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Regre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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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풍광
작품등록일 :
2014.04.24 10:18
최근연재일 :
2014.04.25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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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2.18 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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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쪽

라슈벨 폰 발렌타인(4)

DUMMY

“실은 아버님께서 신혼인 신부와 함께 자는 초야권을 1년 전부터 쓰고 계시대요. 그래서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지 않다고 그랬어요. 특히 물레방앗간 사람들을 중심으로요.”

“물레방앗간이라면 구보 일간데. 하긴 그 집은 딸만 다섯이니까. 다섯을 전부 아버지한테 내줬다면 열이 받을 만도 하지. 초보치곤 그럴듯한데? 벨.”

“고마워요. 누나. 헤헤.”

“그래. 그랬단 말이지. 역시 구보 쪽을 조사해 본 게 정답이었어. 벨. 오늘 훈련은 취소다. 집에 가 있어.”

“네? 하지만......”


벨은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발을 동동거렸다. 솔직히 훈련이 아쉽진 않았다. 리엔의 실력은 전성기의 자신에 비하면 한참 못 미쳤고, 그가 검을 휘두르는 건 단지 미래를 위한 체력 다지기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정작 아쉬운 건 따로 있었다. 바로 그녀가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하는지 보고 싶을 뿐. 하지만 리엔은 자신을 따라가겠다며 졸라대거나 우는 아이를 끔찍할 정도로 싫어한다. 이럴 때는 어른스러운 아이의 모습을(사실상 모순이다.) 보여주는 수밖에. 그러자 벨의 수에 걸려든 그녀가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왜? 따라오고 싶어?”

“아, 아니에요. 저 같은 건 가봐야 방해만 될 뿐이고......”

“다시 한 번 묻는다. 이제 두 번은 안 물어. 벨. 누나가 뭘 하는지 가서 보고 싶어?”

“......네.”

“따라와.”


단순한 여자. 벨은 그녀의 등을 바라보며 피식 웃고는 선물 받은 검을 얼른 허리춤에 찼다. 아무래도 리엔은 벨이 라슈벨보다 자신을 따라올 거라 믿고 있는 모양이었다. 뭐. 그녀의 생각이 전혀 틀린 것은 아니다. 어차피 이제 살날이 2년 남짓 남은 라슈벨을 따르느니, 그보다 5년은 더 오래 사는 리엔의 뒤를 따르는 게 벨에게도 이득이었으니까. 물론 그 와중에도 언제든 빈틈을 보이면 밟고 올라설 작정이었지만. 벨이 잠시 딴 생각을 한 사이 리엔은 저만치 앞에 칙 나갔다. 그녀는 어린 동생을 배려해주지 않았다. 정말 급한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앞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하아. 하아.”

“얼른 따라와. 늦으면 다 끝이야!”

“예!”


끝? 대체 뭐가 끝이라는 걸까. 벨은 숨이 턱에 닿아 헐떡거리면서도 끈질기게 리엔을 쫓아갔다. 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조바심이 난다. 지금 이 자리에서 그녀를 놓쳤다간 평생 후회할 것만 같았다. 이 골목, 저 골목 사이로 이리저리 빠져나가는 그녀의 등만을 보며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졸졸 흐르는 시냇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벨은 거칠게 숨을 내쉬며 이를 악물었다.


‘물레방앗간!’


그래. 그곳은 구보와 그의 일족들이 있는 물레방앗간이었다. 하지만 평소와는 뭔가 다르다. 평온한 어둠 속에 휩싸여 있어야 할 집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불에 타오르고 있다. 도망치는 사람들의 비명 소리와, 살려달라는 목소리가 주변을 뒤흔든다. 벨은 무너진 벽에 기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이 일만은, 그의 과거와 맞물려 돌아간다. 그 때도 그랬다. 분명 구보의 일가는 도적떼에게 습격을 받아 형과 누나가 떠난 지 정확히 1년만에 모두 떼죽음을 당했었다. 자랑하던 물레방아는 전부 불에 타고, 살아남은 자는 한 명도 없었지.


어릴 때는 그런가보다 하고 넘겼던 일이,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생생하게 펼쳐지고 있다. 그 설렘이, 희열이 벨의 작은 몸을 자극한다. 벨이 눈을 들어 전방을 살피자 그곳엔 한 무리의 기사들이 도망치는 사람들을 베고 있었다. 그리고 마치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 예상했던 것처럼 리엔은 몸을 일으키곤 그들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깜짝 놀란 벨이 얼른 리엔의 옷자락을 잡았지만, 리엔은 씩 웃으며 그의 손을 뿌리쳤다.


“자. 벨. 다시 한 번 묻겠다. 집에 갈래? 아니면 누나랑 같이 갈래?”

“가, 같이 갈래요!”

“그래?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네가 지금까지 알던 모습이 전부 무너져 내릴 거라고? 아. 물론 그건 나도 마찬가지이지만.”

“그런 일이라면 보지 않는 게 낫지 않아요?”

“이렇게 재밌는 걸 두고 그냥 돌아가라고?”


희열로 가득 찬 리엔의 두 눈이 벨의 눈과 마주친다. 그녀는 참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킥킥거리기 시작했다. 그 웃음은 마치 화형대에 묶인 마녀와 같다. 공포에 몸을 떠는 병사들을 보며 짓는 것처럼 섬뜩하고, 날이 서 있다. 벨은 보면 볼수록 전생엔 인연이 없었던 이 여자는 자신과 많이 닮아있었다는 걸 느꼈다. 지내면 지낼수록 자신은 그녀와 얽힐 수밖에 없는 사람들인데 어째서 전생에는 그렇게 만남이 없었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벨은 그녀를 똑바로 올려다보며 말했다.


“알겠어요. 따라갈게요.”

“그렇게 나오셔야지. 자. 놀라지 마. 오늘의 주인공을 보러 갈 테니까.”


리엔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척척 걸어갔다. 힌트를 줘도 너무 많이 준 탓에 벨도 마을을 휘젓고 있는 자가 누군지 대충 눈치를 채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그렇게 신나하는 이유도 말이다. 즐거운 거겠지. 자신에게는 없는 것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 남자가 사실은 자신과 똑같은 피가 흐르는 야수라는 걸 알게 된 사실이. 너무나 즐거워 참을 수 없게 만드는 거겠지. 그리고 막 살려달라고 무릎을 꿇고 비는 여자의 목을 베어버린 사내가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그것은 양 볼부터 가슴 부근까지 피가 잔뜩 묻어있는 그들의 형, 라슈벨이었다. 리엔은 마치 지나가다 만난 것 마냥 환하게 웃으면서 인사를 건넸다.


“여. 오빠.”

“리엔, 거기다 벨까지? 여긴 어쩐 일이야?”

“저녁먹자고 해놓고는 당최 오지를 않아서 찾으러 왔어.”

“이래서 싫다니까. 이 마을은. 너무 비좁아서 사람들 눈을 숨길 수가 없거든.”

“그러게나 말이야. 우리 막내, 벨한테 뭐 할 말 없어?”


리엔의 말에 라슈벨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든 채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벨이 섬뜩함을 느낀 것은 단순히 그가 자신들의 방문에 태연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를 놀리기 위한 마음이 더 컸을 말에 굉장히 진지하게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은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고, 도망쳐 다니는 지금 이 상황과는 완벽한 괴리감이 있어서 벨은 이 자들이 자신과 피가 섞인 사람들이 맞다는 걸 다시 한 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도 즐거운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리엔을 슬쩍 곁눈질하던 라슈벨은 들고 있는 머리통을 바닥에 집어던진 뒤 입을 열었다.


“벨. 형이 준 돈은 다 썼니?”

“아니요. 하, 하지만 집에 있는 동안은 다 쓸 거예요.”

“그래. 한 푼도 남김없이 다 써야 된다.”

“네.”

“리엔. 돈이 부족하면 벨에게 받아. 네 몫까지 생각해서 넉넉히 넣어 놨으니까.”

“알았어.”

“미안하지만 난 정리해야 할 일이 있어. 오늘은 좀 늦을 것 같은데. 여기서 구경 할 거니?”

“벨에게 할 말은 그게 전부야?”

“어. 뭐. 여기까지 봐버렸으면 감출 것도 없고. 그리고 리엔 너한테도 별로 할 말은 없어. 같은 귀신들끼리 굳이 말로 주고받지 않아도 죄잖아.”

“하.”


리엔의 표정이 급속도로 굳기 시작한다. 마치 똥이라도 씹은 표정으로 라슈벨을 바라보던 그녀는 벨의 손을 거칠게 낚아채곤 물레방앗간을 벗어났다. 두 사람은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은, 라슈벨이 눌러쓰고 있던 가식의 껍데기를 강제로 벗기면 그의 자아의 붕괴하는 것을 기대했을 누나에겐 그리 좋지 않은 경험이었을지도 모른다. 너무나 태연하게 귀신끼리 말로 주고받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건넨 라슈벨은 어느새 그녀의 옆자리까지 내려와 있었다. 그는 원래 그녀와 같은 귀신이었으며, 단 한 순간도 도덕적으로 살지 않았음을 깨달은 리엔에겐 오히려 진한 패배감을 느끼게 만든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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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죽음(챕터 完) +1 14.04.25 1,380 25 12쪽
33 죽음(10) 14.04.23 1,435 22 7쪽
32 죽음(9) +2 14.04.14 1,461 28 7쪽
31 죽음(8) +1 14.04.02 1,391 31 7쪽
30 죽음(7) +2 14.03.25 1,419 30 9쪽
29 죽음(6) +1 14.03.24 1,442 33 8쪽
28 죽음(5) +2 14.03.12 1,829 43 7쪽
27 죽음(4) +4 14.03.06 1,930 44 7쪽
26 죽음(3) +4 14.03.03 2,097 47 8쪽
25 죽음(2) +2 14.02.27 1,957 46 8쪽
24 죽음 +2 14.02.27 2,629 53 6쪽
23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8) +6 14.02.25 2,346 59 7쪽
22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7) +2 14.02.24 2,663 52 7쪽
21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6) +3 14.02.23 2,188 53 9쪽
20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5) +3 14.02.22 2,367 58 11쪽
19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4) +2 14.02.22 2,338 53 7쪽
18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3) +1 14.02.22 3,232 60 9쪽
17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2) +2 14.02.20 2,400 63 8쪽
16 강의 흐름을 바꾸는데 필요한 건. +4 14.02.20 2,801 70 9쪽
15 라슈벨 폰 발렌타인(5) +4 14.02.19 2,800 69 8쪽
» 라슈벨 폰 발렌타인(4) +6 14.02.18 2,739 63 8쪽
13 라슈벨 폰 발렌타인(3) +4 14.02.18 2,989 68 10쪽
12 라슈벨 폰 발렌타인(2) +2 14.02.17 2,949 76 8쪽
11 라슈벨 폰 발렌타인 +1 14.02.17 3,152 71 9쪽
10 머리는 추악한 진실을 숨겨두는 법(4) +2 14.02.16 3,303 78 7쪽
9 머리는 추악한 진실을 숨겨두는 법(3) +2 14.02.15 3,372 71 8쪽
8 머리는 추악한 진실을 숨겨두는 법(2) +4 14.02.15 3,874 88 9쪽
7 머리는 추악한 진실을 숨겨두는 법 +1 14.02.14 4,248 91 9쪽
6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5) +2 14.02.13 5,993 113 8쪽
5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4) +1 14.02.12 5,434 103 8쪽
4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3) +2 14.02.11 5,923 110 7쪽
3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2) +1 14.02.10 7,034 134 9쪽
2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에 다른 뜻을 품다. +7 14.02.10 6,480 122 8쪽
1 최후는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한다. +7 14.02.09 7,975 137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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