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Regre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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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풍광
작품등록일 :
2014.04.24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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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25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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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2.17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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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쪽

라슈벨 폰 발렌타인(2)

DUMMY

오랜만에 만나는 어머니의 얼굴은 생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살아있다는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다. 라슈벨과 벨, 리엔은 그런 어머니 앞에 나란히 서서 인사를 올렸다. 파리해진 표정과 꾹 다문 입술, 죽어버린 눈동자가 어린 벨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라슈벨이 살짝 그의 등을 밀었다. 벨이 몇 걸음 앞으로 나오자, 부인의 눈엔 금세 눈물이 고였다.


“벨. 오. 내 아들.”

“다녀왔어요. 어머니.”

“완전히 돌아온 거니?”

“아니요. 입학이 결정 되어서 잠시 집에 다녀와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거예요. 4일 뒤엔 다시 올라가야 해요. 신학기가 시작되거든요.”

“말도 안 돼. 학장님도 정신이 없는 게지. 어떻게 이런 어린 아이를......”

“걱정 마세요. 저희들이 있잖아요.”

“......애초에 너희들 때문이야! 저 아이만, 저 아이만 집에 있었어도 그이가 그리 엇나가진 않았을 텐데......”


미안. 그건 착각이에요. 어머니. 벨은 쓰게 웃으며 화를 내는 부인의 손을 쓰다듬었다. 사실 화를 낸다고 하기도 힘들었다. 1년 새에 너무나도 쇠약해진 그녀의 목소리는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듣기조차 힘들었다. 아마 이 때쯤이었겠지. 그녀가 병에 걸려 힘들어하던 때가 말이다. 어느새 두 사람의 곁으로 다가온 라슈벨은 부인과 벨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려놓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아버지와 무슨 일이 있으셨어요?”

“말도 마라. 네 아버지가 하녀들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생각하기만 해도 머리 꼭대기에 불이 날 지경이다. 전에 유모를 죽인 것도 미심쩍어. 이야기가 불거지는 게 두려워 죽인 게 틀림없을 거다.”

“어머니도 참. 아버지가 일부러 그러시기야 했겠어요. 누구보다도 가족을 소중하게 생각하시는 분이시잖아요.”

“그 사람은 단지 만들어진 가정을 원할 뿐이야. 자신의 뜻에 순종하는 부인과 그의 어깨를 세워주는 뛰어난 자식들, 그리고 집을 지탱할 정도의 가산. 자신의 완벽한 삶을 영위하기 위한 껍데기. 나는 그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단다. 라슈벨.”

“어머니.”

“어쩌면 네 어미가 부러워. 아마도 그녀는 이런 현실을 알고 있었기에 망설이지 않고 탑에서 몸을 던질 수 있었겠지. 가끔은 말이다. 그녀에게 질투를 느끼기도 해. 온갖 행복만을 쏙 빼고 내 옆엔 쭉정이만 남긴 것 같아서.”

“......쉬세요. 기숙사 주변에서 몸에 잘 듣는 약을 달여 왔어요. 이따가 저녁 식사와 함께 넣어드릴 테니, 챙겨 드시고요.”

“그래. 고맙다.”

“나가자.”


지독한 소리. 그야말로 악담의 수준을 넘어선 말을 듣고도 라슈벨은 끝까지 부인을 챙겼다. 그것은 건강할 때 자신에게 폭언과 욕설을 퍼붓던 그녀가 쇠약해진 것에 대한 동정이었을까. 아니면 복수의 감정을 뛰어넘은 완벽한 용서였을까. 물론 벨의 시선에서 보기엔 완벽한 성자가 되지 못한 라슈벨이 절대 용서를 할 수 없는 입장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아마도 연기일 것이다. 동정도 용서도 아닌 그저 자신의 껍데기를 온존하기 위한 연기 말이다.


밖으로 나온 세 사람은 잠시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서로 입을 열진 않았지만, 지금은 각자가 가진 커넥션과 만나야 할 때다. 그것은 아무리 피가 이어진 형제끼리라고 해도 공유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라슈벨은 갑자기 환히 웃더니 등 뒤에서 지갑을 꺼내 들었다. 그리곤 벨의 손에 지갑을 쥐어주며 말했다.


“자. 벨. 넌 따로 받은 돈이 없을 테니 오늘은 형이 준 돈으로 실컷 쓰도록 해.”

“네? 하지만 형님은 어쩌고요.”

“나는 내 몫이 따로 있다. 이건 온전히 너만 쓸 수 있는 지갑이야. 안에 있는 금액은 전혀 신경 쓰지 말고 마음껏 쓰다 오도록 해라.”

“어머. 부럽다야. 오빠는 매 번 벨만 챙기네. 나도 좀 주지.”

“넉넉히 넣어 두었으니까 빼 쓰도록 해. 어차피 벨 혼자 쓰기엔 많은 양이기도 하고.”

“오? 땡큐. 그럼 사양 않고 쓸게.”

“후후. 그래. 자. 그럼 이따 저녁식사 때들 보자고. 난 오늘 찾아뵙기로 한 은사님이 있어서 말이야.”

“응. 이따 봐요. 형.”

“그래.”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던 라슈벨이 사라지자, 옅게 웃고 있던 리엔의 표정이 싹 굳었다. 마치 혐오스러운 것에 손을 댄 것처럼 들고 있던 지폐를 다시 벨의 지갑에 쑤셔 박은 그녀는 기지개를 크게 켰다. 지금까지 겪은 일들이 이 세상에서 제일 따분한 일이라도 되는 것 마냥. 그녀는 마른 눈으로 벨을 보며 말했다.


“그 돈, 웬만하면 흡족할 만큼 쓰는 게 좋을 거다. 라슈벨, 이미 겪어봤지?”

“네. 어떻게 아세요?”

“미안하지만 나와 라슈벨의 정보력을 그리 우습게보지 않는 게 좋아. 우린 서로에 대해 뭐든지 알고 있어. 그리고 벨, 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전부.”

“우, 우습게 본 적 없어요.”

“그나저나 이상한 일이네. 분명 이곳에서는 따뜻한 형을 연기하는 걸 택할 줄 알았는데. 뭐. 덕분에 나만 좋게 됐네. 지금부터 약 두 시간 뒤에 다시 이곳으로 집합해. 이유는 말 안해도 알지?”

“네. 수련...때문인가요?”

“어. 네게 따로 줄 선물도 있고. 그리고 너도 네 정보망을 만나는 데 두 시간 정도면 되잖아.”

“아.”

“자. 그럼 이따 보자고.”

“네. 누님.”


벨을 향해 눈을 찡긋거린 리엔이 사라지자, 벨은 한숨을 내쉬었다. 과연 대단하다. 어렸을 땐 그저 좋은 형과, 이상한 누나라고만 생각했는데. 그들은 이미 자신들의 영역을 구축해 놓고 있었다. 게다가 서로에 대한 스파이 파견 및 막내 벨에 대한 총체적인 감시. 아마도 아직은 중립인 자신이 어느 쪽으로 움직이는가에 촉각이 곤두서 있겠지. 그렇다면 이셀리아 주변에도 빨대를 꽂아놨다는 말인데. 벨은 슬슬 자신의 정보망 중 상급에 해당하는 이셀리아를 움직일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원로원의 기사들이라면 분명 그의 마음에 들 만한 정보들을 뽑아올 수 있으리라. 가만히 서서 지갑을 들고 있던 그는 이내 집 밖으로 터벅터벅 걸어 나갔다.


“어머. 작은 도련님.”

“그간 잘 계셨어요?”

“그럼요. 도련님도 혈색이 훨씬 더 좋아지셨네요.”

“네. 누나랑 형이 잘 챙겨주니 살만 찌나 봐요.”

“호호. 농담도.”


제일 먼저 그를 알아본 것은 방앗간에 있는 피셀 할멈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유난히 벨에게 호감을 보인 이 노인은 후에 일가가 반역에 스러져 갈 때에도 도망쳐 온 벨을 바구니 안에 숨겨주었었다. 물론 당장에 발각이 되어 병사들에 의해 목이 날아가야 했지만. 그 때 그녀가 시간을 벌어주지 않았더라면 아마 자신은 단두대에서 목이 잘렸을 거다. 공주의 기사가 도착한 건 정말 아슬아슬한 시간이었으니까. 잠시 옛 추억을 떠올리던 벨은 환히 웃으며 할멈에게 말했다.


“혹시 주변에서 들리는 소문 같은 거 들은 적 없어요?”

“어머. 어머. 벌써부터 그런 상스런 일에 관심을 기울이시면 안 돼요.”

“제가 아니라 형이 부탁한 일이에요. 저도 소문 같은 건 듣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데, 형은 자꾸만 비밀리에 할머니한테 가보라고 해서......”

“......라슈벨이 그런 말을 했단 말이에요?”

“네. 별 게 없으면 돌아갈게요. 솔직히 듣고 싶지도 않고.”

“아니. 잠깐만 기다리세요.”


라슈벨이 보냈다는 말에 할멈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줄을 댈 생각이겠지. 순진한 할멈 같으니라고. 벨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서둘러 자신의 손을 잡아끄는 할멈의 뒤를 따라갔다. 아무래도 제법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작가의말

현실주의자가 많은 소설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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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죽음(챕터 完) +1 14.04.25 1,380 25 12쪽
33 죽음(10) 14.04.23 1,435 22 7쪽
32 죽음(9) +2 14.04.14 1,461 28 7쪽
31 죽음(8) +1 14.04.02 1,391 31 7쪽
30 죽음(7) +2 14.03.25 1,419 30 9쪽
29 죽음(6) +1 14.03.24 1,442 33 8쪽
28 죽음(5) +2 14.03.12 1,829 43 7쪽
27 죽음(4) +4 14.03.06 1,930 44 7쪽
26 죽음(3) +4 14.03.03 2,097 47 8쪽
25 죽음(2) +2 14.02.27 1,957 46 8쪽
24 죽음 +2 14.02.27 2,629 53 6쪽
23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8) +6 14.02.25 2,346 59 7쪽
22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7) +2 14.02.24 2,663 52 7쪽
21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6) +3 14.02.23 2,188 53 9쪽
20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5) +3 14.02.22 2,367 58 11쪽
19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4) +2 14.02.22 2,338 53 7쪽
18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3) +1 14.02.22 3,232 60 9쪽
17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2) +2 14.02.20 2,400 63 8쪽
16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 +4 14.02.20 2,801 70 9쪽
15 라슈벨 폰 발렌타인(5) +4 14.02.19 2,800 69 8쪽
14 라슈벨 폰 발렌타인(4) +6 14.02.18 2,740 63 8쪽
13 라슈벨 폰 발렌타인(3) +4 14.02.18 2,989 68 10쪽
» 라슈벨 폰 발렌타인(2) +2 14.02.17 2,950 76 8쪽
11 라슈벨 폰 발렌타인 +1 14.02.17 3,152 71 9쪽
10 머리는 추악한 진실을 숨겨두는 법(4) +2 14.02.16 3,303 78 7쪽
9 머리는 추악한 진실을 숨겨두는 법(3) +2 14.02.15 3,372 71 8쪽
8 머리는 추악한 진실을 숨겨두는 법(2) +4 14.02.15 3,874 88 9쪽
7 머리는 추악한 진실을 숨겨두는 법 +1 14.02.14 4,248 91 9쪽
6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5) +2 14.02.13 5,993 113 8쪽
5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4) +1 14.02.12 5,434 103 8쪽
4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3) +2 14.02.11 5,923 110 7쪽
3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2) +1 14.02.10 7,034 134 9쪽
2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 +7 14.02.10 6,480 122 8쪽
1 최후는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한다. +7 14.02.09 7,975 137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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