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Regre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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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풍광
작품등록일 :
2014.04.24 10:18
최근연재일 :
2014.04.25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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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2.11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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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3)

DUMMY

벨은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이것도 역시 정해진 수순이다. 이 때는 분명 자신의 기사, 즉 사랑하는 형의 가족들을 알기 위해서 순수한 마음으로 물었던 거겠지. 하지만 그 마음이 몇 년 뒤엔 집착에 가까운 광기로 변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녀의 귀엽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잔뜩 찌푸려진다. 이 미친 년한테 또 코가 꿰이기는 싫었지만, 일단 공주이니 대답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아버지가 유모의 머리채를 잡고 나간 이후에 파티장엔 묘한 긴장이 흘러, 허튼 수작을 부릴 수도 없다. 하는 수 없이 그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공주님.”

“어머. 딱딱한 말투 쓰지 않아도 돼. 조금 있으면 너랑 나는 가족이 되는 걸.”

“크, 크흠.”


큰 형이 부끄러운 듯 헛기침을 한다. 그 모습을 건너 보면서 벨은 차게 웃었다. 어차피 3년도 못 가 죽을 거면서. 그것도 다른 누구도 아닌, 이 자리에서 환히 웃고 있는 왕의 오해 때문에 말이다. 너랑 공주는 이어질 수 없어. 그리고 이 년은 미쳐 버리지. 벨은 문득 자신이 굉장한 연극 무대 밑에 선 연출자처럼 느껴졌다. 마치 무대 위에서 자신의 뜻대로 뛰노는 배우들을 바라보는 것 마냥, 어린 아이의 공허한 시선이 주변을 훑는다. 하지만 지금 그 굉장한 사실을 입에 담을 수는 없다. 죄는 한 번이면 족하다. 이미 유모의 경우로 확인하지 않았던가. 자신의 과거는 틀에 갇혀 있고, 그 틀은 너무나도 견고해서 벨 혼자만으론 깨버릴 수 없다. 그가 노리는 것은 나비 효과. 즉 나비 한 마리가 날갯짓을 해 반대편에서 태풍을 불러일으키는 것처럼 아주 작은 어긋남을 연속적으로 심어, 결국 나중에 그의 과거를 크게 바꿔버릴 셈이었다. 벨은 자신을 다정하게 바라보는 공주에게 고개를 숙였다.


“형과 사이 좋게 지내주세요.”

“자꾸 매달리는 나를 라슈벨 님이 내치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뭐.”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공주님. 결단코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후후. 농담이에요. 농담. 라슈벨은 놀리는 재미가 있다니까?”

“하하하.”


왕이 호쾌한 웃음을 터트린다. 모두가 그에 맞춰 억지로 웃었지만, 벨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주눅이 들어있는 왕자를 보고 있었다. 역시 그도. 어렸을 때 내재된 감정이 있었다. 모든 시선이 이슈탈에게 쏠려, 자신에겐 한 줌의 관심도 돌아오지 않는 이 때. 왕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가 왕자를 유심히 살피는 사이 라슈벨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아. 그런 농담은 즐겁지 않아요.”

“하하하. 6살이나 어린 이슈탈에게 쩔쩔매다니. 준기사들을 호령하는 자네도 여자 앞에선 어쩔 수 없는 게로군.”

“그러게나 말입니다. 폐하.”

“하하하.”


연회장 안의 긴장을 녹이는 웃음 소리가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 얼핏 보기엔 굉장히 다정한, 가족들과 친지들의 모습처럼 보였지만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벨에겐 전부 다 가식으로 보였다. 그는 전생과는 달리 예쁘장한 이슈탈에게 호감을 보이지도 않았고, 물구나무를 서서 그녀를 즐겁게 해주지도 않았다. 그저 시체처럼 공허한 눈빛을 한 채 입을 꾹 다물고 있을 뿐. 이 장소에서 웃고 있지 않는 자는 벨과 왕자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던 이슈탈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얼른 자신의 연인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재미가 없어진 모양이다. 그러던 사이 옷을 갈아입고 단정한 모습으로 나타난 아버지가 왕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폐하.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다. 아니야. 목을 베었으면 됐지. 내가 자네에게 더 무슨 말을 하겠는가.”

“……하지만.”

“괜찮대도. 얼른 내 옆으로 와서 술이나 한 잔 따르게. 아이들은 그만 돌려 보내고. 우리끼리 한 잔 해야지?”

“하하. 이를 말이겠습니까. 자. 모두들 그만 나가 보아라. 어차피 오늘은 공주님과 왕자님도 우리 집에서 머무르셔야 하니, 펜델!”

“예? 아. 예예.”


유모가 끌려나간 충격으로 몸을 덜덜 떨고 있던 늙은 집사 펜델이 주인의 부름에 얼른 앞으로 다가왔다. 침착해 보려 애를 쓰지만 잘 되지 않아 보여, 벨은 살풋 웃고 말았다. 그런 펜델을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아버지가 막 자리에서 일어선 왕자와 공주를 가리키며 말했다.


“두 분이 머무르실 수 있는 좋은 방을 준비해라.”

“예. 주인님.”

“그럼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그래. 다시 한 번 생일 진심으로 축하한다. 벨.”

“감사합니다. 폐하.”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나서 벨은 제일 먼저 밖으로 나왔다. 어릴 때, 바쁜 부모에게서 제대로 사랑을 받지 못해 항상 형과 누나에게 매달렸던 벨 발렌타인은 지금 누구보다도 강하고, 차가운 자로 변해 있었다. 아직 어린데. 자기보다 한참 더 큰 형과 누나에게 칭얼대고 매달릴 나이인 녀석이 어째서 저렇게 공허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까. 또래답지 않아. 라슈벨은 허리춤에 찬 검의 손잡이를 꽉 움켜쥐었다. 그는 하품을 하며 밖으로 걸어 나오는 리엔을 붙잡고 말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뭐가.”

“벨. 우리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환하게 웃던 애가 어째서 저렇게……”

“벨도 이제 다섯 살이야. 징징대고 울기만 해선 방법이 없다는 걸 깨달았겠지.”

“리엔!”

“왜? 난 지금의 벨이 더 마음에 드는데. 칭얼대는 애들은 정말 귀찮거든. 오히려 저대로만 자라준다면, 나도 살갑게 대해줄 수 있을 것 같아.”

“아무래도 안 되겠어. 저택에 있는 동안이라도 벨을 달래 줘야지.”

“잘 생각해. 오빠. 그래 봤자 이틀이야. 그럼 저 버릇없는 공주와 왕자 뒤치닥거리는 누가 하는데?”

“……지금은 저들보다 내 가족이 더 소중해. 그 뿐이다.”

“……”


라슈벨의 말에 리엔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여지없이 바르고 착하게 큰 장남. 그는 주변 또래에 비해 어느 것 하나 부족할 것 없는 자신의 유일한 콤플렉스였다. 라슈벨이라는 존재 자체가 그녀의 열등감을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리엔을 만나는 모든 사람의 첫 마디는 항상 라슈벨의 안부를 묻는 것으로 시작되었고, 심지어 라슈벨을 가까이서 보기 위해 그녀와 말을 섞는 자도 있을 정도다. 차라리 조금 어긋나기라도 했으면 좋았으련만. 라슈벨은 우직하게도 너무나 매력적이었고, 심지가 굳은 사람이었다. 묵묵히 벨의 방으로 향하는 그를 바라보던 리엔은 자신의 검은 머리카락을 마구 휘젓더니, 이내 소리를 질렀다.


“알았어! 알았다고! 벨한테는 내가 가볼게. 오빠는 어서 저 문제 덩어리를 맡아줘.”

“그게 정말이야? 부탁해도 되겠어?”

“그래. 오빠 몸이 두 개가 아닌 이상 불가능하다는 건 잘 알고 있으니까.”

“고맙다. 리엔.”

“휴.”


한결 마음이 놓인다는 표정으로 왕자와 공주의 방으로 걸어가는 라슈벨. 그리고 그런 그를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리엔은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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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죽음(4) +4 14.03.06 1,930 44 7쪽
26 죽음(3) +4 14.03.03 2,097 47 8쪽
25 죽음(2) +2 14.02.27 1,957 46 8쪽
24 죽음 +2 14.02.27 2,629 53 6쪽
23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8) +6 14.02.25 2,346 59 7쪽
22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7) +2 14.02.24 2,663 52 7쪽
21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6) +3 14.02.23 2,188 53 9쪽
20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5) +3 14.02.22 2,367 58 11쪽
19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4) +2 14.02.22 2,338 53 7쪽
18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3) +1 14.02.22 3,232 60 9쪽
17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2) +2 14.02.20 2,400 63 8쪽
16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 +4 14.02.20 2,801 70 9쪽
15 라슈벨 폰 발렌타인(5) +4 14.02.19 2,800 69 8쪽
14 라슈벨 폰 발렌타인(4) +6 14.02.18 2,739 63 8쪽
13 라슈벨 폰 발렌타인(3) +4 14.02.18 2,989 68 10쪽
12 라슈벨 폰 발렌타인(2) +2 14.02.17 2,949 76 8쪽
11 라슈벨 폰 발렌타인 +1 14.02.17 3,152 71 9쪽
10 머리는 추악한 진실을 숨겨두는 법(4) +2 14.02.16 3,302 78 7쪽
9 머리는 추악한 진실을 숨겨두는 법(3) +2 14.02.15 3,372 71 8쪽
8 머리는 추악한 진실을 숨겨두는 법(2) +4 14.02.15 3,874 88 9쪽
7 머리는 추악한 진실을 숨겨두는 법 +1 14.02.14 4,248 91 9쪽
6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5) +2 14.02.13 5,993 113 8쪽
5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4) +1 14.02.12 5,434 103 8쪽
»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3) +2 14.02.11 5,923 110 7쪽
3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2) +1 14.02.10 7,034 134 9쪽
2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 +7 14.02.10 6,480 122 8쪽
1 최후는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한다. +7 14.02.09 7,975 137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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