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Regre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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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풍광
작품등록일 :
2014.04.24 10:18
최근연재일 :
2014.04.25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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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2.18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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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라슈벨 폰 발렌타인(3)

DUMMY

결국 그녀의 방앗간까지 끌려온 벨은 저릿저릿한 손을 주무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전하다. 한 쪽엔 쌀을 빻고, 떡을 만들어 내는 도구들이 즐비하게 놓여 있다. 어렸을 때, 즉 전생에는 라슈벨이 가끔 내려오면 그와 함께 이곳에 놀러오곤 했었다. 비록 먼지가 날리고, 짚이 펄럭거리는 낡은 방앗간이었지만 벨에겐 너무나도 아늑하고 소중한 공간이었었다. 그가 주위를 계속 두리번거리자, 안에서 쌀로 만든 과자를 들고 나온 피셀 할멈이 옅게 웃었다.


“원 녀석두. 볼품없는 방앗간이 뭐 그리 좋다고 기웃거리누.”

“그냥 신기해서요.”

“신기할 만도 하지. 벨은 아직 많이 어리니까. 지금은 세상 어디를 돌아다녀도 보는 것마다 신기할 게야. 하지만 커서 어른이 되면 신기했던 것들이 익숙해지게 된단다. 익숙해지게 되면 지루해지지. 결국 눈길도 주지 않게 되고, 자극적인 것을 찾아 도시로 가게 돼. 그게 어른이라는 게야. 벨.”

“그럼 전 어른이 되지 않을래요.”

“호호호. 이 할미도 벨이 계속 어렸으면 좋겠구나.”


잠시 웃음을 터트리던 할멈은 쌀 과자가 든 통을 벨에게 건넸다. 벨은 묵묵히 통을 받아들었다. 통 안에선 그리운 냄새가 났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쌀 과자 냄새가 몸을 따뜻하게 녹여주는 기분이었다. 그가 눈을 감고 코를 킁킁거리자, 할멈이 통 안에 손을 넣어 과자를 직접 꺼내주었다. 동글동글하게 뭉쳐 달콤한 굴을 바른 쌀 과자. 벨은 절로 입 안에 침이 고였다.


“아. 아까 얘기했던 소문 말인데.”

“......”


순간 쌀 과자에 집중되었던 벨의 시야가 확 트였다. 그제야 그는 차갑고, 딱딱한 현실로 눈을 돌렸다. 들고 있던 쌀 과자를 통 안에 다시 집어놓은 벨이 고개를 끄덕이자, 할멈은 느릿하게 걸어가 창문에 걸어놓았던 나무 걸쇠를 잡아당겼다. 끼이익. 걸쇠가 내려가면서 창문이 닫히자, 천장을 통해 들어오는 소량의 빛을 제외하곤 어떤 빛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야말로 밀폐된 공간. 다시 주위를 신중히 둘러보던 할멈이 입을 열었다.


“내가 말이야. 요전번에 골동품 가게를 하는 요한센에게 들었는데, 아무래도 영주님이 말씀하신 초야(初夜, 신부의 첫날 밤을 영주와 보냄.)권 문제로 불만을 가진 자들이 많은 것 같네.”

“아버지가요?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듣는데......”

“에잉. 조심을 했겠지. 들리는 이야기로는 하녀 복장을 입혀서 집 안에 들였다는데, 이 짓을 하질 않으면 결혼을 인정하지 않으니 영지를 떠날 수밖에 없어. 이 땅에 터전을 잡고 산 사람들은 이를 악물고 신부를 보냈던 모양이야.”

“......문제가 되고 있는 건 어느 쪽 사람들이죠?”

“저 물레방앗간 근처에 모여 있는 구보 씨 일행인데, 이미 라슈벨님에게 한 차례 이야기가 돌았다고 해. 다만 이게 생각보다 심각해져서, 계속 여인들을 취했다간 왕에게까지 올라갈 문제라고 하더구나. 아무래도 며칠 뒤, 직접 올라갈 지도 모르겠어.”


벨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릴 때 보았던 풍경, 하녀들을 마음껏 취하고 날뛰던 아버지가 그 때 거느린 건 하녀가 아니었다. 바로 이 지역에서 영주를 믿고 살아가야 할 백성들이었다니. 형이 무너져 내린 건 이것 때문인가. 아버지의 초야권, 그리고 그것을 문제 삼은 다른 귀족들. 왕의 입장에서도 아버지를 감싸고 돌 순 없었을 거다. 도덕을 좋아하는 이 나라 기사들에겐 씻을 수 없는 죄악이었을 테니까.


‘의외로 간단하게 풀렸군. 하지만......’


모든 수수께끼가 풀린 지금이었지만 벨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유를 찾을 수가 없다. 대체 왜? 아버지가 왜 낡다 못해 먼지가 두텁게 쌓여 있는 초야권을 건드렸단 말인가. 그도 생각이 있고, 머리가 있어 공작의 작위를 받은 자다. 왕에게 외면당할 것을 알면서 대체 아버지는 왜 초야권을 시행하게 된 걸까. 그 의문이 벨의 머리를 계속 감돌았다. 벨은 할멈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초야권이 시행된 지가 언제죠?”

“1년 전, 딱 네가 떠나고 몇 주 뒤의 일이었지. 그 때의 영주님은 정말 다른 사람 같았어. 평소에는 그렇게나 다정하시던 분이 말이야.”


다른 사람 같았다? 약을 탄 것일까? 아니면 무언가를 가지고 협박을 했다? 음. 지금은 뭔가 결론을 내리기엔 가진 정보가 너무 부족하다. 벨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올라가 있던 나무통에서 내려왔다. 아. 갈 땐 가더라도 할멈의 저 기대하는 눈빛엔 제대로 대응을 해줘야지.


“네. 들은 대로 형님께 전할게요. 분명 기뻐하실 거예요.”

“그, 그래? 호호. 언제든 좋으니까 들리시라고 해. 내가 맛있는 쌀 과자를 잔뜩 만들어 주마.”

“네. 할머니. 그럼 전 이만.”

“그래. 잘 가거라.”


방앗간을 나온 벨은 해와 그림자를 보고 대충 시간을 계산했다. 물론 이곳에도 교회는 있었지만, 규모가 도시보다 작아 시간을 알려주는 종이 없었다.(대부분 규모가 작은 교회에선 작은 종을 들고 다니며 직접 두드리곤 했다.) 아무리 봐도 30분을 넘지 않았기에 다른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오랜만에 걷는 흙길과, 반겨주는 사람들이 낯설다. 벨은 어린아이라는 장점을 최대한 앞세워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들어 나갔다.


“벨, 라슈벨님이 관심이 있다니 특별히 말해주는 건데......”

“실은 이번 초야권에 신부를 빼앗긴 사람들이 모임을 가지고 있다는 말도 들린단다. 예의 그 물레방앗간에서 말이지.”


사람들의 이야기는 다른 것 같으면서도 전부 똑같다. 벨은 어깨를 으쓱이며 생각보다 일찍 정보 수집을 접었다. 역시 조그마한 시골에선 그다지 고급 정보를 기대할 수 없다. 그나마 할멈을 통해, 아버지가 초야권이라는 과거의 유물을 답습하고 있다는 점을 알아낸 것만 해도 큰 수확이었다. 자신의 방으로 조심조심 들어온 벨은 깃펜을 들고 이셀리아에게 보낼 편지를 적기 시작했다. 처음은 아이다운 귀여운 인사로 시작해서, 가볍게 안부를 물어본 다음 본론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내가 전에 원로원에 가 보았을 때, 무섭게 생긴 아저씨들이 그곳을 지키고 있었는데.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잔뜩 있었어. 하지만 너무 무서워서 말도 제대로 걸지 못했거든. 혹시 이셀리아의 근처에도 있어? 내가 말을 걸 수 있는 아저씨가 있다면 좋을 텐데.’


마치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가볍게 집어넣는다. 아마도 자신에게 푹 빠진 이셀리아는 그 문장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조만간 자신에게 소개를 시켜 주겠지. 지금으로선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벨은 편지를 봉한 다음, 집배원을 불렀다. 형이 준 돈으로 배달비를 넉넉하게 계산하고 나니, 어느덧 약속시간이었다. 옷을 갈아입은 벨은 모형검을 든 채로 밖으로 나갔다. 해는 들어오기 전보다 조금 더 기울어져 있었다. 그리고 약속했던 장소엔 칙칙한 천으로 둘둘 싸여진 뭔가를 들고 있는 리엔이 서 있었다. 벨은 손을 흔들며 외쳤다.


“누나!”

“어. 벨. 일찍 왔네?”

“네. 그런 누나도 일찍 왔네요?”

“대장장이의 솜씨가 좋아서 말이야. 생각보다 더 빨리 끝나버렸어. 원래는 조금 더 기다리게 할 참이었는데.”

“대장장이요?”

“어. 어차피 선물 가지고 언제 주네, 마네 이러는 건 내 성격에 맞지도 않으니까 미리 줄게. 자 받아.”

“아? 감사합니다.”


양손에 느껴지는 묵직한 느낌에 벨은 씩 웃었다. 아무래도 선물이라는 건 제대로 된 검을 말하는 모양이다. 지금 들기엔 다소 버거운 무게였지만, 그간 받았던 어떤 선물보다 마음에 들었다. 드디어 장난감 같이 가볍기만 한 검을 버리고, 제대로 된 검을 받았기 때문이다. 양 손으로 느껴지는 묵직한 무게가 어린 벨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벨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열어봐도 되나요?”

“그럼.”


허겁지겁 천을 풀자, 거기엔 도색이 되지 않은 검이 가문의 문양이 새겨진 검집 안에 들어 있었다. 슬쩍 검을 뽑자, 매끈한 검 날이 눈에 들어온다. 마음에 든다. 역시 라슈벨 못지않게 검을 잘 쓰는 리엔의 눈썰미다. 도색은 나중에라도 하면 된다. 이 정도의 검이라면 분명 여차할 때 써도 될 정도로 잘 벼려진 상태였다. 벨이 흡족한 표정을 짓자, 잘린 나무 밑둥에 앉아 그 모습을 바라보던 리엔이 피식 웃었다.


“그리도 좋냐.”

“네. 정말, 정말 기뻐요.”

“그래? 그럼 대가.”

“......네?”

“너. 오늘 하루 종일 마을을 헤집고 다녔다면서? 대체 무슨 이야기를 물어보고 다닌 거야? 방앗간에는 왜 들어간 거고.”

“아. 저. 그게.”

“음. 난 말이야. 여기까진 네 구역, 여기까진 내 구역 이렇게 나누는 성격이 못 돼. 힘이 있는 자는 힘이 약한 자의 구역에 쳐들어가 모아온 정보를 당연히 빼앗을 권리가 있다는 말이야. 몰랐다면 모를까, 이미 네가 정보를 모으는 걸 알게 된 이상, 그 정보가 뭔지 듣지 않으면 수지가 맞지 않기도 하고.”

“역시 누님은 보통이 아니세요.”

“칭찬을 하는 건지. 욕을 하는 건지. 뭐. 후자이겠지만.”


벨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녀는 진심으로 대단하다. 왜 이런 약아빠진 여자가 라슈벨이 죽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죽어 버렸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다. 마치 빼앗지 않을 것처럼 교묘하게 행동해 놓고, 당당히 정보를 갈취한다. 라슈벨보다 훨씬 뛰어난 여자였다. 리엔은. 벨은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들을 일단 전부 말하기로 했다. 여기서 적을 만들어 놓고 싶지 않을 뿐더러, 그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벨은 씩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리엔을 향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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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죽음(챕터 完) +1 14.04.25 1,381 25 12쪽
33 죽음(10) 14.04.23 1,436 22 7쪽
32 죽음(9) +2 14.04.14 1,462 28 7쪽
31 죽음(8) +1 14.04.02 1,391 31 7쪽
30 죽음(7) +2 14.03.25 1,419 30 9쪽
29 죽음(6) +1 14.03.24 1,442 33 8쪽
28 죽음(5) +2 14.03.12 1,830 43 7쪽
27 죽음(4) +4 14.03.06 1,931 44 7쪽
26 죽음(3) +4 14.03.03 2,098 47 8쪽
25 죽음(2) +2 14.02.27 1,957 46 8쪽
24 죽음 +2 14.02.27 2,630 53 6쪽
23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8) +6 14.02.25 2,347 59 7쪽
22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7) +2 14.02.24 2,663 52 7쪽
21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6) +3 14.02.23 2,189 53 9쪽
20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5) +3 14.02.22 2,367 58 11쪽
19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4) +2 14.02.22 2,339 53 7쪽
18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3) +1 14.02.22 3,232 60 9쪽
17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2) +2 14.02.20 2,401 63 8쪽
16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 +4 14.02.20 2,802 70 9쪽
15 라슈벨 폰 발렌타인(5) +4 14.02.19 2,800 69 8쪽
14 라슈벨 폰 발렌타인(4) +6 14.02.18 2,740 63 8쪽
» 라슈벨 폰 발렌타인(3) +4 14.02.18 2,990 68 10쪽
12 라슈벨 폰 발렌타인(2) +2 14.02.17 2,950 76 8쪽
11 라슈벨 폰 발렌타인 +1 14.02.17 3,152 71 9쪽
10 머리는 추악한 진실을 숨겨두는 법(4) +2 14.02.16 3,303 78 7쪽
9 머리는 추악한 진실을 숨겨두는 법(3) +2 14.02.15 3,373 71 8쪽
8 머리는 추악한 진실을 숨겨두는 법(2) +4 14.02.15 3,874 88 9쪽
7 머리는 추악한 진실을 숨겨두는 법 +1 14.02.14 4,249 91 9쪽
6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5) +2 14.02.13 5,994 113 8쪽
5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4) +1 14.02.12 5,435 103 8쪽
4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3) +2 14.02.11 5,923 110 7쪽
3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2) +1 14.02.10 7,034 134 9쪽
2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 +7 14.02.10 6,480 122 8쪽
1 최후는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한다. +7 14.02.09 7,977 137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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