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는 추악한 진실을 숨겨두는 법(4)
“좀 더 위로 휘둘러!”
“이야!”
“좀 더 위로!”
“이야아!”
팔이 멎는다. 힘껏 검을 올려보지만 이 이상은 한계다.
“윽.”
챙그랑. 벨의 손에 들린 검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팔이 심하게 떨려 검을 잡지 못한 탓이다. 거친 호흡 소리가 주변을 울리고, 이제 막 다섯 살이 된 아이는 양 손으로 땅을 짚었다. 볼을 타고 흘러내린 땀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져 내린다. 벨의 전신은 이미 땀 투성이다. 물론 성숙되지 않은 아이의 몸이라는 것 쯤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허약할 줄이야. 어느 한 군데 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 벨은 혀를 내둘렀다. 팔짱을 낀 채로 벨을 바라보던 리엔이 옅게 웃었다.
“오늘은 이 정도로 하자. 잘 버텼어. 벨.”
“수고...하셨어요. 누나.”
“수고는 무슨. 체력을 기르는 일은 내가 알려준 팔굽혀 펴기나, 아침마다 기숙사 주위를 달리는 게 제일 좋아. 하루라도 빼먹으면 운동이 되지 않는다는 거, 명심하고.”
“네.”
“들어가 봐. 오빠가 기다리고 있을 거야.”
“......들어가볼게요.”
“그래.”
리엔은 즐거워 보였다. 자신과 형이 만나는 걸 그렇게 싫어하면서, 뭐가 그리 즐거운 건지. 벨은 땅에 떨어진 모형검을 주워들고 털레털레 걸어갔다. 다소 찬 바람이 부는 3월 초였지만, 오히려 전신이 뜨거워져옴을 느꼈다. 무리다. 해도 너무 했어. 오랜만에 든 검의 감촉이 좋았기 때문일까. 자신답지 않게 몸을 혹사시켰다. 주먹을 한 번 쥐었다펴며 그는 피식 웃었다.
‘아. 내일 쓰러지지만 않았으면 좋겠는데.’
비틀비틀거린다. 마치 술에라도 취한 것처럼. 당장 쓰러질 것 같으면서도, 벨의 입가에선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살아있다는 실감, 전생에서도 검을 휘두를 때만 느꼈었던 그 감각이 짜릿하게 전신을 자극한다. 하지만 그 미소도 점점 기숙사가 가까워질수록 자취를 감췄다. 결국 다시 완벽한 무표정이 된 벨은 어깨로 문을 힘겹게 밀쳤다. 마침 밖으로 나오던 학생들이 그를 보곤 환하게 웃었다.
“어? 너 라슈벨 동생 아니야?”
“......”
“맞네. 맞아. 귀엽게 생겼네. 야...저기 지금부터......”
“먼저 올라갈게요.”
“어? 어어. 그래. 올라가.”
“애새끼가 되바라져선.”
어린 놈들한테 존댓말 써주는 것만 해도 감사하게 생각해라. 벨은 어깨를 으쓱한 후에 5층까지 걸어 올라갔다. 방문은 여지없이 열려 있었다. 들어오지 않았나, 하여 안으로 한 걸음 내딛자 가만히 지갑을 내려다보고 있는 라슈벨이 서 있다. 마침 잘 됐다. 옷도 끈적거리고, 검도 무거운데 얼른 인사나 한 뒤 씻어야지. 홀가분한 마음으로 안으로 들어서던 벨은 갑자기 소리를 지르는 라슈벨 때문에 얼른 그 자리에 멈춰섰다.
“왜! 대체 왜! 돈을 쓰지 않은 거냐.”
“.....네?”
“내가 분명 내 지갑에 있는 돈을 쓰라고 했지?”
“아니. 리엔 누나가 전부 다 내는 바람에 꺼내서 쓸 일이......”
“그 망할 계집년이 돈을 냈으면, 나머진 네가 냈어야 할 거 아니야!”
“형.”
“젠장. 젠장!”
라슈벨은 지갑을 거칠게 내던졌다. 지갑 안에 넘치도록 들어있던 지폐들이 허공에 뿌려 흩어진다. 물건을 던지고, 거울을 제 주먹으로 깨부순다. 처음 보는 형의 모습에 벨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그의 기억속에서의 형은 너무나도 다정하고, 사리 분별이 확실한 사람이었다. 자신에겐 단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으며 죽는 그 순간에도 손을 잡고 가족들을 부탁했던 사람이다. 검술 실력은 제국 최고였으며, 인성 또한 제국 최고였다. 자신에게 있어서 최고의 롤모델이었던 그가 지금 화를 내고 있었다. 자신이 호의로 건네준 지갑의 돈을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내가 그에 대한 기억을 일부로 지우고 있었단 말인가.’
지랄맞을 만큼 전생과 똑같은 세계에서 형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아니. 형만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심지어 과거와는 다르게 행동하는 리엔도 성격만큼은 본판을 빼다박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형의 성격은 평소에도 이랬다는 것. 전생에선 리엔보다 오히려 라슈벨에게 더 많이 의지했던 자신이 이 모습을 보지 못했을 리가 없다.
“크흐흐흐.”
벨은 웃음을 터트렸다. 온갖 집기들이 날아다니고, 발길질을 거듭하고 있는 형을 바라보면서, 작은 몸집의 아이가 웃음을 터트렸다. 과거는 너무나 잔인하다. 자신이 한켠에 꼭꼭 숨겨둔 기억의 머리채를 낚아 채 한 마디 설명도 없이 내리 꽂는다. 틀림없다. 이 새끼는 자신의 호의에 대한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었고, 호의를 베푼만큼 남들이 받아주길 바랐다. 그제야 벨은 어째서 자신이 그 어린 나이에 형을 따라 벨슈포드 아카데미에 오지 않으려 했는지 알아챘다. 이제 막 다섯 살의 벨은 그 날, 리엔이 아닌 라슈벨이 자신을 달래주러 온 그 날 밤, 그의 본성을 목격했던 것이다. 그리고 짐승같은 형을 보면서 검을 잡기를 꺼려하게 되었고, 결국 검보다는 책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흐흐흐흐.”
“으아아!”
“라슈벨. 심정은 잘 알겠지만 문은 좀 닫아. 5층에 살고 있는 다른 친구들이 잠을 들 수가 없잖니.”
“......후우. 후우.”
한 손에 휴대용 양초를 들고 벨의 뒤에 선 사감의 말에 라슈벨은 겨우 몸을 진정시켰다. 그의 표정엔 움울하고도 짙은 그림자가 새겨져 있었다. 다시 한번 더 주위를 준 사감이 나가고 나자, 벨은 무표정한 얼굴이 되었다. 작은 소년은 형을 보고 울지도, 몸을 떨지도 않았다. 그저 척척 걸어가 검을 벽에 기대놓고 갈아입을 옷을 챙겨 샤워실로 들어갈 뿐. 그리고 가던 길에 떨어진 지갑을 줏어 거울이 깨져버린 책상 위에 올려 놓았을 뿐이었다. 라슈벨은 침대 끝에 털썩 주저앉았다.
“미안해. 미안해. 벨. 미안해. 나는 그저, 돈을 줬는데도 쓰지 않는다는 게 나쁘다고 생각해서 그랬어. 미안해. 미안해. 용서해줘. 다신 그러지 않을게. 잘못했어요. 아버지. 때리지 마세요. 죄송해요. 제발. 한 번 만 용서해주세요.”
“불쌍한 새끼.”
벨은 밖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형의 목소리에 이를 악물었다. 이쯤되면 거의 정신병 수준이다. 이 집안은 전부 하나, 둘 미쳐가는 게 집안 내력인 걸까? 그는 조금이나마 과거가 변할거라 생각했던 자신의 마음이 송두리째 뜯겨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변하지 않아. 29살에 그는 뒤질 것이고, 그 전에 자신의 가문은 역모죄로 목이 날아간다. 어떤 루트를 선택해도 자신의 인생은 남들처럼 편하게 사는 게 용납되지 않는 것일까. 벨은 한 쪽에 놓여진 크림을 머리에 잔뜩 발랐다. 꽉 깨문 그의 입술이 터져 피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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