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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음여류
작품등록일 :
2012.11.16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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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2.12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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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격변의 시[Episode : 어떤 복수] 07

DUMMY

그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흘렸다.


‘와, 목소리 하나로 사람을 녹이네. 어떻게 생겼을까?’ 그럴만한 상황에 기분이 아니었음에도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그냥 가슴이 설렌다.


피 끓는 청춘이라서 그렇겠지? 그래도 나름 산전수전을 다 겪었는데, 그냥 듣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묘한 기분이 들다니.. 그는 자신도 모르게 들뜬 숨결을 뱉다가 문득 든 생각에 이를 악물었다.


‘이런 병신이, 너 지금 뭐해? 정신차려, 이 새끼야! 오늘이 무슨 날인지 잊었냐, 이 미친놈아?’


고개까지 저으며 상황에 집중하려고 했지만, 귓가를 메아리치며 맴도는 신비로운 음색은 그저 예쁘고 듣기 좋은 게 아니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뭔가가 있었다. 그래서..


'그래도 딱 한 번 만 더 들어봤으면.'


때마침 눈앞의 독사와 눈이 마주치지 않았다면 휴대폰을 꺼내서 녹음이라도 했으리라. 그는 반사적으로 허리부터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리곤 헛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인간이 욕망하는 모든 매력을 가졌다 평하는 여성의 신비스러운 목소리를 들은 열아홉 피 끓는 젊음은, 부대에서 공수돼 온 초소형 무전기를 처음 사용한 날 괜히 부끄러워하며 여신의 물음에 이렇게 답했다.


-여..여보세요?

‘아, 이런 씨 팔! 하필이면..’


찰나 간의 침묵이 억겁같이 흘러 여신이 웃음기를 담아 답하려는 순간, 표독스러운 마녀가 대신해서 소리를 질렀다.


-신유, 병신 같은 짓 그만하고 빨리 뛰기나 해!


긴장과 흥분으로 날카로워진 목소리가 귓가를 때리자 당황한 신유는 동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 여자는 또 뭔가요?’ 그런 의문을 잔뜩 품은 눈동자에 저만치 올라가는 독사의 뒷모습이 비친다. ‘아, 뭐야?’


바삐 걸음을 옮겨 동민의 뒤로 따라붙던 그는 불현듯 푹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몰라도 혼자서 바보가 된 기분이라 솔직히 조금 그랬다.


“아, 쪽팔려.”


어디 가서 바보 취급 당하지 않으려면 입 다물고 눈부터 크게 뜨라고 했던 아버지의 주옥같은 명언을 떠올린 그는 조용히 동민을 쫓았다. 한데 왠지 몰라도 그의 걸음이 꽤나 무거워 보인다. 걷는 중 괜히 어깨를 풀고 하는 걸 보면 그 역시 느끼고 있는 듯했다.


‘왜 이러지? 에너지 드링크를 한 병 더 마실 걸 그랬나?’ 정도의 가벼운 생각만 할 뿐 원인을 찾지는 못했다.


서서히 뒤틀려가는 전장의 공기에 짓눌려 가고 있음을 그가 어찌 알겠는가? 꿈에서도 그렸던 복수의 붉음이 얼마나 참혹할지, 아직 어린 청춘으로선 알 도리가 없었다.


그저 “집중하자, 집중.”이라며 가엽게 중얼댈 뿐.


죽은 고깃덩이를 만지던 어린 청소부는 그렇게 살아있는 피의 향연장으로 들어섰다. 시체를 분해하는 것처럼 살인도 쉬울 거라는 망상을 품었겠지만, 과연 현실이 그럴까? 최동민을 따라서 집결지에 도착한 그는 표독스러운 목소리의 마녀와 일면식이 있다는 걸 깨닫곤 어색하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이 선생님. 어쩌다 보니까 이런 데서 다 뵙네요. 기억나실지 모르겠지만, 저 맑음의 신유입니다. 신선한 사장의..”

“알아.”


짜증스럽게 말을 끊고 대충 고개를 끄덕인 혜리는 바로 동민에게 물었다.


“언제 시작하죠?”


기계적인 웃음소리가 물음을 맞이한다.


“언제나처럼 멋진 전투복입니다.”


동민이 노골적으로 몸을 훑었지만, 그녀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살인을 할 때나 흥분하는 고자 새끼의 눈빛에 불쾌해 할 만큼 바보는 아니었으니까. 어쨌든 전투복이라는 말에 신유도 슬쩍 선생을 훑었다.


'오!'


요즘 여자들처럼 그냥 마른 게 아니라 수많은 운동과 무술로 단련된 탄력적인 몸매와 그를 감싼 검은색 스킨슈트는 놀랍게도 그를 독사와 한마음이 되게 하였다. 이 서글픈 청춘은 한 발 더 나아갔지만 말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해. 이 선생님이라면 그럴 수 있을 것 같아.’


허리에서 허벅지로 이어진 띠와 홀스터에 장착된 3단봉과 소음기가 장착된 베레타, 그리고 허리춤 다양한 크기의 파우쳐. 아마도 엽인들이 쓴다는 특별한 귀가 들어 있겠지. 이제 자신에게도 하나 있었고.


‘와, 저런 옷 입은 걸 실제로 볼 줄 몰랐는데.. 확, 달라 보이네 진짜, 죽인다.’


그녀의 섹시한 차림새가 차갑고 이지적인 외모와 기묘하게 어우러지며 더 선정적인 느낌을 주는 바람에 쉽사리 눈을 떼지 못할 때, 조금은 앳된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저기요, 이제 그만 좀 보시죠 이 변태 새끼야? 잘생기면 그렇게 막 봐도 돼?”


놀라 고개 돌리니 이 선생과 꼭 같은 슈트 차림의 인형 같은 소녀가 서 있다. 그녀는 기묘한 냄새를 풍겼는데.. 아니, 그런 느낌이 들었다는 게 맞는 말이겠지.


‘인간이 아니다?’


피부가 비정상적으로 창백해서 그런 걸까? 아니면 새하얀 목덜미에 그려진 새빨간 혈문이나 그만큼 붉은 입술 때문에? 많아봐야 또래 정도나 될법한 소녀는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뭔가가 분명히 결여된 상태였다.


'그런데 그게 뭔지를 모르겠어.'


그가 나름 심각하게 고민할 때, 소녀의 커다란 눈동자에 장난기가 어린다.


“야, 너 이번에는 나야? 어때, 이렇게 해주면 더 흥분돼? 우리 선생님만큼은 아니지만 나 라인 죽이지? 엉덩이도 보여줘?”


그녀는 묘한 색기를 흘리며 둔부를 쓸어내렸고 신유는 당황해 고개를 돌렸다. 자칭 산전수전을 다 겪었지만, 여자까지 마스터하기에는 아직 어린 나이였다. 사실은 여자와의 관계를 가급적 멀리하는 편이었다. 아마도 어머니의 일이 트라우마를 만들었으리라. 한데 저 도발적인 소녀가 그런 사실을 알게 뭐란 말인가?


“야, 너 왜 갑자기 순진한 척하고 그래? 볼 거 다 봤다 이거야?"


그녀가 화사한 미소를 머금은 채 다가오자 신유는 주춤주춤 물러섰다. 마침 이선생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와 둘을 잡지 않았다면, 뭔가 볼만한 일이 벌어졌으리라.


“희선아.”


좀 더 놀지 못한 게 아쉬운지 노골적으로 신유를 훑던 희선은 두말없이 돌아섰다. 슬쩍 고개 돌린 신유의 눈길이 그녀의 탄력적인 엉덩이에 닿은 건 우연일까? 아, 불타는 청춘이여. 옆에서 그 둘을 살피던 동민이 뜬금없이 농을 던진다.


“이거, 두 분이 썩 잘 어울립니다. 제가 자리를 한 번 만들어 볼까요? 이런 칙칙한 삶을 잠시나마 잊으시고..”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선생이 짜증을 내며 소리쳤다.


“지부장,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시죠? 그들이 어디에 있고, 언제 시작하는지부터 확실히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다시 기계적인 미소를 입가에 그린 동민은 손목시계를 보며 잠시 생각하다가,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포인터 3명을 가리켰다.


“안타깝군요. 자료를 보고 브리핑을 기억하신다면, 다들 각자의 위치에서 대기중이라는 것 정도는 알아차리셨을 건데.. 이혜리 엽인님, 묻기 전에 생각을 좀 하십시오.”


여지없이 혜리의 얼굴이 일그러지자 그는 유들유들한 표정으로 오른쪽 귀를 두들기며 말을 이었다.


“저들을 이끌고 여기에서 대기하다가 명령을 따르면 됩니다. 메인 게스트와 각 팀장만 무전을 들을 수 있으니까, 팀을 잘 이끌어 주십시오. 그리고..”


그가 말끝을 살짝 늘어뜨리며 입술을 핥는 순간, 봉제인형 같던 눈빛이 신유를 떨게 했던 뱀의 것으로 변한다.


“전투의 시작과 끝은 오직 그분만이 알고, 결정하십니다. 당신 따위가 간섭할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 이혜리 엽인님, 부디 선을 지키십시오.”


바로 한마디 하려던 혜리는 놈의 그분을 잘 알기에 억지로 말을 삼켰다. 도살자와 명진을 치료해주고 혈문을 새기는 대가로 망설임 없이 탈의 소유권을 넘겨준 자. 그가 지하 밀실과 미로의 비밀을 알려주지 않았다면 탈의 주인이 아니라 관리인으로서 10년은 살았으리라.


‘그가 탈에 관해서 어떻게 안 걸까? 송사부가 짐승 따위에게 가르쳐줬을 리 만무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다.


이후 몇 차례 교류가 더 있었지만, 아직도 현이라는 자의 정체를 다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간혹 명령조로 던지는 말을 거역할 수도 없었고.


‘그 빚만 아니었다면..’


문득 탈보다 더 소중한 걸 받은 게 떠오르자 그녀는 지극히 엽인다운 생각을 했다.


‘그걸 완성해서 그를 사냥하는 거로 갚으면 되는 거야. 그러니까 지금은 딴 생각 말고 전투에 집중하자. 그와는 하루 이틀 볼 게 아니니까.’


그렇게 머릿속을 정리하고 무장을 점검해가자 동민은 그녀가 자신의 말에 따른다 여겼는지, 만족스러운 미소를 한껏 머금은 채 신유에게 다가갔다.


“우리 신유 씨도 준비하시죠."

“예? 아..예, 지부장님.”


이선생과 함께 무기를 점검하는 인형 같은 아이, 희선을 한 번 더 힐끔 쳐다본 청춘은 양손으로 자신의 뺨을 두들기며, “집중하자, 집중해.” 라고 중얼대며 크게 한 번 심호흡했다. 그리곤 약 100여 미터 전방에 위치한 기도원의 정문으로 시선을 옮겼다.


“드디어..”


그는 이 갈리는 과거를 되새김질하며 거칠게 호흡을 골랐다. 솔직히 말해서 실감 나지 않았지만, 어쨌든 복수의 때가 온 건 분명했다.


“씨팔놈들.”


아버지의 몸에서 풍기는 피비린내를 견디지 못한 엄마는 현실을 외면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사이비교에 심취해서 저 지옥으로 들어갔고, 그 개 같은 일을 당하고 말았다. 어둠의 경로를 통해서 엄마의 소식을 듣게 된 형은 아버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혼자 움직였고 어느 가을날 머리만 돌아왔다.


‘네놈들한테도 똑같이 해줄게.’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동자에 정문을 지키는 건장한 사내 4명과 20대 초반 정도의 여인 2명이 비친다. 그녀들의 화장기 없이 순박해 보이는 얼굴을 보니 더 울화가 치밀었다.


‘저 여자들도 밤마다 윤간당하겠지. 그 개 같은 짓을 공덕이라 여길 테고..’


저들은 그 끔찍한 일을 신의 화신이자 손인 교주가 내린 축복이라 여기며 성심껏 행하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육체의 향락을 대가로 외부인을 유혹해서 이 지옥으로 끌어들일 게 분명했다.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그녀들과 이런저런 말을 하며 낄낄대는 놈들이 너무나도 역겹게 느껴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두 번 다시는 웃지 못하게 해줄게.’ 그는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을 가까스로 삼키며 메고 온 배낭을 열어 50cm 길이의 기계톱을 꺼내 들었다.


직업의 특성상 시체를 급히 분해해야 할 일이 많았고, 굳은 피부와 근육을 잘라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제법 큰돈을 들여서 이 놀라운 무기를 만들었는데, 티타늄합금으로 주문 제작된 이 기계톱은 남들에게는 조금 우습게 보일지 몰라도, 어쨌든 첨단시대에 발맞춘 무기였다.


‘아주 토막을 내야지.’


그런 섬뜩한 생각을 하며 작동 버튼을 누르자 거의 무음에 가까운 소리를 내며 톱날이 초고속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휘두를 필요도 없이 어떤 부위라도 가져다 대기만 하면 두부 썰리듯 잘려나가리라.


‘그때도 웃는지 보자.’


과학이 돈을 따르지 더러움을 가리지 않는다는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그런데 막상 사람을 죽인다고 생각하니 입술이 바싹 말라붙는다.


‘긴장하지 말자. 평소 하던 대로 그냥 썰면 되는 거야.’


그렇게 속으로 끊임없이 되뇌며 정문을 쏘아볼 때, 이질적인 소음이 귓가를 울렸다. 낯선 것 같으면서도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소리였다.


‘뭐지? 무슨 엔진소리 같기도 하고..’


급격히 가까워지는 기계음을 따라서 고개 든 그는 영화에서나 봤던 비행기를 발견하고는 떡 하니 입을 벌렸다.


“와, 역시 스케일이..”


제법 가까운 거리인데도 별다른 소음 없이 머리 위를 지나친 비행기는 기도원을 가로지르다가 이상한 물체를 뚝 떨어뜨리곤 유유히 사라졌다.


‘설마, 폭탄?’


작가의말

굉음과 함께 폭탄이 터지면서 에피소드가 끝난다면?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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