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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음여류
작품등록일 :
2012.11.16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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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26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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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2.11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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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격변의 시[Episode : 어떤 복수] 06

DUMMY

“유야.. 신유!”


철야작업을 끝내고 현장 근처의 허름한 모텔에서 깜빡 잠이 들었던 선한은 기억나지 않는 악몽에 시달리다가 애타게 아들을 부르며 눈을 떴다. 언제나처럼 잠결에 메시지부터 확인하다가, 소스라치게 놀라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벌써 11시다.


“이런, 씨 팔!”


평소와 달리 왜 그리 깊이 잠든 걸까?


“병신..이 병신아!”


다급히 휴대폰의 단축키 1번을 누를 때, 마침 배터리가 다 된 휴대폰이 흥겨운 멜로디를 뇌까리며 그대로 임종에 든다. 시꺼먼 화면을 멍하니 내려다보던 선한은 버럭 고함을 지르며 욕설을 뱉었다.


“이런 씨팔, 신선한 너 치매 왔어? 오늘이 무슨 날인지 몰라? 이 병신아, 왜 충전하는 거 하나 제대로 못해!”


화장대 위 커다란 거울 속의 피곤에 찌든 중년인을 노려보던 그는, “지쳤냐? 지쳤으면 민폐 끼치지 말고 나가 뒈져.”라고 중얼대며 잠들기 전 대충 벗어 던진 옷가지를 잡아 걸쳤다. 바닥에 널브러진 소주병들이 눈에 들어오자 토악질 하듯 욕설을 뱉었다.


“이 병신아, 제발 좀 끊어.” 그는 언젠가부터 입에 달고 살기 시작한 말을 뇌까리며 방을 나섰다.


좁다란 복도를 정신없이 내달리다가 엘리베이터가 1층에 있는 걸 발견하곤 곧장 계단으로 뛰었다. 주차장의 허름한 SUV에 올라서 시동을 걸고 액셀을 밟자 익숙한 멜로디와 함께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 되십시오.

“웃기고 있네.”


내비게이션을 힐끔 쳐다본 그는 혹시 더 빠른 길은 없을까, 하며 급히 주소를 입력했다.


-목적지까지, 2시간..

“이런 씨팔!”


순간 내비게이션을 부숴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일단은 핸들을 틀고 기어부터 변속했다.


“유야, 제발 무사해라.”


그의 간절한 바람에 어우러진 청아하고 단아한 목소리가 마치 그를 약 올리듯 들려왔다.


-약 2km 전방에서 왼쪽 직진입니다. 다음 안내 시까지 차선을 유지..


"시끄러! 이게 길도 잘 모르면서.."

-규정속도를 준수하십시오. 약 100m 전방에서 신호와 과속에 주의하십시오. 제한속도 60km..

"아니, 이 판국에 속도를 줄이라고? 그리고 길은 이쪽이 맞거든!"


끊임없이 들려오는 경고음을 채찍질 삼아서 정말로 미친놈마냥 액셀을 밟던 그는 어느 순간부터 길이 확 트이자 겨우 한숨 돌리며 주변을 살폈다.


‘11시 30분.’ 정오가 가까워져 오는 시간이었음에도 도로에는 승용차 한 대 보이지 않았다.


번듯한 건물이나 인가도 없이 휑한 도로변에는 한참 초록을 뽐내야 할 논밭이 방치돼 죽어 있고, 폐가로 보이는 초가집 몇 채와 부서진 비닐하우스만 눈에 들어왔다. 뒤쪽으로 덩그러니 선 민둥산이 버려진 무덤처럼 보여서 더 속도를 올릴 때, 불현듯 목소리가 들려왔다.


-약, 500m 전방에서 과속에 주의하십시오. 시속 80km 이하로 안전운행.. 약, 300m 전방에서 80km.. 안전..

"이런 씨팔, 놀래라. 이런 곳에도 카메라가 있다고? 너 지금 나한테 구라치는 거 아니야?"


급한 마음을 추스르려 아무 말이나 막 던져 대던 그는 오늘을 있게 한 놈들이 떠오르자 욕설부터 뱉었다.


“개 같은 놈들이 진짜 좆 같은 곳에도 사네.”


철전지원수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울화가 치밀었지만, 이상하게도 오래 가지는 않았다. 스멀스멀 덩치를 불린 위화감이 그들을 향한 분노를 희석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왜 이러지?' 그렇게나 바라고도 고대한 시간이 왔건만, 왜 흔들리는 걸까?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분노와 증오심이 들끓어야 정상인데, 이상하게도 계속 망설여졌다. 혹시 긴장해서 그런 걸까?


‘이 신선한이가 그까짓 일로?’ 애써 부정했지만, 슬금슬금 가슴을 조여오는 압박감에 숙취까지 몰려든다.


설마 그 개새끼를 대면하는 게 무서워서? 최근 들어 가위에 눌리는 것도 그 때문이라면..


‘그게 뭔 개소리야, 그런 게 아니라··· 혹시 2년 전에 들은 정보 때문에?’


몇 번이고 입술을 깨물며 고민하던 그는 불현듯 손을 들어 자신의 뺨을 후려쳤다.


“이 병신아,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집중해! 지금 그딴 거 생각할 때야?”


망상이 의심을, 그 의심이 다시 망상을 낳는 개 같은 상황에 매몰되면 일이 꼬이다 못해 틀어진다는 걸 그 역시 잘 알고 있었기에 몇 번이고 다시 뺨을 때린 뒤, 발악하듯 액셀을 밟았다.


‘복수도 좋지만 제일 중요한 건 하나 뿐이잖아. 이놈아, 그냥 무사만 해다오.’


-목적지에 도착하였습니다. 경로안내를 종료합니다.

“그래, 나도 알아. 저기에 보이네.”


산속으로 이어진 아스팔트도로의 끄트머리, 대형차 한 대 정도는 어떻게 지나갈 법한 너비의 비포장도로로 들어서는 경계선에 그가 서 있다. 말끔한 회색 세미정장을 입은 채, 언제나처럼 환한 미소를 머금곤 이리로 오라며 손을 까닥인다.


‘재수없는 놈. 그런데 진짜 인간이긴 한 건가? 그 포식자라는 놈들 중 하나 같은데..’


이렇게 보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해지자 그는 크고 깊게 심호흡하며 차에서 내렸다. 그리곤 뛰다시피 빠른 걸음으로 가서 일단 허리부터 숙였다.


“최 지부장님.”


살짝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고 자로 잰 듯한 미소를 머금은 놈이 부드러운 어투로 말을 걸어왔다.


“신유 씨, 조금 늦으셨네요.” 환한 웃음, 사람 좋아 보이는 말투, 그리고 인간성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냉혈동물의 눈동자.


그를 절대로 믿지 말라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자 신유는 이를 악물었다. 목과 손등 위로 보이는 기괴한 문신들.. 핏물을 머금은 듯 새빨간 혈문이 오늘따라 유달리 섬뜩해 보이는 건 기분 탓만은 아니리라. 저 괴물은 언제나 굶주려 있으니까.


‘뭐 때문인지는 몰라도 오늘은 더 그런 것 같은데.. 괜히 눈에 거슬리지 말고 잘해야겠다.’


그는 허리를 들다 말고 다시 숙였다.


“죄송합니다, 지부장님. 부산 작업이 예상외로 꼬여서 조금 늦었습니다.”


동민의 입꼬리에 걸린 웃음이 조금 더 짙어진다.


“무슨 말씀이시죠? 이미 늦은 게 사과한다고 달라지나요?”

“예? 아, 예. 이해해주신 거로 알고, 감사..”


어중간한 시비조의 말이라 어떻게 대충 넘어가려고 하자 동민은 여지없이 말을 끊었다.


“신뢰라는 게 아주 사소한 곳에서부터 무너지더라고요. 제 경험상 그런 관계는 싹이 트기 전에 잘라내는 편이 좋던데, 우리 신유 씨는 어떻게 생각하시죠?”


일순 신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지난 몇 개월간 봐왔던 저 냉혈동물의 잔혹한 행보가 눈앞을 스치자 맹독을 가진 구렁이에 감긴 듯 숨쉬기가 버거워진다. 무조건 사과부터 해야겠지.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지부장님.”


쉽사리 허리 들지 못하는 그를 지긋이 내려다보던 동민은 기계적인 웃음을 흘렸다.


“너무 그렇게 긴장하지는 마세요, 아직은 맑음을 믿고 있으니까. 자, 일단은 가시죠.”


그는 습관처럼 입가를 올려서 자로 잰 미소를 머금곤 비포장도로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등 뒤로 식은땀까지 흘리던 신유의 입에서 절로 한숨이 흘러나온다.


‘죽다 살았네.’ 그는 숨통을 바싹 조이던 긴장을 뱉어내며 천천히 허리를 들었다.


이곳에 올 때 봤던 도로변 사장된 대지와는 달리, 계절에 걸맞은 푸름을 자랑하는 수풀 사이로 그림처럼 이어진 길 하나가 보인다. 이렇게 얼핏 봐도 제법 그럴싸한 풍경이었지만, 맹독을 머금은 독사가 섬뜩한 피비린내를 풍기며 기어가고 있으니 뱀굴로 보였다.


‘아, 이거 너무 쫀 거 아니야? 여차하면 그냥 확 들이받아 봐?’


아직은 어리고 젊기에 그런 충동도 느꼈지만, 동시에 자신이 죽게 되면 배에 꽂힌 칼자루를 쥐고 웃을 놈이 바로 저 냉혈동물일거라는 생각이 들어 쓴웃음을 흘렸다.


‘왜 저놈을 만나기만 하면 나쁜 예감이 들까? 아버지 말대로 종자가 달라서? 아니면 단순히 놈이 더 강해서? 어떤 쪽이든 기분 나쁜 놈이야.’


벌써 저만치 앞서가는 동민을 말없이 노려보던 그는, “언젠가는..”하고 중얼댄 뒤 바닥을 박찼다. 그렇게 둘이 약 10여분 가량 산을 올랐을 때쯤 냉혈동물이 혼자 중얼거렸다.


-알겠습니다. 게스트를 준비시키고 10분 안에 합류하겠습니다.


슈트 안주머니에서 볼펜처럼 생긴 원통을 꺼낸 동민은 의아한 눈으로 자신을 보는 신유에게 빙그레 웃어주고는 원통의 끝부분을 살짝 돌려 빼며 말했다.


“일전에 보내드린 자료, 어떻게 하셨습니까?”


신유는 각종 도면과 정보들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암기한 뒤에 파기했습니다.”

“알겠습니다. 굳이 확인하지는 않겠지만, 지금 당신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그 정보의 정확도에 따라서 생사가 갈릴지도 모른다는 것을 명심해 두십시오.”


동민은 분리된 원통 속에서 검은색 콩 같은 것을 꺼내 들었다.


“지부장님, 그게 뭡니까?”


그는 대답 없이 원통을 조립해서 안주머니에 넣은 뒤 의문의 검은콩을 건네주며 오른쪽 귀를 두드렸다. 조심스럽게 콩을 받아 든 신유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곤 귓구멍 안으로 콩을 집어넣었다.


‘이거 좀 찝찝한데.. 무슨 자살 폭탄 같은 거 아니.. 어, 이게 뭐야?’


검은콩은 귀 안으로 쏙 파고들었는데 별다른 거부감이나 고통은 없었다. 그냥 평소에 쓰는 이어폰을 집어넣는 느낌이었다. 그사이 손바닥 크기의 금속 케이스를 꺼낸 동민은 검은색 소형 주사기를 하나 꺼내서 건네줬다.


“그건 또 뭡니까?”

“원하시던 겁니다. 당신이 쓸 수 있을 정도로 희석했으니까, 오늘 한 번 사용해 보세요.”

“설마 이게 그..”


동민은 그의 어깨를 살짝 두드려 주며 답했다.


“축하합니다. 그걸 사용할 수 있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잘 아실 거라고 믿습니다.”

“예, 지부장님. 정말 감사합니다.”


환히 웃으며 고개 숙이는 신유를 보며 기계적인 미소를 머금던 동민은 이내 얼굴을 굳힌 채 사무적인 어투로 말했다.


-예, 레이더. 게스트를 준비시켰습니다.

“예? 혹시, 저한테 하신 말씀입니까?"


뜬금없는 말이라 반사적으로 주변을 살피던 신유는 역시나 둘밖에 없다는 걸 깨닫곤 난처해 하며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지부장님. 제가 귀를 본다고 정신이 없어서.. 한 번만 더 말씀해주시면 새겨 듣겠습니다.”


자신의 말에 대답은커녕 쳐다보지도 않는 동민의 침묵이 무섭고 또 머쓱해서 괜히 뒷머리를 긁적이던 그는 갑자기, “뭐야?” 하고 중얼대더니 귓가를 더듬었다. 귓속에서 아날로그 라디오의 주파수를 잡을 때나 들었던 소음이 들려온 것이다.


‘뭐지?’


방금 귓속에 넣은 검은콩이 내는 소리라는 것을 직감하였음에도 낯설어 당혹스러워 할 때, 너무나도 청아해 계속 듣고 싶은 목소리가 귓전을 간질였다.


-신 유, 메인 게스트 신유 씨, 제 목소리가 들리나요? 들리면 지금 바로 신호 주세요.


작가의말

-재미있게 보셨으면 신호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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