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Regre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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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풍광
작품등록일 :
2014.04.24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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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2.10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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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

DUMMY

세상은 아무리 해도 그의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것은 죽은 다음도 마찬가지다.

이제야 조금 안식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라는 그의 바람은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다.

제 1지옥에서 그는 나무와 풀 대신 날카로운 검이 빼곡하게 쌓인 산을 오르는 형벌을 받았다. 그것은 지금까지 그가 죽인 자들의 원망이 형상화된 것이오, 죽지 않아도 될 자들이 죽어 가슴 속에 칼을 품은 까닭이었다. 온갖 날카로운 것들이 발을 헤집고 때론 찢어발겼지만 사내는 묵묵히 산을 올랐다. 이 자들에겐 자신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도구이기 때문에 주인에게 막말을 할 수 없는 것과는 다르다. 어쩌면 그건 모든 것에 서툰 사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사과일지도 모른다.


제 2지옥에서 그는 뜨거운 물이 펄펄 끓는 강을 맨 몸으로 건너는 형벌을 받았다. 그것은 가족이 어긋나는 것을 막지 않은 탓이오, 보고서도 모른 체 한 탓이니 이 때만큼은 사내도 속 시원히 비명을 질렀다. 단순히 비명을 지르는 것 뿐만 아니라 아버지를 욕하고, 어머니를 욕하고, 제 형과 누이들을 모조리 씹었다. 망할 년, 미친 새끼, 거지 같은 반역자들까지. 패륜에 가까운 말을 지껄이던 그는 결국 강 중간까지 걸어와서야 입을 닫았다. 이미 온 몸의 살갗은 흐물흐물하다 전부 벗겨지고, 벌겋게 튀어나온 속살이 펄펄 끓는 물에 닿는 것은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의 고통이었으나 그는 더 이상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예의 그 무표정한 얼굴로 말없이 강을 건널 뿐이었다. 스스로가 해결해야 한다. 자신이 나서서 모두를 죽였어야 했다, 라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꽉 쥐어 잡았기 때문이다.


제 3지옥에서 그는 형틀에 묶인 채 혀를 잘리는 형벌을 받았다. 감히 왕의 누이를 겁탈하고, 세 치 혀를 놀려 그녀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는 죄목이었다. 이 때만큼은 그는 연신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자신을 먼저 유혹한 것은 이슈탈이며, 관음증이었던 왕은 그런 자신을 부추겼다고 울부짖었다. 하지만 혀는 계속 길어 나왔고, 형을 집행하는 자는 그 혀를 뭉툭한 검으로 썰어냈다. 결국 고통에 못 이겨 몇 번을 거꾸러진 그는 그 자리에서 4년 정도가 지나자 이내 더 이상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유혹을 당한 것도 자신이며, 관음증이건 나발이건 그의 부추김에 넘어간 것도 자신이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사내가 비명을 지르지 않자 3지옥의 수문장은 직접 4지옥의 문을 열어 주었다.


그리고 제 4지옥에서 그는 검은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 입은 악마를 만났다. 그간 무수한 형벌을 받으며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된 사내와는 대조적으로 악마는 온 몸에서 빛이 났다. 젤을 발라 깔끔하게 넘긴 머리와 번쩍이는 갈색 구두, 몸에 딱 맞는 검은색 정장과 오른손에 찬 시계가 굉장히 멋스러워 보였다. 그는 이미 수천, 혹은 수 만년에 가까운 시간을 산 자. 어느 공간, 어느 시대에서 날아오던 가장 최근의 시대를 살고 있는 악마는 그 수준에 맞는 옷과 스타일을 고수하고 있었다. 바로 그 때문에 모든 고문서에 그려진 악마의 모습이 항상 검은 바탕에 머리에 뿔(젤로 세운 머리)이 달려있다는 걸 사내로서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단지 악마니까 이상한 복장을 하고 있구나, 라고 생각했을 뿐. 다리를 꼰 채 앉아있던 악마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앞에 빈 자리를 가리켰다.


“여기에 앉으란 말입니까?”

“그래.”


이번엔 또 어떤 형벌이 기다리고 있을지. 도무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잔악한 지옥들을 맛보고 온 사내였기에 솔직히 4지옥에 대한 두려움도 만만치 않았다. 잠시 숨을 크게 들이쉬던 그는 조심스럽게 의자 위에 앉았다. 작은 나무 의자에선 뭔가 튀어나올 줄 알았는데, 1분 여가 지나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자 사내의 시선이 악마에게로 향했다. 언제 가져온 건지 차가운 음료수를 마시고 있던 악마가 피식 웃는다. 그는 자신의 옆에 나타난 다른 악마에게서 서류를 받아 들고는 천천히 넘기 시작했다.


“어디 보자. 벨 발렌타인. 15살에 집안이 반역을 일으켰다가 전부 몰살당했군. 이후에 개처럼 살다가 빈민가를 둘러보러 나온 이슈탈과 인연을 맺어, 궁에 기사로까지 발탁되었고. 이후에 왕의 명령에 따라 온갖 적을 다 죽이고 다니다가 이슈탈이 다른 남자와 통정한 사실을 알게……흐음. 사연이 많은 자인데?”

“예. 이 정도의 악운은 솔직히 저도 오랜만에 봅니다.”

“……제 4지옥의 수문장은 남의 인생 이야기나 즐기는 그런 자요?”


사내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던 악마가 씩 웃었다. 설마 지금까지 지옥을 거쳐온 자가 자신에게 말대꾸할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 그는 들고 있던 서류를 다시 옆에 서 있던 악마에게 넘겨준 뒤에 자세를 고쳐 앉았다. 꼬았던 다리를 풀고, 무릎 위에 양 손을 깍지 껴 턱을 괸 그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본래 제1지옥만 갔다고 할 지라도 지옥을 거친 자는 천국에 갈 수 없다. 결국 다시 환생하여 전생에 지은 죄를 씻을 수밖에 없지. 근데 이 업보라는 게 참 무서운 거라 전생에 지은 죄가 너무나도 많은 자는 다음 생에도 불우한 인생을 살게 된다는 거야. 바로 너 같은 자는 분명 지금 환생하게 된다면 기본적인 인권조차 보호되지 못하는 곳에서 여성으로 태어나게 될 가능성이 높다.”

“……”

“어때? 괜찮겠어? 인권이 없는 나라에서 여자로 태어난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라고?”

“그걸로 내 죄를 씻어야 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소.”

“후흐흐흐. 이거 생각보다 체념이 빠른 놈이네. 다른 놈들은 제발 한 번만 봐달라면서 울고 불고 난리를 쳤는데.”

“……”


사내가 아무 말 없이 입을 닫고 있자, 악마는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물론 그 자의 인생은 벌써 정해져 있다. 지나간 삶에 미련이 너무나 많고, 지은 죄도 보통의 환생으론 갚을 수가 없을 만큼 크다. 보통 이런 자는 다시 전생의 삶을 살게 해 지금까지 지은 죄를 한 번 변제해 주는 것이 원칙이었다. 물론 그 지옥 같은 삶을 다시 영위하게 되니 어쩌면 이 자에게 있어선 가장 큰 형벌일지도 모르겠지만. 본래 미래의 삶과 전생의 삶을 두고 흥정할 요량이었던 악마는 고개를 젓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자신의 뒤에 있는 방을 가리키며 사내에게 말했다.


“나가라. 가 보면 네 삶이 있을 거다.”

“새로운 삶?”

“글쎄. 과연 어떨지는 직접 느껴보면 알겠지. 어차피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


단 열 걸음 뒤에 나무로 된 작은 문. 그곳을 지나면 드디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는 건가. 사내는 괜히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더 이상 그들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기쁨과 더불어 그들을 죽일 수 없다는 진한 아쉬움이 동시에 흘러 들어온다. 이젠 완전히 잊어야 할 때인 것이다. 가족들도, 그들도, 과거로 가고 싶어한 자신의 욕망도. 모든 것을 그 자리에 내려놓아야 할 때가 되었음을 사내는 실감했다.


“어서 들어가.”


악마의 말에 홀리기라도 한 듯 잠시 주춤하던 사내는 성큼성큼 걸어 문을 열었다. 그 곳은 온통 새하얀 빛이 넘쳐나고 있어 눈이 부실 정도였다. 마치 어머니의 품처럼 따뜻하고, 받아놓은 뜨끈한 목욕 물에 들어간 것처럼 노곤하다. 잠시 멈춰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사내는 천천히 빛 속으로 들어갔다. 뒤에 서 있던 악마가 히죽, 웃음을 터트림과 동시에 사내의 정신은 아득해져 그만 갈 곳을 잃고, 끝도 없는 공간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작가의말

다시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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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죽음(6) +1 14.03.24 1,442 33 8쪽
28 죽음(5) +2 14.03.12 1,829 43 7쪽
27 죽음(4) +4 14.03.06 1,930 44 7쪽
26 죽음(3) +4 14.03.03 2,097 47 8쪽
25 죽음(2) +2 14.02.27 1,957 46 8쪽
24 죽음 +2 14.02.27 2,629 53 6쪽
23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8) +6 14.02.25 2,346 59 7쪽
22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7) +2 14.02.24 2,662 52 7쪽
21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6) +3 14.02.23 2,188 53 9쪽
20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5) +3 14.02.22 2,366 58 11쪽
19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4) +2 14.02.22 2,338 53 7쪽
18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3) +1 14.02.22 3,231 60 9쪽
17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2) +2 14.02.20 2,400 63 8쪽
16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 +4 14.02.20 2,801 70 9쪽
15 라슈벨 폰 발렌타인(5) +4 14.02.19 2,799 69 8쪽
14 라슈벨 폰 발렌타인(4) +6 14.02.18 2,739 63 8쪽
13 라슈벨 폰 발렌타인(3) +4 14.02.18 2,989 68 10쪽
12 라슈벨 폰 발렌타인(2) +2 14.02.17 2,949 76 8쪽
11 라슈벨 폰 발렌타인 +1 14.02.17 3,152 71 9쪽
10 머리는 추악한 진실을 숨겨두는 법(4) +2 14.02.16 3,302 78 7쪽
9 머리는 추악한 진실을 숨겨두는 법(3) +2 14.02.15 3,372 71 8쪽
8 머리는 추악한 진실을 숨겨두는 법(2) +4 14.02.15 3,873 88 9쪽
7 머리는 추악한 진실을 숨겨두는 법 +1 14.02.14 4,248 91 9쪽
6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5) +2 14.02.13 5,993 113 8쪽
5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4) +1 14.02.12 5,434 103 8쪽
4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3) +2 14.02.11 5,922 110 7쪽
3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2) +1 14.02.10 7,033 134 9쪽
»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 +7 14.02.10 6,480 122 8쪽
1 최후는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한다. +7 14.02.09 7,975 137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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