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Regre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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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풍광
작품등록일 :
2014.04.24 10:18
최근연재일 :
2014.04.25 04:00
연재수 :
3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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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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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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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2.15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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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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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글자
8쪽

머리는 추악한 진실을 숨겨두는 법(3)

DUMMY

벨이 다가가자 이셀리아는 손을 흔들었다. 어딘가 수줍어 보인다. 볼도 살짝 붉어져 있었다. 벨은 마주 손을 흔들며 리엔을 바라보았다. 선수를 치려 했는데 선수를 당했다. 그것도 같은 목적으로, 같은 목표를. 그의 과거 중에서 오직 혼자 비틀려져 있는 사람에게 말이다. 굳은 표정으로 걷던 벨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상관없다. 어차피 도와준다면 자신에겐 나쁠 것 없는 일이었다. 그가 다가서자 리엔이 두 사람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갑자기 쿵, 하고 누나의 무게가 벨의 어깨에 실린다.


“자. 주인공도 나왔으니 가자. 이셀리아는 뭐 먼저 먹고 싶어?”

“저요? 저는...음...베, 벨이 먹고 싶은 거요.”

“오호. 그렇다는데? 벨은 어때?”

“아직 잘 몰라요. 가서 보면 안 돼요?”

“그래? 그럼 가봅시다. 무슨 음식들이 있나~”


리엔이 팔을 풀고 앞장선다. 벨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확실하다. 분명 이셀리아에게 뭔가 바람을 불어 넣은 거야. 왜? 어째서? 대체 그녀가 원하는 게 뭐냔 말이다. 벨의 서늘한 눈동자가 두 사람을 돌아보며 환히 웃는 리엔에게로 향했다. 대체 뭘 생각하는 거냐. 미치광이 여자야. 그 때, 옆에 있던 이셀리아가 벨의 옷자락을 살짝 잡더니 말했다.


“고, 고마워.”

“응? 뭐가?”

“나. 누가 나를 좋아해준 적, 처음이야.”

“......고맙긴. 나도 너처럼 예쁜 아이를 본 건 처음이야. 이셀리아.”

“너, 너도 멋져! 벨. 비록 나보다 어리긴 하지만 너도 정말 멋져.”

“그럼 나 앞으로도 계속 널 좋아해도 될까?”

“응!”


기뻐하는 이셀리아의 모습은 영락없는 8살 어린 아이였다. 단지 좋아하고 있다는 말 한마디로 상대를 설레게 할 수 있을 만큼,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나이 말이다. 벨은 옅게 웃었다. 일단 첫 단추는 잘 꿴 셈이다. 원로원 룩소르의 손녀와 연이 닿았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아카데미의 저학년들은 모두 자신과 친해지기 위해 애를 쓰겠지. 이제 그토록 원하던 정보망을 얻었으니, 다음은 저 여자다. 벨의 시선이 리엔을 향했다. 그녀는 꽈배기 상인 앞에 서서 손짓하고 있었다.


“벨! 이셀리아! 어서 와! 여기 꽈배기가 정말 맛있어.”

“네! 벨. 얼른 가자!”

“어. 그래.”

“벨!”


무심코 뛰어가려던 그는 자리에 멈춰선 이셀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양 볼을 부풀린 채 말이 없다. 뭘 하자는 거지? 벨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저 작은 아이가 한숨을 내쉰다. 그러더니 자신의 오른손을 내밀었다. 벨은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손을 잡자는 말일 줄은 몰랐는데. 이셀리아는 어느새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돌리고 있다. 그 모습이 너무나 귀엽고 아름다워, 벨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볼에 입을 맞추고 말았다.


“어마!”

“간다. 손 놓지 마. 이셀리아.”

“으...응!”


벨과 이셀리아는 손을 꼭 맞잡고 달렸다. 그것은 열 다섯 살 때, 둘이 처음 데이트를 할 때와 전혀 다르지 않는 모습이었다. 다만 그 때보다 10년이 빨랐을 뿐이다. 그 때도 그녀는 볼에 기습 키스를 한 자신을 보며 눈을 흘겼더랬지. 그리고 그 때는, 그 때만큼은 자신도 진심이었다. 진심으로 널, 사랑했었어. 이셀리아. 벨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리엔에게로 달려갔다. 그 뒤로는 계속 손을 잡고 다니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도넛츠도 먹고, 꽈배기도 먹고, 목이 탈 땐 음료수도 사서 마시고. 리엔은 이셀리아가 돈을 내밀 때마다 고개를 젓고는 자신이 모든 돈을 계산했다. 라슈벨이 두툼한 지갑을 쥐어 주었지만 그걸 쓸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낸 세 사람은 어느새 노을이 지기 시작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워.”

“응. 정말.”

“몇 년만 더 봐봐. 지겨워 질 거다.”


뒷짐을 진 채 하는 리엔의 말에 이셀리아가 혀를 비쭉 내밀었다. 평온하다. 하지만 평온하지 않다. 벨은 여전히 꽉 쥐고 있는 그녀의 손을 따라 느껴지는 온기를 가만히 가슴 안에 가둬두었다. 어디든 도망가지 못 하게. 언제든 꺼내어 볼 수 있도록. 그리고 해가 완전히 떨어져 내리자, 이셀리아는 두 사람에게 인사를 하곤 기숙사 안으로 사라졌다. 벨의 표정을 가만히 살피던 리엔이 입을 열었다.


“모형검. 들고 나와.”

“왜...그랬어요?”

“뭘.”

“제가 이셀리아를 좋아한다고 말한 거요.”

“그냥 그럴 것 같아서. 처음 보는데도 이름을 알고 있을 정도면 너도 관심이 있다는 뜻이잖아. 왜? 실례였니?”

“아니요.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럼 됐잖아. 둘이 잘 어울리던데.”

“......네.”


어디까지를 믿고, 어디까지를 버려야 하는 걸까. 자신이 그들을 속이고 있기 때문인지, 벨은 그녀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마도 자신이 접근하기 쉽게끔 배려를 해준 것이겠지. 물론 그가 과거의 벨임을 눈치 챘을 리는 없다. 그것 하나만큼은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행동과 말을 각별히 신경쓰기도 했다. 항상 다섯 살 어린 아이의 말투를 따라하고, 절대 어려운 단어도 쓰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리 상상력이 풍부한 자라도 미래의 벨이 과거의 벨로 회귀했다고 생각할 순 없었다.


‘그렇다면 대체 뭘 노리고 있는 건가. 리엔.’


잠시 더 알 수 없는 누이의 얼굴을 바라보던 벨은 잠자코 기숙사 안으로 들어갔다. 라슈벨은 이미 외출한 뒤였고, 방문은 열려 있었다. 문을 열어놓아도 아무도 들어오지 못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참 대단한 자신감이다. 두둑한 지갑을 탁상 위에 놓아두고, 옷을 갈아입는다. 편하고 활동하기 좋은 옷으로. 구석에 세워둔 모형검을 들고 밖으로 나가니, 리엔이 가볍게 휘파람을 분다.


“오. 자세가 되어 있는데?”

“감사해요.”

“좋아. 그럼 바로 시작해 볼까? 벨. 너는 어느 때 검을 휘두르고 싶지?”

“사랑하는 사람을 지킬 때요.”

“그 때 말고는?”

“생각해 본 적 없는데......”

“누군가를 죽인다는 생각은 해 본 적 없어?”

“꼭...죽여야만 해요? 검으로 위협만 할 수도 있잖아요.”

‘후후. 가면을 눌러쓴 채 벗지 않겠다 이건가?’


리엔은 딴소리를 하는 벨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아마 자신을 더욱 믿게 하기 위한 짓이겠지. 아이같은 모습을 유지하는 것, 그러기 위한 당연한 행위. 그 발버둥치는 꼬라지를 보는 게 너무나 즐겁다. 이미 자신에게 그 눈을 보여 놓고선. 죽어가는 눈을 보여 놓고선. 이제와 연기를 하겠다는 게 우습기만 하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상태. 그녀는 일단 즐겨주기로 마음 먹었다.


“그래?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지킨다는 건 누군가를 죽인다는 뜻하고도 맞먹는 거야.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언젠간 알게 되겠지.”

“꼭 그래야만 하는 거예요?”

“응. 꼭 그래야 돼. 그게 검을 든 사람의 숙명이야.”


검을 든 사람의 숙명. 벨은 리엔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서 검을 든 사람도 결국 사명을 다하기 위해 살인을 한다. 돈이 필요한 사람도 돈을 얻기 위해 살인을 한다. 그럼 살인의 값어치는 달라지는 걸까, 라고.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행위가 숙명이란 단어로 감싸지는 건 그가 이제껏 들은 말 중에 가장 서글픈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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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죽음(9) +2 14.04.14 1,461 28 7쪽
31 죽음(8) +1 14.04.02 1,391 31 7쪽
30 죽음(7) +2 14.03.25 1,419 30 9쪽
29 죽음(6) +1 14.03.24 1,442 33 8쪽
28 죽음(5) +2 14.03.12 1,829 43 7쪽
27 죽음(4) +4 14.03.06 1,930 44 7쪽
26 죽음(3) +4 14.03.03 2,098 47 8쪽
25 죽음(2) +2 14.02.27 1,957 46 8쪽
24 죽음 +2 14.02.27 2,630 53 6쪽
23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8) +6 14.02.25 2,347 59 7쪽
22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7) +2 14.02.24 2,663 52 7쪽
21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6) +3 14.02.23 2,189 53 9쪽
20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5) +3 14.02.22 2,367 58 11쪽
19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4) +2 14.02.22 2,338 53 7쪽
18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3) +1 14.02.22 3,232 60 9쪽
17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2) +2 14.02.20 2,401 63 8쪽
16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 +4 14.02.20 2,801 70 9쪽
15 라슈벨 폰 발렌타인(5) +4 14.02.19 2,800 69 8쪽
14 라슈벨 폰 발렌타인(4) +6 14.02.18 2,740 63 8쪽
13 라슈벨 폰 발렌타인(3) +4 14.02.18 2,989 68 10쪽
12 라슈벨 폰 발렌타인(2) +2 14.02.17 2,950 76 8쪽
11 라슈벨 폰 발렌타인 +1 14.02.17 3,152 71 9쪽
10 머리는 추악한 진실을 숨겨두는 법(4) +2 14.02.16 3,303 78 7쪽
» 머리는 추악한 진실을 숨겨두는 법(3) +2 14.02.15 3,373 71 8쪽
8 머리는 추악한 진실을 숨겨두는 법(2) +4 14.02.15 3,874 88 9쪽
7 머리는 추악한 진실을 숨겨두는 법 +1 14.02.14 4,248 91 9쪽
6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5) +2 14.02.13 5,994 113 8쪽
5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4) +1 14.02.12 5,434 103 8쪽
4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3) +2 14.02.11 5,923 110 7쪽
3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2) +1 14.02.10 7,034 134 9쪽
2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 +7 14.02.10 6,480 122 8쪽
1 최후는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한다. +7 14.02.09 7,976 137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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