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4)
이미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있던 벨은 왕이 준 모형검을 들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어차피 지금 자신의 뒤를 따라 들어올 사람은 정해져 있다. 정이 많고, 형제들을 끔찍하게 생각하는 큰 형, 라슈벨이겠지. 아직 다섯 살 밖엔 되지 않았지만, 분명 그가 검을 절묘하게 휘두른다면 보는 눈이 달라질 거다. 두 눈을 감은 채 정신을 집중하던 벨은 검을 손에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너무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검의 무게에 맞춰 횡으로 휘둘러 본다. 비록 모형 검이라도 맛이 난다.
거역하는 자를 모조리 베고, 사람 기름이 잔뜩 긴 검을 휘둘렀던 지난날의 맛이. 모형 검을 살짝 핥은 벨은 이번엔 조금 더 빠르게 사방으로 휘둘렀다. 도저히 모형 검에서 나올 수 없는 날카로운 기가 대기를 가른다. 누가 봐도 눈을 동그랗게 뜰 정도였지만, 벨의 표정은 썩 만족스럽지 않았다. 아무래도 아이의 몸이라서 그런지 전신이 비명을 지른다. 그는 모형 검을 옆에 내려놓았다. 지금 당장 힘을 뺄 필요는 없다. 잠시 뒤 라슈벨이 안으로 들어오면 검술을 보여주고, 그에게 검술에 관해 조금이라도 조언을 얻을 셈이었다.
“그래도 검술 하나만큼은 분명 배울 구석이 있는 자일 테니.”
영악한 구석만 있다면 지금까지 중직을 지키고 있었을 거다. 그 정도의 실력은 있는 자였다. 하지만 너무나도 순진하고 티없이 맑은 성격은 스스로의 목을 조르는 밧줄이 되었다. 분명 이번 생에서도 크게 다르진 않으리라. 하지만 딱히 그를 구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왕에 대한 분노도, 형에 대한 동정심도 들지 않는다. 이미 전생에 대한 지긋지긋한 경험으로 형제들에 대한 감정이 사라진 벨에겐 그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쓰일 소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형에 대한 생각들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더니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왔다. 벨은 의자에서 내려서며 자신이 기다린 사람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라슈벨?”
“라슈벨이 아니라 미안하구나.”
“리, 리엔 누님?”
“뭘 그렇게 놀라. 늪의 마녀라도 본 것처럼.”
“……아무것도 아니에요.”
“들어가도 되지?”
“네.”
벨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동자가 빠르게 좌우로 움직인다. 환한 표정의 라슈벨이 서 있어야 할 문 앞에는 삐딱한 표정의 금발 머리, 리엔이 서 있었다. 타오를 듯한 붉은 눈동자와 앞섶을 풀어헤친 경망스러운 의복, 허리춤에 찬 레이피어까지. 여전하구나. 벨의 미간이 자신도 모르게 찌푸려졌다.
설마 그녀가 올 줄은 몰랐던 탓이겠지. 그도 그럴 것이 장남인 라슈벨이 대공의 영원한 자랑거리였다면, 차녀인 리엔은 대공의 골치를 썩히는 문제아였다. 물론 검 실력은 수준급이었지만, 15살이 될 때까지 그녀의 머리 끝조차 본 적이 없던 벨에겐 그건 장담할 수 없는 문제였다. 스스로도 그런 소문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던지 미간을 찌푸리는 벨을 보며 씩 웃던 리엔의 손가락이 그의 이마를 살짝 눌러 의자에 쓰러트렸다. 새빨간 입술에서 어딘가 거무튀튀한 목소리가 튀어 나왔다.
“왜? 문제덩어리 누님이 오니 속이 상하니?”
“그런 거 아니에요. 다만……”
“다만?”
“좀 신기해서요.”
“후후. 하긴 그렇겠지. 내가 널 의도적으로 피했으니까.”
“그런데 왜 지금은?”
“네 눈, 이제 겨우 다섯 살인 주제에 마치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고통을 다 겪은 그 눈. 그리고 죽어버린 표정. 딱 네 나이 때의 나와 너무나 닮아서 말이야. 끌림이라고 해야 하나. 그래서 왔어.”
벨은 침을 꿀꺽 삼켰다. 변했다. 유모의 죽음과 그녀의 관심. 둘을 다루는 운명의 저울추가 변덕이라도 부린 것일까. 유모는 운명대로 죽음을 맞이했고, 리엔은 운명과 다르게 자신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목소리조차 열다섯이 되던 해에 처음 들었었는데. 그걸 10년이나 앞당겨 들을 수 있을 줄은 몰랐다. 벨의 이마로 식은 땀이 흘러내렸다. 올곧은 성격 덕분에 파악이 쉬운 라슈벨과는 다르게 리엔의 속은 알 수가 없다. 조심. 신중에 신중을 기하지 않으면 오히려 그녀의 페이스에 말릴 수밖에 없다. 벨이 슬금슬금 뒷걸음질치자 리엔은 그만큼 그에게 다가섰다. 좁혀지지 않는 거리. 결국 막다른 벽에 부딪친 벨이 그녀를 올려다본다. 리엔의 입 꼬리가 한쪽으로 말려 올라갔다.
“모형검을 들고 있네? 왜? 검을 배우고 싶어?”
“누님이랑은 상관 없잖아요.”
“왜 나랑 상관이 없어. 내 허리춤에 찬 검은 장식처럼 보이니?”
“……아니요.”
“물론 아카데미 차석인 나보다 아카데미 수석인 오빠가 더 낫긴 하겠지. 하지만 그의 검은 너무나 고리타분해. 정의감에 가득 차있고, 변칙적인 걸 싫어하지. 그럼 그런 오빠를 사랑하면서도 증오하는 내 검은 어떨까?”
“어떤…데요?”
“궁금하면 배워볼래? 후후.”
그녀는 도발적으로 자신의 입술을 핥았다. 저 눈, 불길하게 타오르는 두 눈에 빨려 들어갈 것만 같다. 벨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그녀가 왜 내게 관심을 갖고, 검을 가르쳐주겠다고 말하는 건가. 라슈벨은 어디로 간 거지? 온갖 의문이 작은 아이의 머릿속을 정신 없이 헤집었다. 안 돼. 이래선 안 된다. 잠시 눈을 감고 잡념을 지운 벨은 지금 상황을 냉정하게 놓고 바라보았다.
일단 라슈벨은 오지 않았다. 아마도 왕녀와 왕자를 돌보느라 정신이 없는 거겠지. 전생에서는 한 방에 데려와 같이 놀게끔 해주었는데, 오히려 지금이 더 다행일 수도 있다. 무엇보다 자신은 열 다섯 살 이전에 어느 정도 경지에 올라 있어야 한다. 아버지가 반역을 일으킬 때, 그를 죽이고 그것을 막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선 리엔의 제안은 감히 거부할 수 없는 달콤한 독과도 같았다. 분명 먹으면 죽을 것을 아는데도 삼킬 수밖에 없는 그런 달콤한 독. 잠시 마른 침을 꿀꺽 삼킨 벨은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배워보고 싶어요.”
“아쉽지만 대답이 너무 늦었어.”
“예? 하, 하지만……!”
“후후. 아서라. 내가 고작 다섯 살 난 아이의 검술을 지도해 줄 만큼 한가한 줄 알아? 그냥 해본 말이야.”
“……아마 제 검을 보시면 그런 말이 나오지 않으실 거예요.”
“뭐?”
네년이 날 놀리려 드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뜻이다. 이를 악문 벨이 모형검을 들고 자신의 눈높이에 맞춰 무릎을 꿇은 리엔의 미간을 찔렀다. 순간 깜짝 놀란 리엔이 몸을 뒤로 젖히면서 검을 빼들었는데, 반응이 어찌나 빠른지 지근거리였음에도 검을 피해버렸다. 피할 줄은 알고 있었다. 벨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검을 그대로 내리 눌렀다. 리엔은 입술을 깨물며 찌르기 전용인 레이피어를 옆으로 베어 모형 검을 후려쳤다. 조각일 뿐인 검이 허공으로 날아가고 벨의 부드러운 손아귀는 손에 전해지는 압력을 견디지 못해 찢어져 버렸다. 이글거리는 시선으로 벨을 노려보던 리엔이 몸을 일으켜 레이피어를 그의 목에 겨누었다.
“이게,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벨.”
“우…우…”
“속일 생각은 하지 말아라. 네가 방금 휘두른 검술은 분명 10년 이상은 배워야 하는……”
“으아아아앙!!!”
순간 긴장감이 감도는 방 안에서 벨이 울음을 터트렸다. 그냥 우는 것도 아니고 주저 앉아 눈물을 뚝뚝 흘리는데, 어찌나 서러워 보이던지 그 사납던 리엔도 잠시 말을 잇지 못할 정도였다. 한참 동안 그렇게 울던 벨은 어깨를 크게 들썩이더니 이내 풀이 죽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작가의말
부족한 작품을 어여삐 봐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Comment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