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꽃마리 - 봄에 피고 지는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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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진사로
작품등록일 :
2013.11.07 00:20
최근연재일 :
2018.07.23 00:16
연재수 :
2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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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6.27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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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봄꽃마리 - 봄에 피고 지는 꽃

DUMMY

2월 5일.

엘린츠는 일찌감치 집을 나서 보르니온 영지로 향했다.

군청색의 단정한 세미 정장의 왼쪽 옆구리에 남작을 상징하는 문장이 붙어 있었다.


보르니온 영지 입구의 연못을 돌며 주위를 둘러보는 표정은 며칠 전 이곳에 섰을 때와는 달리 매우 평온했다.


“그래. 오늘이야. 오늘······.”


엘린츠는 레이네에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있었고,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기다려 왔다.

오늘이 바로 그것을 말하는 날이다.


“내 청을 받아 주지 않는대도 괜찮아. 지난 보름간 나는 웃었고, 즐거웠고, 행복했으니까.”


귀여움, 예쁨, 웃음, 진심, 즐거움, 고마움, 기쁨, 그리고 행복.

레이네를 만나지 않았다면 몰랐을, 혹은 잊고 살았을 단어들.

행복이란 단어를 네댓 번 되뇌는 그에게 은은한 미소가 함께했다.

그런데!


“어?”


연못 한구석의 돌 쪽에 뭔가가 보였다.


“앗!”


엘린츠는 낯익은 그 색깔과 자태에 놀라며 제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돌 틈 앞 아침 햇살이 내리는 공간에 핀, 조그맣고 아름다운 꽃.

다섯 개의 상아빛 꽃잎, 조그맣고 빨간 암술, 그리고 와인빛이 도는 꽃받침까지.

그의 기억에 남아 있는 유일한, 레이네와 꼭 닮은, 바로 그 꽃!


“이, 이 꽃이 또 있네?”


엘린츠는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다.

꽃잎이 얕은 바람에 흔들렸다.

그는 벌떡 일어나서 하늘을 한동안 응시하다가 다시 꽃을 보았다.

꽃은 여전히 흔들렸다.

그는 다시 쪼그려 앉아 꽃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기억에 남은 향기가 그의 콧속으로 들어왔다.


“이게 현실일까 망혼일까?”


엘린츠는 꽃을 만져보기로 결심했다.

그의 손이 조심스럽게 꽃으로 다가갔다.

상아빛 꽃잎이 부드럽게 만져졌다.

따뜻해지는 느낌마저 고스란히 그의 손을 타고 전해져 왔다.

그는 반대쪽 손으로 자신의 뒷목을 꼬집어 보았다.


아아! 이 꽃이 정말로 있었구나. 내가 본 게 헛것만은 아니었던 거였어!


엘린츠는 뭔가 모를 감정에 휩싸였고, 가슴이 벅차오르는 느낌마저 받았다.


키르센스여! 감사합니다. 오늘, 제게 다시는 오지 못할 이 중요한 날에 기쁨과 행복을 내려 주신 은혜.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그는 꽃의 향기를 맡으며 한동안 꽃잎이 살랑대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오빠!”

“아! 레이네 왔어?”


엘린츠의 미소가 더 짙어졌고, 그것은 레이네도 마찬가지였다.


“뭐 하고 있었어요? ······어?”


레이네도 엘린츠의 발치에 있던 꽃을 보았다.


“오빠 봄꽃마리 보고 있었네요?”

“봄꽃마리?”

“네. 꽃마리 중에서 유일하게 봄에 펴요. 가장 빨리 피고 빨리 져요.”

“그렇구나.”

“이게 내가 제일 좋아하는 꽃이에요.”


레이네의 말에 엘린츠가 깜짝 놀랐다.


“조그만 꽃이 화려하진 않아도 귀엽고 예쁘잖아요. 일주일은 더 있어야 필 줄 알았는데 벌써 폈네?”

“원래 2월 중순에 펴?”

“네.”

“그때 피고 언제 지는데?”

“4월 말쯤?”

“그래. 가르쳐 줘서 고마워.”

“뭘요.”

“레이네. 여기, 잠깐 앉아 볼래?”


엘린츠는 봄꽃마리 옆에 있던 마르고 평평한 돌에 자신의 손수건을 두 장 깔고 레이네를 앉혔다.

그는 제자리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레이네와 봄꽃마리를 번갈아 쳐다본 후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떨렸다.


“부탁, 아니 청이 있어.”

“네. 얘기해요.”

“후우! 저, 저기······.”

“······?”

“레이네?”

“네.”

“내, 내 연인이 되어 줘.”


레이네의 눈이 더할 나위 없이 커다래졌다.


“레이네를 보고 만난 후부터 나는 언제나 즐겁고 기뻤어. 내 마음은 늘 레이네에게 있었고.”

“······.”

“내 마음은 앞으로도 늘 그럴 거야. 레이네에게 가장 멋지고 좋은 사람이 되도록 항상 노력할게.”


엘린츠는 조그만 상자를 열어 레이네에게 내밀었다.

상자 안에는 커플링 세트가 있었다. 가느다란 호박 링에 자수정을 박아 넣고 마법까지 가하여 완성한 반지.


“내 마음, 받아 줄래?”


레이네의 눈이 떨렸다.


“다, 당장 답변하지 않아도 괜찮······.”

“오빠. 나, 그 얘기 많이 기다렸어요.”

“······!”


레이네의 빠른 답변에 엘린츠의 말문이 턱 막혔다.


“나 어리고 철없는데 괜찮아요?”

“철없지 않아. 레이네는 현명한 사람이야.”

“네. 얼른 끼워 주세요.”


두 사람은 서로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준 후 손을 마주 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고마워요. 나, 오빠의 연인으로서 오빠에게 늘 예쁘고 귀엽고 현명한 여자가 될게요.”

“이미 그런 사람이야.”

“오빠도 이미 멋지고 좋은 사람이에요. 나는 오빠가 멋지고 좋은 사람인 걸 세상 사람들 모두가 알게 만들 거예요. 오빠의 꿈에 함께할 거고요.”

“고마워. 정말······.”

“그리고 오빠.”

“응?”

“아직도 많이 아파요?”


엘린츠는 놀랐지만 고개를 저었다.


“앞으로도 오빠가 힘들 수 있다는 건 알아요. 꿈을 이루기 위해 해야 할 일이 쉽지 않다는 것도 알고요.”

“······.”

“그럴 때는 제일 먼저 나한테 힘들다고 얘기해요. 힘든 게 한 덩어리면 오빠는 반만 갖고 나머지는 나 줘요.”


엘린츠의 가슴이 내려앉았다.


“어, 어떻게 그런 얘기까지 해······.”

“나도 많이 생각했어요. 오빠한테 짐이 되는 여자는 싫으니까요.”


엘린츠는 레이네의 두 어깨를 조심스럽게 잡았고, 레이네는 고개를 숙여 그의 가슴에 이마를 대었다.


‘아아아!’


봄꽃마리 향기가 쏟아졌다.

두 사람의 눈이 떨렸지만, 얼굴에는 더없이 행복한 미소가 비어 나왔다.


***


엘린츠와 레이네는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장소에서 손을 맞잡고 대화를 나누었다.


“이 꽃, 레이네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꽃 앞에서 얘기해서 참 다행이야.”

“오빠도 이 꽃 좋아해요?”

“응. 이름은 몰랐지만 좋아했어. 그러고 보니 할 얘기가 또 있네.”

“네.”

“지금부터 내가 할 얘기, 레이네는 믿기 힘들 수도 있는데 내겐 사실이고 진심이야. 가문의 명예와 부모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할게.”


레이네가 고개를 끄덕이자 엘린츠는 다소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지난달에 이 꽃을 보았어.”

“네?”

“한겨울에 꽃이 핀 게 신기하기도 하고, 귀엽고 예쁘기도 해서 한동안 넋을 놓고 꽃을 보며 향기까지 느꼈는데, 연못에 동전을 넣고 기도하는 사이에 꽃이 사라졌어.”


레이네가 깜짝 놀랐다.


“처음에 나 봤을 때요? 소원의 연못에서?”

“응. 아무리 찾아봐도 없었어. 분명히 여러 번 찾았는데도 그랬어.”

“봄꽃마리가 오빠의 눈에 보였다가, 사라졌다고요?”

“응. 믿기 힘들지?”


레이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믿기 힘든 것이 아니라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레이네는 엘린츠가 이 말을 아주 심각하게, 자신의 진심을 담아 말했음을 알았다. 게다가 엘린츠는 이 말을 하기 위해 자신의 가문과 부모님의 이름까지 걸고 맹세하지 않았는가.


레이네의 머릿속에 두 사람의 첫 만남이 떠올랐다. 먼발치의 엘린츠는 소원의 연못을 향해 기도를 올렸고, 무엇인가를 찾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때 그가 찾던 것이 바로 봄꽃마리였다는 뜻이다.


“그때 레이네가 내게 와 주었어.”


엘린츠는 아직도 그날을 생생히 기억했다. 봄꽃마리가 사라진 직후에 봄꽃마리처럼 다가온 레이네의 모습을.


“그리고, 이건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가 아니라······. 나는 레이네의 첫 모습이 그 꽃으로 보였어.”

“······!”

“꽃잎 같은 얼굴, 꽃받침 같은 머릿결, 암술을 닮은 입술. 향기까지 같았지.”

“······.”

“나중에 한참 생각해봤는데, 키르센스께서 내게 범상치 않은 일이 생길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꽃을 먼저 보여 주어 알려 주신 거로구나. 그렇게 생각했어.”

“네.”


레이네가 고개를 돌리자 엘린츠는 미안함을 느끼면서도, 계시라는 단어까지 말하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레이네는 그의 말을 모두 알아들었다.

그가 말한 ‘범상치 않은 일’이 자신을 만난 일이기에, 그것이 결국 계시였다는 사실까지 모두.


“휴우. 미안해. 내가 내 감정에 취해서 부담스런 얘기를 많이 했네.”

“아니요! 나 괜찮아요. 그리고 오빠.”

“응?”

“꽃에 대고 귀엽고 예쁘다고 말한 적이 있다던 게, 이 꽃이었어요?”

“응.”

“소원의 연못에서 올렸던 기도도 이 꽃에 관한 거였고요?”

“응.”

“그럼 결국 그 기도도 나를 향해 올린 거네요.”

“그렇지.”


엘린츠는 고개를 깊이 숙이며 눈을 감았고, 소원의 연못에서 빌었던 기도의 내용을 떠올렸다.


키르센스여!

제 연인을 지켜 주시옵소서.

지금 잡은 이 손을 놓지 않게 하시옵소서.

저 역시 제 모든 것을 다해 제 연인을 지키겠나이다······.


엘린츠가 기도를 끝내자 레이네는 그의 손을 더 꼭 잡아 주었다.


“오빠 오늘 옷이 평소에 입는 거랑 다르네요? 오늘 무슨 일 있어요?”

“그건 아닌데, 오늘이 아버님 돌아가신 지 백 일 되는 날이라서 이렇게 입었어.”

“아! 그래요?”


어떤 이들은 가까운 사람이 타계한 날로부터 백 일, 1년, 3년인 날 짙은 색 정장을 입어 애도하곤 한다.

레이네는 고개를 끄덕이다 엘린츠를 밉지 않게 째려보며 말했다.


“혹시 오늘 고백해야겠다고 계획했던 거였어요?”

“어?”

“오늘쯤 얘기해야 하는데, 하고 나가면 오빠가 말을 안 해서요.”

“아, 아니······.”

“오빠가 하도 말을 안 해서, 만날수록 내가 별로였나, 내가 너무 튕겼나,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고요.”


엘린츠는 예상치 못한 말에 순간 당황했다.


“아니, 그게, 반지가 어제 나와서 그랬어. 마법까지 거느라고 오래 걸렸대.”

“······.”

“아무것도 없이 어떻게 고백을 해.”

“풉!”


엘린츠는 레이네가 웃는 모습이 흩날리는 꽃잎 같다고 생각했다.


“오빠 아버님은 어디 계세요?”

“‘귀인의 안식처’에 계셔.”

“그럼 우리 거기 가요.”


또 한 번 예상치 못한 말.


“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

“내가 가고 싶어서 그래요.”

“······.”

“가요. 응?”


레이네는 엘린츠의 답변도 듣지 않고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엘린츠는 자신도 모르게 디뎌지는 발걸음이 가벼워졌음을 느끼고 싱긋 웃었다.


“지난주에 샐리가 그랬어. 어떨 땐 레이네가 이십 대 중반쯤인 것 같다고.”

“걔가 철이 없는 거예요.”

“후후.”

“근데 그 얘긴 왜요?”

“아버님한테 가자니까 갑자기 생각나서. 어차피 다 보고 계실 텐데······.”

“허락받을 수는 없어도 찾아뵈어야죠. 예의가 있지.”

“어? 어.”


엘린츠는 헤벌쭉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반대로 돌렸다.

왠지 모르게 자꾸 웃음이 나왔다.


***


한 시간 후, 엘린츠와 레이네는 이스트번 시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한 ‘귀인의 안식처’에 왔다.

귀인의 안식처는 왕국에 대한 충성심과 공적이 증명된 귀족 가문의 묘지로, 영지가 없는 귀족들이 주로 묻히는 장소이다.

평소 다니던 길과 반대쪽으로 가는 마차 안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미소를 보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콜로세린 가주님과 보르니온 가문의 영애님. 신분 확인되었습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감사합니다.”


이윽고 엘린츠가 한 장소 앞에서 멈춰 서자 레이네의 시선은 그가 선 곳의 비석으로 돌아갔다.


“앉지 마. 다리 아프니까.”


엘린츠는 부모님의 비석 앞에 무릎을 꿇어앉아 국화꽃을 올려놓은 후 비석을 응시했다.

그의 입에서 아주 느리게 말이 나왔다.


“아버님. 저 왔습니다. 백 일만이네요. 잘 계셨지요? 엄마도 잘 있었죠? 형도? 엘론도?”


레이네도 국화꽃을 올려놓은 후 엘린츠의 어깨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기쁜 소식이 있어서 왔습니다. 좋은 모습 보여 드리려고요.”


엘린츠가 레이네의 손을 꼭 잡았다.

담담하던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나오기 시작했다.


“엄마. 저 이제 웃게 되었어요. 엄마가 웃으라고 하셨는데도 웃지 않았는데, 저 벌써 며칠째 웃기만 하네요.”

“······.”

“이 사람이에요. 엄마도 못한 일을 한 사람이요.”

“레이네 보르니온이라고 합니다.”


레이네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고, 엘린츠가 뒷말을 이었다.


“엄마. 죄송한 말씀인데, 이 사람 말이에요. 엄마보다 분명히 예쁘고 귀엽죠? 모든 게 장점이지만, 무엇보다도 마음의 그릇이 크고 현명한 사람이에요. 제가 오늘 이 사람에게 제 마음을 고백했는데, 이 사람이 여기 오자고 했어요.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사람이에요.”


엘린츠의 말투가 너무 따뜻해서일까.

레이네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제가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앞으로 더 잘해야 해요. 이 사람이 남자밖에 없는 소굴에 떨어져도 저만 보일 정도로요······. 아버님. 귀한 사람일수록 조심해서 대해야 한다는 말씀, 잘 기억하고 실천하겠습니다. 지켜봐 주세요.”


이 말은 엘린츠 자신의 다짐이었고, 부모님께 말하는 형식을 빌려 레이네에게 하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아버님. 엄마. 형. 엘론. 어둠의 세상에서 저희를 지켜보고 응원해 주세요. 이 사람이 제 꿈에 함께한다고 했어요. 저는 최선을 다해 제 꿈을 이뤄내고 이 사람과 함께 행복하게, 지금처럼 웃고 지내겠습니다. 그 말씀 꼭 드리고 싶었어요.”


레이네는 고요한 묘지에 지나가는 은은한 바람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두 사람은 잠깐 동안 그렇게 말없이 있었다.


“아버님. 엄마. 조만간 또 올게요. 편하고 행복하게 지내세요. 제 걱정은 마시고요.”


엘린츠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레이네는 무덤을 향해 고개를 깊이 숙인 후 그를 따랐다.


“오빠.”

“응.”

“이제 어머님이라고 불러 드려야 하지 않아요?”

“그렇긴 한데, 엄마가 돌아가실 때 서른 살이었고 나는 아홉 살이었어. 내 기억이 거기에 멈춰 있어서······.”

“네.”


두 사람은 귀인의 안식처를 나왔다.

엘린츠는 레이네의 손을 잡으며 따뜻한 눈길을 보내려고 노력했다.


“레이네. 고마워.”

“아니에요. 근데.”

“응.”

“혹시 카타룽카 호수가 이 근처예요?”

“응. 여기서 걸어가면 30분쯤 걸릴 거야. 역마차가 다니지 않는 곳이라 걸어가는 게 나아.”

“······.”

“거기 가서 점심 먹을까?”

“······.”

“카타룽카 호수에는 잉어 요리가 맛있는 집이 많아. 가 본 적은 없지만, 귀족 분들이 자주 찾는 음식점도 알고.”

“······.”

“잉어 요리는 몸 기운을 키우는 데도 좋아.”


레이네가 말이 없자 엘린츠가 그녀를 보았는데, 표정이 일그러져 있었다.

엘린츠는 걸음을 멈추고 레이네의 손을 잡은 후 자리에 쪼그려 앉아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레이네는 고개를 돌리며 엘린츠의 시선을 피했다.


“그곳에 좋지 않은 기억이 있어?”


레이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좋은 날 내가 이런 옷을 입어서, 여기에 와서 이러네. 미안해.”

“아니에요.”

“무슨 일인지 얘기해 줄 수 있어?”


레이네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어, 엄마요.”

“······!”

“엄마가······.”

“응. 알았어. 얘기하지 않아도 돼.”


엘린츠는 고개를 여러 번 끄덕였다. 레이네가 말한 ‘엄마’가 보르니온 영주의 부인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다.

엘린츠는 자신의 손에 힘을 주었다.


“저기. 레이네?”

“네.”


눈이 다시 마주쳤다.


“나는 뵙고 싶어.”

“······.”

“내가 많이 부족해서 보여 드리기가 싫은 게 아니라면······.”

“아니에요. 그런 거.”

“그럼 가자. 레이네는 오늘이 아니라도 언제고 가고 싶을 거야.”

“······네.”


엘린츠는 레이네의 왼손을 자신의 오른손으로 깍지 끼어 잡은 후 그녀의 외투에 손을 넣었다.

두 사람은 눈 쌓인 관도를 다시 걷기 시작했다.


카타룽카 호수에 도착하자마자 엘린츠는 레이네에게 난롯불을 쬐게 하고 차를 사 주었다.

그것은 쌀쌀한 관도를 오래 걸어서이기도 했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누군가 돌아가셨을 때 유골을 뿌리는 장소가, 이 호수에서는 어디죠?”

“저쪽 간이 선착장에서 보면 반대편에 여러 집들이 보여요. 선착장에서 그쪽 방향으로 조각배를 몰아서 호수 한가운데에서 뿌리죠.”

“예. 감사합니다.”


상점 주인과 대화를 나누고 차를 마신 후, 엘린츠는 레이네를 데리고 간이 선착장으로 갔다.


“레이네?”

“네.”

“저기 집들 보이지?”

“······.”

“여기서 저 집들 쪽 방향으로 가다가 한가운데래.”

“네.”


레이네는 엘린츠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나란히 서자 호수에서 서서히 물안개가 피어났다.


“내가 먼저 어머님께 말씀 올릴게.”

“그래요.”


레이네의 표정은 일그러져 있었고, 엘린츠는 그녀의 어깨를 쓸어 준 후 호수 한가운데로 시선을 돌렸다.


“어머님. 저는 엘린츠라고 합니다. 이 사람 레이네의 연인이고요.”


그의 눈빛은 차분했지만 빛났다.


“이 사람이 오늘 제 마음을 받아 주었습니다. 어머님께서 이 귀한 사람을 아프게 낳으시어 제게 보내 주신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이 사람과 저, 우리를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가겠습니다. 부디 어둠의 세상에서 굽어살펴 주세요. 어머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엘린츠의 말은 느렸지만 힘이 있었다.

그의 말이 끝나자 레이네가 한 발 앞으로 나왔다.


“엄, 마. ······엄마!”


레이네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엄마! 엄마는 왜 그렇게 빨리 가셨어요? 나한테 얼굴이나 보여 주고 가시지?”

“······!”


엘린츠의 눈이 크게 떠졌다.


“아빠가 뭐래는지 알아요? 나만 보면 나한테 미안하대요. 엄마랑 관련된 건 우리 집에 나밖에 없어서요! 내가 아빠한테 미안하려고 태어났어요? 네?”


엘린츠의 고개가 떨어졌다.


“나는 엄마 이름도 몰라요. 아빠건 누구건 안 알려 주니까요. 엄마가 입던 옷이고 쓰던 화장품이고 끼던 장신구고 뭐고, 어머니가 다 갖다 버렸대요! 아빠가 엄마 자꾸 생각할까 봐, 엄마의 영혼도 이 먼 곳에다 놓아 주었대요!”


엘린츠는 깨달았다.

레이네의 이 말은 샐리조차 모른다는 사실을.


“나 인물화 그리는 거 좋아하는데, 어머니는 내가 자화상 그리면 엄마랑 똑같다고 못 그리게 하고, 아빠랑 단둘이 있지도 못하게 해요! 아빠도 내가 엄마랑 똑같이 생겼다고 하는데, 내 꿈에서 엄마는 그냥 어둠 속에만 있다고요!”


그래서 집에 들어가면 방에서 혼자 지내는 거였구나!


엘린츠의 코끝이 시큰해지고 눈물이 고였다.


“엄마! 왜 그런 건데요? 나 영애 같은 거 안 해도 되니까 오래 좀 살지, 어둠의 세상이 뭐 좋다고 그렇게 빨리 가셨어요? 네?”


지금 이 순간, 엘린츠는 자신이 레이네의 마음을 완전히 공감할 수 없다는 점이 너무 안타까웠다.


“······흑!”


레이네는 아까부터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엘린츠 역시 그것을 알고 있었다.


어떤 말도 해 줄 수 없다.

위로조차 될 리 없다.


엘린츠는 자신의 외투를 벗어서 레이네에게 씌워 주고 어깨를 천천히 토닥이기만 했다.

한동안의 들썩임이 잦아들었다.


“여기 잠깐 앉자.”


엘린츠는 자신의 손수건을 벤치에 깔고 레이네를 앉혔다.


“오빠. 미안해요.”

“아니야. 무슨 그런 말을 해.”


레이네가 엘린츠의 어깨에 자신의 얼굴을 묻었다.


레이네! 미안해.

내가 서자가 아니어서, 그 마음을 다 몰라서 정말 미안해.


하지만 엘린츠의 말은 소리가 되지 못했다.


호수의 물안개가 서서히 사라졌다.

엘린츠의 어깨에 기대어 벤치 밑 땅을 보던 레이네의 눈에 조그만 꽃이 보였다.


봄꽃마리 두 송이가 서로의 꽃잎을 마주 댄 채 옅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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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8. 행복을 품은 그림 18.06.28 99 2 19쪽
» #7. 봄꽃마리 - 봄에 피고 지는 꽃 18.06.27 117 2 20쪽
6 #6. 가로수길에서의 고해(告解) 18.06.26 105 2 19쪽
5 #5. 예쁘고 귀여워서 더 무서운 소녀 18.06.26 139 2 21쪽
4 #4. 페퍼민트 향기에 씻겨 내려가다 18.06.26 110 3 13쪽
3 #3. 감사의 선물 18.06.25 99 3 17쪽
2 #2. 꿈속에서, 그리고 꿈 밖에서 16.05.16 615 3 19쪽
1 #1. 겨울에 피어난 꽃 13.11.10 1,429 24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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