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는 추악한 진실을 숨겨두는 법(2)
이셀리아 폰 발프그랑슈. 원로원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는 론데인의 손녀이자, 자신을 죽을만큼 사랑했던 여자이기도 하다. 처음 아카데미에 들어갔을 때부터 그랬었지. 자신에게 첫 눈에 반해 따라다니다가 공주에게 걸려 반역죄로 일족이 몰살당한 여자. 설마 이렇게 어릴 때부터 왔으리라곤 생각도 못했다.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검술 실력은 아카데미 내에서도 끝에서 1,2 등을 다툴 정도였으니까. 자신만 바라보던 멍한 여자. 이 여자라면 써먹어 볼 만 하다. 벨은 자신을 천진난만하게 바라보는 이셀리아를 보며 씩 웃었다.
“이야기를 들었어요. 론데인님의 손녀이라고.”
“뭐? 이 아가씨가?”
“응. 맞아요. 하지만 비밀이니까 아무에게나 말하지 말아요!”
“......”
리엔은 묘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벨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원로원의 론데인에게 손녀가 있고, 그 손녀가 지금 벨슈포드 아카데미를 다니고 있다는 것을. 분명 원로원 내에서도 아무나 알지 못하는 고급 정보일 텐데, 이제 겨우 다섯 살이 된 어린 아이가 알고 있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이내 그녀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흘렀다. 재미있다. 너무나 재밌어 정신을 못 차리겠다. 매 번 지루하게만 흘러가던 그녀의 인생에 갑자기 벨이 난입해 들어와 온통 헝클기 시작하는 걸, 리엔은 너무나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녀는 이셀리아와 통성명을 하며 환하게 웃는 벨을 바라보았다.
‘두 가지다. 이 아이는 희대의 천재이거나, 아니면 다른 영혼이 몸을 파고들어 왔거나.’
기왕이면 희대의 천재가 더 좋겠지만, 뒤의 가정도 그녀의 마음을 설레이게 한다. 그녀의 얼굴은 흥분으로 잔뜩 상기되었다. 다른 영혼이 들어왔다면 어떤 놈이 들어온 걸까. 분명 끝장을 본 놈이겠지? 이렇게까지 무섭게 준비할 정도면 분명 보통은 아닐 것이다. 아아. 너무 기분이 좋아 지금 당장이라도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르고 싶을 정도다. 이런 재미있는 일에 자신이 관여되다니. 그녀는 인사를 마치고 총총 뛰어가는 이셀리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벨의 손을 잡았다. 입을 여는 리엔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흥분된, 다소 높은 음정이었다.
“벨? 론데인님의 손녀라는 건 누구한테 들었어?”
“비밀이에요.”
“그러지 말고 이 누나한테만 살짝 말해주면 안 될까?”
“싫어요.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단 말이에요.”
“놔둬. 리엔. 약속했다고 하잖아.”
“오빠는 궁금하지도 않아? 생각해 봐. 벨은 이제 겨우 다섯살이라고. 벌써 이 녀석만의 커넥션을 둘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궁금하지만 벨도 어엿한 우리 가문의 사람이야. 아무리 다섯이라도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하고 비교할 순 없지. 난 오히려 자랑스러워. 우리 벨이.”
라슈벨의 따뜻한 웃음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벨은 전신에 소름이 돋는 느낌이었다. 형은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듯한 차가운 눈빛. 그는 점점 알면 알수록 리엔 못지 않게 라슈벨 또한 괴기스러운 자라는 걸 느끼고 있었다. 가문에 대한 비정상적일 정도로 높은 프라이드, 그리고 몸에 배어있는 공손함에 숨겨진 가식. 라슈벨의 속을 파보면 분명 자신 못지 않게 새까만 잔해가 남아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벨은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어쩌면 이들과 함께 사는 생활은 집에서 미쳐가는 부모님을 보는 것보다 더 힘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
기숙사는 생각보다 더 좁았다. 처음 들어갔을 땐, 너무나 넓어 괜히 기가 죽을 정도였는데. 참으로 오랜만에 들리는 기숙사의 공기에 벨은 눈을 감고 숨을 들이마셨다. 익숙하고 정겨운 냄새가 그의 코를 파고든다. 라슈벨이 살고 있는 방은 5층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이는 학생들 중에서도 최상위 계급임을 뜻한다. 때문에 간단히 말해 2층에 사는 학생들은 1층에 사는 학생들을, 3층에 사는 학생들은 1,2층에 사는 학생들을 은근히 무시하곤 했다.
5층에 있는 자들이 다른 층에 있는 학생을 제 수족처럼 부리는 자들도 적지 않았고. 사회에 나가기 전, 그들은 어릴 때부터 계급에 따른 차이를 몸소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층에 관계없이 모두를 따뜻하게 대해주는 라슈벨은 이미 기숙사 내에선 차기 학생회장으로 정해진 거나 다름이 없었다. 무엇보다 공주의 남자로 지목받은 라슈벨에 대한 대우는 벨슈포드 아카데미 내부에서도 파격적인 것이라, 아직 학생도 아닌 벨의 입교를 허가한 것도 모자라 그와 같이 살 수 있게끔 룸메이트까지 바꿔 버렸다. 키로 문을 따고 안으로 들어선 라슈벨은 멀뚱히 서 있는 벨을 향해 손짓했다.
“어서 들어와. 벨. 사양말고.”
“네. 형.”
벨이 짐을 들고 안으로 들어가자, 라슈벨은 비어있는 침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일단 짐을 풀고, 리엔이 안내를 해주겠다고 하니 나가봐. 녀석, 참을성이 좀 없어. 최대한 빨리 나가는 게 좋을 거야.”
“네. 그렇게 할 게요. 어차피 들고 온 것도 별로 없어요.”
“후후. 아직 어린데도 이렇게나 적응이 빨라서야. 벨. 넌 아마 나 못지 않게 아카데미 생활도 곧잘 해낼 거야.”
‘당연하지. 네가 살았던 곳인데.’
그는 피식 웃고는 짐을 대충 정리하고는 옷을 갈아 입었다.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기 위해 입었던 어린이용 정장이 답답했던 탓이다. 나비 넥타이를 풀어 가방에 넣고, 남은 옷들을 옷장 위에 걸어 놓는다. 확실히 저학년 용 옷장이 아니라 불편했지만, 그런 건 라슈벨이 도와주워 쉽게 걸 수 있었다. 잠시 벨이 쓰기엔 큰 옷장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던 그는 벨에게 말했다.
“나갔다 오기 전에 옷장은 네 키에 맞게 바꿔줄게. 아무래도 어린 친구와 같이 사는 건 처음이라 내가 세세한 것까진 신경쓰지 못한 것 같다.”
“아니에요. 이렇게 같이 살게 되어서 기뻐요. 정말.”
“하하. 형도 마찬가지야. 앞으로 잘 해보자. 벨.”
“네. 라슈벨 형.”
“자. 이제 나가봐. 그 녀석, 벌써 나와 있을 거야.”
“다녀오겠습니다!”
“아. 잠깐.”
벨을 멈춰세운 그는 자신의 호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이내 꽤 많은 양의 화폐가 든 지갑을 벨에게 건넸다. 벨이 고개를 들어 쳐다보자 라슈벨은 다정하게 웃으며 말했다.
“마음대로 쓰고 와. 리엔에겐 비밀이다?”
“네!”
신이 나서 뛰어 나가는 벨을 바라보던 라슈벨의 입가에서 점점 웃음이 사라졌지만 그걸 알아챌 수 있는 사람은 방 안에 아무도 없었다. 밖으로 나간 벨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문을 나서자마자 그 자리에 우두커니 멈춰섰다. 그리곤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이 닫은 방문을 바라보았다. 라슈벨도 그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마치 그렇게라도 하면 문이 뚫리기라도 하듯 강한 시선을 보내던 벨은 천천히 걸어 층계를 내려왔다. 자신이 5층에서부터 내려온 것을 보았기 때문인지, 저학년이 내려가면 되레 시비를 걸기 마련인 학생들은 그의 눈치를 살피며 옆으로 피했다.
“어디서 온 얘야? 너무 어려보이는데.”
“라슈벨님이 본가에서 직접 데려오셨대.”
“어머? 정말? 저 애한테라도 잘 보이면......”
“아서라. 공주님이 질투가 얼마나 심하신데.”
“하긴, 그것도 그래.”
자신을 둘러싸고 들리는 이야기들을 흘려넘기며, 벨은 어느새 1층에 도착했다. 그가 힘차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누군가의 손을 잡은 채 담소를 나누고 있던 리엔이 이쪽을 바라보았다. 대체 누구지? 이번엔 어떤 시체일까를 생각하며 담담히 고개를 돌린 그는 그만 씩 웃고 말았다. 리엔이 손을 잡고 있는 사람은 바로 마주 웃고 있는 이셀리아 였다.
‘이거 일이 재미있게 돌아가겠는데.’
자신의 의도를 알아챈 것일까. 아니면 그저 원로원의 사랑을 받기 위한 수작일까. 어느 쪽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매사 대충대충 살아가던 누나가 뭔가 발동이 걸렸다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그리 살아줄수록 자신의 과거는 크게 요동친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벨은 어린아이답지 않은 섬뜩한 미소를 머금은 채 그들의 곁으로 천천히 다가서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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