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Regre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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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풍광
작품등록일 :
2014.04.24 10:18
최근연재일 :
2014.04.25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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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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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14.02.09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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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
글자
9쪽

최후는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한다.

DUMMY

돌아가는 날을 얼마나 꿈꾸었던가.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끈적한 기름 때가 끼고 날이 죄다 빠진 검을 들고 난 그렇게 몇 번이나 전장을 내려다보았다. 시선 아래에서 비참히 움직이는 병사들은 아마도 후퇴 신호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겠지. 추측이나 의심이 아니다. 나도 저 진흙탕 속에서 굴러 봤기 때문에 뱉을 수 있는 말들. 한참 검을 휘두르다 해질녘 노을이 물든 언덕 위에 올라선 날이면 항상 처음 검을 잡던 때가 망치로 내려친듯 뇌리를 강렬히 때렸다.


"대장! 돌격을 전담했던 1기사단이 전멸했습니다!"

"궁수들을 호위할 중갑 보병단도 전멸 직전입니다! 어서 후퇴 명령을!"


마치 꿈 속에 서 있는 것만 같다. 다급한 목소리가 저 어둠의 심연에서 날아드는 악마의 달콤한 주문인 듯, 꿀을 바른 나긋한 유혹인듯. 아아. 그저 좋기만 했다. 여자의 몸으로 검을 들 수 있는 자가 몇이나 되었던가. 물론 검을 들기 위해 온갖 모멸섞인 시선과 수근거림을 들어야 했지만 나는 분명 행운아였다. 내가 아버님의 뒤를 이을 수 있다는 게 자랑스러웠고, 이 가문의 일원으로서 검을 든다는 게 행복했다.


"퇴각, 퇴각 신호를!"

"대장!"

"퇴각 신호는 없다. 이 언덕을 사수하라는 공왕 폐하의 명이 있으셨어."

"예? 하지만......!"

"궁수들을 언덕 위로 올려. 남은 보병들과 기사들은 전원 궁수를 보호하고 언덕으로 올라오는 길목을 차단한다. 여기서 저 병력 다 못 잡으면 우린 돌아갈 길이 없다."

"......"


목을 사정없이 긁고 가는 쇳조각이 평소답지 않은 거친 목소리를 내뱉는다. 2천대 2만. 그것도 사수할 성도 없는 버려진 병력들.


'네가 꼭 맡아주었으면 좋겠어. 이번 작전은 그만큼 중요하거든.'


마지막에 본 공왕은 진심이 가득 담긴 웃음으로 날 보고 있었다. 설마 내가, 이 내가 왕과 아버지의 희생양이 되어야 했을 줄은. 아버지는 권력을 위해 아들 같이 키워온 나를 저버렸고, 새롭게 즉위한 야심에 가득찬 공왕은 수도 점령을 위해 연인을 버렸다. 모두에게 배신당해, 모두에게 버려졌다.

그럼 역적 가문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지도 않았고, 나 또한 피의 늪에서 헤매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그간의 모순들을 뒤집을 수만 있다면, 내 죄를 씻어 내릴 수만 있다면.

다시 과거로 돌아가 이 모든 것들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세상은 언제나 내가 꿈꾸던 이상과 매우 동떨어져 있었다.


“푸하!”

“눈을 떠라! 이 악마!”

“네놈을 그렇게 쉽게 보내줄 거라 생각하지 마!”


거칠게 얼굴을 후려치는 물줄기에 고개를 든다. 작고 딱딱한 나무 의자에 매인 몸은 제 의지를 잃고 덜렁거리고, 인두에 의해 지져진 눈덩이가 쓰라려 눈물이 줄줄 흐른다. 이슈탈, 한 때 가장 사랑했던 여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지만 그저 멍하니 입만 벌린다. 그녀는 자기가 살기 위한 선택을 한 것이고, 나는 그 선택을 위한 도구였을 뿐이다. 도구는 자신을 어떻게 쓰던 주인에게 항의할 수 없다. 따라서 나 역시 그녀에게 그 흔한 욕조차 내뱉지 못했다.


“푸흐흐.”


심하게 부르튼 입술을 비집고, 퍼렇게 죽은 웃음이 튀어나온다. 하지만 이건 좀 심한 거 아니야? 내가 한 거라곤 시대에 맞춰서 살 길을 모색했던 것뿐인데. 도구로 써도 좋다고 말한 건 사실이지만 응? 이건 좀 아니잖아? 검을 휘두르다 보니, 어느새 피에 물들어 있었고, 주인을 따르다 보니 충견이 되었다가 지금은 도저히 구제할 수 없는 악마가 되어 있었다. 즐겁다. 너무나 즐거워 신이라는 게 있다면 멱살을 잡고 싶을 정도다. 내 인생을 관장하는 자가 누구이기에 나는 이런 저주받은 삶을 살아야 하는가. 그리고 왜 내가 살던 가문은 왕을 배신하고 역적의 감투를 뒤집어써야 했는가. 누군가 내 아비를 홀린 것이야. 내 삶을 송두리째 들어내기 위해 누군가 꾸민 일이다. 푸흐흐흐.


“다시 한 번 묻겠다. 네 뒤에 있는 자가 누구지? 내 암살을 지시한 자가 누구냔 말이다.”

“후흐흐……잔말 말고 그냥 죽여라.”

“정말 혼자 다 뒤집어쓰고 갈 셈이냐. 나는 너를 죽이고 싶지 않다.”

“이 일은 아무도 모른다. 나 혼자만이 계획하고 실행한 일이다.”

“어째서! 어째서 말을 하지 않는 거야! 누구든 좋아. 누구든 좋다고! 어떤 놈이건 이름을 대! 그 자가 성인이건, 현자건, 마법사건 내가 다 죽여주겠다. 네 대신!! 죄를 뒤집어씌워주겠단 말이다!!”

“다 필요 없다. 더 이상 사람을 엮어대지 마라.”

“으아악!!”


미친 놈. 제국의 황제이자 나를 가장 많이 아꼈던 친우는 결국 참지 못하고 집기를 집어 던졌다. 나를 아껴? 아니 어쩌면 그것도 거짓말이겠지. 그가 아낀 건 내가 아니라 내게 집착을 보이는 누이, 이슈탈이었다. 그년이 나를 붙잡고 우짖는 걸 지켜보며 즐기던 관음증 환자. 더 이상 은밀한 취미를 즐길 수 없다는 사실이 분한 거겠지. 후흐흐. 고문 도구들이 벽에 부딪쳐 나뒹굴고, 날카로운 송곳이 이리저리 날아다닌다. 한동안 제 분을 참지 못하고 그렇게 잡히는 건 죄다 집어 던진 황제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의 상기된 두 볼과 들썩이는 어깨가 오늘따라 더욱 처연해 보였다. 그가 제대로 서지 못해 비틀거리자, 무표정한 얼굴로 이쪽을 응시하던 이슈탈이 얼른 왕을 받쳤다. 그 모습에 왠지 울화가 치밀었다. 한낱 도구 주제에.


“오라버니. 너무 무리하셨어요. 얼른 들어가세요.”

“……처형은 내일이다. 일정에 차질 없이 준비해.”

“예? 하지만……”

“토를 다는 자는 모두 죽인다. 내일 당장 처형해.”

“알겠어요. 그럼 화형에 필요한 제단을 쌓도록 지시할게요.”

“그래. 그거면 됐다.”


그는 더 이상 나를 바라보지 않았다. 그저 이슈탈의 부축을 받은 채로 녹슨 철문을 벗어났을 뿐. 그저 어설픈 돌들이 얽혀 있는 바닥을 내려다본다. 죽고 싶은가, 아니면 살고 싶은가라고 묻는다면 당연히 살고 싶었다. 하지만 왕이 있고, 이슈탈이 있고, 형제들이 있는 제국에서 살고 싶은가 라고 묻는다면 나는 살고 싶지 않았다.


*


제단에 묶인 내게 앞에 있던 병사가 기름을 들이 부었다. 분노로 뜨거워졌던 머리가 그나마 조금은 차갑게 식혀졌다.한 쪽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더 괴로운 일이라, 불이 난 듯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 보았다. 그런다고 나아지는 건 당연히 없다. 히히. 어느새 제국에 찾아온 봄은 잔잔한 바람을 불어 주었고, 하늘은 더할 나위 없이 쾌청해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아직 불을 붙이지 않았기 때문일까. 죽음을 맞이할 거란 것도, 내 앞에서 축문을 읊어주는 신부의 움직임도 하나도 실감이 나질 않았다. 단지 실감이 나는 건 이 미치도록 뜨겁게 달아오른 눈동자뿐. 마치 더러운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에 전신이 살짝 떨린다.


모두가 나를 보고 서 있다.


오랜만의 처형은 그들에게는 신선한 자극이 되기 때문이겠지. 나는 눈이 마주치는 이들을 노려보았다. 내 인생은 이렇게 더럽고 비참했으니, 너희들은 이곳에 묶이지 않게 조심하렴. 굳이 그런 언어가 담긴 표정을 짓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저들의 인생, 적어도 나보단 나았을 저 인생들이 너무나 부럽다. 잔악하게 찢어주고 싶다. 그 어떤 이유를 대서든 갈가리 찢어버려 지금 이 자리에 세우고 싶다. 어차피 그들은 이곳에 묶인 자가 느끼는 감정의 한 톨만큼도 느끼지 못할 테니까.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 있는가!”

“……”


있을 리가 없지. 모두를 죽여 달라는 소원을 말하면 들어줄 텐가? 응? 후히히. 내가 고개를 젓자 고개를 끄덕인 병사가 횃불을 제단에 붙였다. 불은 금새 활활 타올라 제단을 삼키고 내 몸을 집어…… 으으아악!! 뜨거워! 뭐가 이렇게 뜨거워? 대체 이걸 어떻게 참아내란 말이야!! 살려줘. 살려줘, 살려줘, 살려줘!! 살고 싶어! 어째서! 어째서 나만 이런 꼴을 겪어야 해!! 저 년도, 저 놈도 나보다 더한 짓을 하고 산 놈들인데! 내 아버지를 찢어 죽이고, 어머니를 불에 태운 놈들인데. 어째서 나만……어째서…이런…더러운 꼴을……


알아.

나도 잘 알아.

감정을 죽인 척 해왔을 뿐이야.

애써 감적을 죽인 척 연기해 왔을 뿐이다. 증오와 번민에 가득 찬 내 본의를 벗어 던지고, 깨끗하고 성스러운 벨 발렌타인을 연기했을 뿐이야.



만약 내가 과거로 돌아간다면.

난 아마도 모두를 죽이고 말겠지.

그건 불타오르는 화염에 둘러싸인 내가 내뱉은 마지막 문장이자 바람이었다.


작가의말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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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죽음(8) +1 14.04.02 1,391 31 7쪽
30 죽음(7) +2 14.03.25 1,419 30 9쪽
29 죽음(6) +1 14.03.24 1,442 33 8쪽
28 죽음(5) +2 14.03.12 1,829 43 7쪽
27 죽음(4) +4 14.03.06 1,930 44 7쪽
26 죽음(3) +4 14.03.03 2,098 47 8쪽
25 죽음(2) +2 14.02.27 1,957 46 8쪽
24 죽음 +2 14.02.27 2,630 53 6쪽
23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8) +6 14.02.25 2,347 59 7쪽
22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7) +2 14.02.24 2,663 52 7쪽
21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6) +3 14.02.23 2,189 53 9쪽
20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5) +3 14.02.22 2,367 58 11쪽
19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4) +2 14.02.22 2,339 53 7쪽
18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3) +1 14.02.22 3,232 60 9쪽
17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2) +2 14.02.20 2,401 63 8쪽
16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 +4 14.02.20 2,801 70 9쪽
15 라슈벨 폰 발렌타인(5) +4 14.02.19 2,800 69 8쪽
14 라슈벨 폰 발렌타인(4) +6 14.02.18 2,740 63 8쪽
13 라슈벨 폰 발렌타인(3) +4 14.02.18 2,989 68 10쪽
12 라슈벨 폰 발렌타인(2) +2 14.02.17 2,950 76 8쪽
11 라슈벨 폰 발렌타인 +1 14.02.17 3,152 71 9쪽
10 머리는 추악한 진실을 숨겨두는 법(4) +2 14.02.16 3,303 78 7쪽
9 머리는 추악한 진실을 숨겨두는 법(3) +2 14.02.15 3,373 71 8쪽
8 머리는 추악한 진실을 숨겨두는 법(2) +4 14.02.15 3,874 88 9쪽
7 머리는 추악한 진실을 숨겨두는 법 +1 14.02.14 4,248 91 9쪽
6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5) +2 14.02.13 5,994 113 8쪽
5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4) +1 14.02.12 5,434 103 8쪽
4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3) +2 14.02.11 5,923 110 7쪽
3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2) +1 14.02.10 7,034 134 9쪽
2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 +7 14.02.10 6,480 122 8쪽
» 최후는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한다. +7 14.02.09 7,977 137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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