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Regre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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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풍광
작품등록일 :
2014.04.24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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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2.14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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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머리는 추악한 진실을 숨겨두는 법

DUMMY

다섯 살의 첫 나들이. 어쩌면 집을 벗어난다는 두려움 때문에 눈물을 흘릴 수도 있고, 호기심과 기대감 때문에 방방 뛸 수도 있겠지만 벨은 그러지 않았다. 그저 마차 안에서 숨을 죽인 채 조용히 앉아있을 뿐이다. 다정한 라슈벨이 계속 속이 나쁜 것이냐, 아니면 어딘가 기분이 좋지 않으냐고 물었지만, 그는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리엔의 마음에 꼭 드는 행동이었다. 만약 마차에 타서 부모님을 찾으며 울거나, 칭얼댔다간 바로 그 자리에서 아이를 내렸을 테니까. 사실 벨에게도 침묵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그가 보내는 지금 이 시간들은 시체들과 보내는 것과 하등 다를 게 없었다. 금방이라도 구토가 나올 것만 같다. 누나도 형도, 결국은 피지도 못하고 요절한 꽃이다.


그들의 미래를 전부 꿰뚫고 있는 벨에겐 마치 시체의 역한 냄새가 자신의 코로 스며드는 느낌이었다. 아마 리엔이 자신을 밖으로 끌어내지 못했다고 해도 그는 크게 실망하지 않았을 거다. 어차피 벨슈포드 아카데미에 진학해서 만나는 놈들도 전부 시체들뿐이었으니까. 벨이 정신력이 강했기에 망정이지, 만약 보통 사람이었다면 그들의 얼굴을 보자마자 정신 착란을 일으켰을 것이다.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본다는 건 그렇게 녹록한 일이 아니었다.


“조금만 더 가면 기숙사야.”

“허락은 맡았어? 사감이 쉽게 들여보내주지 않을 것 같은데.”

“미리 서신을 보내놨어. 네가 빨리 말해줘서 다행이었지. 아마 나랑 같이 지내게 하는 조건이라면 통과시켜 줄 거야.”

“그래. 기숙사는 어차피 남, 여가 떨어져 있어야 하니까. 다만 벨은 내가 점 찍었어. 자는 시간 외엔 전부 나한테 맡겨주겠다고 약속해.”

“하하. 리엔 네가 누군가에게 이렇게까지 집착하는 건 처음 보는데? 그게 다른 사내였다면 생각을 좀 해봐야겠지만 벨이라면 대 환영이야. 그래도 가끔은 내게도 시간을 줘. 형으로서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

“……알았어.”

“오케이. 벨도 그걸로 괜찮지?”

“응. 고마워요. 형.”

“고맙긴. 후후. 역시 마차를 처음 타봐서 그랬나 봐. 지금은 이렇게나 귀여운 표정을 하고 있는데.”


벨은 거칠게 머리를 쓰다듬는 라슈벨을 가만히 올려다 보았다. 얼핏 보면 다정한 형, 동생 사이였지만 벨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확실하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긴가민가 했는데 형은 자신을 유심히 보지 않았다. 어릴 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알 수 있다. 만약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면, 리엔과 같은 반응을 보였겠지. 그의 눈이 죽은 물고기의 그것과 닮아 있다는 걸 알았을 테니. 이 눈이, 이 표정이 귀엽다고? 하하.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리가 없지. 애초에 라슈벨은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기조차 꺼려하고 있다. 왜? 배다른 형제라서? 아니면 검술에 자질이 없는 평범하지도 못한 놈이라서?


라슈벨이 내뱉었던 한 문장이 벨의 마음 속을 새까맣게 뒤집어 놓았다.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는 리엔의 얼굴엔 묘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마차는 울퉁불퉁한 길을 넘어 드디어 고른 돌이 깔린 가도로 진입했다. 마차가 흔들릴 때마다 연신 사죄를 하던 마부는 신나게 채찍질을 하여 달리기 시작한다. 길을 걷는 사람들의 모습, 대대적으로 바뀌기 전의 수도의 모습이 벨에게는 꽤 새롭다. 열 다섯이나 되어서야 겨우 아카데미에 발을 들이밀었던 그 때와는 정말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도착했습니다.”

“수고했어. 가서 부모님께 잘 도착했다고 전해드리고.”

“예. 어르신.”


고개를 숙인 마부가 떠나자, 벨의 앞에는 열 다섯의 때랑 전혀 다를 게 없는 벨슈포드 아카데미가 웅장한 자태를 뽐내며 서 있었다. 끝이 뾰족한 첨탑처럼 생긴 아카데미는, 좌, 우로 너비가 같은 시계탑이 하나씩, 중앙엔 네 개의 시계탑을 하나로 합친 것과 같은, 너비가 넓지만 상대적으로 층이 낮은 건물로 이루어져 있었다. 어설프게 만들어진 주변 건물들에 비해 아카데미는 전국에서 몰려든 장인들이 철저하게 계산을 해 만든 것으로 돌의 재질부터, 가공방식까지 전부 그 유래가 없을 정도로 정교하고 고급스럽게 만들어졌다.


중앙의 건물 꼭대기엔 거대한 종이 달려 있어, 3시간 마다 울려 시간을 알려주었다. 보통 6시에 첫 식사, 9시에 오전 수업, 12시에 점심, 3시에 오후 수업 종료, 6시에 저녁, 9시에 취침으로 이는 아카데미의 학생들의 일과였지만, 수도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시간에 맞춰 하루 일과를 움직이곤 했다. 벨에게 있어선 아카데미에서 공부를 하던 중 개처럼 바닥에 질질 끌려갔던 좋지 못한 기억이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가 가만히 건물을 올려다보다 라슈벨은 환히 웃으며 벨을 갑자기 들어 올렸다. 그러더니 자신의 어깨에 앉히고는 입을 열었다.


“어때? 저곳이 앞으로 네가 공부할 벨슈포드 아카데미다. 지금까진 자고 싶은 시간에 자고, 일어나고 싶은 시간에 일어났겠지만 이제는 달라. 힘들어도 잘 해낼 수 있지? 벨.”

“네. 형. 열심히 할 게요.”

“하하. 그래. 그래. 넌 분명히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웃기는 소리. 내 눈을 한 번이라도 바라봤으면 형이 그딴 말을 지껄일 수 있었을까. 벨은 라슈벨의 어깨 위에서 씩 웃고 말았다. 어떻게 보면 가식이자 허례허식이다. 그는 단지 편안하고 친절한 형을 연기하고 있을 뿐이다. 어쩌면 자신에게 더 맞는 것은 리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벨이 무의식 중에 리엔을 바라보자, 마침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리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그를 바라보며 가볍게 웃어줬을 뿐. 하지만 그 웃음이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28살의 벨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뿌듯한 표정으로 아카데미를 바라보고 있던 라슈벨이 벨을 어깨 위에서 내려주며 말했다.


“자. 일단 기숙사로 들어가자. 아카데미와 기숙사는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았어. 다만 가는 도중에 유혹이 많으니 아차, 하는 순간에 수중에 지닌 돈을 전부 써버릴 수도 있지. 잘 알아둬. 벨. 형과 누나가 줄 수 있는 돈은 언제나 그리 많지 않으니까.”

“응. 명심할게요.”

“하하. 자. 그럼 가볼까? 리엔도 같이 갈 거지? 어차피 남, 여 기숙사는 붙어 있잖아.”

“어. 나도 짐을 좀 풀어야 돼. 그리고 벨에게 이 주변을 좀 알려줘야 할 것도 같고.”

“이야. 많이 변했네. 리엔~ 언제는 집에 가는 것도 싫어하더니.”

“몇 번이나 말했지만 그건 별개야. 단지 저 아이가 마음에 들었을 뿐이지.”

“벨!”

“뭐?”

“벨이라고. 저 아이가 아니라.”

“하여튼 오빠는. 알았어. 난 그저 벨이 마음에 들었을 뿐이야. 됐지?”

“좋아. 좋아.”


그제야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는 라슈벨을 따라 우리는 돌이 깔린 길을 걸어갔다. 아카데미를 조금만 벗어나자, 벌써부터 자리를 잡고 물건을 파는 상인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흔히 보이는 튀김이나 즉석 요리를 파는 상인부터 도자기나 비싼 그림을 파는 상인까지. 돌길 주변에 쫙 펼쳐진 상인들은 확실히 쉽게 지나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실제로 점심을 먹고 나서 1시까지의 쉬는 시간 동안 밖으로 나와 브로치를 사거나, 간식을 사먹는 학생들의 모습이 심심치 않게 보일 정도였다. 라슈벨과 리엔은 다시 벨의 손을 하나씩 잡고 서둘러 길을 빠져나갔다. 이미 아카데미의 유명한 인재인 두 사람을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는데 라슈벨은 하나하나 다 응대하며 웃어준 반면, 리엔은 눈길조차 보내지 않았다. 어찌 달라도 이리 다를까.


“아!”


그 때, 아이스크림을 든 채 정신 없이 달려오던 아이가 라슈벨과 부딪쳐 쓰러졌다. 자신의 옷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툭툭 털어낸 라슈벨이 일으켜 주자, 아이는 천천히 고개를 든다. 빨간 물감을 그대로 뿌린 듯한 적색 머리카락과 앳되지만 오밀조밀 모인, 꽤나 귀엽게 생긴 얼굴이 세 사람에게로 향했고, 순간 벨은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이, 이셀리아?”

“응. 나 이셀리아 맞는데. 누구세요? 어떻게 내 이름을 알아?”

“벨. 너 아는 사람이었니?”

“……”


고개를 갸웃거리는 라슈벨의 말에도 벨은 꼼짝도 하지 않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죽어있던 그의 눈이 다시금 묘한 생기를 띠기 시작했다.


작가의말

금요일입니다. 직장인 분들 모두 힘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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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죽음(10) 14.04.23 1,435 22 7쪽
32 죽음(9) +2 14.04.14 1,461 28 7쪽
31 죽음(8) +1 14.04.02 1,391 31 7쪽
30 죽음(7) +2 14.03.25 1,419 30 9쪽
29 죽음(6) +1 14.03.24 1,442 33 8쪽
28 죽음(5) +2 14.03.12 1,830 43 7쪽
27 죽음(4) +4 14.03.06 1,931 44 7쪽
26 죽음(3) +4 14.03.03 2,098 47 8쪽
25 죽음(2) +2 14.02.27 1,957 46 8쪽
24 죽음 +2 14.02.27 2,630 53 6쪽
23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8) +6 14.02.25 2,347 59 7쪽
22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7) +2 14.02.24 2,663 52 7쪽
21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6) +3 14.02.23 2,189 53 9쪽
20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5) +3 14.02.22 2,367 58 11쪽
19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4) +2 14.02.22 2,339 53 7쪽
18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3) +1 14.02.22 3,232 60 9쪽
17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2) +2 14.02.20 2,401 63 8쪽
16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 +4 14.02.20 2,802 70 9쪽
15 라슈벨 폰 발렌타인(5) +4 14.02.19 2,800 69 8쪽
14 라슈벨 폰 발렌타인(4) +6 14.02.18 2,740 63 8쪽
13 라슈벨 폰 발렌타인(3) +4 14.02.18 2,989 68 10쪽
12 라슈벨 폰 발렌타인(2) +2 14.02.17 2,950 76 8쪽
11 라슈벨 폰 발렌타인 +1 14.02.17 3,152 71 9쪽
10 머리는 추악한 진실을 숨겨두는 법(4) +2 14.02.16 3,303 78 7쪽
9 머리는 추악한 진실을 숨겨두는 법(3) +2 14.02.15 3,373 71 8쪽
8 머리는 추악한 진실을 숨겨두는 법(2) +4 14.02.15 3,874 88 9쪽
» 머리는 추악한 진실을 숨겨두는 법 +1 14.02.14 4,249 91 9쪽
6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5) +2 14.02.13 5,994 113 8쪽
5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4) +1 14.02.12 5,435 103 8쪽
4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3) +2 14.02.11 5,923 110 7쪽
3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2) +1 14.02.10 7,034 134 9쪽
2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 +7 14.02.10 6,480 122 8쪽
1 최후는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한다. +7 14.02.09 7,977 137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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