세히 생각하려고 했어도 자세히 생각할 틈은 없었다. 내가 잠시 기억을 떠올리느라 잠시 침묵한 사이, 후작은 그 침묵을 긍정의 표시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위압감 넘치는 말투로, 후작은 갑작스레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내들었다.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엑?”


의외여도 보통 의외인 이야기가 아니었는지라 나는 나도 모르게 그리 중얼거렸다. 물론 예의가 없는 일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이게 또 머리로 알고 있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후작이 이런 말을 한다고? 놀랄 일 아냐? 그러나 알고 했든 모르고 했든 내가 그렇게 중얼거린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에, 나는 곧 이어 즉각 사과했다.


“아, 죄송합니다...”


“아니다. 나도 지금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이런 낯 뜨거운 이야기는 하지 않았을 테니까.”


후작은 그렇게 말하는 것으로 내 실수를 덮는 한편, 자신의 행동에 대한 정당성까지 확보해냈다. 그런 연륜 있는 대처에 순간 나는 살짝 감탄했지만, 아쉽게도 지금 상황은 마냥 속 편하게 감탄이나 하고 있을 만큼 평온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후작이 꺼낸 표현이 묘하게 마음을 울려왔다.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나는 그 표현을 두어 번 마음속으로 중얼거려보았다.


“왜 그러나.”


지금 이렇게 태평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닐 텐데.


“...지금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고 있죠?”


나는 나도 모르게 불쑥 그렇게 묻고 말았다. 스스로도 그런 질문을 던진 뒤에 어라? 하는 생각을 할 정도였으니까, 후작에게는 더더욱 갑작스러운 질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후작은 그다지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그런 질문을 던진 나를 잠시 쳐다보다가 툭 던지듯 대꾸했다.


“...알고 있다.”


“소형을 받아들이는 건가요?”


시아가 그 여자애를 살려줄 생각이 없다 해도? 그러나 그 질문을 잇는 것은 뭔가 부적절한 기분이 들어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나 후작은 그런 내 생각을 이미 읽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마 곧 알게 될 것이다.”


윽, 오늘 아침에 시아에게서 들었던 이야기가 또 다시 후작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바람에 나는 나도 모르게 흠칫 놀라고 말았다. 그러나 둘 다 속 시원히 답을 주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기에, 나는 답답함을 느끼면서 다시 한 번 물었다.


“그 말은... 시아가 그 여자애를 살려줄 거라는 말인가요?”


다시 똑같이 되물었지만, 후작의 눈동자는 이번엔 흔들리지 않았다. 잠시 침묵한 후작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것도 곧 알게 되겠지.”


명확하게 말하지는 않았어도, 사실상의 긍정이었다. 하지만 당장 오늘 점심에 시아에게서 들은 내용과는 정반대의 이야기에 나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그러나 내가 그렇게 혼란에 빠져있는 사이, 후작은 또 다른 이야기를 꺼내들었다.


“말난 김에 하나만 더 부탁하지.”


“하나 더?”


잠깐, 이 사람이 자꾸 죄수라는 걸 망각한다니까. 한때 왕국의 재상이었다는 사실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런 상황에서조차 후작의 말투에는 위압감이 있었다. 그리고 그 위압감 넘치는 말투로, 후작은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내들었다.


“리체를 부탁하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2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판상츠모사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95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22] 23.09.29 20 1 24쪽
294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21] 23.09.27 22 1 19쪽
293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20] 23.09.26 25 1 16쪽
292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19] 23.09.25 24 1 19쪽
291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18] 23.09.24 32 1 14쪽
290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17] 23.09.23 25 1 22쪽
289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16] +2 23.09.22 28 1 14쪽
288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15] 23.09.21 27 1 20쪽
287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14] 23.09.20 27 1 20쪽
286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13] 23.09.14 30 1 19쪽
285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12] +1 23.09.09 31 2 26쪽
284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11] 23.09.08 25 1 23쪽
283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10] +1 23.09.03 30 2 21쪽
282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9] 23.09.02 28 1 22쪽
281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8] 23.09.01 30 1 21쪽
280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7] 23.08.30 33 2 21쪽
279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6] +1 23.08.29 33 2 27쪽
278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5] 23.08.28 35 2 17쪽
277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4] 23.08.27 30 2 19쪽
276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3] +1 23.08.26 34 2 17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