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Regre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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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풍광
작품등록일 :
2014.04.24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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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2.10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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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2)

DUMMY

한 살, 두 살, 세 살, 그리고 네 살. 사내의 어린 시절은 정신 없이 흘러갔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직 제대로 된 사고조차 하지 못해, 본능에 이끌리는 아이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때가 되면 젖을 빨고, 졸리면 자고, 깨면 갑갑함 때문에 우는 생활의 반복. 그리고 겨우 그 생활을 졸업한 게 사내가 네 살이 되던 해였다. 집에서 입혀준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정원에 앉아있던 벨은 가만히 작은 손을 눈 높이까지 들어올렸다.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벨의 작고 앙증맞은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정말 돌아왔을 줄이야.”


결국 그렇게 저주하고 증오하던 곳에 다시 돌아왔다는 사실이 작은 가슴에 파문을 일으켰다. 모두를 죽이겠다. 죽이고 말겠다고 울부짖었던 28살의 벨은 이제 다시 4살의 아이가 되었다. 그가 처절한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이제 24년이 남은 셈이었다. 벨은 손을 더 높이 들어 손가락 사이로 흩어져 오는 햇빛을 가만히 느껴보았다. 볼에 닿는 이 느낌, 따뜻함과 노곤함, 아무리 생각해도 거짓이나 환상 같진 않다. 그는 들어올린 손을 내리고, 눈을 감았다. 너무 어릴 때라 기억에 없는 줄로만 알았는데, 생각해보니 그간의 일생 중에서 가장 평온하고 지루한 때라 기억에 남지 않은 것 같다.


“도련님. 졸리세요?”


그의 옆에 그림자처럼 붙어 있던 유모가 묻는다. 벨은 살짝 눈썹을 찡그렸다. 정신까지 아이로 돌아왔다면 모를까, 지금 그는 28살, 닳고 닳은 성인이다. 사사건건 간섭하는 유모의 잔소리가 즐겁게 들릴 리 없었다. 벨이 아무 말 없이 눈을 감고 의자에 편히 기대니, 유모는 다정하게 웃었다. 그녀에겐 자신의 젖을 물린 벨은 친아들과도 같았다. 단지 모든 일에 흥미가 없고, 눈빛이 가라앉아 있긴 하나 그런 벨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유모는 행복했다. 자신의 몸을 살포시 덮어주는 유모의 손길을 느끼며 벨은 잠깐의 낮잠에 빠져들었다. 꿈 속의 꿈이라는 말이 떠올라 얼핏 웃은 것도 같은데 유모의 웃음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걸로 봐선 겉으로 드러나진 않은 모양이다. 그녀는 자신이 입 꼬리를 살짝 비집어도 이내 웃음을 터트리곤 했으니까. 잠시 눈을 감고 있던 벨이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모.”

“네. 도련님.”

“유모는 자기가 언제 죽을 거라는 걸 생각해 본 적이 있어?”

“아니요. 그런 것까지 생각할 만큼 한가한 때가 없어서……”

“유모의 끝은 정말 간단해. 정확히 일주일 뒤. 내 생일 파티에서 유모는 실수로 가져오던 차를 폐하의 옷자락에 쏟게 될 거야. 그 일 때문에 아버님의 검에 목이 베이게 되지.”

“도련……님?”

“죽기 싫으면 전력을 다해서 빠져. 아니면 차는 다른 아이에게 맡기던지. 명심해. 기회는 두 번 오지 않아.”

“하아……”


유모는 차갑게 말을 내뱉는 벨을 보며 전신을 떨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자, 의자에서 내려선 아이와 겨우 눈 높이가 맞아 들어간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까이에서 마주하는 에메랄드 빛 눈동자는 끝을 모를 공허와 허무로 가득 차 있었다. 유모의 입술이 덜덜 떨린다. 이 아이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잔인하고 신비롭다. 고작 자신의 젖을 빨았다고 해서, 그를 다 아는 것처럼 행동했던 자신의 무지함이 새삼 철퇴처럼 그녀의 머리통을 후려 갈겼다. 그런 유모의 어깨를 두어 번 치고 나서, 벨은 등을 돌려 걸어 나왔다. 이것은 하나의 실험이었다. 자신이 벨 발렌타인의 과거에 어느 정도까지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그가 던진 돌은 과연 파문을 일으킬 수 있는지에 관한 실험. 만약 유모가 살면 그의 과거는 변한다. 바꿀 수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유모가 죽으면 그가 아무리 지랄 발광을 해도 과거를 바꿀 순 없다. 그것을 벨은 알고 싶었다.


“명심해. 일주일이다.”


정원의 문을 열기 전, 벨은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유모를 바라보며 마지막 당부를 건넸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이제 다섯 살을 맞은 벨 발렌타인의 성대한 생일 잔치가 저택에서 벌어졌다. 이미 기사의 작위를 받고 이슈탈의 전속 기사가 된 큰형 라슈벨과, 아카데미 졸업을 눈앞에 둔 작은 누나 리엔, 대공과 어머니, 그리고 왕과 왕족들이 함께한 비밀 파티였다. 새벽부터 준비를 마친 하녀들이 흰 테이블 보를 깔아둔 길고 넓적한 상 위에 음식들을 늘어 놓았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멧돼지 고기부터, 날카로운 꼬챙이를 박아 넣은 꼬치 요리와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해산물이 들어간 탕까지. 그야말로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였다. 초대받은 왕족들과 큰형, 작은 누나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벨의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특히 덥수룩한 수염이 난 왕은 벨의 몸 크기만한 선물 상자를 직접 전해 주었는데, 그는 그게 모형검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크게 놀라 주었다. 자신이 부린 작은 마술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때까진 5살의 벨을 연기해주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그렇게 생일 파티가 무르익고, 왕이 직접 부른 악단이 우아하고 잔잔한 곡을 연주할 때 쯤, 오늘의 주인공인 벨은 앙증맞은 검은 리본을 목에 멘 채 자꾸만 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궁금했던 것이다. 앞으로의 운명이 어떻게 될 지. 무릎을 꿇고 한참 어린 이슈탈과 이야기를 나누던 라슈벨이 벨을 바라보며 다정하게 물었다.


“벨? 무슨 일이니. 손님이 더 오기로 했어?”

“아니. 기다리고 있어요.”

“기다리다니 무엇을?”

“……”


벨은 검지를 세워 입에 가져다 대었다. 그 앙증맞은 손짓에 씩 웃은 라슈벨은 다시 시선을 돌려 칭얼대는 이슈탈을 달래 주었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왕과 대공이 흐뭇하게 바라보니, 시선에서 소외된 왕자는 양 볼을 크게 부풀리며 괜히 다리만 이리저리 흔들고 있었다. 비록 나이 차이는 많이 나지만 공주가 성년이 되는 10년 뒤(성년은 20살.), 결혼을 약조한 두 사람이 부럽기도 하고, 짜증이 나기도 했다. 아마 이 때부터였을지 모른다. 공주에 대한 왕자의 관음증이 시작된 것은. 잠시 그들의 관계를 지켜보던 벨은 커다란 문이 열리자 다시 그 쪽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문이 열렸다. 그리고 커피를 들고 온 것은 바로 벨의 유모였다.


“병신.”


벨은 씩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조심스럽게 커피잔을 들고 들어오던 유모는 벨을 보고선 그 자리에 우뚝 멈췄다. 아무래도 바쁜 일 때문에 잊고 있었던 저주가 갑자기 떠오른 모양이었다. 그 때부터 유모의 걸음이 심하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이런 일을 한, 두 번 겪어본 것도 아닌 베테랑인데도 유모는 전신을 덜덜 떨며 정신을 못 차렸다. 목이 베인다. 이 커피를 잘못 놓았다간 목이 베어 죽고 만다는 압박감이 유모를 강하게 자극했다. 벨은 불이 뿜어져 나올 것 같은 시선으로 유모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제일 먼저 왕에게 놓는 것이 순서였기에 차를 왕의 자리로 가져간 그녀는 다시 한 번 벨을 살피더니, 이내 최대한 조심스럽게 왕의 자리에 커피를……


‘쓰러진다.’

“어, 어머!!”

“폐하! 폐하! 괜찮으십니까!”

“앗! 뜨뜨!!”

“이런 미천한 년이! 제 죽을 자리를 보고 파야지! 감히 누구한테 커피를 들이 붓는 게냐!”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어르신!”

“듣기 싫다! 당장 끌고 나가라! 내가 직접 목을 벨 것이야!”

“예!”

“어르신! 어르신!!”


벨은 고개를 푹 숙였다. 변하지 않는다. 자신의 과거는 이미 확고한 틀에 박혀 흘러가고 있었다. 그가 어떤 수를 쓰건 이 과거는 변하지 않을 거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하면서, 벨의 머리속도 복잡해졌다.


‘내가 검을 처음 잡은 것은 일곱 살 때의 일. 분명 그 전엔 검보단 책을 더 많이 봤을 것이다.’


거기서부터 시작하자. 물줄기가 변하지 않는다면 작은 부분부터 두드려서 한 번 바꿔보자. 적어도 2년이나 일찍 검을 잡는다면, 지금의 자신과는 분명 달라져 있을 것이다. 벨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새롭게 각오를 다지고 있을 때, 갑자기 누군가 자신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안녕? 벨? 귀엽게 생겼네?”

“……뭣?”


순간 무의식 중에 고개를 들어올린 벨은 그만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자신에게 말을 건 소녀, 그녀는 벨이 죽을 때까지 스토킹에 가까운 집착을 보여준 공주, 이슈탈이었다.


작가의말

만약 벨이 유모에게 커피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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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죽음(챕터 完) +1 14.04.25 1,380 25 12쪽
33 죽음(10) 14.04.23 1,435 22 7쪽
32 죽음(9) +2 14.04.14 1,461 28 7쪽
31 죽음(8) +1 14.04.02 1,391 31 7쪽
30 죽음(7) +2 14.03.25 1,419 30 9쪽
29 죽음(6) +1 14.03.24 1,442 33 8쪽
28 죽음(5) +2 14.03.12 1,829 43 7쪽
27 죽음(4) +4 14.03.06 1,930 44 7쪽
26 죽음(3) +4 14.03.03 2,097 47 8쪽
25 죽음(2) +2 14.02.27 1,957 46 8쪽
24 죽음 +2 14.02.27 2,629 53 6쪽
23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8) +6 14.02.25 2,346 59 7쪽
22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7) +2 14.02.24 2,663 52 7쪽
21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6) +3 14.02.23 2,188 53 9쪽
20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5) +3 14.02.22 2,367 58 11쪽
19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4) +2 14.02.22 2,338 53 7쪽
18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3) +1 14.02.22 3,231 60 9쪽
17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2) +2 14.02.20 2,400 63 8쪽
16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 +4 14.02.20 2,801 70 9쪽
15 라슈벨 폰 발렌타인(5) +4 14.02.19 2,799 69 8쪽
14 라슈벨 폰 발렌타인(4) +6 14.02.18 2,739 63 8쪽
13 라슈벨 폰 발렌타인(3) +4 14.02.18 2,989 68 10쪽
12 라슈벨 폰 발렌타인(2) +2 14.02.17 2,949 76 8쪽
11 라슈벨 폰 발렌타인 +1 14.02.17 3,152 71 9쪽
10 머리는 추악한 진실을 숨겨두는 법(4) +2 14.02.16 3,302 78 7쪽
9 머리는 추악한 진실을 숨겨두는 법(3) +2 14.02.15 3,372 71 8쪽
8 머리는 추악한 진실을 숨겨두는 법(2) +4 14.02.15 3,874 88 9쪽
7 머리는 추악한 진실을 숨겨두는 법 +1 14.02.14 4,248 91 9쪽
6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5) +2 14.02.13 5,993 113 8쪽
5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4) +1 14.02.12 5,434 103 8쪽
4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3) +2 14.02.11 5,922 110 7쪽
»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2) +1 14.02.10 7,034 134 9쪽
2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 +7 14.02.10 6,480 122 8쪽
1 최후는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한다. +7 14.02.09 7,975 137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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